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이 이야기는 돌멩이나 들꽃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사소하지만 살인적인 고통이 될 수 있는, 보잘것 없지만 천상의 위안이 될 수 있는, 삶에서 만나는 그 모든 돌멩이와 들꽃.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고 해도, 아무리 전 존재를 증여한다고 해도 인간이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란 결국 돌멩이나 들꽃에 불과한 게 아닐까.
인혜는 이제 사랑에 대해 어떤 환상도 품고 있지 않았다. 첫만남에서 어쩐지 낯이 익고, 두 번째 만남에서 동질감을 발견하고, 세 번째 만남에서 운명이나 인연을 거론하는, 그런 사랑의 환상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한때 인혜도 그런 식의 사랑의 환상을 믿은 적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 온몸이 감전되는 전율과 함께 찾아오는 천둥 번개같은 사랑,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지고 일상과 관습이 사라지는 정전같은 사랑, 온몸과 마음을 혼곤하게 취하게하는 봄빛 같은 사랑......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것은 사랑의 다양성이 아니라 환상의 다양성일 뿐이었다. 그때는 사랑이 순수한 열정이고 아름다운 애착이고 낭만적인 체험이며 순결한 정서라 믿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말들을 입에 담기에는 인혜는 사랑의 속성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인혜는 이제 사람들이 사랑 앞에서 낯익음인, 동질감이니, 운명이니 하는 언어를 동원하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모호한 상황, 불투명한 미래쪽으로 자신을 밀어붙일 때는 그런 언어가 위안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통속적이군...... 인혜는 두 팔을 벌려 흔쾌히 눈앞의 통속을 껴안는 기분이 되었다. 인혜는 통속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온몸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의 중심을 관통하는 바로 그 통속. 정선 아라리가 매혹적이었던 것도 그것이 통속의 본질을 활짝 펼쳐서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인혜는 늘 세상의 중심을 온몸으로 지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나친 엄숙주의, 유교적 허위의식, 그런 것들을 벗고 싶었다. 비가 오면 속살까지 비에 젖고, 햇빛이 좋으면 뼛속까지 볕에 그을리고 싶었다. 어떤 이들은 통속이라는 말에 천박하고 유치하고 범박한 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질을 담는 모양이지만 인혜는 세상을 뚫고 지나가는 방법은 통속밖에 없다고 믿는 쪽이었다.
일상은 자주 허위 과장 광고인 듯했고, 우리네 삶은 통째로 농담에 가까운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삶이 은근이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삶이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면 사랑은 그보다 더 가볍고 사소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사랑의 본질이 권력욕이라면 사랑의 형식은 통속성임에 틀림없었다.
애정에 대한 신뢰가 없는 사람이 자주, 네가 나를 버리기 전에 내가 너를 버리겠다는 심리적 이유로 연인을 떠나곤 한다는 사실은 책에서 읽어 알고 있었다.
무의식이 꿈, 언어, 신체적 증상 등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내가 타인의 호의나 친절을 별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은, 이젠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겠구나 하는 확신이 내 속에서 생긴 이후부터였다.
도움을 청해 놓고 거절하고, 유혹해 놓고 거절하고. 면담자가 했던 말을 더 생각해 보았다. 분명 내 의식은 도움을 청하는 일을 잘하지 못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방어적이고 불능이다. 그럼에도 살면서 나는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고, 원하지 않는데도 남성들이 끊임없이 내게 와서 부딪치곤 했다. 내게 어떤 빌미가 있었던 걸까? 내 무의식이 도움을 청하고 남성을 유혹하는가?
그게 전적인 거절이 아니라 지금 바쁘니까 다음에 하자 하는 잠정적인 거절, 연기조차 받아들이기 힘들던 시기도 있었어요. 이십대 중반쯤에요.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여전히 전화를 좋아하지는 않아요. 특별한 용건 없이도 안부 전화들 많이 주고받잖아요. 저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망설여요. 상대가 반가워할까, 바쁜데 공연히 번거롭게 하는 건 아닌가, 그래서 수화기를 들었다가 놓아 버리는 때도 있어요.
그는 사랑받으려는 욕구와 유혹될 수 없는 성적 불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심지어 여자가 마침내 유혹되는 때에도 그는 이 승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는 거기서 성적인 마력을 보고 그녀를 벌주기를 더 좋아한다. 이것은 성적 불능의 문제가 아니다. 유혹한다는 것은 유혹당한다는 이유로, 다시 말해서 자신을 상실하고 마법의 내기에 빠져 버린다는 이유로 대가를 치르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때 모든 것은 인간과 신의 제의적 희생 관계를 결정짓는 상징적 규칙에 따른다. 유혹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제의적 행위이다.
운전하는 길 내내 울었던 것이,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바로 그 구절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 나는 아무래도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 나는 아무래도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 그렇다면 내가 사랑이라 믿었던 그 감정들은 다 무언가 하는 생각, 그런 생각들로 금세 마음이 소란스러워졌다.
한얼의 씨앗이 내 머릿골 속에 내려와 있다구요? 그 말은 내 마음 속에 부처가 들어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과 비슷하네요. 저는 종교 다원주의에 동의하는 편인데, 알면 알수록 모든 종교가 하나라는 사실이 명백해져요. 요즈음은 민간 신앙에서 말하는 수호령의 존재나, 융의 초자아 개념까지도 다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는 서로 다른 언어일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해요. 모든 게 결국 내 자아의 일부, 나 자신이라는 거죠.
인체는 소우주이고 축소된 자연입니다. 그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자연의 이치에 맞춰 살도록 노력하세요. 요즈음은 계절 구분 없이, 밤낮 구분 없이, 몸을 함부로 움직여서 병이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름 게으름뱅이도 병이 되고, 겨울 부지런쟁이도 병이 들게 마련이죠. 밤낮을 뒤집어 사는 사람도 병이 들지요. 나무처럼, 계곡물처럼 살면 병이 없습니다. 이번 가을에는 햇빛을 많이 쬐십시오. 열매나 곡식이 가을 볕에 마지막 살집을 단단하게 하듯이 사람도 가을볕을 많이 쬐면 좋습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되도록 적게 움직이세요. 겨울에는 동물들도 겨울잠을 자고 나무도 몸 안의 수분을 모두 비우고 생명 작용을 멈춥니다. 인간도 겨울에는 되도록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만 잘 지키면 여러 선생님들의 몸은 늘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날것인 자신과 직면하게 되는 가장 에누리 없는 방식이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한 번씩 자신의 추악함을 겪고 나면 그 증세가 많이 완화된다는 점이었다. 인혜가 더 많은 사랑을 해보고 싶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인지도 몰랐다. 사랑은 분명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아 가는 과정이고, 자기의 한계를 벗어나기 ㅜ이해 피나게 투쟁하는 일이고, 그것을 통해 점진적으로 자아가 확장되는 것을 느끼는 일이었다. 한 사람이 머물다 떠날 때마다 내면의 공간도 그만큼 넓어졌고 그 자리에 더 많은 빛과 바람이 드나들었다. 물론 다음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도 한결 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