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동


  허리가 직각으로 굽은 할머니가 장바구니 카트를 힘겹게 끌고 가는 것이 보였다. 엄마를 집에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노인은 엘리베이터 앞의 의자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시장에 봄동이 나와서..."

  노인은 우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몇 층 사세요?"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려고 노인에게 물었다. 하지만 노인은 대답 대신에 장애인 전용 버튼의 숫자를 얼른 눌렀다. 8층이었다.

  "말할 기운도 없어."

  노인의 카트에는 봄동과 함께 여러 가지 채소가 들어있었다. 그 무거운 것을 끌고 어떻게 온 것일까? 기운이 너무 없는지, 노인의 말소리는 물크러지고 곰팡이가 핀 귤 같았다.

  "조심해서 가세요."

  지팡이가 없으면 걷지를 못하는 엄마와 함께 내리면서 나는 인사했다. 집에 들어온 나는 TV를 켰다. 케이블 채널을 빠르게 돌린다. 엄마가 좋아하는 '현장르포 특종세상'이 나온다.

  "이거 좀 보고 계세요."

  "너는 어디로 가는 거냐? 넷째는 언제 온다니?"

  나는 엄마가 말하는 넷째가 어디에 사는지 알지 못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네 마트에 들렀다가 봄동을 보았다. 한 봉지에 3천 원이었다. 비싸지 않은 것 같아서 샀다. 그런데 나는 봄동을 어떻게 요리하는지 모른다. 엄마는 나에게 요리라는 것을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봄동은 보통 겉절이를 해서 먹지. 나의 부엌에는 고춧가루도 없다. 언제부터인가 매운 것을 조금만 먹어도 속이 쓰렸다. 어쨌든 봄동의 잎을 톡, 톡 뜯어내었다.

  다음날, 엄마에게 점심을 차려줄 때 그 봄동을 식탁에 내놓았다.

  "달구나. 달아."

  나는 8층의 노인이 앞으로 봄동을 먹을 수 있는 날들에 대해 문득 생각해 보았다. 노인은 팔순을 쉬이 넘긴 것처럼 보였다. 굽은 허리로 장을 힘겹게 봐올 정도면, 분명히 혼자서 살고 있을 것이다. 16평의 이 낡은 복도식 아파트에는 독거노인들이 많이 산다. 나는 그래서 이 아파트를 노인동이라고 부른다.

  엄마의 집을 나올 때, 아파트 앞에는 익숙한 녹색의 목욕 차량이 보였다. '효녀 심청이 목욕 서비스'라고 커다란 글씨가 박힌 차. 차에서는 희뿌연 오수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젠가 엄마는 그 차를 보고는, 자신의 부모를 남한테 목욕시키게 하는 자식들이 불효막심하다면서 분개했다. 나의 오른팔은 테니스 엘보에 시달려서 고무팔이나 다름없다. 나는 그 목욕 차량을 지나오면서 아픈 오른팔을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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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이어서 시집 2부를 올립니다. 



탐구생활(探究生活) 1부 링크

https://blog.aladin.co.kr/sirius7/17025932

 

 


2부     명랑(明朗)  



명랑(明朗)


사다새


희망(希望)


빗방울


상괭이


오늘의 날씨


거짓말


월매(月梅) 정육점


눈물길


그렇게


건너가다


싸구려에 대한 명상


빨강


숙이 아줌마


면도날


납골당(納骨堂)


다시마












명랑(明朗) 



이리 오너라


명랑을 가만히 불러낸다

명랑은 거친 맨발에 민머리를 하고 있었다

배움은 짧았으나 성품은 유순하였다

눈은 매우 가늘어서 늘 세상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명랑은 타고나는 것입니다


명랑에게 명랑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물으니

명랑은 나에게 그렇게 답하였다


명랑이 사는 집의 대문은

녹이 슬어서 마치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명랑은 늘 쪼들렸다

그래도 조그만 입으로 웃음을 떨어뜨리면서

칠칠맞지 못하게 돌아다녔다


한번은 명랑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왜 울고 있느냐 물으니

갖고 있는 명랑이 다 바닥이 나서

더는 먹을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나는 명랑에게 딱히 줄 만한 것이 없어서

피(粥)죽을 한 그릇 쑤어 주었다

명랑은 피죽이 붉은 색이 아니라며 신기해 하였다

명랑은 피(粥)를 한번도 본 적이 없으므로

어리석게도 그리 말하였던 것이다


까끌까끌한 알갱이가 가난한 손톱 같아요


마침내 명랑은 죽그릇을 비우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사다새 



죽은 고등어를 먹으며 언제까지 살아야 할까

물음표는 꼬리를 질질 끌면서 창살을 빠져나간다

일부러 울지 않은 것이 몇 해인지 잊어버렸다


이 동물원의 지하에는 하늘다람쥐가 산다

비막(飛膜)이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다람쥐가 물었다


다시, 날아갈 수 있을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육사의 손을 심심해서 쪼아버렸더니

부리를 망치로 부숴버렸다

마시는 물이 피가 되어 흐른다


그 사막에는 피를 마시고

피어나는 들꽃들이 있다

다리가 부러진 친구들이 모두 떠난 곳


조각난 부리를 그러모은다

죽은 표범의 뼈바늘로 정성스럽게 꿰맨다

하늘다람쥐의 갈라진 옆구리도 이어 붙인다

새벽의 모래가 스르륵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희망(希望) 



흐린 표정을 지으며 너는 서 있다

너의 머리 위로는 작은 구름이 떠다닌다

언제든 자그마한 빗방울이 내릴 수 있는


너를 간절히, 여러 번 부른다


너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보았는데

어쩌면 울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너에게 솔기가 닳은 행주를 건넨다

몇 번 쓰다 버릴 행주였지만

정성스럽게 감침질을 한 행주

죽어서 버려야만 하는 것들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습관이 생겼다


너는 아픈 허리를 조심스럽게 펴고

허우적거리며 머리의 구름을 밀쳐낸다

단단한 초록색의 구름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꼬리가 잘린 도마뱀이 춤을 춘다





























빗방울 



세탁실에서는 비가 샌다

빗방울이 구불구불 기어다닌다


나는 빗방울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빗방울이 내 손목을 꺾어버렸다


빗방울에 얻어맞은 세탁기가 소리를 질렀다

꺼억꺼억, 다 죽어갈 것처럼

세탁기는 사실 죽을 때가 되었다

이십 년을 살아온 세탁기는

요새 쇳조각을 뱉어내고 있다


빗방울이 삐딱하게 웃으며

죽어보라 말한다


오늘도 뜨개질을 한다

빗방울의 기대가 어긋난다






























상괭이 



어린 상괭이는 부둣가에 드러누워 있었다

허여멀건한 배를 드러내고는

아기 손톱같은 이빨에는 피가 흥건했다


이런 게 진짜야


사진 선생은 연달아 셔터를 눌러대었다

학생들은 진저리를 치며 자리를 떴다

그 부둣가에는 도무지 사랑할 만한 것이 없었다

어부들은 아침부터 사진 찍는다고 욕설을 퍼부었고

선착장의 인부는 바다를 향해 오줌을 내갈겼다


사각의 프레임 밖에서 버려지고 잊혀진 것들

상괭이가 나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차마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오늘 아침, 상괭이가 웃으며 걸어나왔다

스무 번의 여름이 지나갔다





























오늘의 날씨 



어제의 일기장을 펴고

오늘의 날씨를 적는다

키보드에 커피를 쏟았다

킬리만자로의 농부가 하늘을 본다

커피나무에서 흉년을 수확한다

아직은 불모(不毛)의 계절

오지 않은 즐거운 일기를 기다린다 





































거짓말 



거짓말을 잘하는 비결은

거짓말을 거짓말처럼 하는 것이다


버마비단뱀을 목에 칭칭 두르면

멋진 목도리가 된다

숨이 막히지 않을 정도로만 두르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매끄럽게 속아넘어갔다


진짜겠지


어제는 아침 일찍 커튼을 열자

버마비단뱀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월매(月梅) 정육점 



아주머니는 왼손에 검은색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고기 자르는 기계에 손가락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의 정육점은 엄마의 단골 가게였다


월매(月梅) 정육점


작달막한 체구에 늘 웃는 얼굴이었던 아주머니의 가게는 잘 되었다

아주머니의 남편도 정육점에서 같이 일했지만

내 기억 속에 늘 고기를 썰어서 내어주던 사람은 아주머니였다

가끔은 아주머니의 이름이 월매라고 생각했다


정육점은 아주머니의 살림집과 이어져 있었다

한번은 엄마가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작은 방 문턱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일고여덟 살 된 아이 하나는 TV 만화를 보고 있었고,   

내 또래일지 아니면, 좀 어리게 보이는 형은

방바닥에 엎드려 공책에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어느 날, 아주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육점을 홀로 꾸려가던 아저씨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

내가 중학생 때의 일이다


오늘 아침, 식탁에 가만히 앉아있는데

월매 아주머니가 건너편에 와서 앉았다

아주머니의 잃어버린 손가락에

분홍색 손톱이 잘 자라고 있었다






















눈물길 



다운 증후군을 앓는 늙은 아가씨가

뽀로로 음료수를 마시고는

커다란 콘칩 봉지를 웃으며 뜯는다

너무나 새까맣게 염색을 한 엄마는

딸이 건넨 음료수병을 버리러 일어선다


불행의 얼굴은 판박이처럼 비슷하다

나는 아픈 왼쪽 얼굴을 쓰다듬으며 걷는다


집으로 오는 늦은 엘리베이터에서

9층의 여자와 마주친다

여자에게는 자폐증을 앓는 아들이 있다

여자는 나즈막하게 노래를 부른다


오 솔레 미오(O Sole Mio)


나폴리의 태양은 울고 싶지만

그 눈물길은 막혀있다

여자는 막힌 눈물길을 우회하여

가끔 컹컹 짖는 흰색의 강아지와

행복한 저녁 산책길에서 돌아온다



























그렇게 



엄마는 그릇을 옷장에 넣어둔다

엄마는 자식이 넷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 가운데 하나가 어디 사는지 모른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엄마가 그렇게 되어서


그렇게는 참으로 기이한 말이다

그렇게 인생이 흘러가지 않는 것이 좋다

아주머니의 딸은 그렇게 납골당에 있다


그의 우울증은 오래되었다

나는 그가 잘 버텨내길 바란다

평범하지 않게 그렇게

































건너가다 



그곳을 건너가지 못했다

발만 동동 구르면서

붉은 눈의 항구가 묻는다

건너갈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냐고


늙어버린 배는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끝이 갈라진 노를 힘겹게 저으며 떠난다

밤은 병든 푸른색이다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민머리 독수리가 굽은 등을 쪼아댄다

먼저 죽은 이의 퉁퉁 부은 얼굴이

뱃머리를 붙잡고 울고 있다


후회하는 돛이 세 갈래로 찢어지며

왼쪽 팔에 기다란 흉터를 새긴다

울음이 얼어붙고 말문이 닫힌다

멀었던 귀가 들리기 시작한다


물이 노래한다

물을 건너간다


























싸구려에 대한 명상 



싸구려 복숭아를 샀다

조막만 한 게 단맛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괜찮아, 설탕을 좀 얹어서 먹으면

올해는 복숭아 풍년이라는데

또 싸구려를 사고 말았어


싸구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왜 이렇게 신맛이 많이 날까

신맛의 커피를 혐오한다

커피는 쓴맛, 기름진 쓴맛이 나야 하거늘


싸구려 남방을 입고 나간다

4천 원짜리, 메이드 인 방글라데시

남방을 입을 때마다

무너진 봉제 공장에 깔려 죽은 

먼 나라의 재봉사들이 생각나

언젠가 내가 입을 수의(壽衣)를 입듯

경건한 마음으로


오래전, 싸구려 비디오 가게에서

희귀 영화를 찾아다녔어

중년의 주인 남자는

친구들과 포커를 치고 있었지


타르코프스키(Tarkovsky)의 '희생'이 있나요?


그런 거는 우리 가게에 없어

비웃는 푸른 돛 문신의 팔뚝

불타는 희생의 나무



















빨강 



빨강의 바다로 간다

손이 비대하게 커진 인간들이

타자기를 두들기며 끊임없이 구토하는

더러운 빨강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픈 빨강의 반점이 웃으며 물었다

칼라민을 아무렇게나 발라주고는

빨강의 입을 조심스럽게 틀어막았다





































숙이 아줌마 



숙이 아줌마는 엄마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아줌마는 교육자 집안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자랐는데,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는 바람에 늘 쪼들리며 살았다 

아줌마는 남편을 돕기 위해 이런저런 부업을 하곤 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엄마를 따라 아줌마의 문구점에 갔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아줌마는 돈을 좀 벌어보겠다고 명리학(命理學)을 배우러 다녔다 

내가 재수생(再修生) 때의 일이다

아줌마는 이제 막 학력고사를 치룬 내 사주를 봐주었다

나는 무언가 좋은 말을 듣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나의 기대에 걸맞게 아줌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 너는 정말로 돈을 많이 벌 거야 엄청난 산처럼,

그렇게 넌 돈에 둘러 쌓여있을 거야


숙이 아줌마는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아줌마는 고혈압이었는데도 혈압약을 먹지 않았다

사이비 도사가 그런 약을 먹으면

일찍 죽는다고 한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서른 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버터를 사야지,

내 얼굴에는 기름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면도날 



면도날이 팔랑거리면서 내려온다


면도날 위의 삶

불운은 불공평하게 기울어져 있고

뒤뚱거리며 걷다가 결국 쏟아진다


색색의 조각난 면도날은

아스팔트 바닥에 짓이겨져

불그죽죽한 염료를 내뿜고

더러는 누군가의 머리에 내려앉아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돌아간다


휘청거리면서 면도날 위를 걷는다

저린 왼쪽 손으로 면도날을 쥐었다

면도날이 조용히 웃었다

































납골당(納骨堂)



네 아빠는 명이 짧았지 


엄마는 납골당에 올 때마다 그 말을 한다


비쩍 마른 몸으로 흔들흔들 그네를 타던 아빠를 기억한다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들

옷장 속에서 해골이 비소를 들이키며

어떤 인생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준다

 

나는 옷장의 문을 열었다가 가만히 도로 닫았다





































다시마 



엄마의 집 찬장에서 다시마를 발견했다

몇 년을 묵은 것 같은, 아주 잘 마른 다시마

나는 다시마를 물에 불린다

푸른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요새는 왜 그렇게 흰색 차들이 많으냐?


모두들 흰색의 세계로 도망치고 싶은 것이겠죠

나는 같은 대답을 매일 엄마에게 들려준다


다시마의 세계는 갈색이고 눈물이며 그래서 짠맛이 난다

엄마의 잃어버린 바다와 다시마가 끈적거리는 시간을 천천히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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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제목:  탐구생활(探究生活) 




1부     파동(波動)  



파동(波動)


출근(出勤)


39층


교차로


교양(敎養)


연습생(練習生) 


모서리


마두금(馬頭琴)


여름, 오후 4시


노란콩


가려운 어깨


여학생(女學生) 


참기름


곰 인형


꿈의 자객(刺客)













파동(波動) 



윗집의 노인은 초능력이 있어요

파동을 만들어서 공격하는 능력이죠

내가 움직일 때마다 파동이 날 때려요

나는 집에서 다리를 절며 걸었고

입술이 제멋대로 실룩거리며

왼쪽 어깨가 가렵기 시작했어요


병원에 가보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그 사람들은 나에게 구속복(拘束服)을 입히고

실험실에 보내어 나의 뇌를 가르겠지요


노인의 A 파동이 천장에서

노인의 B 파동이 하수구에서

두 개의 파동이 새로운 중첩을 만들어 내는데

나는 이곳 아니면 저곳에

잃어버린 몸뚱이를 찾아서

하루 종일 집안을 헤매고 있죠


당신은 파동이 떠도는 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삶도 소문일 뿐이죠

보잘것없고 위대한 소문

당신은 실험해 본 적이 없죠

그러니 증명할 수도 없는 거에요

























출근(出勤) 



발목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날이 있다

한 며칠 절름거리면 뼈가 조금씩 자란다


컴퓨터를 켜고 녹음기의 붉은 버튼을 누른다

새빨간 눈의 여자가 녹음기를 들고 덤벼든다

어떻게든 자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렇게나 마침표를 찍는 인간들

마침표는 쉼표가 아닌데도

그걸 찍는 것을 멋이라고 생각하는 머저리들

도대체 어떻게 이 회사에 들어왔을까

의문이 뭉게뭉게

먹구름이 곧 쏟아지는 소나기로


팀장님은 좀 싸가지가 없네요


점심을 먹다가 체했다

속이 더 쓰릴 줄 알면서도

커피를 들이킨다

















39층


39층의 방화문은 열리지 않는다
39층 이하의 사람들은 옥상으로 갈 수 없다

며칠 전에는 아파트의 정기 소독이 있었다
허름한 옷차림의 노란 염색 머리 여자가 물었다

소독하시겠어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소독이 필요한 것은 집이 아니라 사람들이다
온몸에 문신을 한 개가 쉴 새 없이 짖는다
복도에 떨어진 커다란 바퀴벌레의 얼굴
여자는 개 목줄을 길게 늘어뜨리며 지나간다

나는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비상계단을 오른다
39층의 방화문 앞에서 녹음기를 켜고 소리를 채집한다
81층의 옥상에 이르는 길고 구불구불한 시간
방화문의 영구 폐쇄를 건의하는 남자의 웃음소리
차별의 몸가짐을 알량한 생애에 걸쳐 학습한 목소리

그들을 올라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좋은 교육을 받지 못했어요

나를 가르친 선생들은 최고의 대학을 나왔고
유명한 상을 받았으며 길고 지루한 책을 써냈다
그러므로 이제 39층의 계단에 쪼그려 앉아
좋은 교육의 시를 쓴다

81층의 시멘트 하늘과
방화문의 부서진 손잡이에 대하여


















교차로  



노인이 교차로를 모조리 들고 간다

힘에 부친듯 오른쪽 팔에서 왼쪽 팔로

노인이 떨구고 간 오늘의 교차로 하나


직원을 구합니다

가족 같은 분위기, 늘 즐겁게 일해요


가족이 무서워진다

가족이 그의 왼쪽 신경을 끊었고

왼쪽 팔뚝에 우는 아이를 심었다

아이는 화를 꾹꾹 참고

교차로의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린다

초록불은 너무 짧다

길을 건너다 치일 뻔 했다

































교양(敎養) 



아침 6시, 여자는 놀이터에 개를 풀어놓는다

종잇장 같은 하얀 강아지가 드러눕고

여자가 우라지게도 짖는다


위에서 음식물 쓰레기가 떨어지므로

나는 늘 투구를 쓰고 다닌다

가끔 아파트의 하수구가 막히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교양 없는 까마귀가 죽었기 때문이다


찻물을 끓이려고 수돗물을 받다가

상어의 이빨 하나를 발견한다

아파트의 저수조에는 30년째 상어가 살고 있는데

오늘 아침 그 상어는 교양을 씹어먹다가

이빨을 부러뜨린 것이다

이곳의 인간들은 이빨이 듬성듬성 빠져있어서

상어의 이빨을 주워다가 대충 끼워 넣는다


싸구려 홍차를 마시면서

푸른 벽돌의 시집을 펼친다

이런 벽돌로 된 집을 지어야지

교양을 꽉꽉 채워 넣은 반듯한 나의 집



























연습생(練習生) 



굴러떨어질 준비는 언제나 되어있다

한번도 죽어본 적이 없으므로

죽어야 끝이 날 것인지 알 수 없다


내일 공연은 없습니다


어기적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진심으로 태연해야 한다

라면 따위를 끓여 먹어서는 안 된다

불어터진 얼굴로는 불가능한 스탠바이(standby)


무대의 한 귀퉁이에 선다는 건

발뒤꿈치에 박히는 가시를 견디는 것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며


고맙습니다


회전하는 무대 장치가 내 발목을 꺾고는

편히 쉬어요

내일은 당신의 허리를 부러뜨릴 테니


살아남은 뼛조각을 맞추며

휘청휘청 내려가는 지하의 계단

축축한 이끼에 진심으로 미끄러진다
























모서리 



냉장고 문을 열다가 왼쪽 발을 부딪쳤다

절름절름 다친 이리처럼 걷는다

먹잇감을 가진 이리를 따라가다가

인정사정없이 뜯겼다

등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하늘은 짙푸르다

돌아갈 집 따위는 언제나 없었다


부러진 발톱을 내려다 본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떨어져 나간 모서리 때문이다

회색의 압력을 견디는 모서리


모서리를 살릴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모서리에 낀 푸른 이끼가

숨을 쉬는 소리를 들었다


이끼가 가느다란 팔을 내밀어

자그마한 집을 짓는다

모서리가 조금씩 자란다




























마두금(馬頭琴) 



나는 이따금 앓아눕곤 하였다

손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였고

혓바닥이 굳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하길

마두금(馬頭琴)을 배우면 나을 거야


이지러진 지붕의 2층에

79살의 마두금 연주자가 살고 있었다


마두금을 배우기에는 너무 젊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펼쳤다

내 앞으로 낙타가 천천히 지나갔다

낙타는 왼쪽 눈이 없었는데

그 눈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낙타에게 우산을 씌워주고는

어긋난 마두금 소리를 흉내내었다

허연 머리카락이 후두둑 떨어졌다




























여름, 오후 4시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혼자

놀이터 옆 벤치에 앉아있다

가만가만 숨을 내쉬며 천천히 부채질한다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누런 염색 머리의 늙은 여자는

비척거리며 걷는 아픈 개를 풀어놓고

말 많은 영감은 젊은 날을 늘어놓는다

누군가 쪄온 옥수수를 나누어 먹으며

그들만의 정겨운 오후 4시


하지만, 오늘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검은색 스카프를 두른 외로움이

할머니의 어깨 위에 앉아서

재잘거리는 소리를 낸다


어디를 가시오?


이쪽 집에서 저쪽 집으로요


행인이 상냥하게 대답했다


























노란콩 



밥 지을 때 넣을 콩을 씻는다

이 노란콩은 콩물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가 시골에서 사 온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콩은 페트병에서 잠을 잤다

10년 동안 노란콩은 썩지도 않았다


이 콩을 농사지어서 팔았던 여자는

살기가 힘들었는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콩을 씻다 말고 콩 하나를 집어서

죽음의 냄새가 나는지 맡아본다

어디서 들으니 오래된 죽음은

지독한 소똥 냄새가 난다고 했다


말간 얼굴의 노란콩은

시치미를 뚝 떼고 눈만 껌뻑거린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는지 나도 몰라요




























가려운 어깨 



불길하게 늙어버린 여자가

조화(造花) 상자를 들고 지나간다


여자를 피해서 걷는다

2년째 어깨가 가렵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부작사부작

불운이 어깨를 파먹는 소리를 듣는다 










































여학생(女學生) 



여학생은 답답하면 5층의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의 높은 창가에 의자를 두고 공부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고장난 화장실


학원의 지하에는 이상한 미로가 있었다

가느다란 뱀이 가끔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연애를 하는 것들은 그곳에서 시시덕거렸다

초록의 썩은 물이 웃음소리와 뒤섞였다


4월, 화장실에서 사고가 있었다

5층 화장실은 폐쇄되었고, 여학생도 학원을 떠났다

미로의 지하와 뱀이 사라진 곳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여학생은 몸이 아프면 화장실 꿈을 꾸었다


은빛의 화장실에는 출구가 없었다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스무 살 여자애가

회색의 수의(囚衣)에 수갑을 찬 채 걸었다

고개를 숙이고 아주 오랫동안 





























참기름 



이 참기름이 마지막이야


옥이 아주머니가 참기름 2병을 짜오면서 말했다

아주머니는 단골 방앗간에 들러서 기름을 짜오셨다


언젠가 방앗간 집 여자가 고개를 숙일 때, 정수리가 보이더라

그런데 기름에 찌들어 머리의 살갗이 노랗더군

30년을 참기름만 짜고 살면 그런가 보다 했다


나는 참기름을 찬장 깊숙이 넣어두었다

5년 만에 이사를 하게 되면서 그 참기름 2병이 나왔다

참기름의 색은 시커맸다

나는 참기름의 뚜껑을 따고 그릇에 떨어뜨려 보았다

기름에 한 개의 눈과 입, 세 개의 발이 생겨났다

그것은 퍼런색의 줄무늬 벌레로 변했다


벌레는 어기적어기적 걷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인간이 나 몰래 딴살림을 차리고 아이를 두었지

더는 살고 싶지가 않더군

내가 죽고 딸도 날 따라왔어


벌레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누런 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벌레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벌레를 하수구에 흘려보냈다

검은 기름이 부엌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곰 인형 



커다란 곰 인형이 이 더운 대낮에

누런 배때기를 드러내고 누워있다

물크러진 코에서는 회색 콧물이 줄줄

튿어진 입에서는 부러진 바늘이 한 움큼

찢어진 분홍 리본을 목에 칭칭 두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비웃자

바늘이 사람들의 눈을 찔러대어서

비명소리가 아파트를 뒤흔들었다

누군가 구급차를 불렀지만

구급차는 아무도 싣지 않고 떠났다


인형이 불쌍하다며 만진 아이

갑자기 기침이 쏟아지면서

천식 환자의 삶이 시작되었다



































꿈의 자객(刺客)



뱀눈의 남자는 암만 봐도 무서워

온종일 꾸물거리는 날 꿈으로

죽은 포도주 냄새가 올라와 


이 집으로 이사 오고 그 이듬해

윗층의 젊은 아가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어떤 죽음은 기억의 둥지에서 잠을 자


할머니는 나쁜 꿈을 꾸면

마당에 녹슨 칼을 세게 내려치곤 했지

나에게는 끝이 살짝 부러진 칼이 있어


뱀눈의 남자와 싸워야지 

사박사박 숫돌에 칼을 갈고

꿈으로 길을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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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인 작업 일정이 있어서, 당분간 단편 업데이트는 뜸할 것 같습니다.

  글을 쓰게 되면, 다시 올리겠습니다.


  방문하는 독자분들 모두 새해 새로운 마음으로 기쁘게,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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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와 나


  "정현 씨, 이거 업무용 휴대폰이야. 인턴한테는 이런 걸 주지는 않는데, 요새 책 출간이 몰려서 일이 바빠. 그러니까 전화 오는 거 잘 받아서 업무 일지에 기록해 두고. 물어볼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고. 잘 알겠지만, 개인적인 용도로는 쓸 수 없어."

  정현은 이 대리로부터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새것처럼 보이는 검정색 휴대폰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위에서 시키는 일로 바빴다. 그런데 거기에다 업무용 휴대폰으로 오는 전화 응대라니, 정현은 머리에 무거운 짐보따리 하나를 더 얹은 느낌이었다. 나는 인턴이다. 이 회사의 최말단 인턴이다. 어쨌든 3개월의 수습 기간을 견뎌야 한다.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해내야 한다. 정현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되뇌면서, 건네받은 휴대폰을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안은 자신의 휴대폰을 서랍에 넣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현 씨, 있다가 2시에는 편집부 회의가 있어. 거기 한번 들어가 봐. 내가 편집부 구 대리한테는 말해놨어. 편집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번 보는 거야. 장소는 5층 소회의실."  
  "네, 알겠습니다."

  정현이 업무용 휴대폰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이 대리가 그렇게 말하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오늘은 이래저래 바쁘겠네. 정현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책상 위에 켜진 모니터에는 쓰다만 업무일지 화면의 커서가 깜박이고 있었다. 어디까지 썼더라, 정현은 콧등에 흘러내린 안경을 바로 쓰고는 모니터를 들여다 보았다. 그때였다. 책상 위의 휴대폰에서 징, 징, 하는 진동음이 들렸다. 문자 메시지가 온 모양이었다.

  '칼리 헤어샵 이민정 디자이너입니다. 파마하실 때가 된 것 같아서 연락드려요. 이번 주에 오시면, 신년 할인으로 10퍼센트 할인해 드립니다.' 

  "이게 뭐지?"

  정현은 업무용 휴대폰에 뜬 문자 메시지를 읽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전에 휴대폰을 쓴 사람 앞으로 온 것 같았다. 어떤 여자가 썼나 보네. 칠칠하지 못하게 저게 뭐람. 전화번호 이동을 하려면 깔끔하게 정리를 하던가. 정현은 어쩌면 한동안 저런 쓸데없는 문자에 시달리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약간 짜증이 났다. 미용실 전화번호를 차단 목록에 넣고는 정현은 작성하던 업무 일지에 집중했다.

  '2026년 국가장학금 1차 신청 기한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기한 내에 신청해 주기 바랍니다.'

  "아니, 이건 또 뭐야?"

  국가장학금 신청에 대한 문자 메시지였다. 대학생인가 보군. 2개의 문자 메시지는 업무용 휴대폰의 이전 주인이 여대생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은 정현에게는 하등 쓸데없는 정보일 뿐이었다. 한 번 더, 정현은 그 안내 문자 전화번호를 차단 목록에 추가했다. 정현이 이 대리로부터 휴대폰을 받은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았다. 도대체 오늘 하루에 몇 개의 전화번호가 차단 목록에 더 추가될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아도 업무 일지 작성에다, 출판사에 걸려 오는 문의 전화 응대, 자잘한 외부 심부름까지 해야 하는 정현에게 이 휴대폰은 뭔가 애물단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인턴이라는 자신의 처지에서 싫은 기색을 내비칠 수도 없었다. 모니터의 화면에서는 쓰다만 업무일지의 커서가 깜박거리고 있었다. 모니터 하단에 뜬 시계를 보니, 1시 43분이었다. 2시에는 편집부 회의에 가야만 한다. 정현은 서둘러 오전 업무 일지 작성을 마무리했다.

  "일은 좀 어때요? 이 대리님이 마구 굴려서 힘든 건 아닌지 몰라."

  회의실에 들어와서 막 자리에 앉은 정현에게 말을 건 사람은 편집부의 구 대리였다. 약간 퉁퉁한 체격에 목소리까지 걸걸한 구 대리는 머리까지 짧게 잘라서 남자처럼 보였다. 편집부의 직원은 5명. 그 가운데 맨 막내 사원인 선호 씨만 빼고 모두 여자였다. 출판사도 이젠 여초 직장이 되었나 보군. 정현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위화감을 느꼈다. 정현이 배치된 마케팅부에서도 5명의 정직원 가운데 남자는 이 대리뿐이었다. 

  "아직은 업무 파악을 하느라 좀 정신이 없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병아리 시절에는 다들 그래요. 오늘 회의는 그냥 일상적인 거니까,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요. 메모하거나 그러지 말고. 그냥 수다 좀 떠는 거죠. 업무와 관련된 수다."

  구 대리가 그렇게 눙치는 말에 정현의 긴장한 마음도 조금은 펴지는 것 같았다. 회의의 주제는 새로 출간될 젊은 작가들의 단편선집 편집에 관한 것이었다. 정현은 자신의 자리에 놓인 프린트물을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선집에 실린 작가들의 간략한 소개와 소설의 목차가 적혀 있었다. 책에 실릴 단편은 9편인데, 놀랍게도 그 소설의 작가들은 모두 여자였다. 세상에, 남자 작가들은 전멸한 모양이군. 정현의 관심사는 시였다. 요새 주목받는 젊은 시인들 가운데 여성들이 좀 더 눈에 띄기는 했지만, 정현이 좋아하는 남자 시인들도 몇몇 있었다. 그런데 소설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았다. 만약 괜찮은 소설을 써내는 남자 작가가 있다면, 그 단편선집에 실리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정현은 혼자 속으로 그렇게 반문했다.

  "유리아 작가님은 소설을 2편 보내왔는데, 어떤 걸 뽑는 게 좋겠어요? 다들 읽어본 소감을 말해봅시다. 나는 '엄마는 바다로 갔다'가 좋았는데."

  편집부장이 빠진 회의를 이끄는 사람은 구 대리였다. 구 대리의 말에 이어서 편집부 팀원들의 이런저런 의견 제시가 이루어졌다. 정현은 잘 알지도 못하는 내용이라,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서는 프린트물을 괜스레 뒤적여 보았다. 프린트물의 맨 하단에는 선집에 실릴 평론도 있었다.

  '우리 시대의 작가들은 페미니즘을 근원적으로 장착해야 한다.'

  정현은 그렇게 시작되는 평론을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페미니즘을 말하지 않으면 소설도 쓰지 못하나? 이건 뭔가 강제하는 느낌이군. 정현은 그 평론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 그리 길지 않은 그 글을 읽고 나니, 삶은 계란을 꾸역꾸역 먹다가 목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현은 자신의 텀블러 뚜껑을 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너무 우리들끼리만 말한 것 같다. 정현 씨 이야기도 좀 들어봐야지. 편집부 회의에 들어와 보니, 어때요?"
  "아, 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책이 만들어진다니, 흥미롭네요."

  정현은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편집부의 막내 선호 씨가 정현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에 나온 작가 중에 정현 씨가 읽어보고 관심을 가지는 작가가 있어요?"
  "어, 그게 저는 소설보다는 시를 더 좋아해서요. 김은수 작가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러면, 우리들 회의하는 거 듣는 게 좀 괴로웠겠다. 그래도 간략하게 소감이라도 말하고 회의 마무리하죠."

  구 대리의 말에 편집부 사람들이 정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음, 그러니까 제가 보기에는 이 선집에 실리는 작가들이 다 여성 작가더라고요. 남성 작가의 글도 한 편 싣는 것이 어떤가 싶은 생각도 들고 그러네요. 그러니까 그게, 균형을 맞춘다는 측면에서요."

  정현은 자신의 말에 뭔가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요새 소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한마디 보태려다가 쓸데없는 혹을 붙인 것만 같았다. 정현은 솔직하다 못해 약간은 나이브한 자기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선호 씨, 정현 씨가 읽어볼 만한 책들 좀 챙겨서 줘 봐."

  구 대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회의실 문을 나섰다. 정현은 편집부 사람들이 떠난 회의실 책상에 혼자서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아니, 자신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 않는가. 왜 획일성을 강제하는가? 정현은 살짝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음날, 정현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제 좀 신경을 써서 그런가 보네. 책상 오른쪽 맨 위쪽의 서랍을 열고 타이레놀을 찾았다. 딱 한 알 남은 타이레놀이 참으로 반가웠다. 저 약도 사놔야겠다. 약값도 많이 올랐던데. 정현은 혼잣말을 하면서, 알약을 삼켰다. 건너편 침대의 문국은 정현의 기척에 잠에서 깬 것 같았다.

  "몇 시냐?"
  "이제 8시 반 좀 넘었네. 나 때문에 깬 거야?"
  "깨기는 뭘. 아침잠도 젊었을 적에나 쏟아지지. 이젠 늙어서."
  "웃기는 소리하네. 야, 스물여섯이 늙은 거냐?"
  "늙었지, 늙은 거야."

  정현은 문국의 우스꽝스러운 푸념에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대학에 다닐 때는 공부하느라, 군대에 갔을 때는 얼른 시간이 흘러가길 바라면서, 그러다가 졸업반이 되고 허덕허덕하다가 겨우 인턴사원 명찰 하나 달고 있으니 어느덧 스물여섯이었다.

  "너, 방 비우는 날이 언제더라?"
  "2월 3일. 학사 관리실 게시판에 그렇게 적혀있더라고. 엊그제 문자로도 알려주고. 오늘 주말이니까, 신림동 쪽에 방 좀 알아보려고."
  "내가 같이 가줄까? 혼자보다는 낫잖아."
  "그러면 나야 좋지. 내가 점심 살게."

  정현은 방을 보러 가는 자신과 동행해 주겠다는 문국의 제안이 고마웠다. 정현이 이 학사에서 머물 수 있는 날은 이제 보름 남짓 남았을 뿐이었다. 이 기숙사는 시내 중심가에 자리한 낡은 건물이었다. 정현의 고향 유지가 서울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을 위해 세운 학사였다. 기숙사에 당첨되는 것도 어려운 지방 학생 입장에서 이런 혜택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벽에는 군데군데 금이 가고, 건물의 외벽 페인트칠이 벗겨진 이 학사를 이제 정현은 떠나야만 했다. 정현은 무언가 서러운 느낌도 들었다. 보잘것없지만 작고 따뜻한 방의 아랫목에 있다가 내쫓김을 당하는 것만 같았다. 새로 구해야만 하는 자취방은 어떨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모든 것이 비싼 이 서울 바닥에서 과연 가난한 사회 초년생인 자신이 살만한 집이 있을까?

  그날 하루 동안 정현은 문국과 함께 신림동의 원룸 빌라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집을 찾는 것은 마치 모서리가 맞지 않는 퍼즐을 억지로 구겨서 끼워 넣는 일과도 같았다. 월세가 싼 곳은 화장실이 낡았고, 인테리어가 괜찮아보이는 어느 원룸은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정현이 부동산 중개인이 안내하는 동안, 살짝 벽을 두들겨 보니 '텅텅'하고 울리는 소리가 났다. 말만 원룸이지 싸구려 고시원 방이나 다름없었다. 정현이 보고 나온 어느 원룸 빌라에는 문신한 중년 남자가 드나들었다. 정현은 이 서울 바닥에서 싸구려 월세방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임을 실감했다.

  "젊은 양반, 그렇게 까다로우면 방 못 구해. 돈이 없으면 기대를 좀 접던가."

  정현과 함께 원룸촌을 돌며 방을 보여주던 중개인 영감이 정현에게 한마디했다. 정현은 영감의 좀 무례한 말투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다른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영감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영감의 말마따나 자신은 돈이 없었고, 까다로운 기준도 가지고 있었다.

  "정현아, 아까 봤던 그 전철역 근처 원룸 빌라 말이야. 그 정도면 괜찮은 거 같아. 그 정도 방에 월세 35만 원이면 나쁘지 않아. 관리비 8만 원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다른 데 보다는 깔끔하잖아. 보니까, 드나드는 사람들 행색도 멀끔해 보이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해."
  "영감탱이 말은 그냥 넘겨. 그런 거 신경쓰다가는 속만 상한다."
  
  정현은 문국과 함께 고시촌 근처의 돈가스 체인점에 들어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추운 날 나와서 고생해 준 문국에게 뭔가 괜찮은 것을 사주고 싶었지만, 그 돈가스도 1인분에 15000원짜리였다. 오히려 문국이 그 옆 가게의 12000원짜리 칼국수를 먹자는 것을 정현이 돈까스를 사겠다고 했다. 너무 튀겨서 질깃거리기까지 한 돈가스를 우물거리면서 정현은 가게 밖으로 보이는 고시촌의 거리를 응시했다. 흐린 날씨 때문인지 창밖의 풍경은 어딘지 음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날씨처럼 정현의 마음도 잔뜩 구름이 낀 것처럼 느껴졌다.

  신림동에서 돌아온 그날 오후, 정현은 자신의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사를 하기 전에 미리 버릴 것은 버리고 해서, 가져갈 것들을 간소하게할 생각이었다. 징, 징. 책상 위에 놓아둔 정현의 업무용 휴대폰이 진동음 소리를 내었다. 정현은 주말에도 업무용 휴대폰을 살펴봐야했다. 이 대리가 인쇄소에서 연락올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회사에 두지말고 가져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김수지 님, 롤프 쇼핑몰 물류센터 채용 담당자입니다. 주말 아르바이트 배정이 완료되었습니다. 통근버스 출발 장소는 첨부한 링크를 눌러서 확인해주세요.'

  파마할 때가 다 되었고, 국가 장학금도 신청해야 하는 이 문자의 주인공은 주말에 쇼핑몰 물류센터 알바를 하러 나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여대생의 이름은 김수지였다. 정현은 그 문자 메시지 번호를 수신 차단 목록에 넣기 위해 설정 버튼을 눌렀다. 다소 귀찮은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짜증이 나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 여성이 열심히 살아가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정현은 기묘한 동질감마저 느꼈다.
 
  주말을 보내고 출근한 월요일, 정현은 이 대리와 함께 인쇄소에 가기로 되어있었다. 새로 출간할 시집과 계간지의 인쇄 품질을 보기 위한 외근이었다. 인쇄소라고 해서 뭔가 허름하고 시끄러운 공장 같을 거라고 생각한 정현은 깔끔한 건물의 외관에 좀 놀랐다. 인쇄소 안의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밝은 조명 아래에 자동화된 설비에서 쉴 새 없이 찍어내는 종이들이 반짝거리면서 빛을 내고 있었다.  

  "이렇게 인쇄 과정 전반을 살펴보는 걸, 인쇄 감리라고 하는 거야. 책 출간 전에 인쇄 상태를 보고 조정하는 일이지."

  정현은 이 대리가 담당 라인의 인쇄 주임을 만나는 동안,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출판사 블로그에 올릴 게시글 때문이었다. 그냥 노비가 따로 없네. 사진도 찍고, 전화도 받고, 탕비실 청소도 하고. 정현은 마음에 드는 구도가 나올 때까지, 여러 번 휴대폰의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면서, 최종본을 고르는데 휴대전화가 짧게 2번의 진동음을 내었다.

  '김수지 님의 늘봄 네일 숍 예약이 완료되었습니다. 1월 8일 오후 3시 30분에 뵙겠습니다.'

  주말에 열심히 알바하더니, 그 돈으로 손톱도 다듬나 보군. 수지야, 돈을 힘들게 벌었으면 좀 아껴 써라. 외모, 그까짓 거 다 한 꺼풀이야. 차근차근 돈을 모아야, 나중에 주식계좌 개설할 쥐꼬리만 한 자금이라도 되지 않겠니. 정현은 자그맣게 궁시렁거리면서, 차단 목록에 네일 숍 번호를 추가했다. 젠장, 언제까지 이런 번호들을 눌러서 차단해야 하지? 정현이 꾹꾹 휴대폰의 버튼을 누르고 있는데, 이 대리가 다가왔다.

  "정현 씨, 좀 와서 얘기 나누는 거나 듣지. 뭐해?"
  "아, 네. 업무용 폰으로 자꾸 이전 사용자의 문자메시지가 와서요. 그거 차단하느라..." 
  "그게, 전에 쓰던 폰이 깨지는 바람에 신규로 개통했더니 그런가 보네. 좀 번거로운가? 대부업체 독촉 전화 그런 건 아니지? 한동안 차단 계속하는 수밖에. 점심때 됐으니, 나가서 밥이나 먹자."

  월요일은 언제나 바빴다. 정현은 인쇄소에서 돌아온 후에, 저녁에 있을 저자 강연회 지원 준비 작업을 했다. 미리 건네받은 강연 원고를 대충 훑어보고, 어색한 부분이 없도록 수정했다. 강연이 끝난 후에는 사인회가 있을 예정이어서 펜과 종이도 넉넉히 챙겼다. 정현이 그렇게 준비하고 있는데, 누군가 책상 위에 책 서너 권을 두고 갔다. 편집부의 선호 씨였다.

  "시간 날 때, 한번 읽어보세요."

  책상 위에 놓인 책의 맨 위 표지에는 '세계 페미니즘 걸작 단편선'이라는 글씨가 박혀있었다. 정현은 그 아래 책들의 책등도 살펴보았다. '오늘의 한국 문학', '우리 시대의 젊은 여성 작가들', '페미니즘의 역사'. 정현은 그 제목들을 읽다가 뭔지 모를 답답함이 느껴져서, 책들은 모니터로 부터 좀 먼 구석으로 밀어냈다.

  "아, 이것도 가져가야지."

  정현은 업무용 폰을 들고는, 혹시 자신이 확인하지 못한 전화나 문자 메시지가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새 문자 메시지가 있었는데, 백화점 화장품 매장의 카드 결제 완료 문자였다. 결제 금액은 15만 4천 원이었다. 정현은 물류센터 주말 알바를 하는 여대생의 씀씀이가 좀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은 그렇게 힘들게 아르바이트하면 돈을 좀 아껴 쓰거나 할 텐데, 수지는 그렇지 않았다. 이름이 있는 체인점 미용실에서 파마를 했고, 네일 숍에서 손톱을 다듬었으며,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샀다. 국가장학금 신청을 할 수 있는 요건이 되려면, 그렇게 집안이 여유가 있지도 않을 터였다.

  "수지야, 넌 참 편하게도 산다."

  정현은 카드 결제 알림 문자의 번호를 차단 목록에 추가하고는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자기가 번 돈을 어떤 미래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즉시 현실에 써버릴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정현은 새로 이사할 원룸의 관리비 8만 원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느껴졌다. 여대생 김수지는 그런 자신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인쇄소와 저자 강연회로 바빴던 월요일이 지나고 목요일이 될 때까지 웬일로 업무용 폰의 알림은 조용했다. 정현은 번거롭게 느껴지던 수지와 관련된 문자 알림이 오지 않자,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금요일 아침이 되었을 때, 막 출근한 정현의 업무용 폰에 들어온 문자 메시지가 있었다.

  '김*지님의 그린 비치 호텔 예약이 완료되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진 문자의 내용에는 투숙과 관련된 안내 사항이 있었다. 수지는 강원도 양양의 호텔에서 주말을 보낼 계획이었다. 여대생 김수지는 연애도 열심히 하는가 보네. 정현은 갑작스러운 호텔 예약 안내 문자에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김수지는 정현에게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수지가 주말에 호텔에 가기로 되어있다는 사실은 약간의 배신감마저 들게 했다. 정현은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호텔 예약 안내 전화번호를 차단 목록에 추가했다.

  "어, 세제가 다 떨어졌네."

  토요일 저녁, 정현은 기숙사의 밀린 빨래를 하기 위해 기숙사 세탁실에 있었다. 그런데 세탁물을 세탁기에 넣고 나서 보니, 세제 통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자기가 쓰고 세제가 떨어졌으면 관리실에 말이라도 해놓을 것이지. 정현은 38명이 사는 이 조그만 학사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생각했다. 컵라면 그릇을 치우지 않고 식탁에 놓고 가는 인간, 화장실 휴지를 떼어다가 방에다 놓고 쓰는 인간, 냉장고에 둔 다른 사람의 요구르트를 훔쳐 먹는 인간, 창밖으로 담배꽁초를 내던지는 인간... 인간이란 얼마나 이기적이고 무례하고 어리석은가. 정현은 그 시간에 호텔에서 누군가와 있을 수지는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를 잠깐 생각해 보았다.

  "다음은 사건 사고 소식입니다. 방금 전에 올라온 속보입니다. 강원 방송국의 박충기 기자 연결하겠습니다. 박 기자님, 강원도 그린 비치 호텔에서 투신 사망 사고가 있었다면서요. 어떤 사건인지 알려주시죠."

  정현이 관리실로 내려가려는데, 세탁실 옆의 휴게실에서 뉴스 채널의 속보가 들려왔다. 정현은 그냥 지나가려다가, '그린 비치'라는 단어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린 비치'는 수지가 예약한 그 호텔의 이름이었다. 정현은 TV 앞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네, 사건이 발생한 시각은 오늘 오후 7시 30분경입니다. 투숙자 세 명의 시신이 호텔 1층의 화단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구급대가 출동했지만, 3명 모두 투신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이고요. 사망자는 남자 1명에 여자 2명입니다. 23살 여성 김 모 씨, 25살 여성 박 모 씨, 29살 남성 석 모 씨. 경찰은 이들이 어떻게 만나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조사하는 중입니다."

  "얼마 전에도 이런 비슷한 소식을 전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인터넷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 함께 만나서, 투신 사망하게 된 사건이었는데요. 혹시 이번 사건도 그 사건과 유사점이 있지는 않습니까?"

  "우선, 경찰에서 밝힌 바로는 이들은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경찰은 추가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이들의 소지품과 휴대전화를 수거해서 정밀 감식하고 있습니다. 이후로 조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정현은 갑자기 맥이 탁 풀리면서, TV 앞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낡고 터진 합성 가죽 소파는 정현이 앉자마자 부서질 듯한 소리를 내었다. 자신이 뉴스에서 들은 사망자 23살의 김 모 씨는 수지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추측일 수도 있었다. 주말에 투숙한 그린 비치 호텔에 젊은 여성이 한두 명이겠는가? 최근 몇 년 동안 양양은 주말마다 젊은 사람들이 몰리는 휴양지라고 들었다. 이번 주에 네일 숍에 가고, 새 화장품을 산 수지가 죽음을 택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다음날 새벽, 정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눈코입도 없는 어떤 여자의 얼굴이 도자기처럼 산산조각이 나서 해변가에 흩뿌려져 있었다. 정현은 그것이 수지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지가 이제는 세상에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정현은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씻으려고 화장실에 갔다. 아귀가 맞지 않는 화장실 창틀로 들어오는 겨울바람이 매서웠다.

  "어휴, 내가 미친 거야, 미친 거라고. 알지도 못하는 여자애 하나 죽은 건데."

  정현이 화장실에서 돌아오자, 문국이 졸린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하품하고 있었다.

  "야, 수지가 누구냐? 네가 하도 수지야, 수지야, 하고 불러대서 잠에서 깼다. 옛날 여자 친구야? 아님, 요즘 누구 만나?"

  "아, 아냐,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냐."

  정현은 세게 머리를 내저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새벽에 잠에서 깬 것이 약간은 불만스러운지, 문국은 혼자 궁시렁거리면서 다시 잠을 청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정현은 업무용 폰의 전원을 켰다. 이제껏 차단해 두었던 수지와 관련된 전화번호를 차단 목록에서 모두 해제했다. 만약에 수지가 살아있다면, 그 문자로 무엇이든 연락이 오기는 올 것이다. 정현은 그 전화번호들에서 어떻게든 무슨 연락이 왔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되었다.

  하지만, 보름이 지나는 동안 정현의 업무용 폰에는 수지와 관련된 그 어떤 문자도 오지 않았다. 대신에 정현은 왜 투고한 원고를 읽지 않느냐는 항의 전화를 비롯해, 인세를 언제 입금할 거냐고 재촉하는 작가의 전화 같은 것을 받았다. 그런 전화들을 받을 때, 지치지 않고 대답하는 법은 아주 간단했다. 자신을 기계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정현은 마치 자동응답기처럼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담당자에게 전하겠습니다. 불편을 끼쳐서 죄송합니다."

  정현은 생각이 날 때마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양양 호텔의 투신 사망 소식을 검색해 보았다. 그러나 인터넷 뉴스의 그 어디에서도 후속 보도는 확인할 수 없었다. 매일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세상을 떠난 젊은 사람들의 소식 따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정현은 수지가 확실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정현은 신림동의 원룸 빌라로 이사했다. 짐이라고 해봐야 별것도 없었다. 커다란 여행 캐리어 2개가 정현의 살림살이 전부였다. 학사 관리실에서 작은 승합차로 짐을 실어다 주었다. 정현은  땅값 비싼 서울에서 자신을 4년 동안 품어준 이 낡은 기숙사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이 학사를 세운 고향의 돈 많은 유지(有志) 양반은 지금은 하와이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정현은 얼굴도 모르는 그 영감님이 그곳의 햇살 아래에서 오랫동안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6개월 뒤면 너처럼 이 동네에서 방 구해야겠다."

  문국은 정현이 새 원룸에서 짐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문국은 학비를 버느라, 한 학기를 휴학하고 지방의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학자금 대출이 늘어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 취직이나 할 수 있을까? 넌 그래도 용케 취업해서 인턴이라도 되었는데 말이지. 영문학과는 그래도 불문학과보다 낫지 않냐?"
  "그런 게 어딨어? 어문학 계열은 다들 힘들지."
  "별로 쓸모도 없어 보이는 남의 나라말을 4년 동안 참으로 열심히도 배웠네." 

  정현은 영문학, 문국은 불문학 전공이었다. 문국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정현의 원룸을 나섰다. 문국을 배웅하고 나서, 정현은 이제는 자신의 방이 된 304호로 들어왔다. 방에는 독서실에서나 볼 법한 작은 크기의 책상이 창가 쪽에 놓여있었다. 정현은 아까 책상 위에 둔 업무용 폰의 화면을 열었다. 혹시라도 연락이 온 것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수지야, 호주로 떠난다는 소식은 들었어. 떠나기 전에 한번 얼굴이라도 보면 좋겠는데. 연락 좀 주라.'

  수지는 살아있었다. 아니, 죽은 적이 없었다. 정현은 그 문자 메시지를 보고 나서, 비로소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저 뉴스 소식만 듣고서, 수지가 죽었다고 단정해 버린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현이 수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여대생이라는 그 한 가지뿐이었다. 그럼에도 정현은 김수지라는 그 여학생이 무척 가깝게 느껴졌다. 어떻게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에게서 그런 친근한 느낌이 들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수지는 이제 호주로 떠날 예정이었다.

  정현은 수지가 가게 될 호주라는 나라를 떠올렸다. 코알라와 캥거루가 있는 나라. 국토의 대부분이 황량한 사막인 나라. TV의 여행 프로그램에서 본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와 원주민의 신성한 산 울룰루(Uluru)가 있는 나라. 정현은 언제쯤 자신은 그 나라를 가보게 될까를 생각했다. 어쩌면 먹고사느라 바빠서, 살아있는 동안 그 나라를 가볼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아이구, 박 부장님. 잘 지내십니까? 밥은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시나요? 남의 돈 떼먹고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월요일, 출판사에 가장 먼저 출근한 정현이 탕비실 청소를 하고 있을 때 업무용 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정현의 귀에 쇳소리의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전화를 잘못 거셨습니다. 이 전화는 문재 출판사 마케팅부 전화입니다."
  "어이, 이봐. 왜 이러셔. 목소리를 들어보니 댁이 박 부장이 아닌 건 알겠어. 하지만 거기에 박 부장이 있는 건 내가 다 알고 있거든. 박 부장 좀 바꿔봐."
  "선생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번호를 잘못 아셨어요. 전화 끊겠습니다."
  "그래, 끊어봐라 끊어봐! 너, 박 부장한테 그대로 전해. 내가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돈 받아낸다고. 돈 안갚으면 명대로 못살 거라고..."

  정현은 위협적으로 을러대는 남자의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전화를 끊고는, 그 번호를 바로 차단 목록에 추가했다. 도대체 과거에 이 전화번호를 썼던 박 부장은 어떤 사람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번호는 뭔가 마가 낀 것 같았다. 오후에 그 쇳소리의 남자는 다른 번호로 전화를 또 걸어왔다. 여대생 김수지가 가고, 새로운 인물 박 부장이 정현의 일상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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