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의 행과 불행은 생각의 얼룩이다.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다스려 나가는 삶이 행복한 삶이다. 말 한마디, 생각 하나, 행동 하나는 씨가 된다. 말이 곧 씨다. 우리는 매일을 살며 순간순간 씨를 뿌리는 인생의 농부다. 좋은 씨를 많이 뿌려야 한다. ‘심전경작’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의 밭에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는다는 뜻이다. 내 마음과 그대 마음에 좋은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는다는 뜻이다. 내 마음과 그대 마음에 좋은 씨를 뿌리고 잘 가꾸는 일, 그것이 수행자의 일이다. 아름다운 말 한마디, 생각 하나, 행동 하나가 씨이기에 우리는 말과 생각과 행동을 잘 다스려야 한다. 말과 생각과 행동을 잘 다스리는 길이 수행의 최고 목적이다. 진정한 수행은 인생 최고의 투자다. 말과 생각과 행동을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원천이 바로 마음이기에 마음을 잘 다스리는 길이 수행자의 길이다. 그래서 수행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수행자의 길이야말로 행복의 길이요, 영원한 평화의 길이다.




▣ 진정한 의미의 형제애와 자매애를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보편적 종교라고 믿고 있다. 자신이 불자냐 기독교인이냐, 이슬람교도냐 힌두교도냐, 아니면 무종교인이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인류가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 부처님의 일생을 통해 우리는 수행에 세 가지 단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도덕이 첫 번째고, 그 다음은 집중명상이고, 그 다음은 지혜다. 그리고 우리는 깨달음의 길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개인적 해탈의 효과적인 수행은 건전하고 장기간에 걸친 동기에 달려 있다.




▣ 우리가 보통 쾌락이라고 느끼는 것들은 대개 고통이 축소된 상태다.




▣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무희망이 실패의 진짜 원인이다. 우리는 어떤 문제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외적 환경이 혼란스럽거나 복잡해도 침착해야 한다. 마음이 평화로우면 그런 상황의 영향을 그다지 받지 않는다. 반대로 화를 참지 못하면 세상이 평화롭고 안락해도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한다.




▣ 욕망, 증어, 앙심, 질투와 호전성 같은 비생산적인 감정들은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 겉으로 드러내면 그런 감정들은 점점 더 자주 생긴다. 그런 감정들을 겉으로 드러내면 그것들은 더욱 강해지고 빈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감정들에 휘둘리는 데서 비롯되는 불이익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이롭지 않은 생각이 들면 만족과 사랑의 감정으로 그것들을 대체해본다. 그러면 훨씬 나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정적인 감정이 나타날 때면 그것을 애써 극복해야겠지만, 먼저 그것들이 나타나는 것을 막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훨씬 나아짐을 느끼게 할 것이다.




▣ 생로병사의 반복, 즉 여러 생을 전전하는 윤회의 과정을 몰아대는 책임은 바로 욕망에 있다.




▣ 하나의 업이 ‘업도’가 되려면 다음의 네 가지 특징을 갖춰야 한다. 동기, 사람 또는 대상의 올바른 확인, 적절한 준비와 성공적인 완료가 그것이다. 거지에게 적선할 작정을 하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면 이러한 요소들이 모두 갖추어지는 때도 있다. 네 가지 특징을 모두 갖추지 못한 행동은 두 번째 범주에 들어가는데, 그것은 삶의 세세한 부분을 결정한다.




▣ 업보는 이번 생이나 다음 생 혹은 그 다음 생에 받게 된다. 도와주거나 해치려고 하는 강력한 동기를 가진 뚜렷한 선업 또는 악업은 이번 생에 그 결과를 맞게 된다.




▣ 죽음의 과정

1. 신기루

2. 연기

3. 반딧불

4. 촛불

5. 선명한 흰색이 하늘에 가득 찬 것과 같은 마음

6. 선명한 빨간색 또는 오렌지색이 하늘에 가득 찬 것과 같은 마음

7. 선명한 검은색이 하늘에 가득 찬 것과 같은 마음

8. 청정한 빛




▣ 자비심을 닦는 수행자에게 적은 가장 중요한 스승 중의 하나다. 적이 없으면 관용을 닦을 수 없고, 관용이 없으면 자비심의 튼튼한 기초를 세울 수 없다. 그러므로 자비심을 닦고자 한다면 반드시 적이 있어야 한다.




▣ 내가 아무리 중요한 존재라고 해도 나는 다만 한 사람에 불과하다.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행복을 누릴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나는 하나고 남은 여럿이라는 데 차이점이 있다. 단 한 사람의 행복을 잃는 것도 간과할 수 없지만, 수많은 다른 존재들의 행복을 잃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들에 대한 자비심, 사랑 그리고 존중하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




▣ 우리는 어린이들이 자비심을 닦을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선생님과 부모님은 막대한 이로움을 주는 실제적이고 인정미가 넘치는 인간의 가치를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




▣ 다른 이들에게 완전한 행목을 가져다주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그들을 위해서 깨달음을 구하려고 결심할 때, 그것을 일러 깨달음을 향한 이타적 의도, 또는 보리심이라고 한다.




▣ 나는 모든 존재들을 돕고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겠습니다.




▣ 명상의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1. 근본적인 두 가지 유형의 명상으로는 분석명상과 안정명상을 들 수 있다. 분석명상은 추론을 통해 주제를 이해하고자 그것을 분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물이 원인에 의해 산출되는 과정, 또는 그것이 매순간 붕괴되어 가는 과정을 곰곰이 생각해봄으로써 사물이 무상한 이유에 대해 명상을 하는 것이다. 안정명상은 무상과 같은 단 하나의 대상, 또는 주제에 마음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1. 명상은 또한 주관적 명상과 객관적 명상으로 나눌 수 있다. 주관적 명상의 목적은 마음속에 새롭거나 강화된 견지 또는 자세를 함양하는 것이다. 믿음의 함양은 이러한 유형의 명상의 본보기다. 믿음은 집중의 대상이 아니라 명상을 통해 함양되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자비심의 함양은 주관적 명상이라 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자비심 그 자체에 대해서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식을 좀더 자비롭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객관적 명상은 무상과 같은 주제, 또는 부처님의 黃金身같은 대상을 놓고 명상하는 것이다.

3. 기원의 형식을 통해 명상을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부처님의 자비심과 지혜가 자기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4. 한 단계 더 나아가 실제로는 자기가 아직 갖추지 못한 여러 특질을 갖고 있다고 마음속으로 그리는 상상명상이 있다. 예를 들어 천신 요가를 할 때면 자신의 몸을 지혜의 빛으로 이뤄진 이상적인 존재로 여기는 명상이 필요하다.




▣ 집중명상에 의해 적정을 얻는 방법

1. 적정을 얻는 최초의 원인이 되는 계율을 통해 평화롭고 편하며 세심한 행동 양식을 갖게 됨에 따라 추잡하고 산만한 마음을 버려야 된다.

2. 소란스러운 일상생활에서 벗어난 수행을 위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고 명상을 일과로 삼아야 한다. 집중명상을 하자면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 필수적이다. 소음은 집중을 방해하므로, 처음에는 조용한 곳에 있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3. 마음을 맑게 해주는 알맞은 식사를 해야 한다. 건강 상황에 따라서 고기를 먹을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채식이 가장 좋다. 물론 개인적 해탈의 계율에 따르자면, 때때로 고기를 먹는 것을 금지하는 아무런 규정도 없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 일부러 죽인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고, 주지않은 고기를 달라고 해서도 안 된다. 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대승율의 핵심이므로 고기를 먹는 것을 금지하는 대승경전들도 일부 있다. 또한 음식을 지나치게 많이 먹는 것도 좋지 않으므로 좀 덜 먹어야 한다. 물론 술을 마시거나 향정신 작용을 가진 약을 먹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흡연도 바람직하지 않다.

4. 적당한 시간의 수면이 필요하다. 잠이 지나치면 정신이 둔해지고 너무 부족하면 정신이 혼란스럽게 된다. 자기에게 알맞은 수면 시간을 계산해본다.

5. 집중명상의 초기 단계에서는 몸의 자세가 중요하다. 될 수 있으면 결가부좌 또는 반가부좌를 취한다. 방석 두 개를 준비해서 작은 것을 둔부 아래에 깔아 둔부가 무릎보다 높은 위치에 있게 한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오랫동안 명상을 한다 해도 지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척추를 마치 화살처럼 곧추세운다. 고개는 약간 아래로 숙인다. 눈길은 콧등 위로 앞쪽을 향하게 한다. 혀는 입천장에 갖다 댄다. 입술과 이는 평상시대로 놔둔다. 두 팔은 억지로 몸에 갖다 붙이지 말고 약간 느슨한 상태로 둔다. 손의 위치에 대해서 말하자면, 일본의 선 수행자들은 보통 오른손바닥 위에 왼순바닥을 위로 향한 채 올려놓는다. 티베트인들은 왼손바닥 위에 오른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올려놓는다 딴뜨라 수행을 할 때는 왼손바닥 위에 오른손바닥을 올려놓고 양손의 엄지를 맞대서 삼각형의 모습을 만들고는 양손을 배꼽에서 손가락 네 개의 너비쯤 아래 두는 것이 중요하다.




▣ 집중명상을 할 수 있도록 받쳐주는 힘은 전념인데, 그것은 주의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대상에 열중하는 능력이다. 마음이 자꾸 명상의 대상에서 벗어날 때마다, 다시 그것에 마음을 되돌림으로써 전념하는 훈련을 한다. 계속해서 대상에 전념하는 데 익숙해지면 내관을 해야 한다. 샨띠데바의 ‘입보살행론’에 나와 있듯이, 내관의 특수한 기능은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간에 상관없이 정기적으로 자신의 모든 행동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이다. 적정을 얻는 과정에서 내관이 맡은 임무는 마음이 헤이나 흥분된 상태하에 있는지 또는 막 그렇게 되려고 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 전념과 내관을 통해 계속해서 대상을 붙잡고 있을 수 있게 되면, 6개월 이내에 집중명상을 성취할 가능성이 있다. 처음에는 무진장 애를 써서라도 억지로 명상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다음에는 이따금씩 애쓰는 일 없이 대상에 집중한다. 그 다음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대상에 집중한다. 그러면 마침내 해이와 흥분 상태를 없애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일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대상에 머물게 된다. 4시간 동안 끊임없이 생생하게 대상에 머무를 수 있게 되면, 견고한 안정성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의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가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유연해지는 기쁨을 얻게 된다. 바로 이때, 적정을 이루게 된다.




▣ 이른 아침, 잠에서 깬 직후 모든 감각 기능이 활성화 되기 전- 우리는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상태여서 의식 그 자체를 들여다볼 수 있는데 이때야말로 청정한 빛으로 이루어진 마음의 본성을 경험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옛날 생각과 새로운 생각 사이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 마음의 밝게 빛나고 인지하는 본성을 찾아본다. 이런 식으로 계속하다 보면 마음은 모든 대상과 개념을 반영하는 거울과도 같고, 다만 밝게 빛나고 인지하는 본성, 즉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밝게 빛나고 인지하는 마음의 본성을 알고 나면 그것에 집중한다. 전념과 내관의 힘을 이용해서 계속해서 그 상태에 머문다.




▣ 근본적이고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억지스럽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알게 된 상태에 이르면, 아마도 생각은 일어나는 대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러한 명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예민해지고 기억력과 정신 수행을 넘어 사업이나 공사, 가족 부양을 하거나 교사, 의사 혹은 qust호사가 되는 데 틀림없이 쓸모 있는 특질들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 이러한 정신수련의 또 하나의 이로움은 몸과 마음 사이의 긴밀한 연관에서 비롯된다. 젊고 몸이 건강할 때는 마음 역시 강한 법이다. 그때 수련을 시작하는 것이 특히 유익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면 늙어감에 따라 몸에 변화가 생긴다 해도 마음은 여전히 생기가 넘치고 적극적인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과거에 한 일이나 미래에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에 대한 걱정을 멈출 수 없다면, 들숨과 날숨에 마음을 집중해 본다. 그도 아니면 다음의 진언을 낭송해 본다. ‘옴 마니 반메 훔’




▣ 몸과 마음에 의존해서 ‘나’라는 생각이 일어날 때, 몸과 마음 속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앞 순간과 뒤 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집합도 ‘나’가 아니고, 어느 한 때의 신체 부분들의 집합도 ‘나’가 아니다. 각각의 신체 부분들도 ‘나’가 아니고, 각각의 신체 부분들로 이루어진 어떤 연속체도 ‘나’가 아니다. 또한 몸과 마음과는 별도로 ‘나’라고 할 수 있는 실체도 전혀 없다. 그러므로 ‘나’라고 하는 것은 다만 몸과 마음에 의존해서 개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성립된 것이 아니다.




▣ 현상이 본래부터 존재한다는 잘못된 생각의 무지를 없애면, 탐욕과 증오 같은 번뇌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다음에는 고통도 사라질 것이다. 더구나 공성을 깨달은 지혜는 남을 깊이 배려할 줄 아는 마음과 그로부터 우러나오는 자비행을 갖추어야만 일체지의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다.




▣ 우리 모두에게는 ‘나’라는 의식이 있지만, 그것은 몸과 마음에 의존해서 나타나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영원하고 전일하며 독립적인 자아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교는 몸과 마음의 연속에 의존해서 나타나고, 시시각각 변하는 자아의 존재를 정말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러한 ‘나’라고 하는 의식이 분명히 있다. 불교의 무아설은 이러한 자아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러한 ‘나’를 가지고 있는 우리 모두가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수많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은 자아의식과 그 밖의 현상을 과장해서 본래부터 존재한다고 억지를 부리기 때문이다.




▣ ‘번뇌는 피상적인 것이고, 마읨의 본성은 청정한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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