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전이 끝나고
1.
아침에 눈이 꺼끌거려서 거울로 들여다보니 눈썹 하나가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보였다 안 보였다 하니까 어떻게 뺄 방도가 없다. 사람의 안구 안쪽은 막혀있으니까, 이 눈썹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기분이 찝찝할 뿐이지. 이런 기분은 내가 공모전에 응모하고 난 뒤에 느끼는 기분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작년부터 쓴 단편들을 공모전에 냈다. '당선'이란 로또 복권보다 더한 극강의 운이 작용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본심에라도 올랐으면 이건 뭐 약간의 희망이라도 있겠다 싶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최근 연도의 단편 당선작들을 보면 내가 쓰는 글과의 차이가 분명해진다. 그건 어떤 면에서 스타일이나 소재의 차이가 아니라, 세대 차이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그 단편들을 읽으면서, 그것들을 이해하기에는 내가 늙어버렸다고 생각했다. 2020년대 한국 단편의 주요한 경향으로 지적되는 미문(美文)과 지나친 묘사에 대한 집착, 그리고 안온하고 다정하며 무해한 이야기(속칭 안다무)는 나에게 낯설고 짜증스러운 것이다.
나는 그런 글을 써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공모전의 심사 위원인 소설가와 평론가들이 그런 글들이 좋다고 뽑는다. 그렇다면 방법은 두 가지이다. 그 스타일의 범주에 내 글을 욱여넣고 어떻게든 써내든가, 아니면 그냥 내 글을 써내는 것. 이건 시를 2년 동안 썼을 때의 좌절감과 당혹스러움과도 맞닿아 있다. 나는 지금의 현대 한국 시를 읽으면서 좋다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시들이 좋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시의 세계로 시 쓰기가 좋다고 무작정 직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취미로서의 시 쓰기는 가능하겠지만.
단편 쓰기는 시 쓰기의 서사를 확장할 필요에서 시작되었다. 소설가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이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좋은 소설에 대한 가장 명확한 진리는 그 누구도 그것을 쓰는 법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내가 좋아하는 그런 뛰어난 작가도 좋은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말하자면 소설 쓰기는 그냥 맨땅에 부딪히며 구르면서 자기 스스로 배워가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누군가 깨달은 그 방법은 나의 것이 아니며, 어떻게 배운다고 되는 문제도 아니다. 쓰다 보면 뭐가 보이는 것도 같은데, 조금 있으면 그게 뭐였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러니 그냥 써나가는 방법밖에는 달리 무슨 수가 없다. 이렇게 써나가는 과정에서 내가 어떤 문체를 쓰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주제에 관심이 있는지 알게 된다. 길지 않은 9개월 습작 기간의 수확은 아마도 그런 것이다.
3.
한국의 소설은 일반적으로 읽히는 대중 소설, 문예지와 문학상 위주로 돌아가는 순수 문학 소설, 그리고 압도적인 비중을 보여주는 웹소설로 대강 나눌 수 있다. 신춘문예와 유명 문학상은 순문 출판 시장의 토대가 된다. 그런데 이 출판 시장은 심각하게 쪼그라든 상태이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중환자인 한국 문학에 산소호흡기 겨우 달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회전문처럼 이 시장은 작가, 평론가, 교수, 작가 지망생, 문학 출판사, 국가 지원금을 관리하는 관련 단체들의 '그들만의 리그'에서 돌아갈 뿐이다. 분명하게도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더이상 한국 문학을 읽지 않는다. 이것은 스마트폰의 등장이라는 시대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의 유튜브와 쇼츠에 빠져있고, 책은 읽지 않는다. 근원적인 이유는 한국 문학에 있다. 한국 독자들에게 한국 문학은 그 어떤 감동과 재미를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흥미를 잃고 너무나 먼 곳으로 가버렸고 다시 돌아올 생각도 없다.
웹툰과 웹소설로 대변되는 시장은 철저히 경제적인 관점으로 돌아간다. 그런 즉물적인 만족감을 주는 콘텐츠에 대한 대중의 욕구가 엄청난 시장을 창출해 낸다. 언젠가 웹소설 작가가 자신의 분기별 소득을 인증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억대의 금액이었다. 그걸 올린 이는 자신을 대단한 '작가'라는 이름으로 내세우기는 어렵지만, 자신의 글을 읽고 감동받고 응원해 주는 독자들이 있어서 힘이 난다고 썼다.
그런 웹소 작가와는 달리 순문 작가가 자신의 글만으로 먹고 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지만 문학은 결코 돈이 되지 않는다. 잘나가는 작가라고 해도 인세 수입은 보잘것없어서, 이런 저런 강의와 기고를 하고 다른 부업을 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내 기억 속에 작가가 자신의 글로 먹고살았던 대표적 인물이라면 이문열이었다. 이문열의 책은 웬만한 집의 책장에 다 꽂혀 있었으니까. 이제 그런 시절은 오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은 더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아니, 주식 책은 불티나게 팔리지만 문학책은 더럽게도 팔리지 않는다. 시는 말할 것도 없고 소설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1쇄는 1000부 정도였는데, 이제는 1쇄를 찍는다고 하면 200부에서 300부를 찍는다.
문학 출판사들은 그래도 어떻게든 돈이 될만한 책을 펴내는 것에 대한 욕망이 없을 수가 없다. 출판사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나마 한국 문학 시장을 지탱하는 것이 2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여성 독자들이다. 그 여성 독자들의 구매 잠재력을 보여준 것은 2016년에 발행된 '82년생 김지영'이었다. 한국 소설에서 남성의 목소리, 관점을 지워가기 시작한 분기점이 되는 소설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남성 작가들이 더이상 적극적으로 순수 문학 시장에 들어오지 못하고, 웹소설 시장을 대안적으로 선택하는 것에서도 입증된다.
지난해 어느 문예지의 대담 글은 이제 작가가 되려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페미니즘을 장착하고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 말이 지닌 강압성이 심히 우려스럽다. 페미니즘을 기본적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그 어떤 글은 도태되어 마땅하다는 뜻인가? 젊은 여성 독자들의 입맛에만 맞는 글만을 일방적으로 양산해 내는 문학적 생태계는 건강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한국 문학은 다양성 측면에서 터무니없을 정도로 허약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한국의 추리 문학 시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추리 소설을 쓰는 작가가 거의 없다. 출판사는 일본의 추리 문학을 열심히 번역해다가 내다 팔 뿐이다. 그나마 요새 조금씩 시장이 커가는 SF 문학 시장이 희망의 빛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다. 그리고 그것은 SF 소설 공모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모전과 출판사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 공명하는 관계이다.
4.
이제 올해 내가 소설을 내려는 공모전은 하나가 남아 있다. 그것도 단편이다. 그 단편을 끝내고 나면, 장편을 쓸 생각이다. 그 장편도 공모전에 낼 것이고, 그것이 떨어진 다음에도 무언가를 쓰고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작가 지망생이 자신의 글을 세상과 만나게 할 방법은 결국 공모전밖에 없다. 엄밀히 말해서 투고나 자비 출판은 대안이 되지 못한다. 그 방법으로 글이 독자를 만날 가능성은 영에 가깝다. 문학 커뮤니티의 누군가가 그렇게 한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공모전은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 작가 지망생의 유일한, 그러나 절망적으로 막혀있는 출구로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