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홍포(大紅袍)


1.

  마침내 황제의 칙사가 암벽 아래에 도착했다. 칙사는 말에서 내려, 황금색 상자를 경건하게 열었다. 상자 안에는 황제가 직접 쓴 교서(敎書)가 붉은 비단 위에 놓여 있었다. 칙사는 황제의 교서를 읽고 나서, 자신이 데려온 무관들에게 명하였다. 체구가 작고 날렵한 무관들이 기다란 비단을 몸에 감고, 암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절벽 위에 매달린 차(茶)나무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의 몸에 감은 피같이 붉은 비단을 풀어내어 차 나무에 덮어씌웠다.   


2.

  새로 쓰기 시작한 단편 소설은 처음 써놓은 한 단락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말을 잃어버린 눈사람처럼, 바보처럼 그렇게 소설은 멈춰 서있다. 어떻게 이 글의 멱살을 잡고 나가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질 않는다. 이 소설은 SF이며, 주인공은 눈알이다. 그렇다. 그런데 사람의 진짜 눈알이 아니라, 공장에서 찍어 만든 정교한 인공 눈알이다. 눈알의 주인은 시한부 암 환자이며, 안락사를 선택하기 위해 국경 지대로 떠났다. 그는 떠나기 전에 자신의 인공 눈알을 떼어놓고, 자유를 준다. 하지만 눈알은 주인과의 이별을 감당할 수 없다. 떠나버린 주인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시작한다. 눈알은 과연 주인을 만날 수 있을까?

  도대체 내가 왜 이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운 소설을 왜 쓰려고 하는지 여전히 생각 중이다. 인간과 기계의 결합은 단순한 물리적인 것이 아니며, 감정적이며 유기적인 면이 있음을 말하고 싶기는 하다. 그런데 어떻게 눈알이 여행할 수 있는지 생각을 해보는데, 자꾸만 눈알이 굴러가는 장면만 떠오른다. 눈알은 구르고 구른다. 눈알도 옷을 입고 있다. 은하철도 999의 철이처럼 낡은 모자를 쓰고, 올이 너덜거리는 망토를 두르고 있다. 눈알은 어떻게 이동하지? 글은 거기에서 막힌다.


3.

  동생이 중국 출장에서 사 온 것이라면서, 차통(茶桶) 하나를 두고 갔다. 온통 한문으로 되어있는 그 차통에서 내 눈에 들어오는 한문은 '대홍포(大紅袍)'이다. 나는 차통 뒷면에 가득한 한자들을 사진으로 찍는다. 그런 다음에 구글 렌즈를 켜고, 번역 버튼을 누른다.

  '이 차는 우롱차이며, 품질 수준은 최고급이다. 원산지는 중국 푸젠성(福建省)...'

  나는 찻잎을 들여다본다. 기다랗고 삐죽삐죽한, 검은색에 가까운 찻잎이 비닐봉지에 담겨져 있다. 이 찻잎은 좀 볼품이 없다. 물을 끓이고 차를 우려내어 마셔본다. 밋밋하고 슴슴하다. 별다른 향도 없는 듯하다. 그래, 차는 대만의 우롱차가 제일이지. 나는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면서 진하게 우려낸 보리차 같은 대홍포를 심드렁하게 바라본다.

  그런데 별로 특별한 맛도 없는 것 같은 차에 이상한 매력이 있었다. 이 차를 마시고 나서는, 다른 차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계속해서 이 차만 마시고 있다. 기이한 점은 대홍포의 찻잎에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차를 우려내고 나서 버리는 찻잎은 부드럽게 물크러지기 마련인데, 대홍포의 찻잎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우려내지 않은 마른 찻잎처럼 매우 뻣뻣했다. 찻잎은 찢어지지도, 물러지지도 않았다. 나는 이 보잘것없는 찻잎에서 일종의 근성(根性)을 느꼈다. 그랬다. 이것은 이 차의 성질이며 근원적인 본성이다.

  높은 절벽 위에서 자라는 차나무는 암벽을 타고 흐르는 물을 빨아들이며 자랐다. 대홍포의 중국어 위키 항목에는 이 차가 명나라 황후의 병을 낫게 하였으므로, 황제가 차나무에 붉은 비단옷을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다. 물론 확실한 역사적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아무튼 이 절벽 위의 차 나무는 중국 차의 전설이 되었다. 중국에서 대홍포 차나무의 가지를 꺾어 재배에 성공한 시기는 1980년대였다. 그러니까 오늘날 '대홍포'로 유통되는 모든 차는 그 절벽 위 대홍포의 후손인 셈이다.

  절벽에 뿌리를 내리고, 어떻게든 살아남은 차나무의 기개랄지 근성이 찻잎에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왜 계속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하는가? 이 손톱만 한 찻잎에 있는 도저한 끈기가 과연 나에게는 있는가? 나는 대홍포의 찻잎을 수채에 버릴 때마다 그 생각을 한다. 이번 달이 마감인 SF 단편을 완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글쓰기를 놓지 않겠다는 마음은 높다란 절벽 위, 해가 무지막지하게 내리쬐는 뜨겁고 메마른 그곳에 여전히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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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파헤치고, 잠수를 하다


1.

  여자는 오른손에 돌돌 말린 두툼한 밧줄을, 왼손에는 쇠망치를 들고 있다.
  언제든, 어디로든 달려나갈 준비는 되어있다.


2.

  소설 쓰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올해 나에게 남은 마지막 공모전에 낼 단편을 써야 하는데, 겨우 한 문단을 써놓았을 뿐이다. 분명히 쓰고자 하는 이야기는 머릿속에 있는데,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럴 수도 있나? 소설 쓰는 법을 안다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어쨌든 쓰기는 했다. 그런데 글이 써지질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쩌면 이 소설은 내가 정말로 쓰고 싶었던 글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그런 생각은 핑계가 아닐까? 글이 써지지 않는 것에 대한 그럴듯한 핑계.

  글쓰기도 근육 같은 것이라서, 매일 무언가를 써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일기를 쓴다. 그 일기마저도 쓸 시간이 나질 않아서, 사흘 나흘을 밀렸다가 기억을 더듬어 쓰기도 한다. 때로는 어제, 엊그제의 일을 마치 오늘의 일처럼 복기하고 쓰는 것이 뭔가 나 자신에게도 사기를 치는 것 같다. 일기마저도 진실에서 조금은 삐딱하게 나가버린 느낌.

  '내가 공모전에 당선될 확률을 높이는 방법을 알려줄까요? 미친 것 같은 글을 써보세요. 심사 위원도 사람이에요. 그들이 산더미 같은 지겨운 원고들 읽어낼 생각을 해봐요. 거기에서 미친 척하고 써낸 재미있는 글이 있으면 눈에 확 띄지 않겠냐는 거죠.'

  누군가 공모전 당선 비법이라면서, 조언이랍시고 그렇게 써놓았다. 생각해 보니, 나는 일기마저도 진실의 선에서 조금 삐딱하게 벗어난 것을 견디지 못하는데, 미친 척하고 글을 써내는 것은 더 못할 것 같다. 미쳐버린 글을 어떻게 쓰지? 진짜 미쳐야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닐 테고. 그것도 쓰기의 기술적인 부분이 있나? 공모전 당선자들을 무수히 배출한 어느 글쓰기 강좌에서는 그런 비법들을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전에 꿈을 꾸었다. 현관문 앞에 커다란 종이 박스들이 서너 개 제멋대로 놓여있었다. 문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 박스들 때문에 나갈 수가 없었다. 저걸 어떻게 치울까 하다가 꿈에서 깼다. 나는 그 박스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잘 알고 있다. 버리면 되는데 버릴 수 없는 것들. 글을 쓸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처럼, 꿈속의 박스들이 계속 머릿속에 있다. 

 
3.

  여자의 아들은 19살의 나이에 갑자기 실종되었다. 갱단의 테러와 연루된, 무수한 죽음들 가운데 여자의 아들이 있을 터였다. 여자는 10년 넘게 아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멕시코의 어딘가에서 비밀 매장지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여자는 그곳으로 길을 떠난다. 여자의 오른손에 쥐어진 밧줄은 매장지의 구덩이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몸을 묶는 용도로 쓰일 것이다. 왼손에 든 쇠망치는 땅을 파헤치기 위한 유용한 도구이다.

  어느 사진작가가 그렇게 여자의 고통스러운 삶의 한 단면을 기록했다. 나는 그 사진에서 기이한 감동을 받았다. 죽어버린 것이 확실한 아들에게 제대로 된 무덤을 만들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57세의 어머니. 나는 여자가 밧줄로 몸을 묶고, 시신들로 뒤엉킨 구덩이로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여자에게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이 있다. 필사적으로 땅을 파헤치면서 사라진 혈육의 흔적을 찾으려는 사람들. 그들은 엄청난 두려움과 대면하면서 과거의 상처 속으로 잠수한다.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향해 자신을 내던지는 일. 땅을 파헤치고 잠수를 하듯, 그렇게 써 내려가야지. 이 글을 쓰는 데 영감을 준 사진 속의 주인공은 미국의 공영 라디오 언론 npr.org의 다음 기사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npr.org/2026/03/08/g-s1-112521/photos-international-womens-day-justice-rights-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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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난간(欄干)


1.

  소년은 난간에 매달려 있다.
  자신의 발밑으로 떠내려가는 무언가를 본다.


2.

  학생 시절에 내가 쓴 시는 3.5인치 플로피 디스크(floppy disk) 안에 얌전히 잠들어 있다. 지금의 컴퓨터는 플로피 디스크를 인식하지 못하므로, 이제는 이 시를 읽어낼 방법이 없다. 아마도 그 시의 제목은 '난간(欄干)'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난간'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시 창작 워크숍을 강의하던 시인 선생은 내가 쓴 그 시를 칭찬했다. 그 학기 중에 내가 들은 드문 칭찬 가운데 하나였다. 나머지 나의 시에 대해서, 선생은 침묵했다.

  그 수업을 같이 들었던 A와 B는 이듬해 각각 시와 소설로 등단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이제 나는 그들의 이름이 가끔은 공모전의 심사위원 명단에 있는 것을 확인한다. 내가 왜 좀 더 젊었을 때 글쓰기에 매진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보고는, 새삼 후회하는 마음이 든다. 늦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늦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그 말은 완벽하게 틀린 말이다. 늦은 것은 늦은 것이다. 돌이킬 수 없다.


3.

  눈의 알레르기가 심해져서 안과를 예약하려고 보니, 내 주치의가 병원 홈페이지에서 보이질 않는다. 그 의사는 눈을 참 잘 보았다. 내 생각에 그렇게 실력이 좋은 의사는 보통 그들 세계에서 로컬(local)이라고 부르는 개인 병원에 오래 있질 않았다. 이전의 주치의가 그곳에서 2년을 있다가 대학병원으로 갔듯이, 이 의사도 다른 도시의 대학병원으로 가버렸다. 나는 진료 예약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뭔가 약속 장소에 나갔다가 바람맞은 사람의 심정이 된다. 새로 온 의사는 어떤지 또 기대해 보고, 그 실력을 가늠해 보는 과정은 피곤하다.   

  의사들의 경력을 보다 보면, 뭔가 나름의 정해진 경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로컬이든 대학병원이든, 자신이 추구하는 바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따라가는 트랙이 있다. 나는 그러한 명확한 경로, 트랙, 선형적으로 이어지는 직업의 세계와 글쓰기를 비교해 본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무슨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길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변수가 있다. 의사가 되기 위해 의대에 진학하려고 다들 목을 매는 것처럼, 작가 지망생들은 '등단'에 필사적이다. 등단해야 그래도 '작가'라는 직업적 명함을 내밀 수 있으니까. 그 등단의 경로도 워낙 복마전(伏魔殿) 같은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얼마 전에는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그런 글을 읽었다. 가정주부인 여자가 자비 출판(自費出版)으로 책을 냈다. 수필집인지 시집인지 아무튼,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낸 여자는 그 이후로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작가'로 소개한다고 했다. 어떤 이는 여자에게 멋지다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은 그건 좀 아니잖아, 라고 썼다. 와, 정말 뻔뻔한 사람이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렇다면 우리가 '작가'라고 부르는 직업의 기준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4.

  그 본관 건물은 꽤 낡았다. 공간도 협소했다. 복도는 두 명 정도가 걸어 다니기에 적합한 너비였다. 그 좁고 불편한 건물에 예술학교 사람들이 부대끼면서 공부를 했다. 건물의 가장자리는 옆 건물과의 연결 통로로, 난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난간이라고 해도, 뭔가 위험해 보이고 그런 느낌이라기보다는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학생들은 쉬는 시간이면 그곳에 쏟아져 나와서, 담배를 피우고 누군가에 대해 뒷담화를 했다. 말하자면, 만남의 광장 같은 그런 곳이었다.

  내가 그 당시에 쓴 시는 그 난간을 생각하면서 쓴 시였다. 그 비좁고 낡은 건물은 내가 재학 중에 버려졌다. 나중에 크고 멋진 신축 건물에서 수업을 들었지만, 나는 예전의 본관을 지나다니면서 가끔은 그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일이 지나 건물은 폐쇄되었고, 결국 그 난간에도 다시는 가볼 수 없었다.

  덥고 축축한 7월의 대기가 흐르는 그 난간에 문득 다시 서보고 싶어졌다. 사실, 내가 쓴 시의 화자가 소년이었는지, 소녀였는지, 늙은이였는지, 청년이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누가 되었든, 그는 그 난간 아래로 무언가가 떠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가버린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슬프거나 괴롭지는 않다. 소망하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없이, 앞으로도 그냥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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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행방


1.

  고양이를 찾습니다. 12살. 복도에서 잃어버렸고, 이름은 ***. 사진 속의 고양이를 보신 분은 아래 전화번호로 연락주세요. 소정의 사례금도 잊지 않겠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쪽에 붙여진 전단은 한 달째 그대로다. 아직도 찾지 못했군. 고양이가 12살이면, 사람으로 치면 환갑쯤 되나. 죽기 전에 뭔가 자유를 찾아 떠난 것 같기도 하고. 고양이는 영역 동물인데, 저 늙은 회색 고양이가 이 근방 아파트의 고양이들과 어떻게 부대끼며 살 수 있을까? 밥은 굶지 않을 거야. 고양이 사료 챙겨주는 캣맘이 한둘이 아니니까.

  나는 고양이가 집이 답답한 나머지 가출을 한 것인지, 아니면 어쩌다가 열린 문틈으로 나가서 결국 돌아오지 못하는 것인지 생각을 해본다. 하긴, 내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가끔 인근 공원에서 목이 부러진 비둘기 사체를 볼 때가 있는데, 그곳에 살고 있는 고양이들의 짓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나에게 그 공원의 고양이는 포악한 들짐승으로 생각될 뿐이다. 그런 고양이처럼 집을 나간 ***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12살이면 살 만큼 살았으니, 묘생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2.

  "그러니까 이제는 말이야. 아저씨 죽을 날 받아놓고, 가족들 모두 기다리고 있는 거야. 남자 간병인 들여서 아저씨 돌보게 한 게 벌써 한 달이네. 매일 아침 큰딸이 가서 지 아버지 얼굴 보고 오기는 하지. 나도 기운이 너무 빠져서, 밥도 못 먹고 있어."

  팔순이 된 아주머니의 갈라진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아주머니는 어머니의 아주 오랜 친구이다. 아주머니의 남편은 뇌종양 말기로 임종을 앞두고 있다. 나는 생판 모르는 간병인과 하루를 보내는 그 아저씨의 마지막 날들에 대해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식들은 타지에 있고, 늙은 배우자는 간병을 할 여력이 없다. 문득, 9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그래도 잘 지내다 가셨구나 싶다. 그때는 어머니가 1년 가까이 간병하셨다. 어머니의 체력이 그나마 받쳐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생을 마감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가끔, 돌아가신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지 생각해 본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디에 계시겠지. 어떤 한 자리.  

3.

  '새끼 참새를 집 앞에서 주웠어요. 자, 이것 보세요. 엄지손가락 2개 정도만 해요. 따뜻한 걸 보니 살아있어요. 근데, 내 아내는 새라면 질색해요. 집에 가져갈 수도 없고. 그래서 오다가 경비실에 들러서 그냥 주고 왔어요. 경비 아저씨가 황당한 표정을 짓더라고요.'

  남자는 커뮤니티의 자유게시판에 그런 글을 올렸다. 정말로 사진 속 새끼 참새는 밤톨만 했다. 나는 그 참새를 건네받은 경비가 어떻게 했을지를 생각해 본다. 무슨 야생동물 구조협회 같은 데다 신고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냥 근처 화단에 놓아두지 않았을까. 무슨 희귀종 새도 아니고, 참새는 아주 흔한 새다. 그러니 그런 참새 새끼 한 마리 죽는다고 해도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다.

  살았을까, 죽었을까? 그래도 그 밤톨만한 새끼 참새가 이틀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눈을 감고,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이는 새끼 참새. 그것은 마치 국민학교 6학년 때, 학교 앞에서 산 병아리 2마리 가운데 죽어버린 한 마리와 닮았다. 나머지 한 마리는 붉은 볏이 선명해질 때까지 살아남았다. 할머니는 사료를 사다가 그 닭을 베란다에서 열심히 키우셨다. 그리고 나중에 어머니는 그 닭을 시장 닭집에서 손질해 오셨다. 닭백숙은 식탁에서 오랫동안 식은 채로 남아 있었다.

4.

  조그만 부엌 창문으로 보이는 오래된 벚나무가 있다. 이 아파트가 지어질 때 심은 35년 된 벚나무. 어제 저녁에 식탁에 앉아 있는데, 밖에서 이상한 기계 소리가 났다. 가만히 들어보니 매미 우는 소리였다. 올해 처음으로 듣는 매미 소리였다. 그렇군. 매미가 울 때가 되었나 보군. 나는 저 매미가 올여름 맹렬히 짝을 찾아 울고, 그렇게 짝을 찾고, 자기 후손을 남기고 죽는 그리 멀지 않은 여름의 마지막 날에 먼저 가본다. 그 매미의 새끼가 땅속에 있다가 다시 기어 나와 저 나무에서 울 때, 몇 년 뒤에 내가 이 집에서 계속 살고 있을지를 생각한다. 모를 일이다. 지겹고도 낡은 집. 깨끗하고 좋은 집은 비싸다.

  엊그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어느 증권사 트레이더가 자신의 투자 대박 이야기를 가만히 털어놓았다. 최근의 호황 장에서 큰 것 세 장을 벌었다고 했다. 나는 큰 것 세 장이 얼마인가 생각한다. 3억인가? 트레이더로 구를 만큼 굴렀다고 하니, 3억은 아닌가? 30억? 나는 매일 홈쇼핑 앱에 출석 도장을 찍는데, 찍을 때마다 3원이 찍힌다. 뭔가 매우 구차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걸 한 달 채우면 천 원이 주어진다. 돈 천 원이 어디야? 그것마저도 어쩌다 하루 빠져서 받지 못하게 될 때면, 잠깐이라도 자책하는 마음이 된다. 왜 그 하루를 빼먹은 거지?


5.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종이는 붙어있다. 나는 고양이의 주인이 이제는 그 전단을 떼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볼 때마다 그 고양이의 행방이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그 고양이처럼 궁금해지는 것들이 나에게는 있다. 젊은 날에 불운하게 죽은 K가 만들지 못한 영화는 어떤 것이었을까? 병고에 오래 시달리다 외롭게 세상을 뜬 H가 더 써내지 못한 글과 평론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도 나의 아버지가 어딘가에 계시듯, 내가 알지 못한 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만들지 못했던 그 어떤 것들의 행방을 찾아 나서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에게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어쩌면 그 행방을 찾아 떠나는 여정과도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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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이 끝나고


1.

  아침에 눈이 꺼끌거려서 거울로 들여다보니 눈썹 하나가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보였다 안 보였다 하니까 어떻게 뺄 방도가 없다. 사람의 안구 안쪽은 막혀있으니까, 이 눈썹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기분이 찝찝할 뿐이지. 이런 기분은 내가 공모전에 응모하고 난 뒤에 느끼는 기분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작년부터 쓴 단편들을 공모전에 냈다. '당선'이란 로또 복권보다 더한 극강의 운이 작용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본심에라도 올랐으면 이건 뭐 약간의 희망이라도 있겠다 싶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최근 연도의 단편 당선작들을 보면 내가 쓰는 글과의 차이가 분명해진다. 그건 어떤 면에서 스타일이나 소재의 차이가 아니라, 세대 차이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그 단편들을 읽으면서, 그것들을 이해하기에는 내가 늙어버렸다고 생각했다. 2020년대 한국 단편의 주요한 경향으로 지적되는 미문(美文)과 지나친 묘사에 대한 집착, 그리고 안온하고 다정하며 무해한 이야기(속칭 안다무)는 나에게 낯설고 짜증스러운 것이다.

  나는 그런 글을 써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공모전의 심사 위원인 소설가와 평론가들이 그런 글들이 좋다고 뽑는다. 그렇다면 방법은 두 가지이다. 그 스타일의 범주에 내 글을 욱여넣고 어떻게든 써내든가, 아니면 그냥 내 글을 써내는 것. 이건 시를 2년 동안 썼을 때의 좌절감과 당혹스러움과도 맞닿아 있다. 나는 지금의 현대 한국 시를 읽으면서 좋다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시들이 좋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시의 세계로 시 쓰기가 좋다고 무작정 직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취미로서의 시 쓰기는 가능하겠지만.

  단편 쓰기는 시 쓰기의 서사를 확장할 필요에서 시작되었다. 소설가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이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좋은 소설에 대한 가장 명확한 진리는 그 누구도 그것을 쓰는 법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내가 좋아하는 그런 뛰어난 작가도 좋은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말하자면 소설 쓰기는 그냥 맨땅에 부딪히며 구르면서 자기 스스로 배워가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누군가 깨달은 그 방법은 나의 것이 아니며, 어떻게 배운다고 되는 문제도 아니다. 쓰다 보면 뭐가 보이는 것도 같은데, 조금 있으면 그게 뭐였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러니 그냥 써나가는 방법밖에는 달리 무슨 수가 없다. 이렇게 써나가는 과정에서 내가 어떤 문체를 쓰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주제에 관심이 있는지 알게 된다. 길지 않은 9개월 습작 기간의 수확은 아마도 그런 것이다.

3.

  한국의 소설은 일반적으로 읽히는 대중 소설, 문예지와 문학상 위주로 돌아가는 순수 문학 소설, 그리고 압도적인 비중을 보여주는 웹소설로 대강 나눌 수 있다. 신춘문예와 유명 문학상은 순문 출판 시장의 토대가 된다. 그런데 이 출판 시장은 심각하게 쪼그라든 상태이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중환자인 한국 문학에 산소호흡기 겨우 달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회전문처럼 이 시장은 작가, 평론가, 교수, 작가 지망생, 문학 출판사, 국가 지원금을 관리하는 관련 단체들의 '그들만의 리그'에서 돌아갈 뿐이다. 분명하게도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더이상 한국 문학을 읽지 않는다. 이것은 스마트폰의 등장이라는 시대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의 유튜브와 쇼츠에 빠져있고, 책은 읽지 않는다. 근원적인 이유는 한국 문학에 있다. 한국 독자들에게 한국 문학은 그 어떤 감동과 재미를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흥미를 잃고 너무나 먼 곳으로 가버렸고 다시 돌아올 생각도 없다.

  웹툰과 웹소설로 대변되는 시장은 철저히 경제적인 관점으로 돌아간다. 그런 즉물적인 만족감을 주는 콘텐츠에 대한 대중의 욕구가 엄청난 시장을 창출해 낸다. 언젠가 웹소설 작가가 자신의 분기별 소득을 인증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억대의 금액이었다. 그걸 올린 이는 자신을 대단한 '작가'라는 이름으로 내세우기는 어렵지만, 자신의 글을 읽고 감동받고 응원해 주는 독자들이 있어서 힘이 난다고 썼다.

  그런 웹소 작가와는 달리 순문 작가가 자신의 글만으로 먹고 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지만 문학은 결코 돈이 되지 않는다. 잘나가는 작가라고 해도 인세 수입은 보잘것없어서, 이런 저런 강의와 기고를 하고 다른 부업을 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내 기억 속에 작가가 자신의 글로 먹고살았던 대표적 인물이라면 이문열이었다. 이문열의 책은 웬만한 집의 책장에 다 꽂혀 있었으니까. 이제 그런 시절은 오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은 더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아니, 주식 책은 불티나게 팔리지만 문학책은 더럽게도 팔리지 않는다. 시는 말할 것도 없고 소설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1쇄는 1000부 정도였는데, 이제는 1쇄를 찍는다고 하면 200부에서 300부를 찍는다.

  문학 출판사들은 그래도 어떻게든 돈이 될만한 책을 펴내는 것에 대한 욕망이 없을 수가 없다. 출판사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나마 한국 문학 시장을 지탱하는 것이 2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여성 독자들이다. 그 여성 독자들의 구매 잠재력을 보여준 것은 2016년에 발행된 '82년생 김지영'이었다. 한국 소설에서 남성의 목소리, 관점을 지워가기 시작한 분기점이 되는 소설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남성 작가들이 더이상 적극적으로 순수 문학 시장에 들어오지 못하고, 웹소설 시장을 대안적으로 선택하는 것에서도 입증된다.

  지난해 어느 문예지의 대담 글은 이제 작가가 되려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페미니즘을 장착하고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 말이 지닌 강압성이 심히 우려스럽다. 페미니즘을 기본적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그 어떤 글은 도태되어 마땅하다는 뜻인가? 젊은 여성 독자들의 입맛에만 맞는 글만을 일방적으로 양산해 내는 문학적 생태계는 건강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한국 문학은 다양성 측면에서 터무니없을 정도로 허약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한국의 추리 문학 시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추리 소설을 쓰는 작가가 거의 없다. 출판사는 일본의 추리 문학을 열심히 번역해다가 내다 팔 뿐이다. 그나마 요새 조금씩 시장이 커가는 SF 문학 시장이 희망의 빛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다. 그리고 그것은 SF 소설 공모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모전과 출판사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 공명하는 관계이다.

4.

  이제 올해 내가 소설을 내려는 공모전은 하나가 남아 있다. 그것도 단편이다. 그 단편을 끝내고 나면, 장편을 쓸 생각이다. 그 장편도 공모전에 낼 것이고, 그것이 떨어진 다음에도 무언가를 쓰고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작가 지망생이 자신의 글을 세상과 만나게 할 방법은 결국 공모전밖에 없다. 엄밀히 말해서 투고나 자비 출판은 대안이 되지 못한다. 그 방법으로 글이 독자를 만날 가능성은 영에 가깝다. 문학 커뮤니티의 누군가가 그렇게 한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공모전은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 작가 지망생의 유일한, 그러나 절망적으로 막혀있는 출구로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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