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발가락나무늘보는 환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평화로운 초식동물로 살아간다. 터를러는 "나무늘보의 입에는 언제나 맘씨 좋은 미소가 걸려있다"고 했다. 내 눈으로 직접 그 미소를 본 적이 있다. 난 동물ㅇ게 인간의 특징과 감정을 투사하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브라질 밀림에서 고개를 들다가 쉬고 있는 나무늘보를 볼 때면, 물구나무서서 명상하는 요가 수행자나 기도에 몰두한 은자 앞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 과학적인 접근법으로는 닿을 수 없는 상상력 넘치는 사람을 사는 현자 앞에 있는 느낌이랄까. / 가끔 내 전고은 뒤섞여 버렸다. 종교학을 전공하는 친구들 - 위가 어디인지 모르고, 엉터리 같은 이성의 노예가 디어 갈피를 못 잡는 불가지론자들 - 을 보면 세발가락나무늘보가 떠올랐다. 생명의 기적을 보여주는 세발가락나무늘보를 보면 신이 떠올랐다.
살면서 고통을 많이 겪으면, 더해가는 아픔은 참기 힘들기도 하지만 사소해지기도 한다. 내 인생은 유럽 그림에 나오는 해골과 비슷하다. 옆에ㅡㄴ 늘 씩 웃는 해골이 있어, 야망의 아둔함을 일깨워준다. 나는 그것을 보며 중얼거린다. '사람을 잘못 골랐어. 넌 삶을 믿지 않을지 몰라도 난 죽음을 안 믿거든. 저리가!' 해골은 낄낄대면서 다가오지만, 난 놀라지 않는다. 죽음은 생물학적인 필요때문에 삶에 꼭 달라붙는 것이 아니다. - 시기심때문에 달라붙는다. 삶이 워낙 아름다워서 죽음은 삶과 사랑에 빠졌다. 죽음은 시샘많고 강박적인 사랑을 거머쥔다. 하지만 삶은 망각 위로 가볍게 뛰어오르고, 중요하지 않은 한두 가지를 놓친다. 우울은 구름의 그림자를 지나칠 뿐이고.
정직하게 말해야겠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가지론자다. 한때는 의심도 쓸모 있는 법. 우리 모두 겟세마네 동산(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 마지막으로 기도했던 곳)을 거쳐야 한다. 예수가 의심했다면 우리도 그래야 한다. 예수가 기도하며 분노에 찬 밤을 보냈으니, 십자가 매달려 '주여,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울부짖었으니, 우리도 의심해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나아가야 한다. 의심을 인생철학으로 선택하는 것은, 운송수단으로 '정지'를 선택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 모두 가톨릭 신자처럼 태어난다. 그렇지 않은가?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에서, 종교도 없이 그렇게 있다가 누군가에 이끌려 신을 소개받지 않는가. 대개 그 만남 이후 이 문제는 끝이 난다. 변화가 있다 해도, 사소한 변화도. 많은 사람이 인생여정을 따라가다가 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무신론자들이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하는 말을 상상할 수 있다. "하얗군. 하얀색이야! 사 - 사 - 사랑! 아, 하느님!" 죽으면서 믿음이 생긴다. 반면에 불가지론자들이 정신을 놓지 않는다면, '메마르고 누룩없느 ㄴ사실주의'를 지탱할 수 있다면, 몸을 감싸는 따스한 햇살에 "뇌 - 뇌 - 뇌의 산소가 부 - 부족하군"이라고 하리라. 마지막까지도 상상력 부족으로 더 좋은 이야기를 놓치고 말겠지.
신은 '궁극적인 실체'이자 존재를 떠받치는 틀이건만, 마치 신의 힘이 약해서 자기가 도와야 된다는 듯 나서서 옹호하는 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자들은 정작 나병에 걸려 동전 푼을 동냥하는 과부는 못 본 체 지나고, 누더기 차림으로 노숙하는 아이들 곁을 지나면서도 '늘 있는 일'로 치부한다. 하지만 신에 대해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점을 보면 난리라도 난 것처럼 군다. 얼굴을 붉히고 숨을 몰아쉬면서, 화를 내며 말을 쏟아낸다. 얼마나 분노하는지 놀라울 뿐이다. 그 단호함이 겁난다. / 이런 자들은 겉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 신을 옹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분노의 방향을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는 걸 모른다. 바깥의 악은 내면에서 풀려나간 악인 것을..... 선을 위한 싸움터는 공개적인 싸움장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에 있느 ㄴ작은 공토인 것을..... 과부와 집 없는 아이들의 운명은 너무 힘들다. 그러니 독선적인 자들이 편들어주러 달려갈 곳은 신이 아니라 그런 이들인 것이다.
내 목숨이 위협받을 때는 생존을 향한 이기적이고 무시무시한 갈망에 동정심도 가려버린다.
공포심에 대해 한마디 해야겠다. 공포심만이 생명을 패배시킬 수 있다. 그것은 명민하고 배반 잘하는 적이다. 관대함도 없고, 법이나 관습을 존중하지도 않으며 자비심을 보이지도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에 접근해, 쉽게 약점을 찾아낸다. 공포심은 우리 마음에서 시작딘다. 언제나. 우리는 잠시 차분하고 안정되고 행복을 느낀다. 그러다가 가벼운 의심으로 변장한 공포심이 스파이처럼 어물쩍 마음에 들어선다. 의심은 불신을 만나고, 불신은 그것을 밀어내려 애쓴다. 하지만 불신은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보병과 다름없다. 의심은 간단히 불신을 해치운다. 우리는 초조해진다. 이성이 우리를 위해 싸워 온다. 우리는 안심한다. 이성은 최신 병기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뛰어난 기술과 부인할 수 없는 여러 번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이성은 나자빠진다. 우리는 힘이 빠지고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초조감에 끔찍해진다. / 이렇게 공포심은 우리 몸에 깃들고, 몸은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이미 인식한다. 벌써 폐는 새처럼 날아갔고, 창자는 뱀처럼 스멀스멀 빠져 나갔다. 이제 혀가 주머니쥐처럼 축 늘어지고, 턱은 그 자리에서 덜컹댄다. 귀는 들리지 않는다. 근육이 말라리아에 걸린 사람처럼 떨리고, 무릎은 춤추듯 흔들린다. 심장은 지나치게 경직된 반면 괄약근은 지나치게 이완된다. 몸의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다. 모든 부분이 서로 떨어진다. 눈만 제대로 작용한다. 눈은 언제나 공포심에 쏠려 있다. / 곧 우리는 무모한 결정을 내린다. 마지막 연합군인 희망과 신뢰를 버린다. 이제 스스로 패배한 것이다. 인상에 불과한 공포심이 승리를 거둔다. / 이것은 말로 옮기기가 어렵다. 근본을 흔드는 공포, 생명의 끝에 다가서서 느끼는 진짜 공포는 욕창처럼 기억에 둥지를 튼다. 그것은 모든 것을 썩게 한다. 그것에 대한 말까지도 썩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힘껏 싸워야 한다. 거기에 말의 빛이 비추도록 열심히 싸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피하려 하고 심지어는 잊으려 하는 고요한 어둠으로 다가오면 우리는 더 심한 공포의 공격에 노출된다. 우리를 패배시킨 적과 진정으로 싸우지 않았으므로.
마음 한 편으로 리처드 파커가 있어 다행스러웠다. 마음 한 편에서는 리처드 파커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가 죽으면 절망을 껴안은 채 나 혼자 남겨질 테니까. 절망은 호랑이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아닌가. 내가 이직도 살 의지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리처드 파커 덕분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가족과 비극적인 처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못 했다. 그는 나를 계속 살아 있게 해주었다. 그런 그가 밉지만 동시에 고마웠다. 지금도 고맙다. 이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리처드 파커가 없다면, 난 오늘날 이렇게 살아 여러분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했을 것이다.
생존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내 경험상 조난자가 저지르는 최악의 실수는 기대가 너무 크고 행동은 너무 적은 것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생존은 시작된다. 게으른 희망을 품는 것은 저만치에 있는 삶을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며칠인지, 몇 주일인지, 몇 달인지 헤어리지 않았다. 시간은 우리를 갈망하게 할 뿐인 환영인 것을. 내가 살아남은 것은 시간 개념 자체를 잊은 덕분이었다. / 내가 기억하는 것은 사건과 만남, 일상, 시간의 바다 여기저기서 나타나서 기억에 발자국을 남긴 일들이다. 예컨대 화염 신호기의 냄새, 새벽녘의 기도, 바다거북 죽이기. 바다 조류의 생물학 같은 것. 그 외에도 많이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정연하게 펼쳐 보이지는 못할 것 같다. 기억이 뒤죽박죽이라서.
신을 믿는 것은 마음을 여는 것이고, 마음을 풀어놓는 것이고, 깊은신뢰를 갖는 것이고, 자유로운 사랑의 행위다. 하지만 때로는 사랑하기가 너무도 힘들었다. 때로는 내 마음이 분노와 절망과 약함으로 급속히 가라앉아서, 태평양 바닥에 처박힐 것 같았다. 거기서 다시 올라오지 못할까 두려웠다.
단순한 것도 못 믿는다면, 왜 살아가고 있죠? 사랑이라는 건 믿기 힘들지 않나요? / 사랑은 믿기 힘들죠. 어느 연인한테든 물어보세요. 생명은 믿기 힘들어요. 어떤 과학자한테든 물어보라구요. 신은 믿기 힘들어요. 어느 신자한테든 물어봐요. 믿기 힘들다니, 왜 그래요? . / 나도 마찬가지예요! 매 순간 이성적으로 따지죠. 음식과 옷과 피난처를 얻으려면 이성이 도움이 되죠. 이성은 최고의 수단이에요. 호랑이와 거리를 두려면 이성 없이는 불가능해요. 하지만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굴면, 우주 전체에 목욕물을 끼얹는 위험을 감수하게 되죠.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 - 영어든 일본어든 언어를 사용해서 - 이미 창작의 요소가 들어있지 않나요?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도 이미 창작의 요소가 있지 않나요? /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ㅜㅇ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 / 두 분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요. 놀라지 않을 이야기를 기대하겠죠. 이미 아는 바를 확인시켜줄 이야기를 말이에요. 더 높거나 더 멀리, 다르게 보이지 않는 그런 이야기. 당신들은 무덤덤한 이야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붙박이장 같은 이야기. 메마르고 부풀리지 않는 사실적인 이야기.
두 분은 어떤 이야기가 사실이고, 어떤 이야기가 사실이 아닌지 증명할 수 없어요.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