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왔다는 느낌은 공간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녀를 떠밀어온 모든 감정과 책무, 삶을 속박했던 육신의 욕망, 그리고 그 주기에서 조차 벗어난 기분이었다.
그녀에게는 딸의 생리가 섹스의 기별이 아니었다. 출산에 대한 고통스러운 증오와 그 출산으로 인해 평생 자신의 삶과 평행선을 그으며 이어져 나갈 또 하나의 삶을 맞이하게 되는 딸의 운명에 대한 역시 고통스러운 애정이었다.
한 때 그녀는 그런 우연을 끔찍하게 기다린 적이 있었지만 세상에 우연 따위는 없었다. 우연이란 아무 준비도 없을 때 정말로 뜻밖에 오는 것이거나 아니면 연출일 뿐이다.
너를 사랑해. 어둠 속에서 그가 속삭였다. 그녀 또한 그에게 수없이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자신이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에는 어느 한 순간 '너를 다른 인생으로 데려다줄게'라거나 '너는 네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다른 사람이야'라는 뜻이 들어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열흘쯤 지난 후에 상자를 뜯어보니 사과는 반나마 썩어 있었다. 썩은 것을 골라 내면서 그녀는 사과 역시 자기들끼리 닿을 수록 더욱 많은 욕망이 생기고 결국 속으로 썩어 문드러지는 모양이 사람의 집착과 비슷했다. 갈색으로 썩은 부분을 도려내 봤지만 살이 깊게 팬 사과들은 제 모양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과 병동같은 그 상자를 그날로 내다버렸다.
재생 버튼을 누르가 갓 태어난 아기가 화면에 클로즈업되었다. 아기의 얼굴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난생처음 외기 속으로 나와 숨을 쉬기 위해서 사력을 다하는 아기의 채 펴지지 못 한 팔과 다리는 계속해서 바동거렸다. 살갛은 충혈되고 이마는 일그러지고 입술은 삐뚫어졌다. 세상이라는 미지 속에 내던져진 그 붉은 생명 덩어리는 너무나 미숙하고 나약한 존재였으므로 살겠다는 것부터가 고통을 의미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인생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