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류(逆流)


  "어, 이게 뭐지?"

  소변을 보고 화장실 변기의 물을 내리던 기영은 졸린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것은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불어터진 살덩어리에 붙어있는 것은 분명 손톱이었다.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서 기영은 눈을 비벼보았다. 변기의 물이 거의 채워지면서 그 이상한 덩어리도 천천히 움직였다.

  "기중아, 좀 일어나봐. 일어나 보라고. 변기에 사람 손가락이 있어!"
  "아, 무슨 일이야? 왜 자는 사람을 깨우고 그래? 뭔 손가락이야?"

  기중은 기영이 자신을 흔들어 깨우자,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대답했다. 짜증이 잔뜩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좀 일어나 보래도. 저거 진짜 사람 손가락이라고."

  기중은 기영의 다그치는 목소리에 마지못해 일어났다. 마루 벽에 걸려있는 시계는 새벽 5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휴, 더 잘 수도 있은 걸 깨워서. 대체 뭔 일이야, 응?"
  "야, 이거 봐라. 이게 사람 손가락이잖아."

  기영은 동생의 손목을 잡아끌고는 화장실 변기 안쪽을 가리켰다.

  "아니, 저게 뭔 손가락이야? 저거 옛날 사루비아 과자 같네. 막대 과자 불어터진 거잖아. 나 원 참."
  "아니라고, 손톱이 달려있다고. 과자 아냐."
  "형, 안경 좀 쓰고 잘 봐봐. 형 안경 안 쓰면 나도 못 알아보잖아. 안경 좀 써보라고."
 
  기중의 말에 기영은 책상 위의 안경을 찾아서 썼다. 그러고 나서 변기 안을 보았다. 둥둥 떠다니는 덩어리는 조금씩 형체가 풀어지고 있었다. 기영이 보았던 손톱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아파트가 하도 오래되었잖아. 40년 된 아파트 아냐. 그러니까 변기 물 내려가는 것도 시원찮고, 뭐 어디서 역류하니까 그러는 거겠지. 난 또 무슨 일인가 했네."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기중은 다시 자신의 침대로 돌아갔다. 기영은 자신이 잘못 보았다는 사실에 조금은 멋쩍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까 또렷하게 본 손톱의 잔상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로 헛것을 본 것인가? 차라리 헛것을 본 것이 다행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본 것이 진짜 사람의 손가락이라면, 그건 더 끔찍한 일이 아닌가? 후우, 기영은 새삼스럽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벽의 기이한 일 때문이었는지, 그날 오후에 있었던 졸업시험에서 기영은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어쨌든 졸업시험은 통과해야만 했다. 취업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국문과를 택한 자신의 스무 살이 그저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국문과를 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시골의 부모님은 어디서 들었는지 경영학과를 가야 취직이 잘된다고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기영은 국문과를 선택했다. 시와 소설, 그것을 읽으면서 느꼈던 마음의 울림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은 좋다는 느낌만으로 직진하기에는 너무나 거칠었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기영이 대학을 들어가던 해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남편을 잃은 충격에다, 원래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이듬해, 요양병원에서 지내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기영과 기중 형제는 그야말로 천애고아가 되고 말았다. 시골의 얼마 되지 않은 땅뙈기와 낡은 집을 팔아서, 지금의 16평 아파트에 들어온 것이 작년의 일이었다.


  서울시 변두리의 이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서도 기영이 사는 복도식 아파트는 더 낡고 열악하게 보였다. 적은 평수에다, 월세가 그나마 싸서 이 아파트에는 하층민과 외국인 노동자 이주민들이 꽤 들어와서 살고 있었다. 그들의 국적도 다양했다. 중국, 몽골,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 기영이 처음에 그들의 얼굴을 볼 때는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과 자주 마주칠수록 분명히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30대 중반의 몽골 남자는 기골이 장대했는데, 팔뚝에 과녁과 화살 문신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한국 남자와 결혼한 것으로 보이는 20대 초반의 필리핀 여자는 무척 뚱뚱했다. 여자는 늘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때로는 영어로, 때로는 본토의 언어로 시끄럽게 전화했다. 기영의 이웃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아니, 무슨 졸업시험을 사법고시 출제하듯이 내냐. 난 음운학 문제는 하나도 못 풀겠더라. 기영이 넌 어때? 잘 본 거야?"
  "나도 그렇지 뭐. 그래도 떨어지기야 하겠어? 그래도 1차 시험은 쉬웠으니까, 그거하고 이번 거하고 합산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긴, 교수들이 졸업생 인생 망칠 일 있냐. 졸업은 하게 해주겠지."

  동기인 민철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강의실 복도를 터덜터덜 걸어갔다.

  "이력서 낸 건 소식이 있어? 난 이번 주에 출판사 면접이 있는데, 모르겠다. 붙으면 정말 좋을 텐데."
  "온라인 서점에 내봤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 또 부지런히 써서 뿌려봐야지."

  국문학을 전공해서 책 장사라도 하면 다행일 것 같다. 그런 마음으로 온라인 서점에 이력서를 내보았다. 하지만, 기영이 낸 세 군데 모두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책을 파는 것도 장사니까, 경영학 전공자가 더 낫겠지. 기영은 국문학보다 문예창작과가 자신에게 더 맞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국문과나 문창과나 굶어 죽기는 마찬가지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예의 그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졸업시험을 치느라 진이 빠져서 그런지, 집으로 돌아오는 기영의 다리는 조금 후들거렸다.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아파트까지 걸어오는 그 10분 거리가 30분처럼 느껴졌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천천히 걷는 사람처럼, 기영은 걸음걸이에 정신을 집중했다. 집에 가서 좀 쉬면 낫겠지. 마침내 아파트 출입구에 도착했을 때, 몽골 남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았다. 남자는 늘 줄담배를 피워댔다. 담배꽁초는 아무데나 내던졌고, 가래침도 연신 내뱉었다. 기영은 그런 남자가 꼴 보기 싫어서, 좀 더 걸어서 다른 출입구로 들어가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는 15층에서 좀처럼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젠장, 엘리베이터 붙잡고 애새끼들이 장난이라도 치나. 기영은 자신의 집이 4층에 있다는 것에 그나마 안도했다. 다시 한번, 있는 힘을 쥐어짜 내어 계단을 올라갔다. 번호 키를 누르고 집에 들어오자, 그제야 조금은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쏴아쏴아..."

  기영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앞 베란다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 다용도실에 세탁기를 두고 쓰게 되어있지만, 일부 입주민은 자기들 편한대로 우수관이 있는 앞 베란다에다 세탁기를 두고 썼다. 역겨운 세제 냄새와 오수 때문에 관리사무소에서 세탁기 사용을 금지한다고 공고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세탁기 물 내려가는 소리인가 보네. 저 물소리를 수시로 듣는 것도 고역이었다. 어쨌든 좀 참으면 되겠지. 기영은 피곤을 느끼며 삐걱거리는 소파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렇게 얼마를 잤을까? 기영이 눈을 뜬 시간은 오후 6시였다. 3시에 집에 왔으니, 3시간을 잔 모양이었다. 그런데 앞 베란다의 물소리는 여전히 계속 들렸다. 무슨 빨래를 저렇게나 할까? 오늘은 다들 빨래하는 날인가 보네. 기영은 혀를 끌끌 차면서 일어났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생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들어올 것이다. 그러고 보니, 동생과 지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기중은 한 달 뒤면 군대에 들어간다. 기영은 서로 의지하며 지냈던 동생이 없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벌써 마음이 허전해졌다.  

  이른 저녁을 대충 챙겨 먹고, 기영은 컴퓨터 앞에서 자기소개서 작성에 매달렸다. 사실 자기소개서에 쓸만한 인생의 그 무언가도 없었다. 대학에 들어갔고, 군 복무를 무사히 마쳤다. 부모님은 불운하게 일찍 돌아가셨다. 그나마 남겨주신 재산으로 서울이라는 도시에 작은 아파트 한 칸이나마 남겨주신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 도시에서 집이 있다는 것은 생존의 동아줄을 얻은 셈이나 마찬가지다. 기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쏴아쏴아..."

  밤 11시가 넘어서도 앞 베란다의 물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좀 이상한 일이었다. 물소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 들렸다. 무슨 집중호우 때 내려가는 빗물 소리 같았다.

  "아, 오늘도 피곤하네. 형, 별일 없지?"
  "왔냐? 근데, 앞 베란다에서 계속 물소리가 들린다. 가만있자, 내가 3시에 집에 왔거든. 그러니까 8시간째야. 도대체 뭔 일일까?"
  "뭐 한 집이 아니라 여러 집에서 쓸 수도 있지. 정 신경 쓰이면, 내일 관리사무소에 전화라도 해봐."
  "그래야겠네."

  기중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씻고는, 곧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기중이 조그맣게 코 고는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기영은 그런 동생이 안쓰러워졌다. 얼마나 피곤하면, 저렇게 세찬 물소리가 들려도 잠에 곯아떨어질까 싶어서였다. 그런 기중과는 달리 기영은 물소리 때문에 좀처럼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낮잠을 자서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들여다보는 것도 진력이 났다.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와야지. 기영은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서 현관문을 나섰다.

  기영은 아파트 분리수거대를 지나, 등나무 퍼걸러(pergola)로 향했다. 거기 벤치는 이 아파트 흡연자들의 안식처였다. 기영 또래의 젊은 남자 하나가 스마트폰으로 포커 게임을 하고 있었다. 기영은 자신이 포커 게임은 물론 고스톱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저런 것에 정신을 빼앗기는 일은 그저 인생의 낭비일 뿐이다. 기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건, 수익률이 별로잖아."

  기영이 담배를 다 피웠을 무렵, 또 다른 20대 초반의 남자가 담배를 피워물고는 벤치에 털썩 앉았다. 저 친구는 택배 일을 한다. 언젠가 택배기사 옷을 입고 자신의 집에 택배를 놔두는 남자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의 체구는 작았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무거운 짐들이 쌓여있는 카트를 능숙하게 끌고 다녔다. 기영은 먹고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의 피곤함에 절은 뒷모습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저 친구도 뭔 증권 투자나 코인이나 그런 것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차라리 죽여라, 죽여!"

  기영이 담배를 피우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어눌한 한국말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말소리 뒤로 둔탁한 소리도 났다. 뭔가를 내던지는 소리 같았다. 2층의 필리핀 여자일 것이다. 여자는 50대의 늙은 남편과 살고 있었는데, 그렇게 자주 싸웠다. 그 누구도 경찰에 신고하거나, 그 사람들에게 불평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이 동네에서 살아가는 모습일 뿐이었다.

  "쏴아쏴아..."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물소리는 거침이 없이 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일은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해봐야겠네. 기영은 감기지도 않은 눈을 억지로 꼭 감고는 잠을 청했다.

  "아, 수고하십니다. 205동 입주민인데요. 좀 불편한 것이 있어서요. 앞 베란다에서 어제부터 계속 물소리가 들리거든요. 여기가 몇 라인이냐 하면..."
  "선생님, 거기 6라인이죠?"
  "네,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그걸?"
  "어제부터 민원 전화가 계속 와서요."

  그렇구나. 이 물소리에 자신만 신경쓰는 건 아니었구나. 기영은 조금은 안심하는 마음이 되었다. 신경을 쓰는 주민이 여럿이라면 관리사무소에서도 어떻게든 해결해 주려 할 것이다.

  "그게요, 12층 입주민한테도 전화가 왔어요. 그럼, 13, 14, 15층, 이렇게 3집이 남잖아요. 가서 초인종을 눌러봤는데, 13층과 15층은 아닌 것으로 확인이 되었고요. 남은 집은 14층인데 문을 안 열어줍디다. 인기척은 들리는데."
  "참 이상한 일이네요. 대체 뭔 물을 그렇게나 써대는지."
  "아무튼 저희도 문제를 알고 있고, 해결하려고 하니까요. 좀만 기다려 주시지요."

  젊은 남자 기사의 대답을 듣고, 기영은 찜찜한 기분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 14층이란 집구석은 대체 뭘 하는 집구석인가? 앞 베란다의 물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들리고 있었다. 기영은 학교에 가려고 가방을 챙겼다. 나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렀다. 변기의 물을 내리는데, 희멀건 뭔가가 다시 또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어제 새벽에 본 그 덩어리였다. 분명히 그것은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손톱의 색깔은 붉었다.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 저것은 결코 사루비아 과자가 아니다. 기영은 그 손가락을 찍어놔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황급히 전화기를 찾으러 나갔다. 가방에 놔둔 전화기가 책 때문에 잘 빠지지 않아서, 힘을 주어서 억지로 빼냈다. 그리고 화장실로 다시 갔을 때, 그 손가락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기중에게 이 이야기를 다시 했다가는, 형이 피곤해서 헛것을 보았다고 말할 것이다. 

  오후 강의 내내, 기영의 마음은 불안과 공포로 옥죄어드는 것만 같았다. 어제부터 들리는 물소리와 사람의 손가락.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 물소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주민도 들었다. 그렇다면 그 손가락은 무엇인가? 자신의 감각에 문제가 없는 것은 확실하다. 언젠가 신문 기사에서 읽은 살인사건 이야기가 떠올랐다. 살인자가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사흘 밤낮 물을 썼다던가. 강의가 끝났는데도, 기영은 오금이 저려서 책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앞 베란다의 물소리는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그러던 것이 사흘째 되던 날, 오후 4시가 좀 넘어서야 들리지 않았다. 기영은 그나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물소리 때문에 정말이지 돌아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고 물어보니, 관리사무소에서 왔다고 했다.

  "아이고, 물소리 때문에 고생 많으셨죠?"
  "아, 이제는 안 들리더라고요. 사흘 동안 이게 뭔 일인지, 원."
  "오늘 14층에 다시 가봤더니, 거기 주인이 문을 열어주더구만요. 남자가 어디 목수 일을 다니나 본데, 먼 데 갔다가 와서 보니까 세탁기 물이 틀어져 있더랍니다. 그래서 그랬다고 하네요."
  "아무튼 해결되어서 다행입니다. 기사님도 수고하셨어요."
  "또 불편한 일 있으면 연락을 주시고요."

  어쨌든 물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기영의 마음속 불안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화장실 변기의 괴이한 손가락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하면 나을 것 같았다. 기영은 두 눈을 가볍게 비벼보았다. 앞 베란다 앞으로 보이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조그만 애들이 악다구니를 쓰면서 놀고 있었다. 잘 보이고, 잘 들린다. 이상한 것은 그 손가락이다.

  어쩌면 살인마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곳. 자신과 동생은 그런 곳에 살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기영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아파트가 갑자기 싫고 무서운 곳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하층민이 사는 이 변두리 외곽의 복도식 아파트에서는 살인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낡은 나무 창틀 사이로 초겨울의 바람이 미어지듯 들어왔다. 만약 집수리할 돈이 있다면 새시부터 했을 것이다. 실리콘이 경화된 낡은 알루미늄 새시는 추위와 더위를 막는 데에는 무용지물이었다. 겨울바람이 새시 틈새로 들어왔고, 그 바람이 나무 창틀을 흔드는 소리를 내었다.

  "방풍 비닐을 붙여야 할 때가 왔군."

  마치 번데기가 누에고치를 짓듯, 겨울에는 베란다 쪽의 문만 놔두고 모두 덕지덕지 방풍 비닐을 붙였다. 방풍 비닐로 바람은 막을 수 있겠지만, 아파트 곳곳에서 풍겨나오는 가난과 몰상식의 냄새는 막을 수 없었다. 일부 주민들은 베란다로 담배꽁초와 음식물 쓰레기를 내던졌다. 관리사무소에서 아무리 안내 방송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 것을 참아내는 것도 고역인데, 이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음습한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의 여자는, 아니 남자일 수도 있겠지, 아무튼 그 사람은 손가락을 잃은 채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살았을까, 죽었을까? 어쩌면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기영의 생각은 곰팡이의 포자처럼 끝 간 데 없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 아파트는 서울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생명의 동아줄 같은 보금자리였다. 그러나 변기에서 보았던 그 손가락이 기영의 마음을 불안과 공포로 뒤흔들었다. 어쩌면 자신은 이 보잘것없는 아파트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할지도 몰랐다. 다른 곳으로 이사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장소의 이동일 뿐이지 계층의 이동은 될 수 없을 터였다. 별 볼 일 없는 대학의 국문과 졸업생으로 취업은 애당초 막혀있고,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지도 막막했다. 민철이 이력서를 냈다는 출판사에 사실은 기영도 이력서를 진작에 냈었다. 하지만 기영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취업 준비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답답한데, 잘린 손가락까지 보게 되니 기영의 스트레스는 더 심해지고 있었다.

  "어, 이제 물소리 안 나는데."

  밤늦게 들어온 기중이 앞 베란다를 쓱 들여다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그래. 낮에 관리사무소에서 다녀갔었다. 14층에서 외출하면서 모르고 세탁기 물을 틀어놨었대. 참 한심한 인간이야. 어떻게 물을 틀어놓고 모를 수가 있어?"
  "글쎄.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있으니까. 형의 기준에서는 이상한 사람이겠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둔하게 사는 사람이겠지."

  기중은 식탁 위에 편의점에서 가져온 것들을 펼쳐놓았다. 망고 요구르트, 티라미수 케이크, 딸기 우유, 캔 커피. 모두 소비기한이 지나서 폐기해야 하는 식품들이었다.

  "오늘은 좀 괜찮은 것들이 나왔어. 형 배고플 때 먹어. 난 별로 생각 없어."

  착한 녀석. 기영은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가는 기중의 마른 어깨를 보니 마음이 짠해졌다. 과연 자신이 형으로서 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아니, 어쩌면 동생에게 기대지 않고서 살아가는 것도 버거울지 모르는 일이다. 어떻게든 내 앞가림을 해야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앞으로의 생계에 대한 막막함이 기영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통장에는 부모님의 마지막 농지를 처분하면서 받은 돈 500만 원이 있을 뿐이었다. 취업이 늦어지고, 그 통장의 잔고가 마이너스로 전환된다면 과연 자신 앞에는 어떤 삶이 펼쳐질 것인가? 그런 생각에 이르자, 기영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기영은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담배도 끊어야지. 이것도 돈 드는 습관이니까."

  기영이 벤치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화살 문신의 몽골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나왔다. 아, 또 저 인간이네. 기영은 기분 나쁜 껄끄러움을 느끼며 담배를 비벼서 껐다. 기영은 아파트 출입구 쪽으로 걸으면서, 집집마다 외부로 나와 있는 보일러 연통을 바라보았다. 과연 150 세대 가운데 이 초겨울 밤에 난방하는 집은 몇 집이나 될까? 난방을 틀게 되면, 보일러 연통으로 연기가 나오게 되어있다. 기영은 주의깊게 흰 연기가 나오는 연통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것이 끝이었다. 어쩌면 이른 저녁에 난방을 틀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영이 가끔 생각날 때마다 그렇게 세어보아도 이 아파트 사람들은 난방을 거의 틀지 않았다. 기영의 집 보일러의 난방 설정 온도도 17도에 맞춰져 있었다. 기영은 하층민에게 절약이란 학습된 것이 아니라, 내재된 본능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들어왔다.

  동생은 이미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기영은 식탁에 동생이 펼쳐놓은 간식들을 냉장고에 조심스럽게 넣어두었다. 생명의 양식이네. 그렇게 혼잣말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그 생명의 양식도 동생이 군에 입대하게 되면 끝이었다. 화수분 같은 간식도, 저렇게 코 고는 소리도 없는 이 집은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기영은 새삼스럽게 부모님을 떠올리면서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쏴아쏴아..."

  기영이 물소리에 잠이 깬 것은 새벽 3시가 좀 넘어서였다. 아, 또 저 물소리야? 기영은 앞 베란다 문을 확 열어제꼈다. 물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젠장, 저 14층 놈은 분명 범죄자야. 살인을 저지른 게 틀림없어. 변기에서 내가 본 그 손가락도 저놈이 죽인 여자일 거야. 기영은 분노와 공포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쩌면 또 화장실의 변기에 그 손가락이 둥둥 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영은 화장실의 불을 켰다. 다행히도 변기에는 물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영이 화장실의 불을 끄고 돌아서려는데, 어디선가 비릿한 냄새가 났다. 언젠가 요리하다가 손을 크게 베였을 때 맡았던 피 비린내였다. 기영은 다시 화장실의 불을 켰다.

  "아니, 저건..."

  변기의 물이 붉은색으로 변하면서 손가락 하나가 천천히 맴돌았다. 기영은 곤하게 자고 있는 동생을 차마 깨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변기의 레버를 눌러 물을 내렸다. 손가락이 사라졌고, 물도 맑아졌다. 기영은 화장실 문을 닫고는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컴퓨터를 켰다. 그래,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하자. 기영은 자신의 첫 단편을 쓸 생각이었다. 글쓰기가 자신의 꽉 막힌 인생의 탈출구가 될 것만 같았다.

  '역류(逆流)'

  깜박거리는 커서가 기영이 아직 가지 않은 길을 안내하는 화살표처럼 움직였다. 저 손가락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지. 앞 베란다의 물소리는 계속해서 세차게 들렸다. 타닥타닥, 기영이 두들기는 자판의 소리가 차가운 집안의 공기 속에서 음표처럼 떠다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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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이게 다 뭐예요?"
  "제사 지낼 거."
  "인테리어 박씨네?"
  "야, 인테리어 박씨가 뭐냐. 이제는 새아버지로 인정 좀 해주면 안 되냐?"
  "난 못해요."

  양손에 장 본 것을 잔뜩 들고 온 엄마를 보니, 나는 부아가 치밀었다. 남의 집 제사를 지낸다고 왜 저 난리인가? 인테리어 박은 엄마의 남자친구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제는 남편에 근접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엄마는 3년째 그 아저씨의 부모 제사를 지내고 있다.

  "네가 인정을 하든 못하든, 어쨌든 그 아저씨하고 엄마는 같이 살 거야. 그리고 올해는 너도 그 제사에 참석해야 해."
  "엄마, 지금 그 말 진짜야? 내가 미쳤어? 내가 왜 박 씨 집 제사에 가? 엄마, 어디 좀 이상한 거 아냐?"
  "빌어먹을 자식. 네가 지금 그게 엄마한테 할 소리냐?"
  "아니, 엄마 말이 웃기잖아. 나는 김민수야. 김 씨 집 자손이라고. 그런데 박 씨 집 제사에 가라고 하니까 그런 거 아냐."
  "그건 네 입장이고. 어쨌든 올해 제사는 너도 지내."
  "어쨌든 난 안 갈 거니까, 엄마가 알아서 해."

  그렇게 말하고는 나는 내 방에 들어와 버렸다. 아무리 남자한테 정신이 팔려도 그렇지. 남의 집 제사 지내주는 것도 모자라, 자기 자식한테 그 집 제사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엄마의 논리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저런 엄마하고 내가 얼마나 더 살아야 할까? 이제 고등학교 1학년, 앞으로 3년을 버틸 수 있을까? 나에게 '독립'이라는 말은 서슬 퍼런 일제시대를 살던 우리 조상님들이 느꼈던 막막함과 맞닿아 있다. 대학은 갈 수나 있을까? 아니, 갔다고 해도 졸업을 할까? 스무 살이 되었다고 무조건 집을 나와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너, 나하고 좀 얘기나 하자."

  스마트폰 테트리스 게임의 블록들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를 내고 있을 때, 인테리어 박이 내 방문을 열었다.

  "아저씨, 노크 좀 하시죠?"
  "가족끼리 무슨 노크냐. 아무튼 좀 나와 봐."
  "싫어요. 그냥 여기서 말해요."
  "어휴, 쟤가 버릇이 없어서 저래."

  부엌에서 장 본 것을 정리하던 엄마가 참견하는 소리를 했다. 나는 박씨 아저씨보다도 저렇게 말하는 엄마가 더 얄밉고 짜증스러웠다.
 
  "이번 제사는 가족의 화합 차원에서도 중요하니까, 너도 참석해야 한다. 알았지?"
  "무슨 가족이요? 아저씨 가족은 인호잖아요. 뭐 보니까, 엄마는 곧 가족이 될 거 같고. 난 빼주시죠?"
  "아니, 이 자식이."
  "나가요. 나가라구요."

  내가 화가 치밀어서 고함을 지르자, 박씨 아저씨는 못 이기는 척 방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저 남자가 싫다. 너무나도 싫다. 나한테서 엄마를 뺏어간 것으로도 모자라서, 자기가 내 아버지라도 된 것처럼 으스대고 있다. 나는 저 남자의 경박스러움과 뻔뻔스러움에 침을 뱉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만다. 저 사람의 재수 없는 상판대기와 성질머리를 똑 닮은 아이가 인호이다. 나와 동갑인 그 자식과 나는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것도 같은 반이다. 부모는 이혼했고, 새아버지가 될 남자의 아들과 같은 학교, 같은 반에 다니다니. 이건 뭔가 꼬여도 단단히 꼬여버린 인생이다.

  엄마가 나한테 아저씨네 제사에 참석하라고 하는 소리를 보니, 아마도 이제는 진짜 같이 살 모양인가 보다. 하긴, 지금도 같이 살고 있기는 하다. 박씨 아저씨와 인호는 1층에, 엄마와 나는 2층에 산다. 이 2층 양옥은 박씨 아저씨의 집이다. 그러니까 나와 엄마는 엄밀히 말하자면, 박씨 아저씨에게 얹혀살고 있다. 뭐랄까, 나에게 있어 박씨 아저씨, 인테리어 박은 엄마의 남자 친구이며 집주인인 셈이다. 엄마는 이제 세입자 노릇 그만하고 진짜 안방마님이 될 심산인 것이다. 안방마님이라고 하니까, 인테리어 박이 돈푼깨나 있는 사람처럼 들릴 수도 있다. 동네에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인테리어 박이 알짜배기 부동산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인테리어 박은 오래전에 파주의 비닐하우스 농지를 사뒀는데, 거기에 아파트가 곧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나는 맨날 후줄근한 점퍼나 걸치고 다니는 그가 그런 큰돈을 만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자기 입으로 떠벌리고 다닌 허풍이겠지.     

  "너, 우리집 제사에 오지 마라."

  내가 밤늦게 마당에서 줄넘기하고 있을 때, 재수 없는 인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구. 야, 나도 박씨 집 귀신이 먹다 남길 음식에는 관심 없다."
  "자식, 말하는 본새하고는. 가만 보면 말이지, 넌 사람 열받게 하는 재주가 있어."
  "야, 누가 할 소리. 너야말로 네 아빠 닮아서 사람 긁는 게 취미 아니냐?"
  "어이, 동생. 말 좀 조심하지. 이제 내 아빠가 동생 아빠도 될 건데."
  "웃기고 있네."

  나는 인호 녀석의 속 긁는 말에 태연해지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어서 곧 줄넘기를 멈추고 말았다.

  "아, 달도 밝다. 동생, 운동 더 하다 들어가라고. 이 형님은 이제 자야겠다."

  나는 저런 녀석한테 동생 운운하는 소리를 듣게 만든 엄마가 새삼 원망스러워졌다.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와서 문을 여니, 부엌에서 설거지하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저녁 내내 제사 음식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이제서야 대충 일이 끝난 모양이었다.

  "저녁 내내 뺀질거리면서, 부엌일이나 좀 도와주지 않고."
  "내가 말했잖아요. 난 김씨 집안 자손이라고. 엄마나 박씨 집안 일 열심히 하세요."
  "야, 너는 자식이 되어가지고 엄마 좀 위해주면 안 되냐!" 

  비아냥거리는 내 말을 듣고는 엄마가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그러는 엄마는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대머리에다 키도 작은 박씨 아저씨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그래? 그 파주에 있다는 금싸라기 땅 때문에? 정말 돈 때문에 그런 거야?"
  "넌 그게 네 엄마한테 할 소리냐? 그런 돈 되는 땅 있으면 자기 자식 주지, 아무리 좋아도 날 주겠냐? 너는 사람이 살면서 의지할 데가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러니까 엄마, 인테리어 박이 엄마가 의지할 만한 뭔가 대단한 게 있는 양반이냐고. 인물이 좋아? 지금 확인된 재산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 낡은 2층 양옥집, 동네에 있는 인테리어 가게. 그게 전부잖아."
  "인물 좋은 건 네 아빠 하나로 족해. 적어도 인호 아빠는 나하고 너, 밥은 굶기지 않을 거다. 남자는 모름지기 책임감이 있어야 하는 거야."

  나는 엄마의 그 말에 새삼스럽게 기억 속의 아빠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아빠 얼굴을 못 본 지도 벌써 5년째다. 아빠가 부산의 어느 변두리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소리를 듣기는 들었다. 같이 사는 여자가 있다던가, 어쩌면 나에게는 이미 배다른 동생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나에게 아빠라는 존재는 너무나 멀게만 느껴진다. 남편으로서도 아빠로서도 낙제점이었던 사람. 그리고 앞으로도 볼 생각이 없는 사람. 그 사람이 나에게 물려준 것은 큰 키와 번듯한 외모뿐이다.

  "그런데 엄마, 그 밥을 안 굶긴다는 인테리어 박이 왜 엄마가 아파트 청소 나가는 것은 안 말려? 엄마는 지금도 청소일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네가 철딱서니 없는 거야. 어쨌든 내가 너 대학은 보내야 할 거 아니냐? 그런 돈을 인호 아빠한테 달라고 하냔 말이지. 넌 내가 낳은 자식이고, 네가 대학가는 건 내 책임이야."
  "엄마, 난 그딴 대학 안 가도 괜찮아. 그러니 제발 나한테 박씨네 제사에 참석하라느니, 그런 말 좀 하지 마. 난 그 집 사람들, 너무나 싫으니까."
  "그럼, 당장 이 집에서 나가서 네 힘으로 밥 먹고 살든가. 네가 걸치고 있는 옷이며 신발은 누가 사준 거냐? 그리고 네가 살고 있는 이 집의 주인이 누구냐? 좀 대가리를 굴려 보라고. 어떻게든 살살 비위 맞추면서 네가 살아갈 방도를 생각해야지."

  나는 엄마의 그 말에 화가 나서, 손에 든 줄넘기를 현관문 앞에다 팽개치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누워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인테리어 박과 인호가 싫은 것은 내 감정의 문제일 뿐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문제이다. 17살인 내가 스스로 독립할 방도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인테리어 박에게 '아저씨'라는 호칭 대신에 '새아빠'라든지, 아니면 '아버지'라고 부르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굴욕적이다. 거기에다 인테리어 박의 아들 인호 녀석은 또 어떤가? 그 자식은 느물거리는 말투로 사람의 속을 벅벅 긁어댄다. 그런 녀석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것은 견딜 수가 없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서는 한편으로 하나의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과연 가족이란 게 뭘까? 어떤 면에서 지난 3년 동안 이 낡은 이층집에서 보낸 시간들은 인테리어 박과 인호를 생판 남으로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상한 가족이군. 그렇게 혼잣말을 내뱉고는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어이, 김민수. 요새 잘 지내냐? 내가 어제 화장실 낙서에서 재밌는 거 읽었다. 너 윤슬이랑 사귄다며?"
  "네가 그렇게 믿고 싶으면 믿어라."
  "아, 이 자식은 뻗대는 것도 멋있단 말이야. 저러니, 여자애들이 맨날 따라다니지."
  "나도 그 낙서 봤어."
 
  내가 '멀대'라고 부르는 저 재수 없는 녀석은 이산호다. 유도부에 들어갔다는 것만 내세우며, 괜히 거들먹거리는 한심한 놈에 지나지 않는다. 저런 자식 옆에서 발바닥 비비는 파리처럼 인호가 붙어있었다.

  "이산호 넌, 박인호하고 사귀냐? 너희 둘이 맨날 붙어 다니던데."
  "너, 말조심해라. 아침부터 열받게 하지 말고."
  "그러니 너무 붙어 다니지 말라고."
  "야, 산호야. 네가 참아라. 저게 겉멋이 들어 그래."
 
  나는 멀대 자식보다 그 옆에서 빌빌거리는 인호의 상판대기를 보는 것이 더 싫고 역겨웠다. 왜 저 녀석은 저러고 살까? 저런 모자란 놈 옆에 있으면 더 바보처럼 보인다는 걸 모르나? 근데 윤슬과 내가 사귄다는 말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나는 윤슬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짧은 숏커트 머리에 늘 생콩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아이에게 나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런데 왜? 한 달 전쯤인가? 운동장에서 윤슬이 달리다가 넘어졌을 때, 내가 일으켜 세워준 적은 있지.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별로 기억나는 일이 없다.

  "있다 1층에 내려와라. 너도 제사에 참석하는 거야."

  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엄마는 제사 음식을 2층에서 1층으로 막 나르던 참이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냥 눈 딱 감고 제사에 참석할 것인가? 아니면, 엄마가 난리를 치든 말든 내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버틸까? 어떤 면에서 엄마에게 이 제사는 박씨 집안 사람이 되는 공식적인 절차인지도 몰랐다. 엄마는 그래서 나더러 제사에 참석해 자기 얼굴이라도 세워주라는 것이다. 왜 박 씨 집안 제사에 김 씨 자손인 나의 참석이 구태여 필요한지는 납득할 수 없지만, 내가 짐작하기로는 그러했다. 나는 복잡한 머릿속 생각을 털어내려고 줄넘기를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하여간, 우리 동생은 체력 단련에는 진심이야. 얼굴도 잘생겨, 운동도 잘해."
 
  내가 한참 줄넘기를 하고 있을 때, 인호가 어느새 다가와 이죽거리며 말했다.

  "박씨 집안 아드님, 이제 조상님 오실 텐데 제사 준비나 잘하시죠."
  "뭐 제사 준비는 댁의 어머님이 잘하고 있고요. 그나저나 너 윤슬이하고 사귀는 거 맞아?"

  나는 아침에 들은 그 이름을 또 들으니,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윤슬이한테 별 관심도 없어. 왜 자꾸 걔 이름을 꺼내는 거야?"
  "이 자식 봐라. 너 걔가 너 좋아하는 거 몰라? 뻔뻔하게 모르는 척을 하고 있네."

  멀대 녀석이 봤다는 화장실의 낙서가 그래서 나온 건가? 나는 인호의 그 말에 하도 어이가 없어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너, 혹시 네가 걔를 좋아하는 거 아니냐? 윤슬이를 인호 네가 좋아하는 거 맞지?"
  "내가 그런 선머슴 같은 애를 왜 좋아해? 걔는 예쁘지도 않다고."

  인호는 성질이 났는지 소리를 빽 질렀다.

  "그건 그렇지. 그렇다고 예쁜 애가 너를 좋아할 리는 없지."
  "너는 얼굴만 번지르르하게 생긴 게 나중에 여자들 등이나 처먹을 관상이야. 이 재수 없는 놈아."
  "진짜 윤슬이를 좋아하는 게 맞네."

  나는 신이 나서 더 짖궃게 인호를 놀려댔다.

  "김민수, 너 말이야. 네가 기억해야 할 게 있는데, 너하고 네 엄마는 우리집에 얹혀살고 있어. 내가 모를 줄 알아? 네 엄마가 우리 아빠 돈 보고 저러는 거."
  "이 새끼가 진짜..."

  나는 줄넘기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인호의 멱살을 잡았다. 체구가 작은 인호는 팔랑거리는 바람개비처럼 바닥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아빠, 민수 자식이 날 죽이려 들어!"

  인호의 악다구니에 곧 인테리어 박과 엄마가 놀라서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대체 뭐 하는 짓들이야!"

  나는 인테리어 박의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큰소리에 놀라서 멍하니 서 있었다. 인테리어 박의 옆에 있던 엄마는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민수, 넌 2층으로 올라가라. 오늘 저녁은 내 눈에 띄지 말어."

  인테리어 박은 바닥에 널브러진 인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 나서는 다친 곳이 없는지 인호의 얼굴과 몸을 살펴보았다. 저런 머저리한테도 아빠가 있다. 그런데 왜 지금 내 곁에는 아빠가 없는가 생각하니 슬픔이 밀려왔다. 무엇보다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터벅터벅 2층 계단을 올라갔다.

  "딱, 딱, 딱."

  2층에서도 1층 제사상에서 두들기는 젓가락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박 씨 집 귀신들이 김 씨 집 며느리가 차린 음식을 배터지게 먹겠군. 내 심사는 뒤틀릴 대로 뒤틀려 있었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아서, 그냥 내가 좋아하는 테트리스 게임을 계속할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1층 마당에서 지방(紙榜)을 태우는지, 매캐한 연기가 창틈으로 스멀스멀 스며들었다. 그때였다.

  "김민수, 자냐?"

  방문 밖으로 인호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가. 너 볼 일 없다."
  "아까는 내가 좀 심했어."
  "듣기 싫다고. 가라고."

  나는 짜증이 치밀어서 소리를 질렀다.

  "그래, 갈게, 간다고. 근데 말이야. 난 너도 아줌마도 싫지는 않아. 뭐랄까, 가족 같거든."
  "가족 같은 소리하고 앉아 있네. 넌 박 씨고, 난 김 씨야.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나는 문밖의 인호를 내쫓지도 못하고 그렇게 말을 주고받았다.

  "너 같이 잘생긴 동생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진 않지."
  "하여간, 말하는 거 하고는."
  "나, 간다."

  그렇게 인호가 내려가고 나서도 내 귓가에서는 '가족'이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다. 키가 작고 대머리인 새아버지, 나보다 생일이 한 달 빠른 비실비실한 의붓형, 그리고 엄마.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이 이상한 가족의 족쇄에서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겨울 소슬바람이 후드득, 낙엽을 쓸어가는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 조금씩 조금씩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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젬마에게


  젬마, 내가 일하는 원목실의 창문으로 커다란 벚나무가 보여요. 그 벚나무의 잎들이 노랑과 주황으로 변하는 것을 보니, 문득 '마지막 잎새' 생각이 나더군요. 그래요,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 말이에요. 늙고 보잘것없는 화가 베어만은 자신의 마지막 걸작을 완성하고 죽지요. 그가 그린 담벼락의 잎사귀 하나를 보고, 중병을 앓던 젊은 아가씨는 삶의 희망을 되찾고요. 어쩌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사도직도 그런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병원에 입원한 아픈 환자들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만들어주는 일.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내 능력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아요.

  내가 원목실 소임을 맡기 전에는, 해남에 있는 수녀원 농장에서 농사짓는 사도직을 했어요. 농사일이란 게, 해보니까 참 재밌어요. 물론 힘들지요. 그런데 그 일이 내 적성하고 참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지 뭐예요. 씨를 뿌리고 열심히 풀도 매요. 그렇게 가꾸다 보면 어느새 수확하는 거예요. 토실토실하게 자란 예쁜 고구마들이며, 속이 꽉 찬 배추들 보면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요. 그렇게 수확한 것들을 수녀원 공동체에 나누어서 보낼 때는 마치 먼 곳에 자식 보내는 심정이 되기도 하고. 그런 말이 좀 우습게 들리나요? 하지만 나는 농사일하면서 참 행복했어요.

  그런 농사일에 비하면, 이곳 병원에서의 사도직은 좀 힘들고 지칠 때가 많아요. 아픈 사람들은 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니까, 잘 들어줘야지요. 환자들은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고 그래요. 그게 싫고 귀찮다기보다는... 내가 그분들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괴롭더라고요. 젬마한테 내가 어떻게 작은 힘이라도 되어줄지 생각해 보았어요. 그게 무엇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늙은 화가 베어만이 마지막 잎새를 그리듯 이런 편지라도 쓰고 싶었답니다.

  젬마가 무단으로 외출해서 하루 동안 연락이 안 되었었잖아요. 그때, 내가 정말 걱정 많이 했어요. 혹시 안 좋은 생각이라도 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요. 젬마의 언니한테 내 휴대전화 번호를 남기면서 늦게라도 좋으니, 젬마 소식을 알려달라고 했었지요. 밤 10시에 언니가 젬마를 찾았다고 연락했을 때, 그제야 마음이 놓이더군요. 부모님을 모신 추모 공원이 꽤 먼 곳이었는데, 그 아픈 몸으로 어떻게 젬마가 갔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요. 젬마가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났을 거예요.

  젬마하고 같은 병실에 있었던 로사 자매 기억나요? 50대 중반으로 체격이 꽤 큰 아주머니 환자요. 그 자매는 난소낭종으로 난소와 자궁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어요. 나중에 들으니, 낭종의 무게가 무려 7kg이나 되어서 수술팀이 다들 놀랐다고 해요. 그런 큰 수술을 받았는데도, 로사 자매는 아주 쾌활했어요. 이제 그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일도 없고, 오히려 가볍게 살 수 있다고 하면서요. 로사 자매는 동대문 시장에서 이불 장사를 30년 넘게 했어요. 결혼도 안 하고 홀어머니에 세 명의 동생들 뒤치다꺼리하느라, 자기 돌볼 틈도 없었다고 해요. 어느 날부터 자꾸 배가 나오고 속이 불편해서, 소화기내과를 갔대요. 거기에서 내시경을 해보고는 문제가 없어서, 의사가 부인과 진료를 받아보라 했다는군요. 그러고 나서야 그게 난소낭종인 걸 알게 된 것이지요. 낭종이 커지기 전에 일찍 발견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이 들지요. 그래도 그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그 자매의 의연함이랄지, 어쩌면 그것은 나이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어요.

  로사 자매와는 달리, 어떤 의미에서 젬마에게는 스물넷의 젊음이 고통으로 다가오겠지요. 젬마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나에게 그렇게 물었었지요.
 
  "수녀님, 여자로서 제 인생은 이제 끝난 거죠? 정말 그렇죠?"

  초췌한 얼굴로 나에게 묻는 젬마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더군요. 내가 그 어떤 말로 위로를 한다고 해도, 젬마에게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젬마의 그 질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어요.

  젬마, 내 이야기를 좀 할까요? 나에게는 아주 착하고 예쁜 조카가 있었어요. '있었다'라고 말하는 건, 그 아이, 지수가 이제는 세상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지수는 혈액암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떴어요. 지수의 나이 여덟 살 때에요. 그때가 나의 인생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때였지 싶어요. 그 어린아이의 죽음이 나의 신앙과 삶을 온통 뒤흔들었으니까요. 왜 아무 죄도 없는 그 아이가 죽어야만 했을까요? 나는 하느님께 왜, 라는 질문을 던지고 또 던졌어요. 도저히 지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으니까요. 왜 그런 일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 일어나야 했는지, 왜 그 아이가 그토록 고통받다가 죽어야 했는지, 어떻게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거든요.

  그 가느다란 팔에 혈관을 찾지 못해서 여러 번 주삿바늘을 찌를 때, 지수가 비명을 지르던 모습이 아직도 떠올라요. 동생이 그러더군요. 저걸 보느니, 아이가 그냥 얼른 가버렸으면 한다고요. 그리고 마침내 지수가 눈을 감았을 때, 우리 가족은 슬프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했어요. 지수가 더이상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지수가 가장 두려워했던 건... 다시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일이었어요. 지수의 하나뿐인 소원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결국 그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었지요. 나는 젬마의 퇴원을 보면서, 젬마가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를 생각했어요. 젬마, 젬마는 집에 가서 어떤 일을 가장 먼저 하고 싶은가요? 어쩌면 한 달 동안 쓰지 못한 책상의 먼지를 닦아낼 수도 있고, 이제 계절이 바뀌니까 옷장의 옷들을 살펴볼 수도 있겠네요. 나는 무엇보다 젬마가 식탁에 앉아서 따뜻한 홍차를 마시면 좋겠어요. 

  젬마, 젬마가 나에게 물었던 그 질문에 대해 이제는 내가 답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자로서의 삶, 그러니까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엄마로서의 삶은 사라진 것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젬마에게 여전히 펼쳐진 길이 있어요. 한 인간으로서의 길 말이에요. 그 길 위의 삶이 어떤 것인지 젬마는 아직 모르잖아요. 그러니 한번 걸어가 보는 거예요.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그 길을 젬마가 잘 걸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그것을 위해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돕고 싶어요.

  주치의 선생님에게 들으니, 다행히도 주변 장기로 암세포가 전이되지 않았다고 해요. 만약에 전이가 되었으면, 힘든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그걸 안하게 되었으니까요. 병원에 다니면서, 계속 정기적으로 추적 관찰하면 괜찮을 거라고 하면서요. 지금은 큰 수술을 받고 힘든 상태니까, 모쪼록 몸조리 잘하면서 지내는 것이 중요해요. 앞날의 일을 생각하는 건 잠시 미뤄두고요.

  병원에 오게 되면 원목실의 나를 찾아주어요. 어쩌면 젬마는 나를 다시 만나려고 하지 않을 것도 같아요. 원목실에서 5년을 있어 보니 알겠더군요. 병원에서 힘든 투병 생활을 했던 환자들이나 그 가족들은 병원을 시련의 장소로 기억한다는 사실을요. 마치 전쟁터의 병사가 자신이 치열하게 싸웠던 그곳을 찾는 것을 꺼리듯, 병원이 불안과 공포의 장소로 각인되는 것이지요. 호스피스 병동에서 남편의 임종을 본 아주머니가 나중에 나에게 그런 말을 내게 하더군요. 이 병원의 모든 것이 끔찍하게 싫다고요. 그래서 병원도, 이곳에 있는 수녀님도 다시는 찾지 않게 될 것 같다고 말이지요.

  젬마, 나를 다시 찾지 않아도 괜찮아요. 다만, 내가 젬마에게 하고 싶은 말은... 지금 젬마에게 일어난 일을 '왜'라고 물으면서 구태여 그 답을 찾지는 않았으면 해요. 나도 지금까지 지수의 죽음에 대한 이유는 찾지 못했으니까요. 누군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도 일어났을 뿐이다. 왜 나는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결국 그런 생각에 이르자, 하느님을 원망했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더군요. 여전히 고통의 하늘은 열려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살아야 할 날들이 남아있어요. 젬마가 언젠가 나를 다시 만났을 때, 젬마의 살아온 그날들을 이야기해 주면 좋겠어요.

                                              사랑을 담아, 베로니카 수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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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서 오세요."
  "아줌마, 말보로 하이브리드 좀 줘 봐."
  "잠시만 기다리세요."

  경미는 담배 진열대에 서면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외워야 할 담배의 종류가 너무 많았다. 손님들이 찾는 담배가 제각각인데, 그걸 정확하고 빠르게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만있자, 말보로 하이브리드는 어디 있는 거지? 그게 멘솔 들어간 거니까, 여기쯤 있을 것 같은데...

  "이 아줌마는 항상 느려. 그래 가지고 뭔 장사를 해?"
  "아유, 죄송합니다. 이게 맨날 헷갈리네요. 아, 찾았다. 여기 있습니다."
  "좀 빠릿빠릿하게 일 좀 하쇼."
  "네, 네, 알겠습니다."

  40대 중반의 키가 작고 퉁퉁한 남자 손님은 경미에게 그렇게 핀잔을 주고는 편의점 문을 나섰다. 역시 사람을 대하는 일은 쉽지 않구나. 경미는 나즈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남는 낮시간의 부업으로 찾은 것이 편의점 아르바이트였다. 동네 편의점 창문에 붙어있는 구인 광고를 보고, 편의점에 그냥 한번 들어가 본 것이 시작이었다.

  경미가 면접을 본 편의점의 점주는 대기업에서 퇴직한 50대 초반의 중년 남자였다. 그는 경미의 생글생글한 웃음이 좋아 보인다면서, 그 자리에서 채용을 결정했다. 경미는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편의점 일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지만, 경미는 사장과 야간 알바생에게서 여러 가지를 빠르게 배워나갔다. 주부로만 살아온 경미 자신도 정말이지 놀랄 지경이었다. 자신에게 그토록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업무 매뉴얼이 다소 복잡하기도 했지만, 한번 익히고 나니 나름의 요령도 생겼다. 무엇보다 편의점이 오피스텔이 위치한 상업지구라, 번거로운 어린 학생이나 노인 손님이 거의 없었다. 어떨 때는 좀 시간이 남아돌아서, 책이라도 가져와서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신 여사, 오늘 매상은 좀 어때?"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요. 그냥 평일 수준으로 나왔어요."

  경미는 사장이 자신을 부르는 '여사(女史)'라는 호칭을 들으면, 좀 우습기도 하고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사장은 매너가 좋은 사람으로 경미에게 말을 함부로 놓지도 않았고, 경미가 실수를 해도 큰소리로 질책하는 일도 없었다. 일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사장은 나름 괜찮은 고용주였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쉽게 안착할 수 있었던 것도 저런 사장의 태도 덕분이기도 했다.

  "사장님, 신제품 프로모션으로 나온 것들이 있어요. 크림빵하고, 즉석 카르보나라, 물만두, 이렇게 세 개요. 이거 챙겨드릴까요?"
  "난 크림빵 하나 가져갈 테니, 나머지는 신 여사 집에 가져가서 애들 간식으로 줘요."

  사장은 크림빵 하나만 얌전하게 가져갔다. 원래대로라면 저런 신제품들은 사장이 다 가져가든가, 매대에 진열하게 되어있다. 그런데도 사장은 그런 것들이 나오면, 너그럽게 아량을 베풀어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져가게 했다.

  경미는 야간 알바생에게 인수인계하면서 자신이 가져가기로 한 즉석 카르보나라 제품을 건네주었다. 서른 살의 야간 알바생은 늦깎이 대학생으로 학비를 벌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알바생이 간식을 챙겨준 경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경미는 새로 나온 물만두는 어떤 맛일지 궁금해하며 집으로 향했다.

  "이거, 편의점에서 얻어온 거야?"
 
  저녁 식탁에 물만두를 쪄서 내온 것을 보고 남편이 물었다.

  "우리 사장님, 참 관대해. 신제품 프로모션이 세 개 있었거든. 크림빵, 카르보나라, 물만두. 크림빵만 가져가고 나한테 나머지 가져가서 애들 간식 주라는 거야."
  "당신은 간식 줄 애도 없으면서 어쩌다 그런 거짓말을 하게 된 거야?"
  "글쎄, 그냥 아이가 있는 주부로 행세하는 게 내가 더 편할 것 같아서."
  "그럼, 당신 아이들은 몇 살, 몇 살인데?"

  남편이 짖궂은 표정을 지으며 경미에게 물었다.

  "몇 살로 할까? 몇 살로 하면 좋겠어, 여보?"
  "중학생 정도로 하지 뭐. 내가 마흔다섯이고 당신이 마흔셋이니까, 얼추 중학생 학부모 나이잖아."
  "중학생은 좀 골치가 아파. 나는 사장님한테 초등학교 4학년하고 6학년인 아들이 둘 있다고 했거든."
   
  남편은 경미의 말을 듣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초등생 아들 둘이 더 심란하지. 당신은 도대체 그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어떻게 다 하고 편의점 알바를 한다는 거야?"
  "애들은 지들끼리 놔두면 더 잘 알아서 크는 거 아닐까?"
  "그런가? 우린 사실 아무것도 모르잖아."

  남편의 그 말을 들으니, 저녁 식탁의 음식이 벌써 싸늘하게 식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이 식탁은 더 번잡스럽고 시끄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부의 식탁은 언제나 정갈했고 조용했다. 경미는 그런 대화를 더 이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까 보니까, 당신 택배가 하나 왔던데. 그거 뭐야?"
  "응. 랜턴. 캠핑할 때 쓰는 거."
  "근데, 랜턴은 저번에도 샀잖아."
  "이건 색깔이 다른 거라구."

  남편은 그 말을 하며 멋쩍게 웃었다.

  "난 좀 이해가 안 되네. 당신은 캠핑을 가본 적도 없잖아. 왜 그렇게 캠핑용품을 사 모으는 거야? 창고 좀 봐봐. 죄다 당신 캠핑용품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포트메리온 그릇 사다 모으지 않아?"
  "그건 그런데..."

  경미는 자신의 말을 되받아치는 남편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미는 포트메리온 그릇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하나둘씩 사모으기 시작한 것이 작은 방 벽면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100년 후에 고고학자가 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파보면 말이지. 포트메리온과 닭 뼈만 나올지도 몰라. 집집마다 포트메리온 그릇 하나씩은 다 있고, 치킨에 환장한 민족이니까."

  그렇게 눙치면서 남편은 식어버린 물만두를 하나 집어 들었다.

  "이거 맛은 괜찮은데. 담백하고, 고기가 씹히는 것도 좋고. 잘 팔리겠는걸."

  경미는 남편이 먹고 있는 물만두를 간식으로 줄 아이들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았다. 그 아이들이 있다면 남편과 자신이 더 행복했을지, 아니면 더 괴로워졌을지 궁금해졌다. 생기지 않는 아이를 억지로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경주의 이름난 한의원에서 지은 첩약을 먹으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해서, 남편과 경주에 다녀온 것이 2년 전이었다. 그 이후로 이 부부는 더는 아이를 갖는 걸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그 사실을 두 사람은 받아들였다.

  "내일부터 2주 동안은 많이 늦을 거야. 완성된 선박을 검사해야하는데, 고객사에서 시한을 무척 촉박하게 준 거야. 어쩔 수 없이 야간작업도 해야 할 것 같고."
  "아무튼 조심해서 해요. 무리하지 말고."

  경미의 남편은 조선소 QM(Quality Management) 팀의 차장이다. 그곳에서는 건조된 선박을 검사하고 고객사에 인계하는 전과정을 감독한다. 남편이 사무실보다는 주로 현장에서 일하는지라, 경미는 남편이 다치거나 무슨 사고를 당하지는 않을까 늘 신경이 쓰였다. 이번에는 야간작업도 해야 한다고 하니, 남편의 일이 그저 빨리 순탄하게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만 들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이 출근하고 경미도 편의점에 갈 준비를 했다. 경미는 포트메리온 벨 머그컵에 믹스커피를 한 잔 탔다. 이상하게도 이 컵에는 믹스커피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컵에 그려진 분홍색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경미는 이 컵의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궁색하지 않은 살림에도 자신이 편의점에서 일하는 이유가 바로 포트메리온 그릇을 사기 위해서인지도 몰랐다. 새로 나온 그릇 세트를 사려면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경미는 흠집이 나지 않는 수세미로 컵을 닦았다. 물을 틀어서 컵을 헹구는데, 순간 손이 컵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컵은 개수대 안쪽에 부딪히면서 손잡이가 깨졌다.

  "아이고, 아침부터 참 재수가 없네."

  경미는 이 벨 머그컵이 6개짜리 세트라는 걸 떠올렸다. 이 벚꽃 무늬만 따로 사는 일은 어려웠다. 판매처의 대부분은 벨 머그의 무늬를 랜덤으로 보내주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6개짜리 세트를 또 살 수도 없었다. 그건 낭비다. 아무리 포트메리온을 좋아해도 그런 돈을 쓰기는 싫었다. 경미는 벚꽃 무늬 머그컵을 포기하기로 했다. 어쨌든 손을 다치치 않았으니 다행이야. 깨진 머그컵을 신문지에다 주섬주섬 주워 담으며 경미는 혼자 중얼거렸다.

  11시는 편의점의 물품이 입고되는 시간이었다. 배송 기사에게서 인계받은 물품을 확인하고, 배열하느라 11시부터 12시까지 경미는 무척 바빴다. 오늘은 특히 음료 제품이 많아서, 그걸 나르는 것도 꽤 힘들었다. 물건을 다 정리하고, 경미가 소비 기한이 지난 삼각김밥을 하나 뜯어서 먹은 시각은 1시 반이었다. 돈을 번다는 것이 이렇게나 힘들구나. 경미는 세탁할 때 남편의 옷에서 나오는 가는 쇳가루를 떠올렸다. 아무리 작업복을 입고 보호 장비를 갖추어도 선박에서 나오는 이런저런 이물질과 유독물질을 남편은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다. 노후를 위해 꾸준히 저축하고 연금을 붓고 있지만, 남편이 언제까지 직장에 다닐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경미는 두 사람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지금의 편의점 일을 더 열심히 하겠다고 새삼스레 다짐했다.    

  "말보로 하이브리드."
 
  가끔 그 담배를 사 가는 40대 중반의 남자 손님이었다. 남자는 머리를 빡빡 밀어버려서, 경미는 그 손님에게 '빡빡머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네. 여기 있습니다."
  "아줌마, 이제 좀 말귀를 알아먹는구먼."
  "손님 덕분에 열심히 담배 종류 공부했습니다."

  '빡빡머리'가 흡족한 표정으로 담뱃값을 결제하고 편의점 문을 나섰다. 처음에 그런 험한 인상의 사람을 대할 때면 경미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으나, 요즘은 나름의 여유도 생겼다. 계산대 아래에는 바로 경찰 지구대와 연결되는 무선 비상벨 버튼이 있어서, 안심이 되는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편의점이 있는 위치가 번화한 상점가가 아니라서, 손님들 대부분은 그곳 오피스텔 거주민이거나 인근 사무실의 직원들이었다. 경미는 인품이 괜찮은 사장도 그렇고, 편의점을 찾는 손님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들 덕분에 경미는 돈을 버는 일을 통해 세상의 여러 단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커피와 간식을 찾는 사무실 직원들 한 무리가 우르르 계산을 끝내고 가버리자, 편의점은 다시 한산해졌다. 입고된 상품도 다 정리해서 진열해 놓았겠다, 소비기한 지난 폐기 식품도 확인해서 모아두었겠다, 경미에게 쉴 수 있는 약간의 자투리 시간이 생겼다. 그럴 때면 경미는 새로운 포트메리온 그릇들이 있나 스마트폰으로 들여다보곤 했다.

  "아, 이건 좀 비싸다. 접시 하나에 5만 원이면, 세트는 돈이 얼마나 드는 거야?"

  경미는 보랏빛의 예쁘장한 꽃들 사이로 노랑색과 하늘색의 나비가 날아다니는 둥근 접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포트메리온의 무늬는 가만 보면 거의 비슷해 보였다. 정해진 잎사귀 패턴이며 꽃과 나비도 그렇게 특출난 것이 없는 듯했다. 그럼에도 경미는 포트메리온 그릇들의 문양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치 자신이 그 꽃들과 나비가 있는 어떤 한가로운 오솔길을 거닐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이 좋기는 했지만, 문제는 가격이었다. 누군가 그랬던가? 주부들 취미의 끝판왕은 그릇이라고. 자신은 포트메리온 정도에 빠져있지만, 그보다 더더욱 비싼 외산 명품 그릇들은 많았다. 경미는 사람들이 무언가에 빠지게 되는 계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그 시작은 백화점에서 본 포트메리온의 유아용 식기에서부터였을 것이다. 앙증맞은 크기의 밥공기며 귀여운 무늬의 수저 세트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경미는 자신에게는 그 식기 세트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 대신에 그것을 본 그날, 경미는 2인용 커피잔 세트를 샀다. 분홍색의 벚꽃 무늬가 있는 커피잔 세트였다. 경미의 포트메리온 사랑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경미가 황금빛 띠무늬의 접시 세트를 사려면 자신이 받게 될 월급에서 얼마를 써야 하는지 헤아려 보았다. 6개의 접시에다 앞접시까지 더하면, 남는 돈이 얼마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그 그릇들이 예뻐도 그건 무리였다. 경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집에다 포트메리온 박물관을 차릴 것도 아니고, 어느 시점에서는 이 분수에 넘치는 취미를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때가 오지는 않은 것 같았다.

  "신 여사, 오늘 매상은 괜찮은가? 매장에 다른 별일은 없고?"
  "네, 낮에 사무실 손님들 덕분에 평일보다 조금 더 나왔어요. 사장님, 그런데 폐기 식품들은 어떻게 할까요?"
  "이제 그런 건 그만 묻지 그래. 신 여사하고 창민 군하고 필요한 만큼 나눠 가지도록 해요."
 
  소비기한이 지난 폐기 식품들도 알바생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편의점의 모든 물건은 사장의 것이었으므로, 당연하게도 폐기 식품을 처분하는 일에도 사장의 허락이 필요했다. 말만 소비기한이 지난 음식이지, 먹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어떤 편의점에서는 점주가 그 폐기 식품들도 대부분 가져가서 알바생들의 원성을 듣는다는 말도 있었다. 그런 곳에 비하면, 경미나 야간 알바생에게 이 편의점은 일하기 괜찮은 곳이었다. 경미는 오늘 나온 빵과 요구르트, 과자를 나름 공평하게 나누었다. 그리고 그것을 야간 알바생에게 인수인계할 때 건넸다. 나이 든 복학생은 경미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가볍게 목례를 했다. 어떤 면에서 그런 나눔은 같이 일하는 처지의 사람들이 느끼는 연대감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편의점을 나오면서, 경미는 문득 프랑스의 자연주의 화가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그림을 떠올렸다. 끊임없이 허리를 숙여서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의 이삭을 줍는 세 명의 여인. 경미에게 그 그림의 들판은 편의점이었고, 자기 손에 들린 폐기 식품 봉지는 이삭이었다. 경미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경미는 식탁에 앉아 그 비닐봉지에 든 빵을 하나 꺼냈다. 옥수수 크림빵이었다. 옅은 노란색의 옥수수 크림이 든 빵 맛은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남편은 오늘도 늦을 예정이었다. 고객사에서 요청한 선박의 인수 시한이 빠듯했으므로, 남편의 선박 점검 업무는 야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어제도 남편은 새벽 1시가 넘어 집에 들어왔다. 경미는 남편이 과로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 그 시간까지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오늘도 경미는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

  "이건 좀 느끼하네."

  기대했던 옥수수 크림빵의 맛은 좀 실망스러웠다. 경미는 더이상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서 남은 크림빵을 음식물 쓰레기통에다 버렸다. 가져온 요구르트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딱히 설거지할 그릇도 없었으므로, 경미는 약간의 피로를 느끼며 다소 멍한 상태로 식탁에 앉아있었다. 문득 새벽에 꾼 꿈 생각이 났다. 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났다.

  "경미야, 고구마 좀 삶아라."

  가끔 꿈에 아버지가 보이는 때가 있었다. 그런 경우, 뭔가 근심거리가 생기거나 자신의 몸이 아프거나 하는 일이 생겼다. 그러므로 경미는 아버지가 나온 꿈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말을 건넸다. 언젠가 친구와 재미 삼아 점집에 가보았을 때, 경미는 무당에게 그것에 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꿈에서 망자(亡者)가 보이는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에요. 대개 조상님들은 자손을 지켜주고 싶어서 그렇게 나타나지요. 망자는 말을 하지 않아요. 그런데 꿈에서 뭔가 말을 한다, 그러면 그건 좀 골치가 아파요. 그럴 땐 안 좋은 일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아요."

  경미는 무당의 그 말이 떠올랐다. 오늘, 편의점에서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몸살 기운이 느껴지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냥 평온한 하루였다. 그런데 왜 아버지는 고구마를 삶아달라는 말을 했을까? 아버지의 말대로 정말로 고구마를 삶아서 식탁에다 한 그릇 놓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경미는 며칠 전에 사놓은 밤고구마 상자를 열고는 고구마 세 개를 꺼냈다. 손으로 황토가 덕지덕지 묻은 고구마를 박박 씻었다. 그리고 고구마의 양 끝을 과도로 조금씩 잘라내었다. 전기밥솥에 고구마를 넣고 물을 반 컵 정도 부었다. 소금도 조금 넣었다. 빠른 취사 버튼을 누르고, 식탁에 앉아서 가만히 기다렸다. 15분 뒤에 밥솥의 추가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었고, 마침내 고구마가 다 삶아졌다. 경미는 그 고구마들을 꺼내어서 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식탁에다 놓았다. 그러고 나니 무언가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요새 밤늦게 자서 피곤했던 것일까? 식탁에 엎드려서 잠이 들었던 경미는 휴대전화 울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식탁 건너편 벽에 걸린 시계가 가리킨 시각은 9시 45분이었다. 전화에 뜬 건 남편의 전화번호였다. 무슨 일이지? 경미는 황급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 김 차장님 사모님 되세요? 저는 차장님과 같이 일하고 있는 박경수 대리입니다. 지금 응급실인데요. 야간작업 중에 사고가 좀 있었습니다. 지금 응급실인데, 여기가 어디냐 하면..."

  경미는 너무 놀라서 휴대전화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결국 일이 이렇게 터지고 말았구나, 경미는 새삼스럽게 꿈에 보인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졌다. 도대체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다리에 힘이 빠져서 식탁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휴대전화에서는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는 상대편의 말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경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전화기를 주워들었다. 남편이 실려 간 곳은 시 외곽의 종합병원 응급실이었다. 외투를 찾아 대충 걸치고, 나갈 채비를 했다. 현관으로 나가려던 경미의 눈에 식탁 위의 고구마가 눈에 띄었다. 경미는 자신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어서 그 고구마들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

  경미는 수술실 앞에서 5시간을 기다렸다. 수술실을 나온 의사가 경미에게 수술은 잘되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서는 자리를 떴다. 그래도 뭔가 고비는 넘긴 모양이었다. 회복실로 간 남편이 일반 병실로 온 것은 그날 오후였다. 남편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팔과 다리는 미라처럼 깁스를 잔뜩 감고 있었다.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졌으면 보통은 사망하거나, 하반신 마비가 되어버려요. 그런데 환자분은 골절로만 끝났으니, 이건 뭐 조상님이 도우셨다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내가 의사 생활 20년 동안 이런 경우는 딱 한 번 봤어요. 이제 두 번째가 되겠네요. 돌아오는 명절에 조상님 차례상은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세요."

  회진을 돌던 의사는 넉살이 좋게 말을 건네며 경미를 안심시켰다. 남편은 5미터 높이의 난간에서 추락했다. 원래는 2인 1조로 점검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일정이 빡빡해서 혼자 점검 작업을 하다가 그런 사고가 난 것이다. 어느 정도 회복하려면 6개월 정도 재활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의사는 말했다. 그깟 6개월 정도의 시간은 목숨을 건지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의사가 가고 난 뒤, 경미는 남편의 메말라 터진 입술에 입술보호제를 조심스럽게 발라주었다. 그제야 아버지 드시라고 삶았던 고구마 생각이 났다. 부모자식의 끈이란 것이 그렇게 저승에서도 이어지는구나 싶어서 경미는 목이 메었다.

  경미의 남편이 다시 회사에 복직한 것은 3개월이 흐른 뒤였다. 재활하는 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회사의 요청도 있고 더이상 재활에만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남편은 발목에 핀을 박아넣어 조금 다리를 끌면서 걸어 다녔다. 먹고 산다는 것이 뭔지, 제대로 몸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회사에 나가는 남편을 경미는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남편이 일찍 퇴근한 늦가을 어느 금요일 저녁, 경미는 남편에게 아파트 공원으로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말했다.

  "커피나 한잔해요. 내가 보온병하고 커피잔 챙길 테니."
  "당신, 그 포트메리온 커피잔 구경이나 하지."
  "그렇지 않아도 신상 커피잔을 대령해 놓았습니다."

  경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남편을 향해 웃어 보였다. 이 평범한 일상이 이제는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경미는 끓인 물을 보온병에 담고, 새로 산 커피잔을 두툼한 가방에다 담았다. 늦가을 밤바람이 생각보다 차가웠다. 두툼한 겨울 외투를 걸친 두 사람은 벤치에 방석을 깔고 앉았다.

  "이 커피잔, 너무 큰데?"
  "그렇지? 상품평에다 누군가 이거 커피잔이 아니라 수프 컵이라고 불평을 해놓았는데, 그걸 그냥 흘려 읽었지 뭐야."
  "고양이가 헤엄도 칠 수 있을 것 같아."
  "뭔 고양이야? 그냥 참새 정도는 되겠네."

  경미와 남편은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았다.

  "나, 사실 당신에게 숨기는 일이 하나 있어."

  경미는 남편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서 걱정이 되었다. 혹시 어디 밖에다 살림을 차려서 애가 있다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경미는 자신이 다니던 단골 기름집에 생긴 비극이 떠올랐다. 주인 남자가 아내 몰래 살림을 차려서 아들 둘을 낳은 것이 7년 만에 들통이 났다. 그 일로 충격을 받은 기름집 여자는 목숨을 끊었고, 시집을 간 딸도 엄마의 뒤를 따랐다. 기름집은 얼마 안 가 문을 닫았다.

  "무슨 일인데 그래?"

  경미는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이 나한테 또 샀다고 말한 랜턴 말이야. 당신 몰래 내가 회사에 사다놓은 게 다섯 개나 더 있어."

  경미는 안도했다. 그런 랜턴이라면 열 개를 사도 괜찮다.

  "나도 당신한테 말 안 한 게 있거든. 포트메리온 세트 하나가 막내동생 집에 있어."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비밀을 고백했다. 밤바람이 좀 세게 불자, 부부는 집으로 돌아왔다. 경미는 남편에게 랜턴의 불을 한번 켜보라고 말했다.
 
  "이게 말이지, 독일제 명품 랜턴이야. 12가지 색이 있거든. 이건 연둣빛인데, 불을 붙이면 이 테두리가 이렇게 형광 연두색으로 빛나."

  경미는 남편이 식탁에 켜놓은 랜턴의 불빛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제 더이상 자신에게는 포트메리온 그릇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기자기한 꽃들과 나비가 어우러진 그 포근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자신의 식탁에 고요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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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초단편은 내일 올릴 계획입니다. 그리고 약 일주일 동안은 글을 올리지 못할 수도 있어요. 방문하는 독자분들은 참고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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