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이어서 시집 2부를 올립니다. 



탐구생활(探究生活) 1부 링크

https://blog.aladin.co.kr/sirius7/17025932

 

 


2부     명랑(明朗)  



명랑(明朗)


사다새


희망(希望)


빗방울


상괭이


오늘의 날씨


거짓말


월매(月梅) 정육점


눈물길


그렇게


건너가다


싸구려에 대한 명상


빨강


숙이 아줌마


면도날


납골당(納骨堂)


다시마












명랑(明朗) 



이리 오너라


명랑을 가만히 불러낸다

명랑은 거친 맨발에 민머리를 하고 있었다

배움은 짧았으나 성품은 유순하였다

눈은 매우 가늘어서 늘 세상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명랑은 타고나는 것입니다


명랑에게 명랑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물으니

명랑은 나에게 그렇게 답하였다


명랑이 사는 집의 대문은

녹이 슬어서 마치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명랑은 늘 쪼들렸다

그래도 조그만 입으로 웃음을 떨어뜨리면서

칠칠맞지 못하게 돌아다녔다


한번은 명랑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왜 울고 있느냐 물으니

갖고 있는 명랑이 다 바닥이 나서

더는 먹을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나는 명랑에게 딱히 줄 만한 것이 없어서

피(粥)죽을 한 그릇 쑤어 주었다

명랑은 피죽이 붉은 색이 아니라며 신기해 하였다

명랑은 피(粥)를 한번도 본 적이 없으므로

어리석게도 그리 말하였던 것이다


까끌까끌한 알갱이가 가난한 손톱 같아요


마침내 명랑은 죽그릇을 비우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사다새 



죽은 고등어를 먹으며 언제까지 살아야 할까

물음표는 꼬리를 질질 끌면서 창살을 빠져나간다

일부러 울지 않은 것이 몇 해인지 잊어버렸다


이 동물원의 지하에는 하늘다람쥐가 산다

비막(飛膜)이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다람쥐가 물었다


다시, 날아갈 수 있을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육사의 손을 심심해서 쪼아버렸더니

부리를 망치로 부숴버렸다

마시는 물이 피가 되어 흐른다


그 사막에는 피를 마시고

피어나는 들꽃들이 있다

다리가 부러진 친구들이 모두 떠난 곳


조각난 부리를 그러모은다

죽은 표범의 뼈바늘로 정성스럽게 꿰맨다

하늘다람쥐의 갈라진 옆구리도 이어 붙인다

새벽의 모래가 스르륵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희망(希望) 



흐린 표정을 지으며 너는 서 있다

너의 머리 위로는 작은 구름이 떠다닌다

언제든 자그마한 빗방울이 내릴 수 있는


너를 간절히, 여러 번 부른다


너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보았는데

어쩌면 울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너에게 솔기가 닳은 행주를 건넨다

몇 번 쓰다 버릴 행주였지만

정성스럽게 감침질을 한 행주

죽어서 버려야만 하는 것들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습관이 생겼다


너는 아픈 허리를 조심스럽게 펴고

허우적거리며 머리의 구름을 밀쳐낸다

단단한 초록색의 구름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꼬리가 잘린 도마뱀이 춤을 춘다





























빗방울 



세탁실에서는 비가 샌다

빗방울이 구불구불 기어다닌다


나는 빗방울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빗방울이 내 손목을 꺾어버렸다


빗방울에 얻어맞은 세탁기가 소리를 질렀다

꺼억꺼억, 다 죽어갈 것처럼

세탁기는 사실 죽을 때가 되었다

이십 년을 살아온 세탁기는

요새 쇳조각을 뱉어내고 있다


빗방울이 삐딱하게 웃으며

죽어보라 말한다


오늘도 뜨개질을 한다

빗방울의 기대가 어긋난다






























상괭이 



어린 상괭이는 부둣가에 드러누워 있었다

허여멀건한 배를 드러내고는

아기 손톱같은 이빨에는 피가 흥건했다


이런 게 진짜야


사진 선생은 연달아 셔터를 눌러대었다

학생들은 진저리를 치며 자리를 떴다

그 부둣가에는 도무지 사랑할 만한 것이 없었다

어부들은 아침부터 사진 찍는다고 욕설을 퍼부었고

선착장의 인부는 바다를 향해 오줌을 내갈겼다


사각의 프레임 밖에서 버려지고 잊혀진 것들

상괭이가 나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차마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오늘 아침, 상괭이가 웃으며 걸어나왔다

스무 번의 여름이 지나갔다





























오늘의 날씨 



어제의 일기장을 펴고

오늘의 날씨를 적는다

키보드에 커피를 쏟았다

킬리만자로의 농부가 하늘을 본다

커피나무에서 흉년을 수확한다

아직은 불모(不毛)의 계절

오지 않은 즐거운 일기를 기다린다 





































거짓말 



거짓말을 잘하는 비결은

거짓말을 거짓말처럼 하는 것이다


버마비단뱀을 목에 칭칭 두르면

멋진 목도리가 된다

숨이 막히지 않을 정도로만 두르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매끄럽게 속아넘어갔다


진짜겠지


어제는 아침 일찍 커튼을 열자

버마비단뱀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월매(月梅) 정육점 



아주머니는 왼손에 검은색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고기 자르는 기계에 손가락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의 정육점은 엄마의 단골 가게였다


월매(月梅) 정육점


작달막한 체구에 늘 웃는 얼굴이었던 아주머니의 가게는 잘 되었다

아주머니의 남편도 정육점에서 같이 일했지만

내 기억 속에 늘 고기를 썰어서 내어주던 사람은 아주머니였다

가끔은 아주머니의 이름이 월매라고 생각했다


정육점은 아주머니의 살림집과 이어져 있었다

한번은 엄마가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작은 방 문턱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일고여덟 살 된 아이 하나는 TV 만화를 보고 있었고,   

내 또래일지 아니면, 좀 어리게 보이는 형은

방바닥에 엎드려 공책에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어느 날, 아주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육점을 홀로 꾸려가던 아저씨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

내가 중학생 때의 일이다


오늘 아침, 식탁에 가만히 앉아있는데

월매 아주머니가 건너편에 와서 앉았다

아주머니의 잃어버린 손가락에

분홍색 손톱이 잘 자라고 있었다






















눈물길 



다운 증후군을 앓는 늙은 아가씨가

뽀로로 음료수를 마시고는

커다란 콘칩 봉지를 웃으며 뜯는다

너무나 새까맣게 염색을 한 엄마는

딸이 건넨 음료수병을 버리러 일어선다


불행의 얼굴은 판박이처럼 비슷하다

나는 아픈 왼쪽 얼굴을 쓰다듬으며 걷는다


집으로 오는 늦은 엘리베이터에서

9층의 여자와 마주친다

여자에게는 자폐증을 앓는 아들이 있다

여자는 나즈막하게 노래를 부른다


오 솔레 미오(O Sole Mio)


나폴리의 태양은 울고 싶지만

그 눈물길은 막혀있다

여자는 막힌 눈물길을 우회하여

가끔 컹컹 짖는 흰색의 강아지와

행복한 저녁 산책길에서 돌아온다



























그렇게 



엄마는 그릇을 옷장에 넣어둔다

엄마는 자식이 넷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 가운데 하나가 어디 사는지 모른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엄마가 그렇게 되어서


그렇게는 참으로 기이한 말이다

그렇게 인생이 흘러가지 않는 것이 좋다

아주머니의 딸은 그렇게 납골당에 있다


그의 우울증은 오래되었다

나는 그가 잘 버텨내길 바란다

평범하지 않게 그렇게

































건너가다 



그곳을 건너가지 못했다

발만 동동 구르면서

붉은 눈의 항구가 묻는다

건너갈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냐고


늙어버린 배는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끝이 갈라진 노를 힘겹게 저으며 떠난다

밤은 병든 푸른색이다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민머리 독수리가 굽은 등을 쪼아댄다

먼저 죽은 이의 퉁퉁 부은 얼굴이

뱃머리를 붙잡고 울고 있다


후회하는 돛이 세 갈래로 찢어지며

왼쪽 팔에 기다란 흉터를 새긴다

울음이 얼어붙고 말문이 닫힌다

멀었던 귀가 들리기 시작한다


물이 노래한다

물을 건너간다


























싸구려에 대한 명상 



싸구려 복숭아를 샀다

조막만 한 게 단맛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괜찮아, 설탕을 좀 얹어서 먹으면

올해는 복숭아 풍년이라는데

또 싸구려를 사고 말았어


싸구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왜 이렇게 신맛이 많이 날까

신맛의 커피를 혐오한다

커피는 쓴맛, 기름진 쓴맛이 나야 하거늘


싸구려 남방을 입고 나간다

4천 원짜리, 메이드 인 방글라데시

남방을 입을 때마다

무너진 봉제 공장에 깔려 죽은 

먼 나라의 재봉사들이 생각나

언젠가 내가 입을 수의(壽衣)를 입듯

경건한 마음으로


오래전, 싸구려 비디오 가게에서

희귀 영화를 찾아다녔어

중년의 주인 남자는

친구들과 포커를 치고 있었지


타르코프스키(Tarkovsky)의 '희생'이 있나요?


그런 거는 우리 가게에 없어

비웃는 푸른 돛 문신의 팔뚝

불타는 희생의 나무



















빨강 



빨강의 바다로 간다

손이 비대하게 커진 인간들이

타자기를 두들기며 끊임없이 구토하는

더러운 빨강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픈 빨강의 반점이 웃으며 물었다

칼라민을 아무렇게나 발라주고는

빨강의 입을 조심스럽게 틀어막았다





































숙이 아줌마 



숙이 아줌마는 엄마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아줌마는 교육자 집안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자랐는데,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는 바람에 늘 쪼들리며 살았다 

아줌마는 남편을 돕기 위해 이런저런 부업을 하곤 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엄마를 따라 아줌마의 문구점에 갔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아줌마는 돈을 좀 벌어보겠다고 명리학(命理學)을 배우러 다녔다 

내가 재수생(再修生) 때의 일이다

아줌마는 이제 막 학력고사를 치룬 내 사주를 봐주었다

나는 무언가 좋은 말을 듣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나의 기대에 걸맞게 아줌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 너는 정말로 돈을 많이 벌 거야 엄청난 산처럼,

그렇게 넌 돈에 둘러 쌓여있을 거야


숙이 아줌마는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아줌마는 고혈압이었는데도 혈압약을 먹지 않았다

사이비 도사가 그런 약을 먹으면

일찍 죽는다고 한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서른 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버터를 사야지,

내 얼굴에는 기름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면도날 



면도날이 팔랑거리면서 내려온다


면도날 위의 삶

불운은 불공평하게 기울어져 있고

뒤뚱거리며 걷다가 결국 쏟아진다


색색의 조각난 면도날은

아스팔트 바닥에 짓이겨져

불그죽죽한 염료를 내뿜고

더러는 누군가의 머리에 내려앉아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돌아간다


휘청거리면서 면도날 위를 걷는다

저린 왼쪽 손으로 면도날을 쥐었다

면도날이 조용히 웃었다

































납골당(納骨堂)



네 아빠는 명이 짧았지 


엄마는 납골당에 올 때마다 그 말을 한다


비쩍 마른 몸으로 흔들흔들 그네를 타던 아빠를 기억한다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들

옷장 속에서 해골이 비소를 들이키며

어떤 인생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준다

 

나는 옷장의 문을 열었다가 가만히 도로 닫았다





































다시마 



엄마의 집 찬장에서 다시마를 발견했다

몇 년을 묵은 것 같은, 아주 잘 마른 다시마

나는 다시마를 물에 불린다

푸른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요새는 왜 그렇게 흰색 차들이 많으냐?


모두들 흰색의 세계로 도망치고 싶은 것이겠죠

나는 같은 대답을 매일 엄마에게 들려준다


다시마의 세계는 갈색이고 눈물이며 그래서 짠맛이 난다

엄마의 잃어버린 바다와 다시마가 끈적거리는 시간을 천천히 걸어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시집 제목:  탐구생활(探究生活) 




1부     파동(波動)  



파동(波動)


출근(出勤)


39층


교차로


교양(敎養)


연습생(練習生) 


모서리


마두금(馬頭琴)


여름, 오후 4시


노란콩


가려운 어깨


여학생(女學生) 


참기름


곰 인형


꿈의 자객(刺客)













파동(波動) 



윗집의 노인은 초능력이 있어요

파동을 만들어서 공격하는 능력이죠

내가 움직일 때마다 파동이 날 때려요

나는 집에서 다리를 절며 걸었고

입술이 제멋대로 실룩거리며

왼쪽 어깨가 가렵기 시작했어요


병원에 가보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그 사람들은 나에게 구속복(拘束服)을 입히고

실험실에 보내어 나의 뇌를 가르겠지요


노인의 A 파동이 천장에서

노인의 B 파동이 하수구에서

두 개의 파동이 새로운 중첩을 만들어 내는데

나는 이곳 아니면 저곳에

잃어버린 몸뚱이를 찾아서

하루 종일 집안을 헤매고 있죠


당신은 파동이 떠도는 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삶도 소문일 뿐이죠

보잘것없고 위대한 소문

당신은 실험해 본 적이 없죠

그러니 증명할 수도 없는 거에요

























출근(出勤) 



발목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날이 있다

한 며칠 절름거리면 뼈가 조금씩 자란다


컴퓨터를 켜고 녹음기의 붉은 버튼을 누른다

새빨간 눈의 여자가 녹음기를 들고 덤벼든다

어떻게든 자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렇게나 마침표를 찍는 인간들

마침표는 쉼표가 아닌데도

그걸 찍는 것을 멋이라고 생각하는 머저리들

도대체 어떻게 이 회사에 들어왔을까

의문이 뭉게뭉게

먹구름이 곧 쏟아지는 소나기로


팀장님은 좀 싸가지가 없네요


점심을 먹다가 체했다

속이 더 쓰릴 줄 알면서도

커피를 들이킨다

















39층


39층의 방화문은 열리지 않는다
39층 이하의 사람들은 옥상으로 갈 수 없다

며칠 전에는 아파트의 정기 소독이 있었다
허름한 옷차림의 노란 염색 머리 여자가 물었다

소독하시겠어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소독이 필요한 것은 집이 아니라 사람들이다
온몸에 문신을 한 개가 쉴 새 없이 짖는다
복도에 떨어진 커다란 바퀴벌레의 얼굴
여자는 개 목줄을 길게 늘어뜨리며 지나간다

나는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비상계단을 오른다
39층의 방화문 앞에서 녹음기를 켜고 소리를 채집한다
81층의 옥상에 이르는 길고 구불구불한 시간
방화문의 영구 폐쇄를 건의하는 남자의 웃음소리
차별의 몸가짐을 알량한 생애에 걸쳐 학습한 목소리

그들을 올라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좋은 교육을 받지 못했어요

나를 가르친 선생들은 최고의 대학을 나왔고
유명한 상을 받았으며 길고 지루한 책을 써냈다
그러므로 이제 39층의 계단에 쪼그려 앉아
좋은 교육의 시를 쓴다

81층의 시멘트 하늘과
방화문의 부서진 손잡이에 대하여


















교차로  



노인이 교차로를 모조리 들고 간다

힘에 부친듯 오른쪽 팔에서 왼쪽 팔로

노인이 떨구고 간 오늘의 교차로 하나


직원을 구합니다

가족 같은 분위기, 늘 즐겁게 일해요


가족이 무서워진다

가족이 그의 왼쪽 신경을 끊었고

왼쪽 팔뚝에 우는 아이를 심었다

아이는 화를 꾹꾹 참고

교차로의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린다

초록불은 너무 짧다

길을 건너다 치일 뻔 했다

































교양(敎養) 



아침 6시, 여자는 놀이터에 개를 풀어놓는다

종잇장 같은 하얀 강아지가 드러눕고

여자가 우라지게도 짖는다


위에서 음식물 쓰레기가 떨어지므로

나는 늘 투구를 쓰고 다닌다

가끔 아파트의 하수구가 막히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교양 없는 까마귀가 죽었기 때문이다


찻물을 끓이려고 수돗물을 받다가

상어의 이빨 하나를 발견한다

아파트의 저수조에는 30년째 상어가 살고 있는데

오늘 아침 그 상어는 교양을 씹어먹다가

이빨을 부러뜨린 것이다

이곳의 인간들은 이빨이 듬성듬성 빠져있어서

상어의 이빨을 주워다가 대충 끼워 넣는다


싸구려 홍차를 마시면서

푸른 벽돌의 시집을 펼친다

이런 벽돌로 된 집을 지어야지

교양을 꽉꽉 채워 넣은 반듯한 나의 집



























연습생(練習生) 



굴러떨어질 준비는 언제나 되어있다

한번도 죽어본 적이 없으므로

죽어야 끝이 날 것인지 알 수 없다


내일 공연은 없습니다


어기적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진심으로 태연해야 한다

라면 따위를 끓여 먹어서는 안 된다

불어터진 얼굴로는 불가능한 스탠바이(standby)


무대의 한 귀퉁이에 선다는 건

발뒤꿈치에 박히는 가시를 견디는 것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며


고맙습니다


회전하는 무대 장치가 내 발목을 꺾고는

편히 쉬어요

내일은 당신의 허리를 부러뜨릴 테니


살아남은 뼛조각을 맞추며

휘청휘청 내려가는 지하의 계단

축축한 이끼에 진심으로 미끄러진다
























모서리 



냉장고 문을 열다가 왼쪽 발을 부딪쳤다

절름절름 다친 이리처럼 걷는다

먹잇감을 가진 이리를 따라가다가

인정사정없이 뜯겼다

등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하늘은 짙푸르다

돌아갈 집 따위는 언제나 없었다


부러진 발톱을 내려다 본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떨어져 나간 모서리 때문이다

회색의 압력을 견디는 모서리


모서리를 살릴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모서리에 낀 푸른 이끼가

숨을 쉬는 소리를 들었다


이끼가 가느다란 팔을 내밀어

자그마한 집을 짓는다

모서리가 조금씩 자란다




























마두금(馬頭琴) 



나는 이따금 앓아눕곤 하였다

손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였고

혓바닥이 굳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하길

마두금(馬頭琴)을 배우면 나을 거야


이지러진 지붕의 2층에

79살의 마두금 연주자가 살고 있었다


마두금을 배우기에는 너무 젊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펼쳤다

내 앞으로 낙타가 천천히 지나갔다

낙타는 왼쪽 눈이 없었는데

그 눈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낙타에게 우산을 씌워주고는

어긋난 마두금 소리를 흉내내었다

허연 머리카락이 후두둑 떨어졌다




























여름, 오후 4시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혼자

놀이터 옆 벤치에 앉아있다

가만가만 숨을 내쉬며 천천히 부채질한다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누런 염색 머리의 늙은 여자는

비척거리며 걷는 아픈 개를 풀어놓고

말 많은 영감은 젊은 날을 늘어놓는다

누군가 쪄온 옥수수를 나누어 먹으며

그들만의 정겨운 오후 4시


하지만, 오늘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검은색 스카프를 두른 외로움이

할머니의 어깨 위에 앉아서

재잘거리는 소리를 낸다


어디를 가시오?


이쪽 집에서 저쪽 집으로요


행인이 상냥하게 대답했다


























노란콩 



밥 지을 때 넣을 콩을 씻는다

이 노란콩은 콩물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가 시골에서 사 온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콩은 페트병에서 잠을 잤다

10년 동안 노란콩은 썩지도 않았다


이 콩을 농사지어서 팔았던 여자는

살기가 힘들었는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콩을 씻다 말고 콩 하나를 집어서

죽음의 냄새가 나는지 맡아본다

어디서 들으니 오래된 죽음은

지독한 소똥 냄새가 난다고 했다


말간 얼굴의 노란콩은

시치미를 뚝 떼고 눈만 껌뻑거린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는지 나도 몰라요




























가려운 어깨 



불길하게 늙어버린 여자가

조화(造花) 상자를 들고 지나간다


여자를 피해서 걷는다

2년째 어깨가 가렵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부작사부작

불운이 어깨를 파먹는 소리를 듣는다 










































여학생(女學生) 



여학생은 답답하면 5층의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의 높은 창가에 의자를 두고 공부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고장난 화장실


학원의 지하에는 이상한 미로가 있었다

가느다란 뱀이 가끔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연애를 하는 것들은 그곳에서 시시덕거렸다

초록의 썩은 물이 웃음소리와 뒤섞였다


4월, 화장실에서 사고가 있었다

5층 화장실은 폐쇄되었고, 여학생도 학원을 떠났다

미로의 지하와 뱀이 사라진 곳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여학생은 몸이 아프면 화장실 꿈을 꾸었다


은빛의 화장실에는 출구가 없었다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스무 살 여자애가

회색의 수의(囚衣)에 수갑을 찬 채 걸었다

고개를 숙이고 아주 오랫동안 





























참기름 



이 참기름이 마지막이야


옥이 아주머니가 참기름 2병을 짜오면서 말했다

아주머니는 단골 방앗간에 들러서 기름을 짜오셨다


언젠가 방앗간 집 여자가 고개를 숙일 때, 정수리가 보이더라

그런데 기름에 찌들어 머리의 살갗이 노랗더군

30년을 참기름만 짜고 살면 그런가 보다 했다


나는 참기름을 찬장 깊숙이 넣어두었다

5년 만에 이사를 하게 되면서 그 참기름 2병이 나왔다

참기름의 색은 시커맸다

나는 참기름의 뚜껑을 따고 그릇에 떨어뜨려 보았다

기름에 한 개의 눈과 입, 세 개의 발이 생겨났다

그것은 퍼런색의 줄무늬 벌레로 변했다


벌레는 어기적어기적 걷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인간이 나 몰래 딴살림을 차리고 아이를 두었지

더는 살고 싶지가 않더군

내가 죽고 딸도 날 따라왔어


벌레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누런 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벌레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벌레를 하수구에 흘려보냈다

검은 기름이 부엌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곰 인형 



커다란 곰 인형이 이 더운 대낮에

누런 배때기를 드러내고 누워있다

물크러진 코에서는 회색 콧물이 줄줄

튿어진 입에서는 부러진 바늘이 한 움큼

찢어진 분홍 리본을 목에 칭칭 두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비웃자

바늘이 사람들의 눈을 찔러대어서

비명소리가 아파트를 뒤흔들었다

누군가 구급차를 불렀지만

구급차는 아무도 싣지 않고 떠났다


인형이 불쌍하다며 만진 아이

갑자기 기침이 쏟아지면서

천식 환자의 삶이 시작되었다



































꿈의 자객(刺客)



뱀눈의 남자는 암만 봐도 무서워

온종일 꾸물거리는 날 꿈으로

죽은 포도주 냄새가 올라와 


이 집으로 이사 오고 그 이듬해

윗층의 젊은 아가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어떤 죽음은 기억의 둥지에서 잠을 자


할머니는 나쁜 꿈을 꾸면

마당에 녹슨 칼을 세게 내려치곤 했지

나에게는 끝이 살짝 부러진 칼이 있어


뱀눈의 남자와 싸워야지 

사박사박 숫돌에 칼을 갈고

꿈으로 길을 떠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개인적인 작업 일정이 있어서, 당분간 단편 업데이트는 뜸할 것 같습니다.

  글을 쓰게 되면, 다시 올리겠습니다.


  방문하는 독자분들 모두 새해 새로운 마음으로 기쁘게,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 기원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수지와 나


  "정현 씨, 이거 업무용 휴대폰이야. 인턴한테는 이런 걸 주지는 않는데, 요새 책 출간이 몰려서 일이 바빠. 그러니까 전화 오는 거 잘 받아서 업무 일지에 기록해 두고. 물어볼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고. 잘 알겠지만, 개인적인 용도로는 쓸 수 없어."

  정현은 이 대리로부터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새것처럼 보이는 검정색 휴대폰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위에서 시키는 일로 바빴다. 그런데 거기에다 업무용 휴대폰으로 오는 전화 응대라니, 정현은 머리에 무거운 짐보따리 하나를 더 얹은 느낌이었다. 나는 인턴이다. 이 회사의 최말단 인턴이다. 어쨌든 3개월의 수습 기간을 견뎌야 한다.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해내야 한다. 정현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되뇌면서, 건네받은 휴대폰을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안은 자신의 휴대폰을 서랍에 넣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현 씨, 있다가 2시에는 편집부 회의가 있어. 거기 한번 들어가 봐. 내가 편집부 구 대리한테는 말해놨어. 편집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번 보는 거야. 장소는 5층 소회의실."  
  "네, 알겠습니다."

  정현이 업무용 휴대폰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이 대리가 그렇게 말하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오늘은 이래저래 바쁘겠네. 정현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책상 위에 켜진 모니터에는 쓰다만 업무일지 화면의 커서가 깜박이고 있었다. 어디까지 썼더라, 정현은 콧등에 흘러내린 안경을 바로 쓰고는 모니터를 들여다 보았다. 그때였다. 책상 위의 휴대폰에서 징, 징, 하는 진동음이 들렸다. 문자 메시지가 온 모양이었다.

  '칼리 헤어샵 이민정 디자이너입니다. 파마하실 때가 된 것 같아서 연락드려요. 이번 주에 오시면, 신년 할인으로 10퍼센트 할인해 드립니다.' 

  "이게 뭐지?"

  정현은 업무용 휴대폰에 뜬 문자 메시지를 읽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전에 휴대폰을 쓴 사람 앞으로 온 것 같았다. 어떤 여자가 썼나 보네. 칠칠하지 못하게 저게 뭐람. 전화번호 이동을 하려면 깔끔하게 정리를 하던가. 정현은 어쩌면 한동안 저런 쓸데없는 문자에 시달리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약간 짜증이 났다. 미용실 전화번호를 차단 목록에 넣고는 정현은 작성하던 업무 일지에 집중했다.

  '2026년 국가장학금 1차 신청 기한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기한 내에 신청해 주기 바랍니다.'

  "아니, 이건 또 뭐야?"

  국가장학금 신청에 대한 문자 메시지였다. 대학생인가 보군. 2개의 문자 메시지는 업무용 휴대폰의 이전 주인이 여대생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은 정현에게는 하등 쓸데없는 정보일 뿐이었다. 한 번 더, 정현은 그 안내 문자 전화번호를 차단 목록에 추가했다. 정현이 이 대리로부터 휴대폰을 받은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았다. 도대체 오늘 하루에 몇 개의 전화번호가 차단 목록에 더 추가될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아도 업무 일지 작성에다, 출판사에 걸려 오는 문의 전화 응대, 자잘한 외부 심부름까지 해야 하는 정현에게 이 휴대폰은 뭔가 애물단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인턴이라는 자신의 처지에서 싫은 기색을 내비칠 수도 없었다. 모니터의 화면에서는 쓰다만 업무일지의 커서가 깜박거리고 있었다. 모니터 하단에 뜬 시계를 보니, 1시 43분이었다. 2시에는 편집부 회의에 가야만 한다. 정현은 서둘러 오전 업무 일지 작성을 마무리했다.

  "일은 좀 어때요? 이 대리님이 마구 굴려서 힘든 건 아닌지 몰라."

  회의실에 들어와서 막 자리에 앉은 정현에게 말을 건 사람은 편집부의 구 대리였다. 약간 퉁퉁한 체격에 목소리까지 걸걸한 구 대리는 머리까지 짧게 잘라서 남자처럼 보였다. 편집부의 직원은 5명. 그 가운데 맨 막내 사원인 선호 씨만 빼고 모두 여자였다. 출판사도 이젠 여초 직장이 되었나 보군. 정현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위화감을 느꼈다. 정현이 배치된 마케팅부에서도 5명의 정직원 가운데 남자는 이 대리뿐이었다. 

  "아직은 업무 파악을 하느라 좀 정신이 없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병아리 시절에는 다들 그래요. 오늘 회의는 그냥 일상적인 거니까,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요. 메모하거나 그러지 말고. 그냥 수다 좀 떠는 거죠. 업무와 관련된 수다."

  구 대리가 그렇게 눙치는 말에 정현의 긴장한 마음도 조금은 펴지는 것 같았다. 회의의 주제는 새로 출간될 젊은 작가들의 단편선집 편집에 관한 것이었다. 정현은 자신의 자리에 놓인 프린트물을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선집에 실린 작가들의 간략한 소개와 소설의 목차가 적혀 있었다. 책에 실릴 단편은 9편인데, 놀랍게도 그 소설의 작가들은 모두 여자였다. 세상에, 남자 작가들은 전멸한 모양이군. 정현의 관심사는 시였다. 요새 주목받는 젊은 시인들 가운데 여성들이 좀 더 눈에 띄기는 했지만, 정현이 좋아하는 남자 시인들도 몇몇 있었다. 그런데 소설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았다. 만약 괜찮은 소설을 써내는 남자 작가가 있다면, 그 단편선집에 실리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정현은 혼자 속으로 그렇게 반문했다.

  "유리아 작가님은 소설을 2편 보내왔는데, 어떤 걸 뽑는 게 좋겠어요? 다들 읽어본 소감을 말해봅시다. 나는 '엄마는 바다로 갔다'가 좋았는데."

  편집부장이 빠진 회의를 이끄는 사람은 구 대리였다. 구 대리의 말에 이어서 편집부 팀원들의 이런저런 의견 제시가 이루어졌다. 정현은 잘 알지도 못하는 내용이라,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서는 프린트물을 괜스레 뒤적여 보았다. 프린트물의 맨 하단에는 선집에 실릴 평론도 있었다.

  '우리 시대의 작가들은 페미니즘을 근원적으로 장착해야 한다.'

  정현은 그렇게 시작되는 평론을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페미니즘을 말하지 않으면 소설도 쓰지 못하나? 이건 뭔가 강제하는 느낌이군. 정현은 그 평론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 그리 길지 않은 그 글을 읽고 나니, 삶은 계란을 꾸역꾸역 먹다가 목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현은 자신의 텀블러 뚜껑을 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너무 우리들끼리만 말한 것 같다. 정현 씨 이야기도 좀 들어봐야지. 편집부 회의에 들어와 보니, 어때요?"
  "아, 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책이 만들어진다니, 흥미롭네요."

  정현은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편집부의 막내 선호 씨가 정현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에 나온 작가 중에 정현 씨가 읽어보고 관심을 가지는 작가가 있어요?"
  "어, 그게 저는 소설보다는 시를 더 좋아해서요. 김은수 작가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러면, 우리들 회의하는 거 듣는 게 좀 괴로웠겠다. 그래도 간략하게 소감이라도 말하고 회의 마무리하죠."

  구 대리의 말에 편집부 사람들이 정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음, 그러니까 제가 보기에는 이 선집에 실리는 작가들이 다 여성 작가더라고요. 남성 작가의 글도 한 편 싣는 것이 어떤가 싶은 생각도 들고 그러네요. 그러니까 그게, 균형을 맞춘다는 측면에서요."

  정현은 자신의 말에 뭔가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요새 소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한마디 보태려다가 쓸데없는 혹을 붙인 것만 같았다. 정현은 솔직하다 못해 약간은 나이브한 자기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선호 씨, 정현 씨가 읽어볼 만한 책들 좀 챙겨서 줘 봐."

  구 대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회의실 문을 나섰다. 정현은 편집부 사람들이 떠난 회의실 책상에 혼자서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아니, 자신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 않는가. 왜 획일성을 강제하는가? 정현은 살짝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음날, 정현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제 좀 신경을 써서 그런가 보네. 책상 오른쪽 맨 위쪽의 서랍을 열고 타이레놀을 찾았다. 딱 한 알 남은 타이레놀이 참으로 반가웠다. 저 약도 사놔야겠다. 약값도 많이 올랐던데. 정현은 혼잣말을 하면서, 알약을 삼켰다. 건너편 침대의 문국은 정현의 기척에 잠에서 깬 것 같았다.

  "몇 시냐?"
  "이제 8시 반 좀 넘었네. 나 때문에 깬 거야?"
  "깨기는 뭘. 아침잠도 젊었을 적에나 쏟아지지. 이젠 늙어서."
  "웃기는 소리하네. 야, 스물여섯이 늙은 거냐?"
  "늙었지, 늙은 거야."

  정현은 문국의 우스꽝스러운 푸념에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대학에 다닐 때는 공부하느라, 군대에 갔을 때는 얼른 시간이 흘러가길 바라면서, 그러다가 졸업반이 되고 허덕허덕하다가 겨우 인턴사원 명찰 하나 달고 있으니 어느덧 스물여섯이었다.

  "너, 방 비우는 날이 언제더라?"
  "2월 3일. 학사 관리실 게시판에 그렇게 적혀있더라고. 엊그제 문자로도 알려주고. 오늘 주말이니까, 신림동 쪽에 방 좀 알아보려고."
  "내가 같이 가줄까? 혼자보다는 낫잖아."
  "그러면 나야 좋지. 내가 점심 살게."

  정현은 방을 보러 가는 자신과 동행해 주겠다는 문국의 제안이 고마웠다. 정현이 이 학사에서 머물 수 있는 날은 이제 보름 남짓 남았을 뿐이었다. 이 기숙사는 시내 중심가에 자리한 낡은 건물이었다. 정현의 고향 유지가 서울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을 위해 세운 학사였다. 기숙사에 당첨되는 것도 어려운 지방 학생 입장에서 이런 혜택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벽에는 군데군데 금이 가고, 건물의 외벽 페인트칠이 벗겨진 이 학사를 이제 정현은 떠나야만 했다. 정현은 무언가 서러운 느낌도 들었다. 보잘것없지만 작고 따뜻한 방의 아랫목에 있다가 내쫓김을 당하는 것만 같았다. 새로 구해야만 하는 자취방은 어떨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모든 것이 비싼 이 서울 바닥에서 과연 가난한 사회 초년생인 자신이 살만한 집이 있을까?

  그날 하루 동안 정현은 문국과 함께 신림동의 원룸 빌라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집을 찾는 것은 마치 모서리가 맞지 않는 퍼즐을 억지로 구겨서 끼워 넣는 일과도 같았다. 월세가 싼 곳은 화장실이 낡았고, 인테리어가 괜찮아보이는 어느 원룸은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정현이 부동산 중개인이 안내하는 동안, 살짝 벽을 두들겨 보니 '텅텅'하고 울리는 소리가 났다. 말만 원룸이지 싸구려 고시원 방이나 다름없었다. 정현이 보고 나온 어느 원룸 빌라에는 문신한 중년 남자가 드나들었다. 정현은 이 서울 바닥에서 싸구려 월세방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임을 실감했다.

  "젊은 양반, 그렇게 까다로우면 방 못 구해. 돈이 없으면 기대를 좀 접던가."

  정현과 함께 원룸촌을 돌며 방을 보여주던 중개인 영감이 정현에게 한마디했다. 정현은 영감의 좀 무례한 말투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다른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영감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영감의 말마따나 자신은 돈이 없었고, 까다로운 기준도 가지고 있었다.

  "정현아, 아까 봤던 그 전철역 근처 원룸 빌라 말이야. 그 정도면 괜찮은 거 같아. 그 정도 방에 월세 35만 원이면 나쁘지 않아. 관리비 8만 원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다른 데 보다는 깔끔하잖아. 보니까, 드나드는 사람들 행색도 멀끔해 보이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해."
  "영감탱이 말은 그냥 넘겨. 그런 거 신경쓰다가는 속만 상한다."
  
  정현은 문국과 함께 고시촌 근처의 돈가스 체인점에 들어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추운 날 나와서 고생해 준 문국에게 뭔가 괜찮은 것을 사주고 싶었지만, 그 돈가스도 1인분에 15000원짜리였다. 오히려 문국이 그 옆 가게의 12000원짜리 칼국수를 먹자는 것을 정현이 돈까스를 사겠다고 했다. 너무 튀겨서 질깃거리기까지 한 돈가스를 우물거리면서 정현은 가게 밖으로 보이는 고시촌의 거리를 응시했다. 흐린 날씨 때문인지 창밖의 풍경은 어딘지 음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날씨처럼 정현의 마음도 잔뜩 구름이 낀 것처럼 느껴졌다.

  신림동에서 돌아온 그날 오후, 정현은 자신의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사를 하기 전에 미리 버릴 것은 버리고 해서, 가져갈 것들을 간소하게할 생각이었다. 징, 징. 책상 위에 놓아둔 정현의 업무용 휴대폰이 진동음 소리를 내었다. 정현은 주말에도 업무용 휴대폰을 살펴봐야했다. 이 대리가 인쇄소에서 연락올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회사에 두지말고 가져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김수지 님, 롤프 쇼핑몰 물류센터 채용 담당자입니다. 주말 아르바이트 배정이 완료되었습니다. 통근버스 출발 장소는 첨부한 링크를 눌러서 확인해주세요.'

  파마할 때가 다 되었고, 국가 장학금도 신청해야 하는 이 문자의 주인공은 주말에 쇼핑몰 물류센터 알바를 하러 나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여대생의 이름은 김수지였다. 정현은 그 문자 메시지 번호를 수신 차단 목록에 넣기 위해 설정 버튼을 눌렀다. 다소 귀찮은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짜증이 나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 여성이 열심히 살아가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정현은 기묘한 동질감마저 느꼈다.
 
  주말을 보내고 출근한 월요일, 정현은 이 대리와 함께 인쇄소에 가기로 되어있었다. 새로 출간할 시집과 계간지의 인쇄 품질을 보기 위한 외근이었다. 인쇄소라고 해서 뭔가 허름하고 시끄러운 공장 같을 거라고 생각한 정현은 깔끔한 건물의 외관에 좀 놀랐다. 인쇄소 안의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밝은 조명 아래에 자동화된 설비에서 쉴 새 없이 찍어내는 종이들이 반짝거리면서 빛을 내고 있었다.  

  "이렇게 인쇄 과정 전반을 살펴보는 걸, 인쇄 감리라고 하는 거야. 책 출간 전에 인쇄 상태를 보고 조정하는 일이지."

  정현은 이 대리가 담당 라인의 인쇄 주임을 만나는 동안,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출판사 블로그에 올릴 게시글 때문이었다. 그냥 노비가 따로 없네. 사진도 찍고, 전화도 받고, 탕비실 청소도 하고. 정현은 마음에 드는 구도가 나올 때까지, 여러 번 휴대폰의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면서, 최종본을 고르는데 휴대전화가 짧게 2번의 진동음을 내었다.

  '김수지 님의 늘봄 네일 숍 예약이 완료되었습니다. 1월 8일 오후 3시 30분에 뵙겠습니다.'

  주말에 열심히 알바하더니, 그 돈으로 손톱도 다듬나 보군. 수지야, 돈을 힘들게 벌었으면 좀 아껴 써라. 외모, 그까짓 거 다 한 꺼풀이야. 차근차근 돈을 모아야, 나중에 주식계좌 개설할 쥐꼬리만 한 자금이라도 되지 않겠니. 정현은 자그맣게 궁시렁거리면서, 차단 목록에 네일 숍 번호를 추가했다. 젠장, 언제까지 이런 번호들을 눌러서 차단해야 하지? 정현이 꾹꾹 휴대폰의 버튼을 누르고 있는데, 이 대리가 다가왔다.

  "정현 씨, 좀 와서 얘기 나누는 거나 듣지. 뭐해?"
  "아, 네. 업무용 폰으로 자꾸 이전 사용자의 문자메시지가 와서요. 그거 차단하느라..." 
  "그게, 전에 쓰던 폰이 깨지는 바람에 신규로 개통했더니 그런가 보네. 좀 번거로운가? 대부업체 독촉 전화 그런 건 아니지? 한동안 차단 계속하는 수밖에. 점심때 됐으니, 나가서 밥이나 먹자."

  월요일은 언제나 바빴다. 정현은 인쇄소에서 돌아온 후에, 저녁에 있을 저자 강연회 지원 준비 작업을 했다. 미리 건네받은 강연 원고를 대충 훑어보고, 어색한 부분이 없도록 수정했다. 강연이 끝난 후에는 사인회가 있을 예정이어서 펜과 종이도 넉넉히 챙겼다. 정현이 그렇게 준비하고 있는데, 누군가 책상 위에 책 서너 권을 두고 갔다. 편집부의 선호 씨였다.

  "시간 날 때, 한번 읽어보세요."

  책상 위에 놓인 책의 맨 위 표지에는 '세계 페미니즘 걸작 단편선'이라는 글씨가 박혀있었다. 정현은 그 아래 책들의 책등도 살펴보았다. '오늘의 한국 문학', '우리 시대의 젊은 여성 작가들', '페미니즘의 역사'. 정현은 그 제목들을 읽다가 뭔지 모를 답답함이 느껴져서, 책들은 모니터로 부터 좀 먼 구석으로 밀어냈다.

  "아, 이것도 가져가야지."

  정현은 업무용 폰을 들고는, 혹시 자신이 확인하지 못한 전화나 문자 메시지가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새 문자 메시지가 있었는데, 백화점 화장품 매장의 카드 결제 완료 문자였다. 결제 금액은 15만 4천 원이었다. 정현은 물류센터 주말 알바를 하는 여대생의 씀씀이가 좀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은 그렇게 힘들게 아르바이트하면 돈을 좀 아껴 쓰거나 할 텐데, 수지는 그렇지 않았다. 이름이 있는 체인점 미용실에서 파마를 했고, 네일 숍에서 손톱을 다듬었으며,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샀다. 국가장학금 신청을 할 수 있는 요건이 되려면, 그렇게 집안이 여유가 있지도 않을 터였다.

  "수지야, 넌 참 편하게도 산다."

  정현은 카드 결제 알림 문자의 번호를 차단 목록에 추가하고는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자기가 번 돈을 어떤 미래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즉시 현실에 써버릴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정현은 새로 이사할 원룸의 관리비 8만 원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느껴졌다. 여대생 김수지는 그런 자신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인쇄소와 저자 강연회로 바빴던 월요일이 지나고 목요일이 될 때까지 웬일로 업무용 폰의 알림은 조용했다. 정현은 번거롭게 느껴지던 수지와 관련된 문자 알림이 오지 않자,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금요일 아침이 되었을 때, 막 출근한 정현의 업무용 폰에 들어온 문자 메시지가 있었다.

  '김*지님의 그린 비치 호텔 예약이 완료되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진 문자의 내용에는 투숙과 관련된 안내 사항이 있었다. 수지는 강원도 양양의 호텔에서 주말을 보낼 계획이었다. 여대생 김수지는 연애도 열심히 하는가 보네. 정현은 갑작스러운 호텔 예약 안내 문자에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김수지는 정현에게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수지가 주말에 호텔에 가기로 되어있다는 사실은 약간의 배신감마저 들게 했다. 정현은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호텔 예약 안내 전화번호를 차단 목록에 추가했다.

  "어, 세제가 다 떨어졌네."

  토요일 저녁, 정현은 기숙사의 밀린 빨래를 하기 위해 기숙사 세탁실에 있었다. 그런데 세탁물을 세탁기에 넣고 나서 보니, 세제 통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자기가 쓰고 세제가 떨어졌으면 관리실에 말이라도 해놓을 것이지. 정현은 38명이 사는 이 조그만 학사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생각했다. 컵라면 그릇을 치우지 않고 식탁에 놓고 가는 인간, 화장실 휴지를 떼어다가 방에다 놓고 쓰는 인간, 냉장고에 둔 다른 사람의 요구르트를 훔쳐 먹는 인간, 창밖으로 담배꽁초를 내던지는 인간... 인간이란 얼마나 이기적이고 무례하고 어리석은가. 정현은 그 시간에 호텔에서 누군가와 있을 수지는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를 잠깐 생각해 보았다.

  "다음은 사건 사고 소식입니다. 방금 전에 올라온 속보입니다. 강원 방송국의 박충기 기자 연결하겠습니다. 박 기자님, 강원도 그린 비치 호텔에서 투신 사망 사고가 있었다면서요. 어떤 사건인지 알려주시죠."

  정현이 관리실로 내려가려는데, 세탁실 옆의 휴게실에서 뉴스 채널의 속보가 들려왔다. 정현은 그냥 지나가려다가, '그린 비치'라는 단어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린 비치'는 수지가 예약한 그 호텔의 이름이었다. 정현은 TV 앞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네, 사건이 발생한 시각은 오늘 오후 7시 30분경입니다. 투숙자 세 명의 시신이 호텔 1층의 화단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구급대가 출동했지만, 3명 모두 투신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이고요. 사망자는 남자 1명에 여자 2명입니다. 23살 여성 김 모 씨, 25살 여성 박 모 씨, 29살 남성 석 모 씨. 경찰은 이들이 어떻게 만나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조사하는 중입니다."

  "얼마 전에도 이런 비슷한 소식을 전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인터넷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 함께 만나서, 투신 사망하게 된 사건이었는데요. 혹시 이번 사건도 그 사건과 유사점이 있지는 않습니까?"

  "우선, 경찰에서 밝힌 바로는 이들은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경찰은 추가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이들의 소지품과 휴대전화를 수거해서 정밀 감식하고 있습니다. 이후로 조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정현은 갑자기 맥이 탁 풀리면서, TV 앞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낡고 터진 합성 가죽 소파는 정현이 앉자마자 부서질 듯한 소리를 내었다. 자신이 뉴스에서 들은 사망자 23살의 김 모 씨는 수지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추측일 수도 있었다. 주말에 투숙한 그린 비치 호텔에 젊은 여성이 한두 명이겠는가? 최근 몇 년 동안 양양은 주말마다 젊은 사람들이 몰리는 휴양지라고 들었다. 이번 주에 네일 숍에 가고, 새 화장품을 산 수지가 죽음을 택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다음날 새벽, 정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눈코입도 없는 어떤 여자의 얼굴이 도자기처럼 산산조각이 나서 해변가에 흩뿌려져 있었다. 정현은 그것이 수지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지가 이제는 세상에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정현은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씻으려고 화장실에 갔다. 아귀가 맞지 않는 화장실 창틀로 들어오는 겨울바람이 매서웠다.

  "어휴, 내가 미친 거야, 미친 거라고. 알지도 못하는 여자애 하나 죽은 건데."

  정현이 화장실에서 돌아오자, 문국이 졸린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하품하고 있었다.

  "야, 수지가 누구냐? 네가 하도 수지야, 수지야, 하고 불러대서 잠에서 깼다. 옛날 여자 친구야? 아님, 요즘 누구 만나?"

  "아, 아냐,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냐."

  정현은 세게 머리를 내저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새벽에 잠에서 깬 것이 약간은 불만스러운지, 문국은 혼자 궁시렁거리면서 다시 잠을 청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정현은 업무용 폰의 전원을 켰다. 이제껏 차단해 두었던 수지와 관련된 전화번호를 차단 목록에서 모두 해제했다. 만약에 수지가 살아있다면, 그 문자로 무엇이든 연락이 오기는 올 것이다. 정현은 그 전화번호들에서 어떻게든 무슨 연락이 왔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되었다.

  하지만, 보름이 지나는 동안 정현의 업무용 폰에는 수지와 관련된 그 어떤 문자도 오지 않았다. 대신에 정현은 왜 투고한 원고를 읽지 않느냐는 항의 전화를 비롯해, 인세를 언제 입금할 거냐고 재촉하는 작가의 전화 같은 것을 받았다. 그런 전화들을 받을 때, 지치지 않고 대답하는 법은 아주 간단했다. 자신을 기계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정현은 마치 자동응답기처럼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담당자에게 전하겠습니다. 불편을 끼쳐서 죄송합니다."

  정현은 생각이 날 때마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양양 호텔의 투신 사망 소식을 검색해 보았다. 그러나 인터넷 뉴스의 그 어디에서도 후속 보도는 확인할 수 없었다. 매일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세상을 떠난 젊은 사람들의 소식 따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정현은 수지가 확실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정현은 신림동의 원룸 빌라로 이사했다. 짐이라고 해봐야 별것도 없었다. 커다란 여행 캐리어 2개가 정현의 살림살이 전부였다. 학사 관리실에서 작은 승합차로 짐을 실어다 주었다. 정현은  땅값 비싼 서울에서 자신을 4년 동안 품어준 이 낡은 기숙사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이 학사를 세운 고향의 돈 많은 유지(有志) 양반은 지금은 하와이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정현은 얼굴도 모르는 그 영감님이 그곳의 햇살 아래에서 오랫동안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6개월 뒤면 너처럼 이 동네에서 방 구해야겠다."

  문국은 정현이 새 원룸에서 짐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문국은 학비를 버느라, 한 학기를 휴학하고 지방의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학자금 대출이 늘어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 취직이나 할 수 있을까? 넌 그래도 용케 취업해서 인턴이라도 되었는데 말이지. 영문학과는 그래도 불문학과보다 낫지 않냐?"
  "그런 게 어딨어? 어문학 계열은 다들 힘들지."
  "별로 쓸모도 없어 보이는 남의 나라말을 4년 동안 참으로 열심히도 배웠네." 

  정현은 영문학, 문국은 불문학 전공이었다. 문국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정현의 원룸을 나섰다. 문국을 배웅하고 나서, 정현은 이제는 자신의 방이 된 304호로 들어왔다. 방에는 독서실에서나 볼 법한 작은 크기의 책상이 창가 쪽에 놓여있었다. 정현은 아까 책상 위에 둔 업무용 폰의 화면을 열었다. 혹시라도 연락이 온 것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수지야, 호주로 떠난다는 소식은 들었어. 떠나기 전에 한번 얼굴이라도 보면 좋겠는데. 연락 좀 주라.'

  수지는 살아있었다. 아니, 죽은 적이 없었다. 정현은 그 문자 메시지를 보고 나서, 비로소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저 뉴스 소식만 듣고서, 수지가 죽었다고 단정해 버린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현이 수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여대생이라는 그 한 가지뿐이었다. 그럼에도 정현은 김수지라는 그 여학생이 무척 가깝게 느껴졌다. 어떻게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에게서 그런 친근한 느낌이 들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수지는 이제 호주로 떠날 예정이었다.

  정현은 수지가 가게 될 호주라는 나라를 떠올렸다. 코알라와 캥거루가 있는 나라. 국토의 대부분이 황량한 사막인 나라. TV의 여행 프로그램에서 본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와 원주민의 신성한 산 울룰루(Uluru)가 있는 나라. 정현은 언제쯤 자신은 그 나라를 가보게 될까를 생각했다. 어쩌면 먹고사느라 바빠서, 살아있는 동안 그 나라를 가볼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아이구, 박 부장님. 잘 지내십니까? 밥은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시나요? 남의 돈 떼먹고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월요일, 출판사에 가장 먼저 출근한 정현이 탕비실 청소를 하고 있을 때 업무용 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정현의 귀에 쇳소리의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전화를 잘못 거셨습니다. 이 전화는 문재 출판사 마케팅부 전화입니다."
  "어이, 이봐. 왜 이러셔. 목소리를 들어보니 댁이 박 부장이 아닌 건 알겠어. 하지만 거기에 박 부장이 있는 건 내가 다 알고 있거든. 박 부장 좀 바꿔봐."
  "선생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번호를 잘못 아셨어요. 전화 끊겠습니다."
  "그래, 끊어봐라 끊어봐! 너, 박 부장한테 그대로 전해. 내가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돈 받아낸다고. 돈 안갚으면 명대로 못살 거라고..."

  정현은 위협적으로 을러대는 남자의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전화를 끊고는, 그 번호를 바로 차단 목록에 추가했다. 도대체 과거에 이 전화번호를 썼던 박 부장은 어떤 사람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번호는 뭔가 마가 낀 것 같았다. 오후에 그 쇳소리의 남자는 다른 번호로 전화를 또 걸어왔다. 여대생 김수지가 가고, 새로운 인물 박 부장이 정현의 일상으로 들어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버터(Butter)


  "뭘 그렇게 오래 들여다봐? 그 코트 마음에 들어?"
  "응. 지호 아빠, 이 코트 좀 만져봐 봐. 얼마나 부드러운지 몰라. 보니까, 캐시미어가 47퍼센트나 들어갔어. 그래서 그런가 너무 부드러운 거야."
  "그렇게 마음에 들면 그냥 하나 사. 가만있자, 가격이 얼마야?"
 
  경희는 코트 소매에 달린 가격표를 들여다보는 남편의 표정을 살폈다. 경희의 예상대로 남편은 흠칫 놀라더니, 얼른 가격표가 붙은 소매 깃을 내려놓았다.

  "350이라니, 이건 좀 비싸네. 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사줄게."

  35만 원짜리였다면, 경희의 남편도 흔쾌히 그 코트를 사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경희가 본 그 코트의 가격은 350만 원이었다. 그것도 연말 세일 행사로 나온 가격으로 그 코트의 가격은 원래 450만 원이었다.

  "코트에 금가루라도 뿌렸나, 뭐가 그렇게 비싸?"
  "아마, 그 코트가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 모양이지."

  경희와 남편은 그렇게 말을 주고받으면서 매장에서 나왔다. 그들이 나온 매장의 간판에는 '앤 마리(Anne Marie)'라는 검은색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그저 플라스틱 글자에 불과해 보일 뿐인 그 로고에는 고고한 매력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할리우드 여배우들과 세계의 갑부 여성들이 사랑하는 코트. 그것이 '앤 마리'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결정했다. 경희는 그저 만져보기만 했을 뿐인 캐시미어 코트에서조차 주눅이 드는 느낌이었다. 그 매장에 있는 캐시미어 100퍼센트 코트는 유리 상자 안에 진열되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가격표가 붙어있지 않았다. 무척 비싼 옷이겠지. 저런 옷을 돈 주고 사서 입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경희는 새삼스럽게 그런 것이 궁금해졌다.

  휴일의 프리미엄 아웃렛 매장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원래 몰리는 방문객들에다가, 연말연시 선물을 사기 위해 온 사람들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나오는 데에만 30분이 넘게 걸렸다. 겨우 지상 주차장으로 나오자,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이 차의 유리창에 부딪히며 흘러내렸다.

  "이거 좀 길이 막히겠는걸."

  남편은 약간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와이퍼의 작동 레버를 아래로 내렸다. 쓱싹쓱싹, 하는 소리와 함께 와이퍼가 빗방울들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난 괜찮으니까, 천천히 가요. 아무래도 빗길 운전은 조심하는 편이 낫지."

  경희는 뒤쪽으로 서서히 멀어지는 아웃렛 매장을 한번 쳐다보았다. 350만 원이라고 적혀있는 코트의 커다란 가격표가 건물의 꼭대기에서 깃발처럼 펄럭이는 것만 같았다. 그냥 입어보기라도 할 걸. 매대의 옷걸이에서 코트를 꺼내지도 못하고, 그저 코트 원단만 만져보고 나온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매장 안에는 코트를 걸쳐보고 거울에서 맵시를 보는 사람들도 여럿이었다. 그런데 경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지도 않을 거, 괜히 입어보면 더 감질날 것도 같았다.

  "지호 녀석, 그냥 지방대 약대라도 들어가면 얼마나 좋아? 그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공대를 뭐하러 간다고 그러는지. 나 원 참."
  "나나 당신이나 걔 고집 못 꺾어. 알면서 그래요?"
  "아니까 속이 터지지. 어른들 말 들어서 하나도 손해날 게 없는데. 아마 나중에 후회하겠지. 그러다 정신 차리면 좋은 거고."

  지호는 나름 괜찮은 수능 점수를 받았다. 부부는 아들에게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약대 진학을 권유했지만, 지호는 듣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물리학을 공부하겠다고 했다. 지호는 명문대의 공대에 합격했다. 하지만 부부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월급쟁이로 산다는 것이 파리 목숨처럼 얼마나 손쉽게 내쳐질 수 있는 것인지 지호는 알지 못할 터였다. 그렇다고 그들의 자식이 학자로 대성할 그런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것이 부부의 마음을 갑갑하게 만들었다. 포근한 겨울 날씨에 내리는 비가 뿌연 안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경희가 보기에 지호의 앞날은 그 안개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안개 속에 있는 것은 아들의 진로뿐만이 아니었다. 자신과 남편의 미래도 그러했다. 회사에서 중년의 관리직 부장으로 남편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부부에게 어떤 제대로 된 노년의 청사진이 있었던가?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없었다. 아무런, 그 무엇도 없었다.

  "사탕 가진 거 있어? 있으면 하나 좀 줘 봐."
  "응. 핸드백에 늘 갖고 다녀. 나이 드니까 자꾸 잔기침이 나서." 

  그들의 차는 횡단보도의 신호대기에 걸려 잠시 멈추었다. 경희는 핸드백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어 남편에게 건넸다.

  "어쨌든 올해는 무사히 넘어갔군. 작년에 희망퇴직으로 몇 명이 쓸려나간 줄 알아? 139명이야. 뭔가 회사에서 칼을 갈았다는 느낌이 들더라고. 이 악물고 말이야. 나중에 들으니, 그 퇴직 비용을 계열사에서 꾸어서 마련했다더군. 그러니까 돈 많이 드는 늙은 직원들 나가라, 이거지. 돈만 있었다면, 올해도 내보냈을 텐데 못했지. 하지만 내년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회사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거야?"
  "안 좋지. 근데 그게 직원들 때문이 아니라, 시대적인 흐름 때문에 그래. 그러니 구조조정에 들어가는 거지. 웬만한 연구 개발도 다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돌리고. 아마 몇 년 이내에 그룹에서 계열사 정리하고, 본사를 그냥 관리부서 규모로 줄여버릴 것 같아."

  경희는 남편에게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건데?'라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런 걸 물어보았자, 별다른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남편의 기분만 처지게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든 걸까?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경희는 돈을 맘껏 써본 적이 없었다. 

  "넌, 아주 돈을 많이 벌게 될 거야. 네 주변을 돈이 산처럼 둘러쌀 거야."

  경희는 숙이 아줌마가 자신에게 해준 그 말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숙이 아줌마가 세상을 뜬 지 얼마나 되었더라. 경희는 속으로 그 햇수를 헤아려 보았다. 벌써 20년이네. 숙이 아줌마는 늘 돈에 쪼들리며 살았다. 그건 아줌마가 가난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기 때문이다. 아줌마의 남편은 별다른 기술도 없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장사를 했다가 망하기를 반복했다. 아줌마는 어쨌든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다양한 부업을 했다. 역학을 배운 것도 그랬다. 사주 관상을 볼 줄 알면 돈이 좀 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경희가 수능시험을 치른 다음날, 아줌마는 경희의 집에 왔다가 그 말을 해주었다.

  그때부터 그 말은 경희에게 하나의 거대한 주문이 되었다. 어쨌든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역학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짜 아줌마의 점괘이기는 했지만, 경희는 그 말을 믿었다. 그래,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난 부자로 살아갈 운명인 거야. 경희는 사는 것이 힘들 때마다 그 말을 되새기곤 했다. 하지만 그 부자의 운명은 쉽사리 다가오질 않았다.

  "아니, 폭팔이 뭐야? 폭발이지. 어휴, 진짜 요새 애들 맞춤법이 엉망진창이네."

  안개를 뚫고 아웃렛에서 돌아온 그날 저녁, 경희는 자기소개서 원고를 교열하다가 헛웃음이 나왔다. '무난하다'를 '문안하다'로 쓴 것을 하도 읽다 보니, 경희는 '문안하다'가 맞는 말처럼 느껴져서 고치지 않고 넘어가는 때도 있었다. 이런 애들이 대학에 가서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한단 말인가? 교정이 끝난 자기소개서 원고 뭉치를 식탁 한쪽 구석으로 밀어놓고는, 경희는 삐딱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저녁 내내 경희가 교정을 본 자기소개서는 세 건. 한 건당 3만 원씩 받고 있으니까, 9만 원을 번 셈이다. 그것들을 들여다보느라, 고개를 숙여서 그런지 경희의 목은 뻣뻣해져 있었다.

  "아, 먹고 살기 참 힘들다."

  도대체 숙이 아줌마가 말한 돈의 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렇게 힘들게 일을 하고 나면, 경희는 자신도 모르게 숙이 아줌마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 아줌마가 그냥 초짜 역술가라서 엉터리 말을 한 것일 뿐이야. 그런 말을 믿다니, 나도 참 어리석지. 그렇게 되뇌면서 경희는 찻물을 끓이기 위해 식탁에서 일어났다.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저녁, 보일러의 실내 설정 온도는 17도였다. 아무리 한파주의보가 내렸다고 해도, 실내 온도가 그 정도까지 내려가는 일은 없었다. 당연히 경희의 집 보일러는 돌아가지 않았다. 스웨터에 오리털 파카를 껴입은 경희는 펭귄처럼 보였다. 옷을 껴입으니, 걸음걸이도 둔했다. 천천히 뒤뚱거리면서 경희는 가스렌지 앞으로 걸어갔다. 타타타... 가스레인지의 불꽃이 점화되는 소리를 냈다. 

  "홍차가 다 떨어졌네."

  경희가 찻잎 쪼가리 몇 개 남은 홍차 캔의 반짝거리는 바닥을 보는데,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아침 추운데 출근하려면 힘들겠네. 경희는 보일러의 실내 설정 온도를 23도로 높였다. 웅, 하는 소음과 함께 보일러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자신이 추운 것은 견딜 수 있어도, 돈을 벌어오는 가장의 육신을 힘들게 하는 일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홍차 캔을 하릴없이 내려놓고, 경희는 차를 끓이기 위한 것을 찾아보았다. 냉장고 한구석에 말라비틀어진 생강차 조각이 든 통이 보였다. 저걸 우려서 마시면 되겠네. 마침내 찻물이 끓는 소리를 내었다.

  알싸한 생강의 맛을 느끼면서, 경희는 아까 작업해 놓은 교정 원고를 인터넷에 업로드했다. 경희가 해놓은 일감을 올린 곳은 교정 전문 플랫폼(platform) 사이트였다. 그 사이트는 등록된 구직자들에게 들어온 교정 원고 일감을 배분해 주고, 그에 따른 수수료를 받았다. 이 사이트에서 일반적인 자기소개서 1건을 교정해 주는 비용은 5만 원이다. 그러니까 경희는 플랫폼 사이트에 2만 원의 중개수수료를 지급하고, 그 차액인 3만 원을 받는 셈이다.

  "어휴, 날강도 놈들."

  경희는 역의 플랫폼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누군가 자신의 지갑에서 아무렇지 않게 정해진 돈을 빼가고 있었다. 그것이 플랫폼 노동자로서 경희의 현실이었다. 경희는 오늘 일한 15만 원어치의 일감에서 6만 원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기가 막힌 시스템이었다.

  '문화 여고 37회 동창회의 밤 행사 일정'

  휴대폰을 잠시 들여다보던 경희는 동창회 알림 문자를 발견했다. 그 문자에 이어서 온 문자는 미주의 것이었다.

  '이번에는 너도 와라. 이제 애도 대학에 보냈겠다, 마음 편하게 보자고.'

  아들의 입시 때문에 마음 졸이며 지내온 3년이었다. 남의 자식 잘되었다는 소식 들으면 속이 시끄러워질까 봐, 경희는 동창회에 가지 않은 지가 꽤 되었다. 하지만, 지호가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 보니 경희의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궁금해지네.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경희는 식탁 건너편, 불이 꺼진 지호의 방을 응시했다. 아들은 친구들과 졸업 여행을 간다고 제주도로 떠났다. 이제, 아들을 곁에서 품어온 스무 해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조만간 지호는 자신의 날개를 펴고 부부의 곁을 떠날 것이다. 경희는 부부만 남게 될 그 집의 시간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앤 마리에서 기쁜 크리스마스 소식을 전합니다. 이제까지 없었던 특별한 세일!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이 행운을 꼭 붙잡으세요.'  

  경희는 동창회에 입고 갈 옷을 생각하다가, 오늘 아웃렛에서 본 앤 마리 코트를 떠올렸다. 그래서 들어가 본 앤 마리 홈페이지에서는 세일을 알리는 작은 팝업창이 떴다. 세일 품목을 클릭해서, 자신이 오늘 본 코트가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경희가 쇼핑몰에서 상품을 정렬하는 순서는 낮은 가격순이었다. 경희가 보았던 연갈색의 그 캐시미어 코트가 제일 상단에 떴다. 코트의 할인된 가격은 250만원이었다. 경희는 자신의 통장 잔고가 얼마인지 헤아려 보았다. 그 통장은 원고 교정으로 받는 돈이 입금되는 통장이었다. 아마도 거기에 남은 돈은 270만 원 언저리였을 것이다. 지호의 대학 등록금에 보태기 위해서 모아놓은 돈이었다. 앤 마리 코트를 사고 나면, 남는 돈은 20여만 원 정도가 될 것이다.

  그 코트는 꼭 사야만 하는 옷인가? 그렇게 스스로에서 물으면서, 경희는 코트 사진이 뜬 상품 페이지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아직까지 그런 가격대의 옷을 사 입어본 적이 경희에게는 한 번도 없었다. 겨울을 나는 옷은 10년도 넘은 오리털 롱패딩 하나뿐이었다. 다운 패딩이라고는 하지만, 깃털 함유량이 50퍼센트 정도라서 패딩은 좀 무겁게 느껴졌다. 거기에다 봉제선으로 가끔 삐져나오는 깃털들 때문에 패딩은 얇은 담요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솜으로 된 싸구려 패딩을 하나 샀지만, 막상 사고 보니 그 무게감이 거추장스러워서 옷장에 처박혀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옷의 무게에 민감해졌다. 적어도 250만 원짜리 앤 마리 코트는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캐시미어가 들어갔으니 따뜻하기까지 할 것이다. 경희는 그 코트가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옷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나가는 동창회에 낡은 롱패딩 따위를 입고가고 싶지는 않았다.

  경희가 그 코트의 구매 버튼을 눌렀을 때, 경희가 주문하려는 M 사이즈의 잔여 수량은 겨우 2벌뿐이었다. 경희는 마치 홀린듯 코트의 카드 결제를 끝냈다. 그렇게 코트를 주문하고 나서, 경희는 250만원이라는 코트의 가격을 다시금 생각했다. 그 돈은 경희가 3만 원짜리 교정 원고를 83건을 하고도 1만 원이 더 필요한 금액이었다. 노안이 온 눈으로 눈알이 빠지게 모니터에 뜬 글자들을 들여다보면서 받는 돈이었다. 경희는 자신이 충동구매를 한 것이 아닌지 잠깐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 코트를 산 결정을 구태여 되돌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판매자 앤 마리에서 발송한 상품을 금일 배송할 예정입니다. 배송 예정 시간은 16시에서 17시 사이입니다.'

  사흘 뒤, 그렇게 앤 마리의 코트가 경희의 집 현관문 앞에 놓여있었다. '개봉 시 커터 칼 사용 절대 금지', 라고 시뻘건 색깔의 경고문이 커다란 박스 상단에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경희는 박스 옆면으로 이어진 테이프의 끝부분을 찾아서 손톱으로 테이프를 뜯어냈다. 갱지 같은 종이 완충재가 잔뜩 들어있어서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덜어냈다. 비닐 포장에 싸여있는 연갈색의 앤 마리 코트를 꺼내는 경희의 손이 떨렸다. 그저 코트일 뿐인데도, 그 코트에서는 신비로운 기운이랄지 그런 것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코트를 입어보니, 사이즈도 자신에게 잘 맞았다. 무엇보다 옷이 전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름의 두께감이 있는데도, 어떻게 코트를 입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코트의 질감이 무척 부드러워서 옷이 쉽게 상하지는 않을까 싶은 걱정도 들었다. 경희는 코트 소매를 손가락으로 한번 꾹, 하고 눌러보았다. 그러자 코트의 옷감은 눌린 자국도 없이 되살아났다. 비싼 옷은 이렇구나. 경희는 감탄했다.

  "야, 너도 앤 마리 코트 샀냐? 여기가 동창회장이 아니라, 앤 마리 매장 같네."

  동창회가 열리는 호텔 로비에서 경희를 본 미주가 그렇게 말했다. 미주가 입고 있는 코트도 앤 마리였다. 검정색의 코트를 입은 미주는 원체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이라 마치 화보 모델처럼 보였다.

  "넌 남이 입은 코트만 봐도 다 아냐?"

  경희는 자신이 말하지 않았는데도, 단번에 알아 본 미주가 신기했다.

  "그런 게 보는 눈이라는 거야. 명품이란 게 왜 있겠니? 알아보는 사람들끼리만 알아보는 거지. 너 돈 좀 썼겠다."
  "돈 좀 쓴 게 아니라, 무리를 했지. 아웃렛에서 봤는데, 정말 사고 싶더라고."
  "앤 마리 코트가 예쁘기는 하지. 예쁜 정도가 아니라, 사람을 혹하게 하거든. 나도 이번에 세일해서 또 하나 샀으니까."

  미주의 남편은 대학교수였다. 미주는 친정이 부유한 편이라, 남편의 월급만으로 살림을 꾸리면서 살지는 않았다. 그런 미주에게 앤 마리 코트는 경희처럼 무리해서 사야만 하는 옷은 아니었다.

  "자, 그럼 어디 한번 들어가서 구경이나 해볼까? 누가 누가 자랑을 늘어지게 하는지."

  미주는 코트의 느슨해진 벨트를 힘을 주어 매고는, 로비의 소파에서 일어났다. 경희는 미주의 뒤를 따라 쭈뼛거리면서 동창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고급 호텔의 행사장 분위기가 경희에게는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경희의 눈에 미주가 신고 있는 붉은 색 하이힐과 손에 든 녹색 핸드백이 보였다. 명품을 잘 모르는 경희였지만, 딱 봐도 그 신발과 가방은 비싼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경희는 자신의 굽 낮은 검은색 단화와 바닥의 귀퉁이가 살짝 헤진 회색 핸드백을 보았다. 250만 원짜리 앤 마리 코트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아들이 이번에 의대에 붙었다면서?"
  "아휴, 그래. 우리 민준이도 애를 썼지만, 나도 정말이지 피를 말리면서 살았다니까."

  경희와 미주가 앉은 옆 테이블에서 수선스러운 말소리가 들렸다. 의대생 아들을 두게 되었다면서, 한껏 고개를 세운 사람은 문영이었다. 저렇게 잘난 척하는 건 여전하군. 경희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람의 본성에 대해 생각했다. 문영의 아버지는 중소기업체 사장이었다. 원체 돈이 많은 집안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들조차 문영에게는 좀 비굴하게 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문영은 공부를 그리 썩 잘하지는 못했다. 그저 그런 대학을 졸업하고 피부과 의사와 결혼했다. 청담동 사모님 소리를 들으면서 편하게 살아온 문영이었다.

  "아들이 쟤 머리를 닮지는 않았나 보네. 지방대 의대이기는 해도, 어쨌든 의대는 의대지."

  미주가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이죽거렸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주의 밝은 귀는 문영이 그 테이블에서 나누는 대화를 쫓아가고 있었다. 미주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경희도 그러했다.

  "남편이 나한테 정말 수고했다면서, 사고 싶은 걸 말해보라는 거야. 그래서 전부터 눈여겨 본 이 옷을 샀지."

  문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의자에 걸어둔 자신의 코트를 가리켰다.

  "이게 캐시미어 100퍼센트인데 정말 옷이 가벼워. 처음 입었을 때부터 느낌이 달라. 마치 나한테 딱 맞는 맞춤옷 같아."
  "캐시미어 100퍼센트는 들어만 봤는데, 정말 고급스럽다. 그런데 이런 옷은 얼마나 해?"

  문영의 옆자리에 앉은 동창이 문영의 자랑에 장단을 맞추면서 말을 이어갔다. 문영은 코트의 가격을 묻는 동창의 말에 동창의 얼굴을 잠깐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천이백만 원. 옷이 주는 만족감을 생각하면,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야."

  문영의 그 말을 듣던 미주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심사가 뒤틀린 것처럼 보이는 미주와는 달리, 경희는 오히려 호기심이 일었다. 천이백만 원짜리 코트는 대체 어떻게 생겼나, 문영이 앉은 의자에 걸쳐둔 코트에 눈길이 갔다. 진회색의 그 코트는 자신이 입은 코트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두께감은 더 얇아 보였고, 디자인도 무척 단순했다. 경희는 천 이백 만원짜리 코트를 비싸지 않다고 말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했다. 갑자기 자신이 입고 있는 250만 원짜리 코트가 싸구려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경희야, 여기 공기가 좀 탁하지 않니? 행사 시작하기 전에 바깥바람 좀 쐬고 올까?"
  "그래. 어째 나도 머리가 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미주는 벗어두었던 코트를 걸쳐 입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희의 마음속에서는 괜히 왔다는 생각이 슬슬 몰려오기 시작했다. 자신은 여기에 왜 오려고 한 것일까? 명문대 공대에 진학한 아들 자랑을 하기 위해서? 아니면 밖에서 앤 마리 코트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서?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냥 답답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매일 저녁 식탁에서 눈이 빠지게 원고를 교정하는 일상이 지겨웠다.

  "너, 아직도 담배 피우니?"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는 미주를 보면서 경희가 말했다. 미주는 고등학생 때부터 담배를 피웠었다.

  "응. 그런데 많이는 안 피워. 일 년에 한 서너 번? 전번에는 집 근처 공원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아들 녀석한테 딱 걸렸지 뭐야. 근데 걔가 뭐라고 그러는지 알아? 용돈 안 올려주면 할머니한테 이르겠대. 경희야, 내가 자식한테 협박을 당하고 산다. 하하..."

  미주는 어이없다는 듯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야, 네 할머니도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렇게 받아넘겼다니까. 나 원 참."
  "동우는 내년에 고 3이지? 이제 너도 뒷바라지하려면 힘들겠다. 난 어쨌든 후련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야."
  "공부 잘하는 자식 두는 게, 여자한테는 트로피 같은 건데 말이지. 경희 넌 그런 트로피 하나는 있는 셈이야."
  "트로피? 그런 건, 장식장에 한번 넣어두면 꺼내볼 일 없잖아. 자식은 자식대로 자기 인생을 사는 거지. 난 그저 매일 빠듯한 삶이 버거운걸."

  그렇게 말하는 경희의 눈에 호텔 입구에 세워진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들어왔다. 'Merry Christmas!' 글자를 빛내는 금색의 전구가 마치 금화처럼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문득, 오래전 숙이 아줌마가 자신에게 말해준 돈의 산을 생각했다. 힘들 때마다 그것이 운명이라고 믿었던, 돈의 산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은 늘 돈에 쪼들렸다. 그것은 매우 복잡한 삶을 산다는 뜻이기도 했다. 경희는 큰돈을 써야 하는 어떤 선택을 할 때, 매번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만 했다. 이것이 나을지 저것이 나을지, 그 선택이 실패했을 경우에 대한 것까지 미루어 짐작해야만 했다. 최저가에 최적화된 삶. 중산층의 언저리를 맴돌지만, 언제든 추락해버릴지도 모르는 삶. 그것이 자신과 남편 앞에 놓인 현실이었다.

  디너로 나온 스테이크는 덜 익은 것이었다. 허기 때문에 몇 조각을 먹기는 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경희의 속은 불편했다. 혼잡한 주말 저녁의 지하철을 타고서는 경희는 힘겹게 집으로 돌아왔다. 경희의 코트는 지하철의 붐비는 승객들에 밀려서 싸구려 담요처럼 짜부라든 것 같았다.

  "개 발에 편자로군."

  아파트 공동 현관 출입문에 다다른 경희는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4자리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자, 전등이 켜지면서 출입문이 열렸다. 경희가 출입문을 통과하는 순간, 갑자기 문이 세게 닫혔다. 깜짝 놀란 경희가 뒤를 돌아보니, 닫힌 문틈 사이로 자신의 코트 자락이 끼어있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경희는 코트를 세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코트가 주욱 찢어지는 소리를 내었다.

  "아니, 이게 무슨..."

  몇 초만에 문은 다시 열렸다. 하지만 경희의 250만 원짜리 코트는 너덜거리고 있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경희는 집으로 들어왔다. 낡은 구두에 화풀이하듯, 신발을 벗어서 현관에 내팽개쳤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연말 모임이 있어서 나간 남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거실에 발을 내딛자, 냉기가 뼛속을 타고 전기처럼 흘렀다. 겨우 기운을 차리고는 식탁 의자에 앉아서, 경희는 코트를 벗어서 살펴보았다. 코트의 뒷자락이 사선으로 찢어져 있었다.

  "아, 이건 수선도 할 수 없겠네."       

  코트가 솔기를 따라 뜯어졌다면, 어떻게든 수선해서 옷을 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단 자체가 찢긴 것을 이을 방법은 짜깁기뿐이었다. 앤 마리 코트를 짜깁기해서 입고 다니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우스꽝스러웠다. 경희는 불편했던 속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냉장고에 탄산수를 넣어둔 것이 떠올랐다. 그거라도 한 모금 마시면 나아질 것 같았다.

  탄산수 한 병이 냉장고 문 안쪽에 있었다. 그걸 꺼내는데, 그 위 칸에 굴러다니는 버터 조각이 눈에 띄었다. 작은 플라스틱 용기에 든 버터였는데, 소비기한이 1달이나 지난 것이었다. 그런 것조차 버리는 것이 아까웠다. 경희는 탄산수는 꺼내지 않고, 그 버터 조각을 꺼냈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서 버터의 포장지를 뜯었다. 버터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경희는 손가락으로 버터를 푹, 찍어서 먹어보았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기름이 목을 타고 술술 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돈이란 삶을 매끄럽게 만들어 주는 버터기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남은 버터를 손가락으로 찍어 먹는데, 녹아버린 버터기름이 식탁 바닥에 내던져둔 코트에 떨어졌다. 연갈색의 캐시미어 코트가 버터를 받아먹고 헤벌쭉하게 웃고 있었다.  





--------------------------------


  가끔 글자로 된 꿈을 꿉니다. 오늘 새벽에 꾼 꿈에는 '閉(닫을 폐)'라는 글자가 보였습니다.

  올해의 마지막 단편을 썼습니다. 기다려준 독자분들을 생각했어요.

  새해에 또 다른 단편으로 여러분과 만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