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비가 연이어 내리면 평소에는 실개천이던 집근처의 천변은 삽시간에 불어나곤 했다. 그렇게 비가 많이 온 뒤끝이면 천변에는 늘 사람들이 모여서 물구경을 하는 것을 본다. 심지어는 비가 오는 와중에도 우산을 쓰고 나와서 구경을 하는 것도 보았다. 나도 가끔은 산책나가는 길에 궁금해서 먼발치에서 천변의 물이 얼마나 불었는지 보곤 했다.


  물구경을 하러 나온 사람들은 대개 나이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느해에는 비가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 그해에 그 물에 휩쓸린 사람이 몇명이었는지, 자신이 살면서 본 큰 홍수는 어떤것이었는지,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을 읊어대며 흐르는 물을 보고 있었다. 올해처럼 긴 장마가 이어져서 천변이 범람 위기에 갔을 때도 그러했다. 도로 밑까지 천변 물이 불어났는데도, 사람들이 떼를 지어 물구경을 하러 나와 있었다. 아, 대체 물구경이란 것이 무엇이길래 저러는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가하면 불구경이라는 것도 있다. 어렸을 적 기억이 난다. 지금의 잠실이 재개발되기 이전의 5층짜리 아파트 단지였던 시절, 그곳에서 어느 아파트에서 불이 났다 하면 삽시간에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은 그곳에 몰려가서 불구경을 했었다. 불자동차라고 하는 소방차 구경을 하려고 아이들도 달려갔다. 사람들은 불난 집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별별 이야기를 하면서 화재가 다 진압된 후에도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것을 누군가의 불행을 단순히 어떤 즐거운 구경거리로 여긴다고 보기만은 어렵다. 어떤 이들에게 이 도시의 삶은 너무나 무료하고 삭막하기 짝이 없어서, 큰 비가 와서 천변이 불어나는 것이나 주변의 화재 사건은 지루한 일상을 뒤엎는 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구경꾼의 역할을 기꺼이 자청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싸움구경이 있다. 아직도 기억나는 인상적인 일이 있다. 몇년 전의 일로 기억되는데,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늦여름 저녁이었다. 건너편 아파트에서 뭔가 깨부수고 악다구니를 쓰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후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나와서 피를 토해내듯 울음을 쏟아내었다. 뭔가를 큰소리로 말했는데, 자세히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자신의 남편과 가족을 향한 원망이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었다.


  거의 난동에 가까운 수준이어서 그 누구도 여자를 말릴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경비조차도 가까이 가질 못하고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었다. 아파트에서 젊은 남자 둘이 나왔다. 처음에는 그 두 사람이 여자의 가족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아주머니 왜 그러세요, 진정하세요, 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울면서 악을 썼다. 그러다 나중에는 분을 못이겨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짓찧고 자신의 몸을 마구 때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위험하다 싶었는지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여자를 감싸안았다. 여자의 울음소리는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러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는 남자의 부축을 받으며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고, 그 모든 소동은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베란다에서 그 모든 것을 보고 있던 나는 뭔가 기이한 감동을 느꼈다. 한 인간이 고통스러워하는 다른 인간에게 건네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따뜻한 위로를 본 느낌이었다. 그것은 분명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와 함께 분별력이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성별과 연령을 떠나 그런 순수한 위로를 생판 모르는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일은 무척 까다롭고 어려운 일이다. 섣불리 그런 시도를 하다가는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오고 불유쾌한 일을 겪을 수 있다. 오늘날 도시에서 살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관심'과 '외면'이라고 무의식 속에 각인되어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물구경, 불구경, 싸움구경, 그리고 도시의 구경꾼들. 나도 그 구경꾼들 가운데 한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삭막하고 거대한 도시의 어떤 사람들은 그 구경꾼의 역할 대신에 사건 속으로 직접 들어간다. 그들의 온기가 있기에 이 세상은 더 차가워지지 않는 것이란 생각이 문득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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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 절망의 섬에 새긴 유배객들의 삶과 예술
이종묵.안대회 지음, 이한구 사진 / 북스코프(아카넷)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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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에 내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낙심하고 있었을 때, 친구가 휴대폰 문자로 보내준 글귀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하늘이 큰 일을 맡기려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시련과 고통을 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겪었던 어려움은 위인이 겪는 그런 것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글귀만큼은 마음에 큰 위로가 된 것 같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유배"라는 역경에 처했던 사람들이다. 그 역경의 길고 짧음이나 정도의 차이는 사실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것을 이겨내고 그 후에 입신양명을 했느냐의 여부도 내게는 큰 인상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역경 자체,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들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가 더 흥미롭다.  

  어떤 이는 울분을 이기느라 술을 벗삼아 무수한 시편을 남겼고, 또 어떤 이는 눈부신 학문적 업적을 이루어냈다. 누군가는 유배에서 풀려나 정승의 반열에 올라 천수를 누리기도 하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유배지에서 비참한 생을 마쳤다. 그들이 유폐의 시간동안 이루어내었거나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시기의 삶도 인생에서는 "살아있는 소중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의 경험이야말로 새로운 삶에 대한 발견의 여정과도 맞닿아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발견의 여정에 충실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깊은 울림을 남겼다. 유배지 흑산도에서의 시련과 고통을 학문으로 승화시킨 정약전은 그것을 증명한다. 

  밤늦게 몇장 보려고 펼친 책을 끝까지 다 읽게 만든 데에는 이 책에 실린 아름다운 사진들도 큰몫을 했다. 오랜 세월의 내공이 느껴지는 사진들은 직접 그곳에 가보지 못하는 이들의 눈을 호사시켜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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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다스리기를 위한 글쓰기
베스 제이콥스 지음, 김현희 옮김 / 학지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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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근처 천변을 산책하면서 보게 되는 새들을 언제부터인가 눈여겨 보게 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새는 왜가리이다. 얼마전 폭우가 그렇게 쏟아지던 날에는 비를 철철 다 맞으면서도 다리밑이나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않고 물가에 꼿꼿하게 서있는 것을 보았다. 홀로 그렇게 있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애잔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 모습이 떠올랐다. 예기치 않은 불편하고 속상한 일들 때문에 감정이 상할 때, 그 감정의 폭우를 피해야한다고 느끼면서도 피할 수 없어서 그냥 그대로 감내하고 마는 모습이 비오는 날의 왜가리와 겹쳐졌기 때문이다. 

  이 책이 제시하는 글쓰기는 어쩌면 그런 감정의 폭우를 막아주는 우산과 같은 역할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우산 장만하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무엇보다 솔직하게 자신과 직면할 용기가 있어야 하고, 글쓰기에 애착이 있어야 하며, 그리고 가장 중요한 끈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적 배경지식이 있는 이라면 이해하기에 별 무리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가 보기엔 딱딱하고, 책의 내용에 접근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저널 쓰기에서 요구하는 내용과 세부적인 항목들은 단순한 쓰기의 차원을 넘어선다. 번역이 잘 읽히게끔 매끄럽게 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책에서 제시하는 저널 쓰기의 방법들은 자신의 감정을 잘 살펴볼 수 있게 만드는 통찰을 제공해준다.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겪는 불편한 감정의 폭우가 쏟아지는 날, 자신만의 글쓰기 우산을 갖고 있다면 견디는 일이 훨씬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보다 세밀하게 잘 들여다 보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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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스크리아빈 : 피아노 작품집
스크리아빈 (Alexander Scriabin) 작곡, 오그돈 (John Ogdon) 연주 / EMI(수입)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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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개인적으로 스크리아빈은 라디오를 통해 어쩌다 듣기는 했어도 굳이 음반을 구매할 필요까지 느끼지 못했던 작곡가였다. 그런데도 이 음반을 구매한 이유는 순전히 존 오그던 때문이다. 그가 몽퇴와 함께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을 한번 들어보고는 그야말로 반해버렸다. 그것은 뭐랄까, 땅에 내려꽂히는 강렬한 번개와도 같았다.  

  역시, 오그던이 들려준 스크리아빈은 정말 훌륭했다. 이 음반은 오그던이 어떤 피아니스트인지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명징하고 힘있는 타건, 극단의 열정과 과감한 개성, 물결치듯 흘러내리는 음악적 감수성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이 음반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 행운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특히 첫번째 CD에 실린 피아노 소나타 연주는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과 깊은 여운을 남긴다.  

  불행하게도, 오그던의 넘치는 재능은 그 자신의 삶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는 정신분열증과 조울증으로 상당한 고통을 겪었다. 증상이 심해져서 한동안 정신병원에서 지내야만 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피아노에 대한 열정은 정신적인 고통마저도 뛰어넘는 것이었다. 오그던은 병원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로 하루에 세시간씩 매일 연습을 했다고 후에 고백했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을 쉬게하지 못한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은 아니었던듯 하다. 

  이 음반을 듣고 있으면,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쓰러지는 위기 속에서도 피아노를 쳤던 그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아직 그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를 들어보지 못했다. 스크리아빈만큼이나 오그던의 라흐마니노프도 뛰어날 것이다. 피아노에 대한 극단의 열정에 휘감긴 이의 흔적이 그 음반에도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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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바흐 :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VoxBox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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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집에 있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의 LP 커버 해설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연주자 빌헬름 박하우스를 "비르투오조"라고 소개해놓았더랬다. 아주 어릴적이라 그 "비르투오조"란 말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면서도 그 단어가 주는 압도적인 느낌에 아마도, 대단하다는 뜻일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요즘의 소소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낙소스 온라인에 접속해서 새로운 연주자들을 발굴(!)해내는 것이다. 훌륭한 연주자들의 음반을 하나씩 발견해가면서 느끼는 것은, 예전의 대가들의 연주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 같은 것이라고 할까. 재능이 넘치는 연주자들은 널리고 널렸지만, 인생의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진정한 비르투오조를 발견하기란 참으로 쉽지가 않다.  

  바이올린에 있어서 나의 베스트 음반들은 오이스트라흐와 그뤼미요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들은 아론 로잔드의 연주는 새로움을 넘어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 이런 연주자가 있었구나하는 탄식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물흐르는듯한 보잉과 넘치는 감성으로 빚어낸 로잔드의 바이올린 연주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준다.   

  한때, 그뤼미요의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듣고는 더이상 이 곡의 다른 음반을 살 일이 없을 거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로잔드의 연주를 듣고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로잔드는 자신의 연주로 진정한 비르투오조란 무엇인지 듣는이로 하여금 절절히 느끼게 만든다.  

  올해 나이가 여든둘, 그를 가리켜 사라져가는 마지막 대가라고 하는 것은 매우 정당한 평가일 것이다. 이런 바이올리니스트를 언젠가 또 만나게 될 수 있을까. 그의 연주를 들으면서 어릴적에 각인되었던 "비르투오조"란 단어를 떠올린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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