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 되어 인간을 밀어라 - 산문의 향기 005
나쓰메 소세키 지음, 미요시 유키오 엮음, 이종수 옮김 / 미다스북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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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고나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가 생각났다. 열 일곱살이었던가, 범우사에서 나온 푸른색 표지의 <마음>을 읽었던 것이. 돌이켜 보면 소설의 내용이 온전히 이해된 것은 아니었고 그것이 주는 쓸쓸하고 애잔한 느낌만이 두고두고 남았다. 그리고나서 이십대에 들어와서 그 소설을 다시 한번 읽었고, 그 때에서야 마음 속 깊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공감할 수 있었다. <그후>, <문>, <행인>, <한눈 팔기>, <산시로>와 같은 작품들을 몇년의 간격을 두고 접하게 되면서 소세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되었다. 나이에 따라서 하나의 작품을 이해하는 폭이 달라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소세키의 작품들은 이십대 후반이나 삼십대에 들어서면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소세키가 쓴 편지글 가운데 그의 인간적 면모를 잘 살펴볼 수 있는 글들로 엮인 이 책에서 이 위대한 작가는 자신에게 드리워진 후광을 내려놓고 일상의 옷을 입은 편안한 모습을 보여준다. 친한 친구, 아내, 신문사의 동료, 문학계의 동료와 후배들, 지인과 독자들에게 보낸 편지들은 소설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작가의 일상과 세상에 대한 견해, 품성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정부 장학생으로 가게 된 영국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소세키의 모습이 매우 잘 드러나 있다. 머나먼 타국에 있으면서도 아내 교코의 틀니 맞추는 일에서부터 늦잠을 자지 말라는 당부, 아이들의 교육에 이르기까지 소세키는 세세한 관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생활고로 아이들 키우는 일에 여념이 없는 아내가 답장을 자주 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그것을 서운해하며 노여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가정내에서의 모습과 함께 작가로서의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정진하려했던 소세키의 노력도 잘 나타난다. 문부성에서 수여하려는 문학 박사 학위를 끝끝내 거절하는 소세키의 의지가 담긴 여러통의 편지에서는 그가 "박사"라는 호칭이 주는 명예 보다도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더 소중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밖에도 아사히 신문사 시절 직장인으로서의 갈등과 고민, 후배 작가에게 주는 진심어린 충고들이 담긴 편지들은 소세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인간적 면모를 투명하게 비추어주고 있다.

  오직 편지글로만 엮여있다는 점 때문에 소세키의 이름을 처음으로 듣는 독자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으므로 그의 작품 한두 편은 접하고 읽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더 낫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소세키를 전혀 모르는 독자라 하더라도 이 책을 통해 예민하고 올곧은 영혼을 지닌 작가의 모습에 흥미를 느끼고 그의 작품들을 찾게 되는 것도 좋은 독서 체험이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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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문 안에서
나쓰메 소오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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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의 모든 것에 대해 객관적으로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나는 소세키의 글을 읽으며 그것을 실감한다. 소세키에 관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빠져들 수 밖에 없고 열렬히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유리문 안에서"는 소세키가 쓴 자신의 이야기다. 물론 그의 소설들 가운데에 자전적 이야기가 어떤식으로든 들어있지 않은 경우는 드물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책은 그 모든 이야기들의 원형이랄까, 출발점이 될 수도 있는 단초들을 제공한다. 양자로 보내야했던 불우한 어린 시절, 늘 신경쇠약과 질병에 시달렸던 괴로움,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보이는 인간적인 면모들, 세상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 이 모든 것을 소세키는 자신의 차분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자신은 삶 보다 죽음이 더 고귀한 것이라고 믿고 있으면서도 삶의 고통으로 죽어야할지 살아야할지를 고민하며 찾아온 여인에게 결코 죽지말고 살아달라고 당부하는 모습에서 소세키의 마음 속 깊이 흐르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삶에 대한 의지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런가하면 집에서 키우던 개와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들에서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같은 작품이 어느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일상의 삶 속에 스민 사유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짐작도 해보게 된다.

  인간의 마음안 그 광대무변한 영역을 평생토록 탐험하고 그것을 글로 써내었던 소세키. 그가 남긴 훌륭한 문학 작품들의 원류를 궁금해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봐야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는 이 위대한 작가가 직접 쓴 삶의 여정이 솔직담백하게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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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큐슈에서 버스 납치 사건이 발생한다. 생존자는 단 세명. 운전기사 사와이 마코토(야쿠쇼 코지 분)와 어린 타무라 남매(배우들은 실제로 남매이다)가 그들이다. 끔찍한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기는 했지만 세사람의 인생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2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 마코토의 반복되는 잠적으로 그의 부인은 지쳐서 떠나버리고, 타무라 남매의 엄마는 다른 남자와 떠나고 얼마 안있어 아버지마저 교통사고로 죽는다. 마코토는 마음을 잡고 살기 위해 형님의 집에 머물면서 모처럼 건설 현장에 취직해서 열심히 일하고, 타무라 남매는 말을 잊은채 사람들과 단절돼어 집에만 머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마을에서는 여성들이 연쇄적으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마코토는 살해범으로 의심받아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그를 형과 형수, 조카마저 의심하자 마코토는 남매를 찾아가 함께 살자고 제안하면서 그들의 기이한 동거는 시작되는데...

  데뷔작 "헬프리스"로 영화세계에 발을 들인 감독 아오야마 신지는 이 영화로 2000년 칸느 영화제에서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상을 수상하면서 새롭게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 영화, 그런데 정말 예사롭지 않다. 러닝타임이 3시간 37분이나 되는데도 그의 치밀한 연출과 밀도있는 이야기 구성은 관객을 영화로 끌어들여서 시간마저 잊게할 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이 떠나는 발견의 여정을 함께 하게 만든다. 특히 특수한 현상을 거쳐 나온 독특한 색감의 흑백 화면은 영화속의 배경이나 인물이 현실도 꿈도 아닌 그 중간 지점의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무겁다. 비극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평범한 삶, 마을의 연쇄 살인 사건. 이처럼 전혀 일상적이지 않을 것 같은 사건이 어느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는 점이 이야기의 시작이 된다.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끔찍한 사건 때문에 자신의 내면을 강탈당하고 공허하게 떠도는 세명의 주인공들은 치유와 회복을 위한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나오키와 코주에 남매, 그리고 야쿠자로부터 목숨을 잃을 뻔한 경험을 지닌 남매의 사촌 아키히코와 함께 버스 여행을 떠난 마코토. 납치 사건이 일어났던 현장을 출발점으로 하고 떠난 그 여행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유레카... 그들이 발견한 것은 바깥의 풍경이나 사람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마음안에 있는 것이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황폐해질 수 있으며 바닥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불러오는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것인지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지나가는 마을에서도 여성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마코토는 그제서야 나오키가 피폐해진 내면의 상처와 그것이 가져다준 공허로 인해 살인을 저질러 왔음을 알아채고 자수를 권유한다. 마코토는 씻을 수 없는 살인의 죄를 지은 나오키를 깊은 포용력과 사랑으로 감싸며 결코 스스로 목숨을 끊지 말라고, 자신은 나오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영화는 마코토를 통해 상처입은 자의 생에 대한 희망과 무참하고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놓지 않는 사랑과 포용의 모습 또한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것임을 조용한 목소리로 일러준다.

  나오키를 자수시키고 마코토는 코주에를 데리고 바닷가로 간다. 납치 사건 이후로 말을 잃은채 살아온 코주에는 오빠를 보내는 아픔 속에서도 마침내 자신의 내면의 상처를 응시하고 삶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그가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약돌을 아빠와 엄마, 오빠와 아키히코, 납치범과 마코토의 이름으로 차례로 부르며 산 위에서 던지고난 후에 비로소 화면은 컬러로 바뀐다. 되돌릴 수 없는 사건, 기억과 상처, 남아있는 삶. 과연 마코토와 코주에는 행복이라는 이름을 만날 수 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도 여전히 길 위에 서있는 그들이 어디로 떠날지 모르지만 더이상 과거는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삶은 때론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을 응시하고 그 안에 잠겨있는 어두움마저도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에게만 희망의 한자락을 발견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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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기다림 - 바깥의 소설 23
샤를르 쥘리에 지음, 이재룡 옮김 / 현대문학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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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바깥의 소설이라는 테마로 발간된 샤를르 쥘리에의 소설집에는 가을 기다림, 마리아, 소용돌이 이 세편의 글들이 실려있다. 작가가 오늘날의 프랑스 문단의 지배적인 경향과는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추구해왔기 있기 때문에 "바깥"에 있게된 것인지는 모르나, 어떤이에게는 그가 바깥에서 쓰는 글들이 반갑고 그리웠을 것이다. 그의 글은 카레르나 노통의 문체처럼 감각적이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읽는 이가 무언가 본질적인 것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다면 충분히 마음안에서 공명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길을 찾는 과정의 한 방법으로써 글쓰기를 받아들인다는 작가의 태도는 독자에게 즐거움이나 신기함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 구도자의 수행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년전 화제가 되었던 노희경의 TV드라마 대사를 떠올렸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러했다. 사랑은 교통사고와 같은 것이라고. 사고가 젊은이 늙은이,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사랑도 그러하다고...  

  세편의 글에 나온 주인공들은 우연한 계기로 만난 아름답고 분별력 있는 여성들과 사랑에 빠지면서 이전까지의 삶을 돌아보게 되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인생의 행복에 대한 갈망에 눈뜨기 시작한다. 이러한 설정 자체로만 보자면 통속 소설의 일부와 맞닿아 있다는 느낌도 들 수 있지만 작가의 역량이 두드러지는 것은 그러한 만남 이후에 주인공들의 내면을 탁월하게 그려내는 데에 있다. 인물들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교통사고와도 같은 사랑의 만남에 전적으로 환호하고 긍정하는 대신에 떨림과 두려움이 가득한 마음을 안게된다. 그 기나긴 고통과 아픔의 시간을 거쳐 비로소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되고 사랑과 행복을 향해 두팔을 벌리게 되는 것이다. 샤를르 쥘리에는 소설이라는 틀을 빌어서 가공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기실 작가의 살아온 이야기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독자로 하여금 품게 만들만큼 글 속에는 진정성이 흐르고 있다.

  최근 국내에 많이 소개되고 있는 대개의 프랑스 작가들의 소설들이 난해하다거나 마음 깊이 와닿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볼만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 문학의 바깥에는 중심과는 또 다른 글쓰기와 작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 책은 고요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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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에게 자신의 사랑이 받아지길 기대하며 고백한 후에 되돌아 오는 것이 외면과 거절이라면 당사자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괴로울까? 같은반의 동급생 요시다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 이토는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거기에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아이들에게는 게이라고 놀림을 받는데 그를 좋아하는 여학생 아이하라만이 친구가 되어준다. 반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하라에게 묘한 호기심과 연민을 느끼게된 요시다는 그것이 사랑의 감정으로 변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자신을 향한 이토의 마음은 외면한채 요시다는 방학이 되자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기 위해 아이하라의 고향을 알고 있는 이토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밤바다에서 함께 만난 세사람은 서로의 진심을 마주하게 된다.   

  그 자신이 게이이기도 한 감독 하시구치 료스케는 이 영화 "해변의 신밧드"로 세계의 유명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자신의 이름을 단번에 알렸다. 단순한 학원 드라마라고 하기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인물들의 섬세한 내면과 감정의 표현들은 너무나도 빼어나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퀴어 영화로 분류하기도 쉽지 않다. 감독은 십대의 혼란스러운 성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인간관계의 근원까지 탐구해나가는 저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왜 내가 사랑하는 그대는 나의 얼굴을 보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대는 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에 매혹되는가? "해변의 신밧드"에 나오는 이토, 요시다, 아이하라가 꿈꾸는 사랑은 서로 만날 수 없는 곳을 향하고 있다. 과연 이 세상에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랑을 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세상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사랑 보다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이의 시선이 이미 다른 곳을 향해있는 어긋난 사랑이 더 많은데도 알려지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그대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라. 그는 그대의 얼굴을 보고 있는가? 그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시선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또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그대를 향한 누군가의 또 다른 시선이 있는지 둘러보라. 이 세상에는 단지 마음만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가슴아프고 슬픈 일인지에 대해서도...

  이 영화의 제목이 왜 "해변의 신밧드"인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감독은 왜 그런 제목을 붙였을까? 세명의 주인공들은 밤의 바닷가에서 서로의 진심을 알게되고 비로소 사랑하는 이의 얼굴 뿐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이의 얼굴도 마주하게 된다. 더 넓은 세상이 보고 싶어서 모험을 떠나는 신밧드처럼 준비가 되어있다면, 우리는 삶이 보여주는 진실의 얼굴과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시구치 료스케는 이 영화를 보는 이에게 함께 그 해변가에 서보지 않겠느냐고 진지한 얼굴로 물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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