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티없이 깨끗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자연이 주는 고요, 어느 악기로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소리가 저 침묵 아닌가요? 고요하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선명하고, 선명하면 드러나고, 드러나면 눈에 안 보이던 것들도 다 보여요.
자연에 대한 기본 예의는 소식이에요. 먹을 만큼만 먹는다는 거지요. 사람으로서 가장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잠자리와 음식에 있다고 하더군요.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
기도해야 합니다. 종교로서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기도하세요. 그러면 좋은 일이 일어날 거예요. 기도하면 나쁜 일도 좋은 일이 되고요. 한번 해보면 효력을 실감할 거예요. 정말이에요. 적어도 모든 살아 있는 것, 우리가 살아있음에 대해 감사기도 정도는 해야하지 않을까요?
흔히 하는 기도를 가만 살펴보면 모두 하느님을 설득하거나 매달리는 기도가 대부분이지 않나요? 나도 전에는 그런 기도를 해왔었어요. 그러나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고 어떻게 하느님을 감동시킬 수 있겠어요? 기도는 우선 자신을 변화시키는데 초점이 맞춰져야 해요. 나는 어쩌면 소속이 된 상태나 편안한 환경보다는 어려울 때, 그리고 산, 나무, 들, 꽃, 공기, 하늘, 바람, 벌레소리 같은 자연을 대할 때 기도가 잘되는 경향이 있더군요. 한없는 주님의 은총 한가운데 있다는느낌을 받거든요. 자신이 어려울 때 어떤 초월적인 힘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인간의 기본 본능이겠지요. 난 내면을 파고드는 간절한 기도를 대구 가기 전에 해봤고 여기 와서 다시 하게 되었어요. 그러면 내 안에서 이상한 힘이 솟아요. 그 희열이랄까, 그런 내면의 성령의 힘으로 사는 거지요.
복종과 순종의 차이를 아세요? 복종은 구속이지만 순종은 기쁨이에요. 가까이 가면 갈수록 질문과 이유가 적어지지요.
'간난이 너를 옥으로 만든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어요. 마음의 장애를 만나 그것을 소화시켜가는 과정
끝에서 이런 평화가 찾아오네요. 나이 들면서 찾아드는 이 평화가 분에 넘쳐요. 진실로 진실을 찾는 사람은 가루보다 더 잘게 부서지는 비참한 고통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잖아요. 그 정련과정을 거쳐 산산이 부서진 다음 다시 하나가 되는 거지요. 밤은 길었지만 새벽은 찾아오더군요. 하느님은 때때로 그가 빛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입증하시려고 우리를 어둠 속에 두기도 하더군요. 청원기 시절에 배운 위대한 포기가 20년 만에 진정한 의미로 살아나 지금 남은 건 평화뿐이에요. 지금은 이 평화를 진정으로 즐기고 있어요.
노동이야말로 '신성한 미사'의 집전일 수도 있지요. 말없이 올리는 기도이기도 하구요. 자기 안의 하느님과 대화를 시작해 보세요. 그게 기초예요.
엠마누엘 수녀님의 '풍요로운 가난' - 그 책에 이렇게 쓰여 있어요. 늑대가 배고픈 개 앞에서 포식을 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굶어가는 다른 인간 앞에서 게걸스럽게 먹기 바쁜 인간들은 보아 넘기기 힘들다고요.
수녀님은 수녀원을 안전지대로 삼았었지만 혼자 있어야만 하는 사람에게 공동체 생활이 최적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했다. 반드시 수녀원에 가지 않아도 자신이 사는 집을 수녀원, 성당처럼 여기고 살면 되는 것이고, 반드시 수녀가 되지 않아도 기도는 자연을 통해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카타리나 수녀님의 메시지인 것이다. 또한 지금 몸이 수녀원에 있다 하여도 불행하다면 본인이 행복하기 위해서, 하느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위해선 어쩌면 한 번은 알을 깨고 나오는, 이런 과감한 선택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냥 좋아요. 밖에서 오는 것은 들어주고, 받아주고, 수용하면 되는 거예요. 안에서는 밖으로 그저 주기만 하면 되구요. 인생에서 돈보다 명예보다 좋은게 사람아니겠어요? 난 이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중시했어요. 살다보면 사람에 따라 내 맘에 안 들 수도 있지요. 그러나 개의치 않고 판단하지 않아요. 설사 그렇다고 하여도 내가 안 좋아하는 새가 지저귀는 구나 하고 모두 들어주면 그만이에요.
그러면 남의 장점만 보면 돼요. 그래야 살면서 이 땅에 미운 사람을 만들지 않아요. 나는 이 땅에 절대로 '내가 미워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어놓고 가지 않을 거예요. 어렸을 때 아버님이 해주셨던 '남을 예뻐할 줄 알아야 내가 사랑받는다' '용서하라'는 그 말만을 지키려고 했던거지요.
팀워크를 이루려면 '나'라고 하는 아상이 없어야 해요. 여럿이 모인 곳에서 '나'를 찾으려고 하면 안되지요. 대중생활에서 튄다는 것은 곧 '나'라고 하는 아상이 일어나는 것이니 진정한 나를 찾으려면 '나'와 '내 것'이 없어야만 해요. 그러나 어떻게 본능을 다 채울 수 있겠어요? 또 그런 본능을 숨기려고만하면 가식이 따르잖아요. 우리에겐 가식이 80퍼센트입니다. 이런 가식을 벗으려면 일상에서 나의 부족함을 감추려 하지 말고 '나 이런 사람입니다.'하고, 상대방에게 '나의 부족함을 채워 주세요/'하면 됩니다.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사람들은 아는 것 같아요.
흔히 기분전환을 위해 자리를 바꾸고 환경을 바꾼다고 하지만 자리만 바꾼다고 세상이 달리 보이지는 않지요. 마음을 바꿔 먹는다고 하지만 마음 껍데기만 바꾸느냐, 속까지 변하느냐는 다르니까요. 지금 있는 자리에서 다시 보는 마음을 가지면 돼요. '지금 살아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이라도 감사하게 받으면 바다같이 살 수 있을 거예요. 생활 철학이 없으면 종교철학도 설 수 없습니다. 저의 서예 은사님이 주신 호인 소석이 말해주듯이, 때가 안 묻은 돌처럼, 부동으로 움직이지 않고, 희디흰 돌처럼 사는 겁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다 보면 몸이 망가지고 말아요. 육신이 시키는대로 하면 엉망이 되기에, 나의 정신이 시키는 대로 살려고 하다 보니 어려움은 있었지만 보람은 커져만 가네요. 앞으로 곧 '보람'이라는 열매를 따먹을 시기도 된 것 같아요.
성직은 다른 직업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좀 색다른 직업이라는 점. 그리고 여러 직업 가운데 남다릉ㄴ 의지를 갖고 선택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죠. 그거 아세요? 엄밀히 말하자면 사제들도 월급쟁이고 또 성직은 일종의 서비스 업종입니다. 세금 안 내도 되는 직종이구요.
나는 사람들이 성직자들을 우러러보는 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우리보다 나은 사람들이라는 생각때문에 성직이나 성직자에 대한 환상을 가지면 반드시 성직자들을 욕하게 됩니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사제들을 신적인 존재처럼 보고 실수라도 하면 당신은 신인데 왜 우리 인간처럼 행동하느냐고 따집니다.
다시 말하지면 갖추어 입는 옷이 다르고, 우리보다 조금 더 양심적으로 살려 노력하고, 봉사하는 것 빼고 나면 성직자는 우리와 크게 다른 점이 없습니다. 여기 어느 교우 한 분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가정을 잘 지키고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또 자식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그 남은 시간을 쪼개 남을 위해 뭔가 봉사 하고 있다면 그 사람도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성직자가 아니겠습니까?
원래 인간의 본성으로 진정한 성직자가 되긴 어렵습니다. 구약에도 나와 있듯이 태초체 인간은 창조주의 말을 거역하는 성질이 있어요. 하느님만이 유일하게 완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절대자에 대한 끝없는 동경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역사적으로 가장 진정한 성인이자 하느님 나라에 봉사한 성직자였다고 생각해요.
<고린도 전서 13장>중에서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성경을 보면서 느끼는 건데 '그분'이 지구를 내려다보면 뭐라고 하겠어요. '그분'을 파는 이 종교를 못 참겠습니다. 종교때문에 일어난 전쟁도 그렇고요. 우리 삶의 허약성때문에 종교를 만들어 세상이 이렇게 되었어요. 종교가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욱 순수했을 거예요. 저는 교회가 없는 무교회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스스로 노예되기를 원하거든요.
네 원수를 사랑하라/동족에게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말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을 주고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굳이 '용서'라는 단어가 필요없지요. 사랑이 모든 걸 다 감싸주니까요.
하느님은 천국을 안 보여줍니다. 왜냐고요? 천국을 만드는 건 바로 자기에게 달렸기 때문이지요. 꽃 한 송이를 바라보고 행복하다면 그게 바로 천국인 거지요. 천국 가기가 너무 쉬워요. 다시 말하지만 난 교회의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교회나 단체에 소속됨없이 각자가 자기 손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고, 기도도 각자 하고 그래도 좋을 거예요. 진정으로 하는 말입니다. 만약 종교인들이 불상이나 십자가를 만들지 않았다면 세상은 좀더 풍요로울 수 도 있었을 거예요.
지금의 절과 교회 안에 행려병자들을 수용해도 좋지 않겠습니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바로 '불상도 없고, 십자가도 없는 그런 사랑의 집은 없느냐'예요. 종교가 조금만 생활화되면 훨씬 다를 텐데요. 종교지도자도, 신도들도 종교 따로, 생활 따로 이지요. 기도하는 시간 다르고, 싸우는 시간 다릅니다. 그래서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게 아니라 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려하니 그런 기도가 어디 효력이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앉아 있는 것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이 주신 선물, 저 산을 보고 '그분'을 생각하니까요. 저 산 정말 아름답지요? 예수의 초상화가 마흔여섯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그분'은 다르게 나타납니다. 나 같은 환자는 환자가 된 예수를 보고, 흑인이 보는 예수는 검은 예수입니다. 각자 다른 눈으로 예수를 본다 해도 우리를 묶어주는 사랑만은 하나입니다.
기도실에 들어가기 전에 보는 책이 있는데, 어느 날 집어든 책에서 '아름답다는 것은 진실한 것과 선한 것의 표출이다'라는 구절을 읽고 그 말에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중국 그림에서 기교가 넘치면 졸하다고 하지만, 더 나아가 아름다움의 극치는 졸하다는 말에 또 한 번 자유인이 되었어요.
성경에 보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구절이 있어요. 그것보다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하랑하여라는 그 말이 진정으로 내 가슴 속에 깊이 아로새겨 있어요. '그분'이 하신 말 가운데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는 이 말이 저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나도 사람이다 보니 이런 말에 크게 의지하고 그 말씀만은 지켜나가자고 했던 거지요.
아름답게 사세요. 들꽃어럼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에겐 하느님은 뭐든지 덤으로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