
♣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창백하게 일렁이던 카바이트 불빛, 불손한 것도 같고 우울한 것도 같은 섬세한 표정, 두툼한 파카를 통해서도 충분히 느껴지던 단단한 몸매, 나는 내 몸에 위험한 바람이 들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 불쌍한 어머니를 맨날맨날 구박한다고 해도 그게 하나도 못돼 보이지 않았다. 피차 동정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닮은 불운을 관통하는 운명의 울림 같은 걸 감지한 건 아니었을까. 나는 마치 길 가다 강풍을 만나 치마가 활짝 부풀어 오른 계집애처럼 붕 떠오르고 싶은 갈망과 얼른 치마를 다독거리며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
♣ 사지가 멀쩡한 상이군인이라는 신분은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우린 그런 것들을 즐겼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행복감을 상승시켰다. 남이 쳐다보고 부러워하지 않는 비단옷과 보석이 무의미하듯이 남이 샘내지 않는 애인은 있으나마나 하지 않을까. 그가 멋있어 보일수록 나도 예뻐지고 싶었다. 나는 내 몸에 물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는 나를 구슬같다고 했다. 애인한테보다는 막내 여동생한테나 어울릴 찬사였다. 성에 차지 않았지만 나도 곧 그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구슬 같은 눈동자, 구슬 같은 눈물, 구슬 같은 이술, 구슬 같은 물결... 어디다 그걸 붙여도 그 말은 빛났다.
♣ 전시의 극장은 난방이 안됐다. 그는 내 앞에 꿇어앉아 자기 털장갑을 뒤집어서 내 발끝에 씌워주곤 했다. 손가락 장갑을 바닥만 뒤집으면 그 안에 다섯 손가락이 뭉쳐 있게 되고 그걸 발끝에다 신으면 아무리 꽁꽁 언 발가락도 스르르 녹으면서 훈훈해진다. 그는 어떻게 그런 신통한 생각을 해낼 수가 있었을까. 그건 일석이조였다. 언 발가락이 따뜻해져TDmf 뿐 아니라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 당하고 있다는 만족감까지 맛볼 수 있었으니까.
♣ 이국적이고 고상한 분위기는, 구경만 하고 나올 것 같은 손님은 꼭 집어낼 듯이 위압적이기도 해서 감히 그 안에 들어가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대신 내가 쇼윈도에 붙어 서서 눈독을 들인 귀금속들은 모조리 장차 내 것이 되었다. 나는 보석보다 그의 허황한 약속이 더 좋아 자꾸자꾸 부추겼다.
♣ 그 남자가 부산간 날이면 나는 외롭고 쓸쓸해서 이불 속에서 몰래 숨을 죽여 흐느끼곤 했다. 아무리 시장바닥에 인간들이 악머구리 끓듯하면 뭐하나. 그가 없는 서울은 빈 거나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남은 남녀는 절대로 헤어져서는 안 된다. 하루만 더 그 무의미, 그 공허감을 견디라 해도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하루하루 절박하고도 열정적으로 그 남자를 기다렸다. 돌아오겠다는 날보다 더 있다 온 적이 없었건만 그는 돌아오는 때마다 벌을 받아야 했다. 일상적인 위안보다 더 큰 위안, 그건 휘황한 장소에서 분수에 넘치는 호화 취미를 즐기는 거였다.
♣ 그 가사에다 그가 허밍을 넣는 걸 듣고 있으면 나는 온몸에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 시절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와 있나. 그 시절이 우리에게 정말 있기나 있었을까. 여긴 어딘가. 그건 일종의 위기의식이었다. 안채에 있는 그의 어머니의 존재가 신경이 써지는 건, 음악 소리가 클 때보다 조용할 때, 대화가 끊기고 어색하고도 터질 듯이 부푼 침묵이 우리 사이를 압박해올 때가 오히려 더할 수도 있었다.
♣그런 꽃들을 분출시킨 참을 수 없는 힘은 남아돌아 주춧돌과 문짝까지 흔들어대는 듯 오래된 조선 기와집이 표류하는 배처럼 출렁였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싶을 만큼 아슬아슬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돈이 안 드는 사치는 이렇게 위험했다.
♣ 우린 틈틈이 만났다. 언제 만나자는 약속을 못 지킬 적도 없지 않았다. 전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붓하던 우리의 연애질이 어쩔 수 없이 산만해지고 있었다. 연애질보다 급하고 실제적인 일이 우리를 필요로 하면 서슴지 않고 약속을 뒤로 미루었다. 때로는 거짓 일을 꾸며대면서까지 약속을 안 지킬 적도 있었다. 우린 이제 마지막 남녀가 아니라 수많은 남자 여자 중의 하나였다. 한 사람에게 몰두하는 일이 얼마나 집중력을 요하는 중노동이라는 걸 서서히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신경써야 할 잡무가 많은데도 그게 오히려 휴식이 되었다. 연애질에서 비켜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그 남자에게 싫증이 난 건 아니었다. 연애의 권태기가 온 것 하고도 달랐다. 만일 그 남자를 못 만났더라면 그 시절을 어떻게 넘겼을까. 그 살벌했던 날. 포성이 지척에서 들리는 최전방 도시, 시민으로부터 버림받은 도시, 버림받은 사람만이 지키던 헐벗은 도시를 그 남자는 풍선에 띄우듯이 가볍고 어질어질하게 들어올렸다. 황홀한 현기증이었다. 이 도시 골목골목에 고인 어둠, 포장마차의 연탄가스, 도처에 지천으로 널린 지지궁상들이 그 갈피에 그렇게 아름다운 비밀을 숨기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남자의 입김만 닿으면 꼭꼭 숨어 있던 비밀이 꽃처럼 피어났다. 그 남자하고 함께 다닌 곳 치고 아름답지 않은 데가 있었던가. 만일 그 시절에 그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인생은 뭐가 되었을까. 청춘이 생략된 인생. 그건 생각만 해도 그 무의미에 진저리가 쳐졌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감사하며 탐닉하고 있는 건 추억이지 현실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 한가운데 있지 않았다. 행복을 과장하고 싶을 때는 이미 행복을 통과한 후이다. 그와 소원해진 사이의 느낀 휴식감도 절정감 못지않게 소중했다. 긴장 뒤엔 반드시 이완이 필요한 것처럼. 그러나 한번 통과한 그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전적인 몰두가 사람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 청첩장을 내보였다. 내용을 확인하더니 조금 돌아앉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격렬하게 흐느꼈다.. 나는 그의 어깨가 요동치는 걸 보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를 보듬어 내 품안에 무너져 내리게 하고 싶었다. 그때 그가 바란 건 어머니의 품속 같은 위안이었는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렇게 해줄 자신이 없었다. 내가 감추고 있는 건 지옥불 같은 열정이었다. 그렇게 오래 붙어 다녔지만 그 남자하고 나는 손 한 번 잡아보지 않았다. 나는 끝까지 내 몸에다 그 남자와의 어떤 몸의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 그 남자도 나에게 어떤 마음의 부담도 남기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비로소 나도 돌아앉아 눈물을 보였다. 답례처럼, 절차처럼. 그는 잠자코 있어도 되련만 계속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두서없이 주섬주섬. 집 사고 판 일, 이사, 복학, 거기 따른 시시콜콜한 식구들의 참견 등, 이미 다 아는 사실을 변명처럼 다시 늘어놓는 건 그동안 나하고 소원해진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려는 절차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가 췰한 행동은 그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 나에게 그가 영원히 아름다운 청년인 것처럼 그에게 나도 영원히 구슬 같은 처녀일 것이다. 우리는 그때 플라토닉의 맹목적 신도였다. 우리가 신봉한 플라토닉은 실은 임신의 공포일 따름인 것을.
♣ 그때는 왜 그랬을까? 후회는 아닐 것이다. 아무리 되짚어 곰곰 생각해봐도 결론은 늘 그럴 수밖에 없었다. 라고 나오니까. 문제는 후회가 아니라 못 잊는다는 데 있다. 아마도 잊기가 아까워서 못 잊을 것이다.
♣ 아직도 차마 못 버리고 간직하고 있는 게 있다면 그건 나만 아는 비밀을 간직한 물건들이다. 그건 물건이라기보다는 낡은 기념사진이나 몇 자 안 되는 편지, 우리반지, 은반지, 은노리개, 돌멩이, 이국의 식당의 컵받침이나 냅킨 따위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내 마음 속에 숨은 비밀을 일깨워준 것들이다. 어떻게 내 안에 그런 것이 있다는 걸 알았겠는가. 떨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솜털의 떨림 같기도 운명의 떨림 같기도 한,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 그것을 비밀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비밀이라고 해서 부끄럽거나 부도덕한 것하고는 다르다. 내 마음의 밑바닥에서 솜털이 일어서는 것 같은 떨림은 절대로 남에게 설명할 수도 없거니와 누구하고 공유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비밀이야 말로 내가 무덤까지 가지고 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나보다.
♣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 첫사랑이란 말이 스칠 때마다 지루한 시간은 맥박 치며 빛났다. 그 남자를 다시 만나기까지는 일주일이나 남아 있었지만 오래간만에 맛보는 기다림의 시간은 황홀했다. 무엇을 입고 나갈까. 첫사랑이 긴 치마를 허리띠로 동여매고 시장바구니를 들고 나타난다면 그 남자가 얼마나 실망할까. 나 또한 그 남자가 첫사랑이거늘. 그건 첫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저것 좋은 나들이옷을 꺼내 입고 거울 앞에서 나를 비춰보아TEk. 어떤 옷은 점잖아 보이고, 어떤 옷은 촌스러워 보이고, 간혹 요염해 보이는 옷도 있었다.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남자가 나에게 해준 최초의 찬사는 구슬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구슬 같은 처녀이고 싶었다.
♣ 우리는 매사에 죽이 잘 맞았지만 가끔 이렇게 견제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적도 있었다. 견제하려는 건 지금 이 상태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아서 유지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 우리는 시간이 없는 것이지 돈이 없는 게 아니었다. 시장 보러 나와서 낸 자투리 시간이라는 이유로 아무리 구질구질한 것들도 과분한 사치처럼 빛났고, 그 남자가 느닷없이 미치겠다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도 그 남자가 자투리 시간이 감질나서 못 견디겠다는 비명소리처럼 들려서 내 가슴을 두방망이질하게 했다. 자투리 시간의 즐거움이 더는 더 큰 쾌락에의 갈망을 억제할 수 없을 지경까지 왔다는 걸 감지한 위기의 순간, 그 남자가 하루만 시간을 낼 수 있냐고 했다.
♣ 위로받고 싶다지 않나. 그 남자가 위로받고 싶은 건 첫사랑의 상처, 금지된 욕망의 고통이 아닐 것인가.
♣ 약속한 날은 더디 오는지 빨리 오는지 종잡을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에 나는 앞으로 내가 저지르게 될 일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는 내 생각에 시달려 녹초가 되고 말았다. 내가 시달리는 게 몸의 갈망인지 마음의 갈망인지부터 알고 싶었다. 나는 결혼한 몸이고 남편과 넘칠 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원만한 부부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딴 남자의 몸을 고파한다면 나는 음탕한 여자가 된다. 음탕한 여자라고 해서 겁날 것도 없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럼 내가 시방 고픈 건 마음인가.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마음보다 더 깊고 더 높은 곳에서 해방을 꿈꾸는 것의 실체를 육체라고도 영혼이라고도 규정지어지지 않았다. 나는 인간이다. 남보다 도덕적이지도 동물적이지도 않는 평균치의 인간일 뿐이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영육이 있을 것이다. 지금 시달리고 있는 것은 영혼인가 육체인가. 성적 갈망과 영혼의 고픔은 어떻게 다른가. 왜 영혼의 고픔은 추앙받고 성 욕망은 매도당하는가. 나는 아무 일도 저지르기 전인데 문책당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나는 특별한 경우라고 고상을 떨 궁리로 며칠을 보냈다. 범죄를 저지르기도 전에 그건 불가항력이었다는 변명 먼저 준비하고 있었다.
♣그 남자하고 산지기 집으로 놀러가려고 할 때 나는 그 남자와 한번 자보기로 작심을 하고 있었다. 꼭 그래야만 첫사랑의 주술로부터 놓여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임신하면 어떻거나 하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안 했다. 왜냐하면 결혼한 몸이기 때문에.
♣ 혼외정사보다는 아새끼를 야단치고 사람 되라고 설교하는게 더 나에게 익숙한 정서가 되어 있었다. 그 남자는 시력을 잃고 나는 귀여움을 잃었다. 나의 첫사랑은 이렇게 작살이 났다.
♣ 우리의 포옹은 내가 꿈꾸던 포옹하고도 욕망하던 포옹하고도 달랐다. 우리의 포옹은 물처럼 담담하고 완벽했다. 우리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