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Yol, 1982)'이라는 터키 영화가 있다. 내가 그 영화를 처음 본 것은 1994년, MBC 주말의 명화에서 였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래전 이야기다. 교도소에서 임시 휴가를 받아 나온 5명의 인물들의 이야기. 영화 속 끝없이 펼쳐진 설원, 각각의 인물들이 풀어내는 이야기에 가슴 먹먹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아, 터키에서도 저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있구나...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그랬었다. '국경의 법칙(Law of Border, 1966)'도 터키 영화다. 감독은 외메르 뤼프티 아카드, 주연 배우는 일마즈 귀니. 이 영화에서 감독과 공동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연기도 했던 일마즈 귀니가 바로 '욜'의 감독이었다.

  '국경의 법칙'은 터키-시리아 국경 부근에 사는 가난한 이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가진 것이라고는 척박한 모래 땅 뿐인 가난한 이들은 국경 지대를 넘나들며 밀수로 먹고 산다. 그러나 그 일은 목숨을 건 도박이나 다름없다. 국경 지대에는 국경 수비대가 설치한 지뢰들이 가득하고, 히디르(일마즈 귀니 분)를 비롯한 밀수업자들은 국경 수비대와 늘 마찰을 빚는다. 새로 부임한 수비대장 제키는 히디르를 설득해 위험한 밀수일을 그만 두게 하려고 한다. 또한 마을에 학교를 세우는 일에도 협조를 구한다. 히디르는 어린 아들 유수프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학교 세우는 일을 돕고, 밀수일도 그만 둔다. 한편, 히디르와 경쟁하는 밀수업자 알리 첼로는 히디르와 동료를 제거하고 자신이 밀수일을 독점하려고 하는데...

  이 영화의 화질은 아쉽게도 그리 좋지가 않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오래된 필름. 내가 본 것은 2011년에 복원된 필름인데도 그렇다. 영화가 그렇게 된 데에는 터키의 복잡한 현대사와도 관련이 있다. 1980년에 일어난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는 사회 비판적인 영화들을 모조리 없애버렸고, 그 과정에서 이 영화는 단 한 벌의 카피본만 남았다. 그것도 온전한 상태가 아니어서 복원이 쉽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감상시 그런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볼만한 가치가 있다.

  시나리오를 쓴 일마즈 귀니는 쿠르드족 출신으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 그의 관심사는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었다. 영화 배우의 길에 들어서서 나름대로 인기를 얻었던 그는 당시 터키의 유명한 감독이었던 아카드를 찾아간다. 아카드는 귀니가 가져온 시나리오를 현실에 맞게 각색할 것을 충고했다. 귀니는 국경 지대의 주민과 밀수업자들을 실제로 만나보고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국경의 법칙'을 찍게 되었다. 영화는 피폐한 국경 마을을 배경으로 가난한 이들의 고통, 근대와 전근대의 충돌, 선인과 악인의 대결, 이런 다양한 요소들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터키의 웨스턴'이라고 종종 소개되기도 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그렇기도 하다. 히디르와 알리 첼로의 대결이 긴박감 넘치는 총격전으로 펼쳐지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웨스턴'의 외피를 입은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에는 다른 근원적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학교'로 대변되는 국가 권력은 근대를 상징한다. 유목과 밀수로 먹고 사는 마을 사람들은 낙후되고 무지한 전근대를 상징한다. 학교를 여는 일에 반대하는 마을의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애들이 학교에 다 가버리면 양들은 누가 돌보냐구!"

  그들에게 아이들은 소중한 노동 인력으로 취급된다. 19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의무교육은 아동 노동의 폐해를 막기 위한 제도였다. 마을에 부임한 여교사는 히디르에게 유수프의 미래를 생각해 보라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국가 권력의 직접적 대변자인 경비 대장, 학교의 여교사, 그들은 히디르와 마을 사람들에게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다. 교육은 시간과 돈이 드는 일이며, 밀수 말고 당장 먹고 살 방도는 가망성이 없는 농사 뿐이다. 히디르는 다시 예전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간다. 큰 양떼를 국경 너머로 이동시키는 돈벌이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알리 첼로 일당과 벌이는 싸움은 히디르를 돌아올 수 없는 국경 너머로 몰아세운다.

  아카드 감독은 전근대에 머문 가난한 이들이 근대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겪는 비극을 충실하게 그려낸다. 의외로 흑백 필름의 촬영과 현상이 아주 잘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는데, 대부분 야외 촬영으로 이루어진 장면들에서 그 정도로 영화를 뽑아낸 감독의 역량이 돋보인다. 또한 히디르와 동료들이 알리 첼로 일당을 처단하는 장면에서 점프컷 편집으로 이야기를 빠르고 간결하게 진행시키는 것도 눈길을 끈다. 영화를 보면서 '아이구, 감독님 영화 열심히 찍었군요'하는 소리를 했더랬다. 

  주연을 맡은 일마즈 귀니는 진중하고 균형잡힌 연기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아카드 감독과 함께 작업하면서 영화 연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영화 이후 그는 자신의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아카드 감독에게도 귀니와의 작업은 그 자신의 영화 세계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성 짙은 그의 후기 작품들은 1970년대에 나왔기 때문이다. '국경의 법칙'을 걸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재능을 막 꽃피우려는 영화인과 오랜 경력을 쌓은 대가의 협업은 독특하고 눈길을 끄는 영화를 만들어 냈다. 이 영화는 분명 자신만의 고유한 색채를 가지고 있다. '터키의 웨스턴'이라는 소개는 그다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국경과 경계를 넘어선 그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 영화 '국경의 법칙'은 오늘도 자신을 알아줄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출처: itpworld.word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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