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계란. 일반적으로 탐정을 주인공으로 하는, 매우 건조하고 딱딱한 문체로 쓰여진 범죄 추리 소설을 일컫는 'hard-boiled'는 완숙 달걀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에서 나왔다. '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의 탐정 사무소의 두 인물, 탐정 우오츠카와 조수 고바야시의 유일한 먹거리는 바로 그 '삶은 계란'이다. 영화 초반부의 달걀 삶는 장면부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다. 탐정은 단서가 풀리지 않자, 계란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먹는다. 이런 기발한 유머를 보여주는 감독은 하야시 카이조다. 그의 첫 장편 데뷔작 '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To Sleep so as to Dream, 1986)'는 여러모로 유별나다. 흑백 필름으로 무성 영화의 형식을 취한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은 1950년대의 도쿄 아사쿠사, 탐정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백발의 신사가 우오츠카(사노 시로 분)의 탐정 사무소를 찾아온 이유는 어느 노부인의 납치당한 딸 키코를 찾아달라는 것. 납치범들이 보낸 녹음 테이프에는 수수께끼와 같은 지시사항이 들어있다. 그들이 돈을 가져오라고 하는 장소를 수수께끼를 풀어서 알아내야 한다. 어렵게 풀어낸 수수께끼의 장소로 돈을 들고 찾아갔더니, 납치범들에게 돈만 뺏기고 얻어맞는다. 그들은 계속해서 수수께끼를 내고 우오츠카와 고바야시를 유인한다. 과연 이 어리버리 탐정과 조수는 수수께끼를 풀고, 납치당한 키코를 구할 수 있을까?

  지직거리는 흑백 화면에 무성 영화라니... 처음에 제작년도를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런데 영화가 만들어진 해는 1986년. 하야시 카이조는 서른을 앞둔 나이에 자신의 첫 영화를 만들었다. 놀랍고 대담한 작품이다. 아마 이런 형식의 영화를 누군가 장편 데뷔작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너, 미쳤구나!'라는 반응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렇다. 세상은 그렇게 약간은 미쳐 보이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균열과 불협화음들로 커다란 변화에 이르기도 한다. 하야시 카이조는 남들이 안하는 방식을 과감하게 택했다. 소리를 배제한 무성 영화이기는 하지만, 오직 사람의 목소리만 들리지 않는다. 자전거의 경적 소리, 전화벨 소리 같은 외적 소음은 그대로 들린다. 인물들의 대사는 무성 영화 시대의 자막으로만 전달된다. 아, 영화의 후반부에는 변사(辯士)도 나온다.

  무성 영화는 하야시 카이조가 자신의 첫 영화를 독특하게 보이기 위해서 택한 하나의 방법적 도구였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영화라는 매체의 시원(始原)을 상기시키며, 그것에 대한 향수와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의 초창기, 사람들은 주연 배우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어도 영화라는 신문물에 매료되었다. '소리'는 영화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이야기'가 영화의 본질과 맞닿아 있었다. 하야시 카이조는 '소리'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납치당한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있고, 탐정과 조수는 반드시 여성을 구해내야 한다. 그들의 임무에는 수수께끼가 등장하고,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이 영화의 서사를 흥미롭게 이끌어 간다.

  영화의 결말부에 관객들이 만나는 것은 '영원한 수수께끼'라는 제목의 오래전 무성 영화이다. 경시청의 검열로 결말부의 촬영이 중단되서 결코 끝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영화. 거기에는 그 마지막 장면을 보고 싶어하는 한 노부인의 열망이 있었다. 그 열망이 우오츠카와 고바야시의 긴 추리여정과 만나게 된다. 노부인은 그토록 원하던 영화의 끝을 보면서 비로소 긴 잠에 빠져든다. 이 영화의 제목은 노부인의 오랜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이 영화가 끝나는 순간에 관객들은 기묘한 감동에 휩싸인다. 평생을 두고 꿈꿔온 그 어떤 것의 마지막 완성을 본다는 것, 그런 일을 많은 이들이 꿈꾸지만 실제로 이루어지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하야시 카이조는 자신이 만든 인물에게 그 꿈의 완성을 선물한다. 관객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나는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그 꿈의 실현에 어디쯤 와있는가,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볼 수 있을까... 영화는 그런 질문들을 잔잔한 물결의 파문처럼 만들어 낸다.

  첫 데뷔작으로 이토록 매혹적이며 눈부시게 빛나는 영화를 만들어낸 것만으로도 하야시 카이조는 영화 감독이란 타이틀에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만 하다. 어쩌면 자신의 재능을 데뷔작에 다 써버려서 그 후속작들이 그저 그런 작품들로 채워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탐정'이란 직업의 주인공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언가를 찾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인생에서 '탐정'을 연기하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 꿈꾸는 것, 결코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어렵고 힘든 그 어떤 것에 도달하고자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여정. 그것이 인생이다. '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는 그 인생의 여정을 소박하고 아름답게 구현해서 보여준다.        



*사진 출처: dsdramas.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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