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두치(咽頭齒) 7

 
  중기가 구만의 푹 꺼진 소파에서 일어났을 때, 중기의 집 초인종이 짧게 2번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니, 밤 9시 10분이었다. 도대체 이 시간에 올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중기는 지직거리는 인터폰의 흑백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주인 영감은 20년도 더 지난 것 같은 낡은 인터폰도 교체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터폰의 화면은 흑백이었다. 화면 속에는 둥근 얼굴에 M자 탈모가 오기 시작한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5층의 쌍둥이 아빠였다.

  "주무관 선생, 늦은 시간에 미안합니다."
  "아니, 차장님이 웬일로 이 시간에..."
  "저기, 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중기가 현관문을 열어주자, 쌍둥이 아빠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서있었다. 중기는 그를 차장님이라고 불렀는데, 그건 그가 전에 다녔던 마을금고에서의 직책이 차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차장이 아니었다. 횡령으로 잘렸기 때문이다. 금고 측에서 고발까지 하지는 않았다고 들었다. 기껏해야 몇천만 원 아닐까? 중기는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오죽 먹고 살기 힘들면 그랬겠어? 애들 엄마는 식물인간으로 누워있지, 애 둘은 어떻게든 키워야지. 2층의 수선스러운 영천 아줌마가 중기가 분리수거할 때, 옆에서 주절주절 쌍둥이 아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공금에 손을 대는 일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중기가 그 말을 들은 것도 벌써 석 달이나 지났다.

  "이것 좀 하나 봐주구려."

  쌍둥이 아빠 박 차장은, 아니 차장이었던 남자는 흰색의 뻣뻣한 쇼핑백에서 기다란 직사각형 나무통을 꺼냈다. 통의 겉면에는 검정색 붓글씨로 '명품 방짜유기'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나무 상자의 위 뚜껑을 열어서 그 안에 든 반짝거리는 수저 한 벌을 보여주었다.

  "이게 인간문화재 김선재 선생이 만든 유기인데, 정말 귀한 거라서. 주무관 선생이라면 이런 귀한 걸 알아봐 줄 것 같기도 하고."

  센서등이 나간 어두운 복도에 서 있는 남자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쌍둥이 아빠는 요새 방짜유기 그릇을 팔러 다니는 모양이었다. 중기는 일요일 저녁의 늦은 시간, 그걸 들고 벨을 누른 남자의 청을 내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하나쯤 있어도 좋은 물건이네요. 얼마나 하는지..."
  "이게 원래 50만 원 받는 건데, 내가 주무관 선생한테는 그리 받을 수는 없고..."

  쌍둥이 아빠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러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30만 원에 해드리리다."

  중기는 수저 한 벌에 30만 원을 달라는 남자의 말에 기가 찼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문을 닫고 남자를 돌려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 남자의 어깨에는 식물인간이 된 아내와 두 쌍둥이 딸이 있었다. 중기는 다음주에 있을 구청 직원의 결혼식 축의금으로 찾아놓은 현금을 떠올렸다. 

  "차장님, 나도 지금 가진 돈이 이것 뿐이라. 20만 원밖에 없는데, 괜찮겠어요?"

  중기의 말에 쌍둥이 아빠의 구겨진 얼굴이 살짝 펴졌다. 그는 상자의 뚜껑을 닫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성급히 쇼핑백에 나무상자를 넣었다. 그러고는 중기가 건넨 20만 원을 건네받고는 휘적휘적 어두운 복도를 걸어갔다. 쌍둥이 아빠가 가고 난 뒤에, 중기는 그가 건넨 방짜유기를 비로소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숟가락의 손잡이 뒷면에는 '선재 유기'라는 각인이 봉황새의 문양과 함께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봉황새라니, 임금이 쓰는 수저를 흉내라도 냈단 말인가? 중기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이런 건 별로 쓸모도 없는 장식품일 뿐이다. 중기는 자신이 건넨 그 20만 원이 병원에서 7년째 누워있다는 차장의 부인 병원비와 그 쌍둥이 딸의 간식값으로 흘러가는 상상을 했다. 오죽 먹고 살기 힘들면 그랬겠어? 2층 영천 아줌마의 말이 이상하게 중기의 귓가를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중기는 문득 구만에게 방짜유기 영업을 시켜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구만은 물건이란 걸 팔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인사팀에서 일했던 구만이 아는 건 인력 채용과 이동에 관한 제반 업무였다. 최근 몇 년 동안 구만을 힘들게 했던 것은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과 관련된 크고 작은 소송이었다. 구만이 보기에는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직원 간에 물고 늘어지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났다. 구만은 그 일을 계속하는 것이 자신의 수명을 갉아먹는 일 같다는 생각마저 할 정도였다. 그래서 구만은 회사를 나오게 되었을 때, 어떤 면에서 후련하기도 했다. 증거랍시고 제출된 시답잖은 녹취 파일과 이메일 내역을 매일 눈이 빠지게 검토하는 건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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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두치(咽頭齒) 6


  "그러니까, 불친절한 글을 써야지."

  여주에서 돌아온 그날 저녁, 중기는 진이 빠진 상태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chat GPT의 말대로 자신의 소설은 설명이 많은, 친절한 글이었다. 친절한 글은 재미도 없고, 매력도 없다. 불친절하고 까칠해져야지. 그런 글을 써야지. 그런데 중기는 불친절한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대화를 짧게 줄일 것인지, 인물의 행동에 설명도 안 하고 그냥 그 행동들을 마구 늘어놓을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우선은 구만을 그대로 주저앉힐지, 아니면 일으켜 세울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심장의 혈관에 스텐트 2개를 넣은 이 중년의 남자는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까?

  중기는 푹 꺼진 15년 된 물소 가죽 소파에 앉아있는 구만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처럼 점심을 라면으로 먹은 구만은 입을 벌리고 낮잠을 자는 중이었다. 중기가 보기에 구만은 한심하기도 했고, 불쌍하기도 했다. 가족을 위해 그저 열심히 일한 가장으로서의 구만은 참으로 안쓰러워 보였다. 하지만 퇴직 후에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그저 집에서만 지내는 이 구만이라는 인물은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마누라는 아파트 청소일까지 다니고 있는데, 중기는 어떤 단무지가 꼬들꼬들하게 맛있는지를 검색하고 있었다.

  중기는 구만의 등짝을 한 대 때려주고 싶다가도, 불안하게 뛰는 구만의 심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아픈 건 사실이잖아. 중기는 구만이 다시는 사회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에 휩싸였다. 작가로서 분명히 자신에게는 구만을 집 밖의 세상으로 밀어낼 힘이 있었다. 하지만 중기는 자신이 구만을 움직인다고 해도, 구만은 부메랑처럼 다시 푹 꺼진 소파의 자리로 돌아올 것 같았다.

  구만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중기는 구만이 앉았던 소파에 앉아 보았다. 검정색의 물소 가죽 소파는 군데군데 터진 자국이 보였다. 중기는 자신의 원룸에 있는 낡은 가죽 소파와 그 소파가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색깔이었다. 중기의 소파는 갈색이었다. 구만은 화장실에서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배경음악처럼 들리는 케이블 TV의 뉴스 채널에서는 전쟁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이란과 미국의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란과 미국 모두 버티기 모드에 들어간 것이죠. 과연 이 치킨 게임의 승자는 누가 될까요? 협상이 난항에 부딪힌 상황에서 유가는 고공 행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제 구만이 전쟁과 별 상관없다고 생각한 라면값이 오르게 될 터였다. 석유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근원적인 동력이다. 그 동력의 흐름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모든 것의 비용이 다 오를 것이다. 구만이 매일 먹는 라면, 단무지, 전기, 가스, 관리비, 구만을 둘러싼 세계의 모든 것이. 그런데도 구만은 다시 돈을 벌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중기는 화장실에서 나오는 구만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구만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도대체 어쩔 셈인가, 저 사람은. 중기는 구만의 좁은 어깨를 마구 흔들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하지만 심장이 좋지 않은 구만에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중기는 구만이 앉을 수 있도록 소파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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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두치(咽頭齒) 5


  화장실의 수전을 교체하고 나서, 중기는 미리 렌트한 차를 몰고 여주로 향했다. 여주의 요양원에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있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작은 요양원이다. 높은 산이 양옆으로 자리한 좁은 도로는 구불구불하게 끝도 없이 이어졌다. 육이오 전쟁 때, 여주에 피난민들이 많이 들어와서 살았다 하더군요. 이런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서, 군대가 쉽게 오지 못한다고 믿었대요. 작은 키에 꼬장꼬장한 얼굴을 한 수녀원장이 중기에게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여주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이상한 약국이 하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약국이 아니라, 약방이었다. 약방의 유리창은 빛바랜 흰색의 코팅지가 추레하게 너덜거렸다. Rx 모양의 표시가 되어있는 것을 보면, 뭔가 약을 짓는 것 같기는 한데, 왜 약국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까? 칠십은 족히 넘은 영감은 늘 고정된 자세로 TV를 보고 있었다. 중기는 아무리 아파 죽을 것 같아도, 저 영감이 짓는 약을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늘도 TV에 시선을 맞추고 카운터를 지키는 영감이 백미러를 천천히 지나갔다.  

  "이렇게 곰돌이를 씹어 먹으니, 얼마나 슬픈 일이냐. 곰돌이가 너무 불쌍해."

  어머니는 중기가 건넨 하리보 젤리를 우물우물 씹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정말로 슬픈 것 같았다. 나이 들어서 꺼지는 눈꺼풀 때문에 더 작아진 어머니의 눈가는 늘 짓물러 있었다. 중기는 휴대용 티슈를 한 장 꺼내어 어머니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았다.

  "여기서 일하는 여자가 내 돈을 훔쳐갔어. 죄다 도둑년들이야."
 
  어머니는 입을 조그맣게 오므리며 속삭이듯 중기에게 말했다. 중기는 그런 어머니를 안심시키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저 걱정하지 마시라고, 자신이 꼭 돈을 찾아서 받아내겠다고만 말할 뿐이었다. 중기는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는 요양원 근처를 산책하기로 했다. 원래 살이 쪘던 어머니는 제대로 걷질 못하자, 살이 더 찐 것 같았다. 휠체어에 커다란 짐을 욱여넣듯 힘겹게 어머니를 앉혔다. 요양원이 자리한 산자락에는 이제 벚꽃이 피고 있었다. 서울은 벚꽃이 다 져버린 지 오래인데, 산속의 계절은 그렇게 또 다른 모양이었다.

  "문수는 잘 지내냐?"
  "네. 잘 지내요."
  "내가 걔 밥을 차려줘야 하는데. 걔가 미나리를 좋아해. 미나리나물 해주면 얼마나 잘 먹는지 몰라. 지금 미나리가 나오는데, 문수 생각이 나서. 우리 착한 아들 문수."

  2주 전에 중기는 문수를 보고 왔다. 문수는 용인의 정신병원에 있다. 중기는 새삼스럽게 문수가 그곳에서 지낸 햇수를 세어보았다. 그러니까 한 10년 되었나? 자신이 공무원으로 임용된 이듬해 봄이니까 아직 10년을 채우지 못한 9년이었다. 문수에게 정신병이 발병하지 않았다면, 문수는 의대를 졸업하고 지금쯤이면 의사가 되었을 것이다. 가끔 중기는 자신이 로또에 당첨되는 것과 문수의 병이 나아서 문수가 다시 의대에 복학하는 것, 그 두 가지 가운데 무엇이 더 가능성이 있을지 생각해 보곤 했다. 둘 다 가망이 없는 일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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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두치(咽頭齒) 4


  "아, 내가 아까 약을 먹었나?"

  소설 속의 구만이 항혈전제를 먹었는지 약통을 확인하는 것처럼, 중기도 TV 옆에 놓인 자신의 약통을 확인했다. 중기는 역류성 후두염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주 쉰 목소리가 났고, 가래와 기침도 잦았다. 근처 종합병원의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편도선이 부어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약을 먹어보고, 정 힘들면 편도선 절제 수술을 하라는 말을 들었다. 약은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수술할 생각도 없었으므로, 중기는 목이 아파도 그러려니 하고 지냈다. 4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그러다가 올해 들어서 증상이 더 심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대학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았더니, 역류성 후두염이었다. 의사는 중기에게 위산 억제제를 처방했다. 생활 습관을 바꾸고, 약은 최소한 3개월 이상은 복용해야 한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중기는 속으로 이전에 본 돌팔이 의사를 욕했다.

  중기는 약통에 그대로 있는 약을 보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먹어야 하는 것인데, 깜빡하고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약을 안 먹어서 그랬는지, 저녁 내내 속이 더부룩하고 불편했다. 위산이 역류하면서 목이 아프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중기는 작은 흰색의 알약을 얼른 입안에 넣었다. 약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속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구만에게는 항혈전제가 꼭 필요하듯, 중기에게는 위산 억제제가 필요했다.

  "이 선생, 다음 달부터 월세는 60만 원 보내주쇼."

  "네? 아니, 그럼 10만 원씩이나 더요?"

  "아, 나도 먹고 살기 힘들어서. 빌라 관리며 이런저런 데 나가는 돈이 오죽 많아야 말이지. 나도 오래 생각한 거니까, 이 선생도 그리 알고."

  20세대가 사는 5층짜리 빌라 임대인은 60대 중반의 꼬장꼬장한 늙은이였다. 비쩍 마른 체구에 기다란 얼굴에는 기름기 하나 없었다. 지난달, 중기는 화장실 세면대 수전에 물이 조금씩 새니 수전을 교체해달라고 그 늙은이에게 전화했다. 늙은이는 화장실의 수도 레버를 들었다 놨다를 몇 번 해보더니, 아직 바꿀만한 때가 아니라고 했다. 중기는 물이 새면 수도 요금이 더 나가니까, 바꿔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하지만 늙은이는 손에 묻은 물기를 탁탁 털면서 화장실에서 나왔다.

  "저런 인간이라서, 돈을 모을 수 있나 보군."

  중기는 3만 정도 하는 세면대 수전을 사다가 직접 교체했다. 아마도 주인 늙은이의 수법은 그런 식으로 세입자가 스스로 고치게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수도꼭지 사다가 직접 한 거 맞죠? 우리도 부엌 수도가 물이 줄줄 새는데, 안 고쳐줘서 사다가 했거든요. 진짜 그 늙은이, 하여간 지독해."
 
  중기가 뜯어낸 수도꼭지를 내다버리는 것을 보더니, 2층의 아주머니가 혀를 끌끌 차며 그렇게 말했다. 정말로 그게 주인의 수법이었다. 중기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이 빌라 말고도, 이문동에 3층짜리 건물을 가지고 있는 늙은 약사의 일생을 떠올려 보았다. 그 늙은이라면 약국 손님에게 나가는 비닐봉지 한 장도 아까워할 것 같았다. 하긴, 약국의 비닐봉지는 제약회사에서 영업을 위해 모두 공짜로 주는 것이니 아까울 것도 없겠구먼. 중기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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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두치(咽頭齒) 3

 
  '선생님, 선생님의 글은 너무나도 친절합니다. 좀 더 불친절해야 하고, 과감하게 생략해야 합니다. 인두치라는 상징적 이미지를 끝까지 밀어붙였어야죠. 남편 구만의 이야기에서는 그 상징이 잘 작동하지만, 아내의 이야기에서 인두치는 엉성하게 엮여 있습니다.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충고하겠습니다. 독자를 믿으셔야 합니다. 독자를 믿으면, 구태여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독자는 선생님이 말하고 싶은 것을 상상해서 글을 읽어냅니다.'

  중기는 Chat GPT가 술술 써 내려간 비평을 읽다가, 독자를 믿으라는 부분에서 잠시 멈췄다. 독자라니, 자신에게 독자가 있기는 있나. 중기는 잡다한 초단편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그 블로그의 매일 방문자 수는 10명 안팎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서 중기 자신을 빼면 정말이지 중기에게는 한 자릿수의 독자가 있는 셈이었다. 그 독자들이 매일 왜 찾아오는지 알 수는 없었다.

  나의 독자를 만나려면 책을 내면 된다. 오래전 중기가 생각한 결론은 그러했다. 중기는 여러 출판사에 자신의 글을 보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죄다 거절의 메일이었다. 선생님의 글을 편집부 회의에서 검토했으나, 우리 출판사의 출판 방향과는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쩌면 그 거절의 문구는 한결같은지, 출판사끼리 거절 메일의 양식도 공유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중기는 '인두치'를 써낸 그날도 출판사로부터 거절의 메일을 받았다. 무려 넉 달 만에 받은 메일이었다. 젠장, 그래 당신들한테 맞는 글 뽑아서 잘들 팔아 먹어. 요새 누가 책을 읽느냐고. 생각해 보니, 중기 자신도 언제 책을 읽었는지 잘 기억나질 않았다. 아마도 1년 전쯤에 '소설 쓰기의 기초'라는 책을 읽기는 했다.

  소설의 본질은 재미에 있다. 그 책의 첫 문장은 그렇게 시작했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총을 든 강도라도 등장시켜라. 그 책이 알려준 소설의 세계는 정교한 건축의 세계였다. 중기는 자신이 그런 건축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을지 별로 자신이 없었다. 자신은 잡지를 읽을 때 아무 데나 펴서 읽는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순서대로 무언가를 쌓아가는 것은 중기에게 버거운 일이었다. 중기는 초단편을 써 내려갈 때도 주인공의 이름을 종종 다르게 적곤 했다. 인물의 이름을 지어내는 것은 꽤나 골치 아픈 일이기도 했다. '인두치'의 주인공 구만의 이름은 '앞길이 구만리 같다'라는 문장에서 따왔다. 왜 그 문장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중기는 창창한 젊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이름을 중년의 시들거리는 인물에게 붙여주고 싶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구만은 지쳐있었다. 그는 자기 심장이 병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쓰러졌고, 운 좋게도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구만과 중기는 좀 닮아있는 것도 같았다. 중기도 지쳐있었다. 구청의 환경과 공무원인 중기는 민원 담당이었다. 민원의 대부분은 소음과 관련된 것이었다. 오늘 받은 민원 전화는 아파트 옆 스포츠 센터 볼링장의 소음을 견딜 수 없다는 영감의 전화였다.

  "공무원 선생, 저 드르륵 쿵쿵거리는 볼링장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정말 죽을 것 같지 뭐요. 저승사자가 날 데려가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오는 것 같다니까."

  노인은 천식이 있는지 밭은기침을 연신 해댔다. 그는 가늘지만, 절박한 목소리로 중기에게 호소했다. 하지만 중기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법규에 규정된 소음의 기준은 극단적이었다. 정말로 포크레인 소리가 나는 건축 현장이 아니라면, 그런 볼링장의 소음은 기준의 범위에 아주 안전하게 들어갔다. 그러므로 노인은 앞으로도 매일 저승사자의 방문을 받게 될 터였다.       

  "어르신, 제가 그 볼링장에 전화는 해보겠습니다."

  중기는 사실 볼링장에 전화를 걸 생각은 없었다.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대개의 업주는 심드렁하게 중기의 전화를 받았고, 더러는 짜증을 내면서 공무원이 갑질을 한다고 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중기는 결국 전화로 소음 방지에 대해 계도하는 것을 포기했다. 다만 노인을 안심시켜 주려고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중기는 노인이 볼링장 소리에서 떠올린다는 그 저승사자에 대해 생각했다. 구만에게도 저승사자가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중기는 구만을 죽게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구만이 살아난 시점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인물은 자신을 비껴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심약해져 있으므로 또 언제든 죽을지도 몰랐다. 구만은 쪼그라든 풍선처럼 숨을 가쁘게 쉬는 인물이었다. 중기는 구만이 느끼는 무력감과 불안이 무엇인지 알았다. 어쩌면 구만은 다시 사회로 돌아가지 못할 것도 같았다. 오전의 산책, 매일 점심으로 먹는 라면과 단무지, 백색 소음처럼 들리는 24시간 뉴스 채널까지 구만의 일상은 애벌레의 고치처럼 나름 안온했기 때문이다.

  구만의 고치는 아파트였다. 35살에 당첨된 강동구의 아파트. 하지만 중기는 그 사실을 소설에 쓰지는 않기로 했다. 귀찮았다. 강동구의 아파트가 소설 속에서 어떻게 유기적으로 작동하게 만들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강남의 아파트는 구만에게는 버겁다. 그건 말도 안 된다. 강동구가 적당하지. 구만은 강동구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그 아파트가 구만의 인생에서 그래도 희망으로 남았다는 점에서 중기는 그 자신도 안도감을 느꼈다. 중기는 강서구의 원룸 빌라에서 살고 있었다. 월세였다. 시도 때도 없이 비행기가 지나가는 소음이 들리는 자기 집이 중기는 진저리나게 싫었다. 강동구에는 그 비행기 소음이 들리지 않겠지. 중기는 소설 속의 구만이 어떤 면에서는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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