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Yol, 1982)'이라는 터키 영화가 있다. 내가 그 영화를 처음 본 것은 1994년, MBC 주말의 명화에서 였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래전 이야기다. 교도소에서 임시 휴가를 받아 나온 5명의 인물들의 이야기. 영화 속 끝없이 펼쳐진 설원, 각각의 인물들이 풀어내는 이야기에 가슴 먹먹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아, 터키에서도 저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있구나...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그랬었다. '국경의 법칙(Law of Border, 1966)'도 터키 영화다. 감독은 외메르 뤼프티 아카드, 주연 배우는 일마즈 귀니. 이 영화에서 감독과 공동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연기도 했던 일마즈 귀니가 바로 '욜'의 감독이었다.

  '국경의 법칙'은 터키-시리아 국경 부근에 사는 가난한 이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가진 것이라고는 척박한 모래 땅 뿐인 가난한 이들은 국경 지대를 넘나들며 밀수로 먹고 산다. 그러나 그 일은 목숨을 건 도박이나 다름없다. 국경 지대에는 국경 수비대가 설치한 지뢰들이 가득하고, 히디르(일마즈 귀니 분)를 비롯한 밀수업자들은 국경 수비대와 늘 마찰을 빚는다. 새로 부임한 수비대장 제키는 히디르를 설득해 위험한 밀수일을 그만 두게 하려고 한다. 또한 마을에 학교를 세우는 일에도 협조를 구한다. 히디르는 어린 아들 유수프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학교 세우는 일을 돕고, 밀수일도 그만 둔다. 한편, 히디르와 경쟁하는 밀수업자 알리 첼로는 히디르와 동료를 제거하고 자신이 밀수일을 독점하려고 하는데...

  이 영화의 화질은 아쉽게도 그리 좋지가 않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오래된 필름. 내가 본 것은 2011년에 복원된 필름인데도 그렇다. 영화가 그렇게 된 데에는 터키의 복잡한 현대사와도 관련이 있다. 1980년에 일어난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는 사회 비판적인 영화들을 모조리 없애버렸고, 그 과정에서 이 영화는 단 한 벌의 카피본만 남았다. 그것도 온전한 상태가 아니어서 복원이 쉽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감상시 그런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볼만한 가치가 있다.

  시나리오를 쓴 일마즈 귀니는 쿠르드족 출신으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 그의 관심사는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었다. 영화 배우의 길에 들어서서 나름대로 인기를 얻었던 그는 당시 터키의 유명한 감독이었던 아카드를 찾아간다. 아카드는 귀니가 가져온 시나리오를 현실에 맞게 각색할 것을 충고했다. 귀니는 국경 지대의 주민과 밀수업자들을 실제로 만나보고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국경의 법칙'을 찍게 되었다. 영화는 피폐한 국경 마을을 배경으로 가난한 이들의 고통, 근대와 전근대의 충돌, 선인과 악인의 대결, 이런 다양한 요소들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터키의 웨스턴'이라고 종종 소개되기도 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그렇기도 하다. 히디르와 알리 첼로의 대결이 긴박감 넘치는 총격전으로 펼쳐지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웨스턴'의 외피를 입은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에는 다른 근원적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학교'로 대변되는 국가 권력은 근대를 상징한다. 유목과 밀수로 먹고 사는 마을 사람들은 낙후되고 무지한 전근대를 상징한다. 학교를 여는 일에 반대하는 마을의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애들이 학교에 다 가버리면 양들은 누가 돌보냐구!"

  그들에게 아이들은 소중한 노동 인력으로 취급된다. 19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의무교육은 아동 노동의 폐해를 막기 위한 제도였다. 마을에 부임한 여교사는 히디르에게 유수프의 미래를 생각해 보라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국가 권력의 직접적 대변자인 경비 대장, 학교의 여교사, 그들은 히디르와 마을 사람들에게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다. 교육은 시간과 돈이 드는 일이며, 밀수 말고 당장 먹고 살 방도는 가망성이 없는 농사 뿐이다. 히디르는 다시 예전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간다. 큰 양떼를 국경 너머로 이동시키는 돈벌이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알리 첼로 일당과 벌이는 싸움은 히디르를 돌아올 수 없는 국경 너머로 몰아세운다.

  아카드 감독은 전근대에 머문 가난한 이들이 근대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겪는 비극을 충실하게 그려낸다. 의외로 흑백 필름의 촬영과 현상이 아주 잘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는데, 대부분 야외 촬영으로 이루어진 장면들에서 그 정도로 영화를 뽑아낸 감독의 역량이 돋보인다. 또한 히디르와 동료들이 알리 첼로 일당을 처단하는 장면에서 점프컷 편집으로 이야기를 빠르고 간결하게 진행시키는 것도 눈길을 끈다. 영화를 보면서 '아이구, 감독님 영화 열심히 찍었군요'하는 소리를 했더랬다. 

  주연을 맡은 일마즈 귀니는 진중하고 균형잡힌 연기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아카드 감독과 함께 작업하면서 영화 연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영화 이후 그는 자신의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아카드 감독에게도 귀니와의 작업은 그 자신의 영화 세계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성 짙은 그의 후기 작품들은 1970년대에 나왔기 때문이다. '국경의 법칙'을 걸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재능을 막 꽃피우려는 영화인과 오랜 경력을 쌓은 대가의 협업은 독특하고 눈길을 끄는 영화를 만들어 냈다. 이 영화는 분명 자신만의 고유한 색채를 가지고 있다. '터키의 웨스턴'이라는 소개는 그다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국경과 경계를 넘어선 그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 영화 '국경의 법칙'은 오늘도 자신을 알아줄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출처: itpworld.word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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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남자가 있다. 양주 회사에 근무하는 서른 여섯의 샐러리맨 에부리만(Everyman의 일본식 발음)은 모든 일에 지루함을 느낀다. 그의 유일한 위로는 '술'이다. 어느날 우연히 술자리를 함께 한 잡지사 편집자들로부터 글쓰기를 제안받는다. 떠밀리다시피 잡지 기고 작가가 된 에부리는 자신의 삶과 주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수필로 써나간다. 잡지에 실린 에부리의 글은 의외로 독자들의 호응을 받고, 급기야 '나오키 문학상'후보에 오른다. 회사에서 별다른 존재감도 없고, 술이나 좋아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던 에부리의 평판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나오키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그는 축하의 술자리에서 마음속 깊이 감추어둔 울분과 고통을 털어놓는데...

  오카모토 키하치 감독의 1963년작 '에부리만 씨의 우아한 생활(The Elegant Life of Mr. Everyman)'은 나오키상 수상작인 야마구치 히토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이다. 영화의 초반부는 에부리와 가족의 일상을 코미디의 느낌을 담아 보여준다. 에부리는 빠듯한 살림살이에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다. 구멍이 난 낡은 런닝셔츠와 암시장에서 파는 군복을 개조한 양복에 대해 설명할 때에는 웃음이 터진다.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관객들은 에부리가 전중파 세대(戰中派, 2차 대전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로 겪었던 삶의 역경들을 알게 된다. 오직 자신만 아는 철없는 아버지의 뒤치다꺼리도 에부리를 힘들게 한다. 키하치 감독은 영화의 서사를 에부리의 내레이션과 함께 애니메이션 장면을 중간 중간 넣어서 보여주는 파격을 선보인다.   

  Everyman. '평범한 사람'을 뜻하는 '에부리'를 별칭으로 택한 주인공의 자전적 고백은 처음에는 웃음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시대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에부리가 나오키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그는 회사 사람들과 술자리를 함께 하는데, 마치 봇물터지듯이 쏟아지는 과거 회상에 주위 사람들이 다 가버린다. 오직 남은 두 명의 회사 직원만이 새벽 4시까지 에부리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다. 그는 일본의 침략 전쟁 시기에 젊은이들에게 애국과 참전을 부르짖었던 군국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을 쏟아낸다. 냉혹하고, 비정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젊은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이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열변을 토한다. 감정에 북받친 그는 종전을 앞두고 필리핀 전장에서 죽어간 병사의 옷에서 나온 편지를 읽는다. 일순, 영화는 반전 영화로 급변하면서 끝을 맺는다.

  전중파 세대는 일본 제국주의의 교육을 받았으나, 종전과 함께 국가에 대한 신념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겪었다. 원작자 야마구치 히토미는 자신의 소설에서 전중파 세대가 가진 통렬한 사회 비판 의식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러나 이것은 그 세대가 가진 보편적인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 전쟁을 계기로 경제 부흥기에 접어든 일본은 전후 자기 반성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장면은 에부리의 회사 점심시간에 건물 옥상에서 펼쳐지는 젊은 직원들의 다양한 여가 활동 모습이다. 춤과 노래, 운동을 즐기는 그들을 에부리는 지루한 표정으로 홀로 떨어져 바라본다. 그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과거 침략 전쟁을 수행한 국가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할 줄 아는 지식인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의 관객들에게도 이 영화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영화였다.

  제작사 도호는 이 영화를 가벼운 코미디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영화를 찍기로 되어 있었던 가와시마 유조 감독의 급사로 자리를 대신하게 된 키하치는 영화의 방향을 자신의 맘대로 틀어버렸다. 나중에 영화의 완성본을 본 제작 담당자가 길길이 날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영화는 결국 2주만에 영화관에서 내려졌다. 도호 소속의 감독이었던 키하치는 상당 기간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는 이 영화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 단서는 키하치 감독의 젊은 시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영화계에 입문하고 감독 수업을 받고 있을 때, 일본은 전쟁 막바지에 다다랐다. 강제로 징집된 키하치는 육군 예비 학교에 복무했는데, 폭격으로 자신의 동료들이 참혹하게 죽어간 것을 목격했다. 그런 그에게 이 영화의 원작이 보여주는 반전 메시지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예술적 신념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 일본의 영화계는 키하치의 그러한 신념에 빚을 지고 있다. '에부리만 씨의 우아한 생활'은 전중파 세대의 치열한 사회 비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이정표로 남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관객들은 작가 의식을 가진 감독의 시대를 향한 진정성 있는 외침을 듣게 된다.



*사진 출처: archive.ica.art 주연 배우 고바야시 케이주


**사진 출처: berlinale.de 감독 오카모토 키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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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알라프로 2021-08-13 14:1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이 영화 정보를 찾다가 선생님 블로그에 오게 되었습니다. 죄송하지만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좀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에서 결제하려고 했더니 서비스 제한 지역이라 안 되는 것 같아서요...

2021-08-14 0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삶은 계란. 일반적으로 탐정을 주인공으로 하는, 매우 건조하고 딱딱한 문체로 쓰여진 범죄 추리 소설을 일컫는 'hard-boiled'는 완숙 달걀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에서 나왔다. '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의 탐정 사무소의 두 인물, 탐정 우오츠카와 조수 고바야시의 유일한 먹거리는 바로 그 '삶은 계란'이다. 영화 초반부의 달걀 삶는 장면부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다. 탐정은 단서가 풀리지 않자, 계란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먹는다. 이런 기발한 유머를 보여주는 감독은 하야시 카이조다. 그의 첫 장편 데뷔작 '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To Sleep so as to Dream, 1986)'는 여러모로 유별나다. 흑백 필름으로 무성 영화의 형식을 취한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은 1950년대의 도쿄 아사쿠사, 탐정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백발의 신사가 우오츠카(사노 시로 분)의 탐정 사무소를 찾아온 이유는 어느 노부인의 납치당한 딸 키코를 찾아달라는 것. 납치범들이 보낸 녹음 테이프에는 수수께끼와 같은 지시사항이 들어있다. 그들이 돈을 가져오라고 하는 장소를 수수께끼를 풀어서 알아내야 한다. 어렵게 풀어낸 수수께끼의 장소로 돈을 들고 찾아갔더니, 납치범들에게 돈만 뺏기고 얻어맞는다. 그들은 계속해서 수수께끼를 내고 우오츠카와 고바야시를 유인한다. 과연 이 어리버리 탐정과 조수는 수수께끼를 풀고, 납치당한 키코를 구할 수 있을까?

  지직거리는 흑백 화면에 무성 영화라니... 처음에 제작년도를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런데 영화가 만들어진 해는 1986년. 하야시 카이조는 서른을 앞둔 나이에 자신의 첫 영화를 만들었다. 놀랍고 대담한 작품이다. 아마 이런 형식의 영화를 누군가 장편 데뷔작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너, 미쳤구나!'라는 반응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렇다. 세상은 그렇게 약간은 미쳐 보이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균열과 불협화음들로 커다란 변화에 이르기도 한다. 하야시 카이조는 남들이 안하는 방식을 과감하게 택했다. 소리를 배제한 무성 영화이기는 하지만, 오직 사람의 목소리만 들리지 않는다. 자전거의 경적 소리, 전화벨 소리 같은 외적 소음은 그대로 들린다. 인물들의 대사는 무성 영화 시대의 자막으로만 전달된다. 아, 영화의 후반부에는 변사(辯士)도 나온다.

  무성 영화는 하야시 카이조가 자신의 첫 영화를 독특하게 보이기 위해서 택한 하나의 방법적 도구였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영화라는 매체의 시원(始原)을 상기시키며, 그것에 대한 향수와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의 초창기, 사람들은 주연 배우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어도 영화라는 신문물에 매료되었다. '소리'는 영화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이야기'가 영화의 본질과 맞닿아 있었다. 하야시 카이조는 '소리'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납치당한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있고, 탐정과 조수는 반드시 여성을 구해내야 한다. 그들의 임무에는 수수께끼가 등장하고,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이 영화의 서사를 흥미롭게 이끌어 간다.

  영화의 결말부에 관객들이 만나는 것은 '영원한 수수께끼'라는 제목의 오래전 무성 영화이다. 경시청의 검열로 결말부의 촬영이 중단되서 결코 끝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영화. 거기에는 그 마지막 장면을 보고 싶어하는 한 노부인의 열망이 있었다. 그 열망이 우오츠카와 고바야시의 긴 추리여정과 만나게 된다. 노부인은 그토록 원하던 영화의 끝을 보면서 비로소 긴 잠에 빠져든다. 이 영화의 제목은 노부인의 오랜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이 영화가 끝나는 순간에 관객들은 기묘한 감동에 휩싸인다. 평생을 두고 꿈꿔온 그 어떤 것의 마지막 완성을 본다는 것, 그런 일을 많은 이들이 꿈꾸지만 실제로 이루어지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하야시 카이조는 자신이 만든 인물에게 그 꿈의 완성을 선물한다. 관객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나는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그 꿈의 실현에 어디쯤 와있는가,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볼 수 있을까... 영화는 그런 질문들을 잔잔한 물결의 파문처럼 만들어 낸다.

  첫 데뷔작으로 이토록 매혹적이며 눈부시게 빛나는 영화를 만들어낸 것만으로도 하야시 카이조는 영화 감독이란 타이틀에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만 하다. 어쩌면 자신의 재능을 데뷔작에 다 써버려서 그 후속작들이 그저 그런 작품들로 채워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탐정'이란 직업의 주인공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언가를 찾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인생에서 '탐정'을 연기하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 꿈꾸는 것, 결코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어렵고 힘든 그 어떤 것에 도달하고자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여정. 그것이 인생이다. '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는 그 인생의 여정을 소박하고 아름답게 구현해서 보여준다.        



*사진 출처: dsdramas.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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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각대(tripod)...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단어였다. 압둘라티프 케시시의 2007년작 '생선 쿠스쿠스(La graine et le mulet, The Secret of the Grain)'의 관객들은 시종일관 흔들리는 화면을 응시해야 한다. 이 감독은 스테디캠 덕후인가? 가족 드라마 찍는데 무슨 대단한 긴박한 상황이라도 들어갔다면 모르겠다. 식탁에서 온가족이 모여 쿠스쿠스를 먹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왜 핸드 헬드가 필요한가? 거기에다 과다한 클로즈업은 멀미가 날 지경이다. 영화를 다큐 찍듯이 하면 사실성이 저절로 확보되는가? 이 영화는 화면 속으로 삼각대를 던져 넣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만든다.

  영화는 조선소 노동자로 일하는 슬리만의 이야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예순의 나이로 평생 동안 배와 함께 일해온 슬리만은 구조조정으로 퇴직의 압력을 받는다. 그는 받은 퇴직금에 대출받은 돈을 더해 폐선을 개조한 식당을 열려고 한다. 튀니지 이민자 출신인 그가 식당 메뉴로 생각한 음식은 '생선 쿠스쿠스'. 그의 전처 수아드는 그 요리의 달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혼하고 작은 호텔 여주인 라티파, 의붓딸 림과 같이 살고 있는 그에게 전처와 자식들은 거리감을 가지고 있다. 슬리만은 본격적인 식당 개업을 앞두고 시의 관계자와 여러 초대 손님들에게 음식을 선보이는 자리를 마련한다. 어쨌든 하나로 뭉친 가족은 손님 접대에 여념이 없는데, 주요리인 쿠스쿠스가 보이지 않는다. 과연 이 가족 식당의 첫 시식은 무사히 이루어질 수 있을까...

  튀니지에서 출생한, 이민자 가정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는 케시시 감독은 이 영화에서 이민족(異民族)의 정서를 드러내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실제로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 대부분을 튀니지 이민자 출신의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했다. 무엇보다 쿠스쿠스라는 요리가 중심 소재로 등장하는데, 그것은 튀니지와 모로코 등지에서 즐겨먹는 요리다. 타진(Tajine)이라는 고깔 모자 뚜껑의 그릇에 담아서 내놓는 이 요리는 고기와 야채, 가는 밀가루를 쪄서 만든다. 슬리만의 전처 수아드는 자신이 만든 생선 쿠스쿠스로 자식들 내외를 불러모아 대접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이 가족들이 모인 식탁에서 나누는 잡다한 대화들은 가족애와 생의 활력으로 넘친다. 길게 이어지는 대화 장면을 케시시는 이민자 가정의 끈끈한 인간적 유대로 포장한다. 그런데 그것이 좀 과하다. 이 가족의 대화는 별다른 주제도 없고, 그저 시시한 잡담들을 이어붙여놓은 것에 불과하다. 러닝타임 2시간 30분 속에는 그 지루하고 긴 대화 장면도 한몫을 한다.

  그렇다고 이 가족이 진정으로 화목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혼한 전처와 자식들은 35년 동안 가족을 위해 헌신한 슬리만을 그다지 존중하는 것 같지 않다. 물론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지내는 슬리만을 곱게 보기만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 해도 자식들이 슬리만의 퇴직금을 운운하는 것은 이 가족에게 가장의 존재란 돈 벌어다 주는 기계였다는 느낌을 준다. 사실 슬리만은 억센 친자식들 보다 의붓딸 림을 더 의지하고 인간적인 따뜻함을 느낀다. 아마도 이런 림과 가장 대비되는 자식은 슬리만의 장남 마지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바람둥이로 자신의 아내와 어린 아들에게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식당 개업을 앞둔 연회에서 쿠스쿠스 요리를 차에서 꺼내는 것을 깜빡하고 사라져 버린 것도 마지드였다. 골칫덩이 마지드가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림이 나선다. 기다림에 지친 손님들 앞에서 필살기 '벨리 댄스'를 선보이기로 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림의 압도적인 벨리 댄스가 차지한다. 화면을 가득 메우는 림(하프시아 헤르지 분)의 터질 것 같은 배와 관능적인 몸짓이 10여분 가량 이어진다. 관객에 따라서는 열광적인 환호를 보낼 수도 있고, 지나치게 선정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호감과 비호감을 떠나서 그 장면도 너무 길고 과하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 2시간 30분은 그렇게 의미없이 낭비되는 장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대체 감독 케시시는 이 영화를 통해서 무얼 보려주려는 것일까?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는 가족 구성원의 최종적 화합? 튀니지 이민자들의 가족애와 유대감? 벨리 댄스가 보여주는 육체미와 생의 에너지? 이 길 잃은 가족 서사는 어설프게 끝을 맺는다.

  나는 이 조잡스럽고 너절한 영화를 포장하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들지 않는다. 이 감독은 절제와 중용의 미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이민자들의 삶에 대한 피상적인 묘사, 과도하고 의미없이 사용된 헨드 헬드 촬영과 클로즈업, 유기적이지 못한 서사, 매우 영악하게 사용된 선정적인 벨리 댄스 장면, 그 모든 것이 조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가 만든 생선 쿠스쿠스를 나는 그 누구에게도 추천하고 싶지 않다. 이 영화가 무슨 상을 받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마치 그것은 영화에 붙은 작은 스티커처럼 보일 뿐이다.       



*사진 출처: hyderabad.afin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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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궁금한 건 말이죠, 출판이 될지 확신도 없는 글을 왜 그렇게 쓰는 거에요?"

  25살의 대학원생은 생의 마지막 소설을 쓰느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노작가에게 당돌하게 묻는다. 한때는 주목받았으나, 이제는 대중들과 평단의 뇌리에서 잊혀진 작가 레너드(프랭크 랜젤라 분)는 10년 넘게 자신의 소설과 씨름하고 있다. 자신의 소설로 박사논문을 쓰겠다며 찾아온 젊고 매력적인 헤더(로렌 앰브로즈 분)는 레너드의 마음을 점점 흔들어 놓는다. 헤더는 전직 교수였던 레너드를 처음에는 '교수님'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레너드'로 부르게 된다.


  앤드류 와그너 감독의 2007년작 'Starting Out in the Evening'은 브라이언 모튼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일견 늙은 작가와 젊은 여성의 어울리지 않는 로맨스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레너드와 헤더의 관계는 단순한 연애 감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레너드는 헤더의 젊음과 과단성에 매혹된다. 그 두 사람 사이에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이 명백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레너드는 매우 진중하고 신사적인 인물로 헤더의 접근을 거부하고 둘 사이의 거리를 지키려 애를 쓴다.


  그런 레너드에게 과감히 돌진하는 헤더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헤더가 직업적 성공을 위한 징검다리로만 레너드에게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헤더에게는 야망이 있다. 자신의 논문으로 비평계의 주목을 받겠다는 야망. 그런 헤더에게 레너드의 글들은 문학을 전공하게 만든, 인생의 변화를 만든 소중한 작품이었다. 처음 레너드의 집에 방문한 날, 헤더는 레너드의 서재에서 젊은 시절 레너드의 사진 한장을 몰래 빼온다. 자신이 존경하는 우상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이 헤더의 마음 속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남자와 여자, 작가와 열성팬, 권위자와 입문자, 이런 다양한 속성들이 뒤섞인 두 사람의 관계는 헤더의 논문이 완성되어감에 따라 끝이 보이는 여정에 접어든다. 그러는 와중에 레너드의 심장 발작은 관계의 종말을 앞당긴다. 어렵게 회복된 레너드는 전보다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인데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도대체 왜 글쓰기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레너드가 소설을 완성한다고 해도 이미 존재감을 잃어버린 작가가 된 레너드의 소설은 출판될 가능성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홀로, 늦은 밤까지, 타자기 앞에서 시간을 보낸다.

  창작이란 결국은 생산성의 문제다. 이 세상에 영속적인 무언가를 남기려고 하는 열망.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위해 택하는 방식은 결혼으로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이다. 그러나 예술가에게 그 생산성의 열망은 예술 작품으로 귀결된다. 자손을 남기는 것은 예술가에게 자신의 예술 작품 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레너드에게도 딸 에리얼이 있지만, 그 딸이 레너드의 영속성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에리얼은 아이 갖기를 거부하는 애인들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동안 어느새 마흔 문턱에 이르렀다. 레너드는 에리얼에게 아이를 원하는 다른 남자를 만나라고 말하지만 에리얼은 아버지의 조언을 듣지 않는다. 10년 넘게 매달리고 있는 소설, 아이를 갖지 못하는 딸, 레너드가 이 세상에 남긴 것은 모두 불임의 상태이다. 어쩌면 그가 그토록 마지막 소설에 매달리는 것은 영속성에 대한 열망인지도 모른다.  

  다시 처음의 헤더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레너드는 헤더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그건 예술의 광기(madness of art) 같은 거겠지."

  퇴원 후 회복기의 성치 않은 몸으로도 글을 쓴다는 이야기를 듣고, 병문안을 온 헤더는 레너드에게 칭찬과 경외의 말을 쏟아낸다. 레너드는 그런 헤더의 뺨을 때린다. 이 장면은 얼핏 보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레너드는 헤더의 같잖은 아첨을 보며, 둘 사이의 관계가 거래였음을 깨닫는다. 헤더는 논문을 얻었고, 레너드는 젊음의 기운을 잠시 느꼈을 뿐이다. 젊은 여자와의 관계가 자신의 영속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님을 레너드는 뼛속 깊이 자각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글쓰기로 돌아온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그는 밤의 서재에서 턱을 괴고 타자기 앞에 앉아있다. 늘 그래왔듯, 자신의 글쓰기를 그렇게 이어가려는 것이다. 매일 밤에 새롭게 시작하는(starting out in the evening) 글쓰기의 일상, 그것이 작가의 숙명이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소설이 출판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저 쓸 따름이다. 고요한, 그러나 열정적인 내면의 광기에 따르는 삶. 그것이 예술가의 숙명이다. 'Starting Out in the Evening'은 그러한 예술가의 고독한 숙명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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