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벽에서 읽었던 작품 소개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구절을 발견했다. 모네가 지베르니의 마지막 시기에 그렸던 그림들이 추상 회화의 초기형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지베르니에서 그린 모네 말년의 작품들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일본식 다리 연작이 그러한데, 보고 있노라면 저것이 과연 다리인가 싶을 정도로 형태와 색채의 왜곡이 심하다. 그런데 그것은 모네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모네로서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 바로 그의 시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백내장은 모네의 시력을 점차적으로 악화시켰으며 그러한 상황은 화가인 모네의 작업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어려움을 무릅쓰고 감행한 수술의 결과는 더욱 참담해서 모네 말년의 그림들은 거의 장님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그려졌다. 그런데 그렇게 그려진 그의 그림들이 추상 회화의 시초가 된다고 써놓았으니 웃음이 나올밖에. 모네의 회화적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추상이 아닌 구상에 있었다.

  전시를 보는 동안 나의 머리를 맴돈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어쩌면 모네가 추구했던 인상주의와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적어도 회화의 진정성에 대한 믿음이 남아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모네가 살았던 시대는 미술사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사진의 발명이란 사건이 있었다. 사진은 회화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는데, 그것은 회화가 사물의 단순한 재현이 될 수 없다면 과연 무엇으로 남아야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은 자신들의 그림 속에서 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이 회화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기에 인상주의는 미술사에 남을 수 있었다.

  인상파 화가들이 사라지는 길목을 한번 떠올려본다. 그들의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이들은 재현을 포기한 표현주의와 추상 회화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회화는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구상과 추상, 그 둘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은 찾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회화는 다시금 재현으로 복귀하는 경향을 보이는 듯 하다. 독일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극사실적 회화도 그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만약 모네가 오늘날의 회화 작품들을 본다면 어떤 말을 할까? 그가 회화의 진정성이 남아있던 시대에 그림을 그렸던 행복한 작가였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그는 어쩌면 현대의 회화들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회화들에서 회화에 대한 근원적 믿음을 찾는 일은 점차로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화가도, 관람객도 더 이상 그림을 통해 숭고함과 구원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회화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 내면은 황폐해져가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모네의 그림들은 회화의 진정성, 그것을 보는 이들의 내면적 충만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시회에서 특히 네덜란드의 튤립 밭을 비롯해 영국의 체링크로스 다리, 항구와 선착장 등을 그린 풍경화가 인상적이었다. 모네가 여행을 하며 느꼈던 정취가 그림을 통해 그대로 전해오는 듯 했다. 나는 모네가 보았던 풍경들 속에서 그와 함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쁨과 충일한 감정이 마음을 잔잔히 물들였다.

  한편, 그러한 감상 외에 전시 기획과 관련하여 문제점을 지적해야겠다. 사실 이번 전시회에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서양 유명 화가들의 이름을 내건 기획 전시회에 갔다가 실망하고 돌아온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이번  “빛의 화가 모네 전”도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모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수련 연작의 소개에 중점을 두었다는 이번 전시에서 정작 수련 연작 작품은 몇 점 되지 않았다. 사실 모네의 수련 작품이 처음 소개된 것은 1996년 가나 아트 센터에서였다. 단 한점의 수련 연작을 보기 위해 전시장을 찾았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때와 비교하여 본다면 이번 전시회의 수련 연작은 몇 점이 더 많기는 하지만, 크기나 내용 면에서 대표작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 보다는 모네의 가족 초상과 그의 초기 풍경화가 오히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 전시회의 어느 부분이 “모네 전”이라고 내걸만한 근거가 되는 것일까? 단지 모네 작품만 몇 점 가져와서 전시하면 되는 건가? 만원이라는 관람료는 결코 적지 않다. 매번 이런 식의 기획 전시를 보고 사기당한 기분으로 전시장을 나오는 것이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오직 상업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전시 기획사, 미술관과 갤러리, 해외의 수준 낮은 컬렉션들, 그렇게 그들이 손을 잡고 만들어낸 것이 바로 대형 기획 전시인 셈인데, 그 결과물이란 것이 속빈 강정이나 다름없다. 서울 시립 미술관의 경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매번 이런 식의 기획 전시를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하고 있는 미술관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절대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성과와 상업적 이윤에 대한 강박관념은 공공미술관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닌 것이 되었다. 그림을 보겠다는 관람객이 구름같이 몰려오는데 어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이전 전시였던  “르네 마그리트 전”의 경우엔 관람기간을 보름이나 연장해야 했을 정도로 관람객이 많았다.

  아마 이번의 “모네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보러올 것이다. 빈약한 작품 구성에 실망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에서였을까? 전시가 끝나는 곳에는 다음 전시를 알려주는 게시판이 있었는데, 세상에, 다음엔 고흐가 온단다. 시립 미술관과 전시주관사인 한국일보사는 이제까지 터뜨려온 것 보다 더 큰 대박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미술 전시에도 바야흐로 한탕주의가 유행하고 있다. 벌써부터 오는 11월의 고흐 전시회에 가야할지 고민이다. 이번의 모네 전과 같은 양상이라면 그다지 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을 것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대형 기획 전시의 폐해를 얼마나 더 목격해야할까? 미술관의 전시 기획 풍토가 명분과 내실을 갖춘 것으로 변모해야할 필요성을 모네 전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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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슈만 : 피아노 협주곡 A단조, 연주회용 소품 G장조 & 알레그로와 서주 D단조 [Digipak]
슈만 (Robert Schumann) 작곡, 쿠르트 마주어 (Kurt Masur) 지휘, / Berlin Classics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내가 알고 있는 염가 음반 시리즈로는 낙소스와 EMI 레드라인 정도가 전부였다. 최근에 구입한Document사의 음반들도 그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염가 음반은 저렴한 가격 때문에 손이 선뜻 가기도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구매한 후에 큰 만족감을 준 경우는 드물었던 것 같다. 그런데 베를린 클래식에서 나온 이 음반은 나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우선 쿠르트 마주어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라는 쟁쟁한 이름이 신뢰감을 주었고, 피아노를 연주한 페터 뢰젤도 훌륭한 피아니스트여서 기대를 할만 했다. 실제로 음반으로 들어보니 어느 한군데 나무랄 데가 없다. 처음 구입한 베를린 클래식의 음반이 이렇게 좋은 느낌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요새 슈만의 피아노 곡들을 새롭게 즐겨듣기 시작한 터라, 이 음반에 점수를 더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슈만의 피아노 곡들을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듣고 있으면 마음에 따뜻한 위로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슈만의 곡을 듣노라면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는 젊은 시절의 손목 부상으로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해야했고, 생의 후반기는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작곡을 멈추지 않았으니 슈만은 신의 선물로 주어진 재능에 충실했던 예술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슈만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피아노의 세계를 구경하고 싶어하는 이들이라면 이 음반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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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게 똑같은 음반인데 가격 차이가...
    from 재즈닥터의 무한음악사랑 2007-12-20 12:20 
    페터 뢰젤과 쿠르트 마주어의 똑같은 연주가 이전에 에테르나 시리즈라고 해서 나왔었지요. 아마 지금도 찾아보면 있을겁니다. 그런데 그건 가격이 3배 정도 더 비싸요... 베를린 클래식스의 염가 재발매 음반은 꽤 괜찮은게 많으니까 나올때 잘 보고 얼른 사는게 좋을거 같습니다. 저도 이거 보고 내심 안타까워했습니다. 어느새 품절이어서...

1. 그래도 사랑할만한 인간 
  홍상수는 이전의 영화들에서 항상 자신의 분신들을 등장시켜왔다. “오! 수정”에서 문성근이 분한 영화감독, “극장전”의 김상경이 분한 영화 감독 지망생은 어느 정도 감독 자신이 반영된 캐릭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해변의 여인”에서 홍상수는 그 자신을 날 것으로 내놓는듯한 느낌이 든다. 중래가 바로 그 인물이다. 
  중래란 인물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이와 같은 철없음을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문숙과 만나고 헤어진 일을 보면 그가 매우 즉흥적이고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숙이 후배의 애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자신에게 넘어오게 만드려고 부리는 수작이라던가, 하룻밤을 보낸 후에 문숙이 보이는 친근함이 부담스러워 “산뜻해지고 싶다”고 단번에 감정적으로 밀쳐내는 장면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 계산적이거나 비열한 구석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래는 그렇게 문숙을 보내고 혼자 다시 서해안으로 돌아와서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모른다.  
  그런 중래의 캐릭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해변가 나무 앞에서 꺽꺽 소리를 내며 우는 장면이 아닐까? 그렇다. 중래는 그런 인간이다. 횟집 종업원은 마구 무시하며 욕을 퍼대는 그가 나무 한 그루가 주는 알 수 없는 도저한 감동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중래란 인물의 그러한 자기중심성은 선희에게 인터뷰를 하고 싶다며 접근해서 이것저것 묻는 대화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살아오면서 무엇이 제일 힘들었느냐는 중래의 질문에 선희는 그다지 힘들었던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중래는 “난 초등학교 3학년 이래로 사는 게 힘든데.”라며 혼잣말을 한다. 중래의 그 말은 결코 우스개 소리가 아니며 아마도 그가 믿는 진실일 것이다. 사는 건 누구에게나 힘들다. 그러나 중래에게는 자신을 둘러싼 삶의 모든 일이 매우 심각하고 극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중심성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문숙을 보자. 문숙은 중래와 선희가 술에 취해 쓰러진 자신의 머리를 넘어갔는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중래에게는 정말 사소하고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 문숙에게는 그토록 중대한 관심사였던 것이다.  
  중래와 문숙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은 그러한 자기중심성이 만들어내는 파열음 속에서 어긋나게 배열되어 있다. 하늘의 별은 자신이 불러주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게 아니나며 천진스럽게 말하던 문숙은 선희의 지갑이 침대 밑에 있는 것을 알고도 선희에게는 못보았노라고 말한다. “해변의 여인”에 나오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다면적인 모습과 감정의 과잉, 극대화된 자기중심성을 이해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홍상수는 이에 대해 친절한 모범 답안을 제시해준다. 그의 전작들에 그러한 모습들이 있었는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림까지 그려서 관객들에게 답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 답은 중래가 문숙에게 사물과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 들어있다. 하나의 실체를 온전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또는 두세 가지 정도의 정보나 사실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보다 자세한 관찰을 통한 많은 정보를 취합해 판단할 때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설파하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중래는 알기 쉬운 도형 그림을 그려가며 문숙에게 자신의 의견을 납득시킨다.     
  중래가 그려낸 도식은 어떤 면에서는 홍상수가 견지하는 인식론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이기심과 극도의 불합리함을 매우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는 의미 있고 숭고한 것을 찾고, 그것에 매혹되기 쉬운 면이 있다는 것 또한 놓치지 않고 보여주려 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중래나 문숙은 결코 속물로 단정짓고 내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도정(道程)에 있는 인물인 셈이다. 그러므로 홍상수에게 그들은 치졸함과 어리석음, 지나친 자기중심성에 빠진 인물들임에도 ‘그래도 사랑할만한 인간’인 것이다.


2. 우연성이 지배하는 이 세계 
  “해변의 여인”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몇몇 장면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연출은 홍상수의 전작들에서도 종종 봐왔던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해변에서 개를 산책시키던 젊은 남녀는 왜 개를 도로에 내버리고 가버릴까? 중래가 욕을 퍼댔던 횟집 종업원은 매우 소심한 인물이었음에도 왜 해변가에서 중래와 선희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보였던 것일까? (그가 매우 소심한 인물이라는 점은 선희에게 얻어맞은 뒤 겁에 질려 소변을 보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한 장면들은 마치 하나의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왜 별로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사건이 지나치듯 제시되는 것일까? 영화 초반부에 중래가 횟집 종업원에게 한 언사는 분명 모욕적이고 지나친 면이 있다. 중래는 그것에 대해 사과하라는 후배 창욱의 요구를 애써 무시한다. 중래에게 그 일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심각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이 한밤의 해변을 거닐고 있는 중래에게 예기치 않은 일로 나타난다. 그는 굉음을 내며 오토바이로 위협하는 낯선 이로 인해 겁에 질린다. 그를 이 위기에서 구해주는 것은 선희의 대찬 행동이다.  
  그런가하면 주인에게 버려진 개 똘이는 새 주인과 함께 전혀 다른 이름으로 문숙 앞에 나타난다. 그 순간에 문숙이 똘이에 대해 이전에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사실과 믿음은 배반당하고 어긋나버린다. 아무렇지 않게 무심코 지나버린 사물과 사건이 시간이 지난 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와 나타나는 것, 그것은 마치 멀리 가버렸다 생각한 부메랑이 다시 되돌아오는 것과도 비슷해 보인다.  
  홍상수가 생각하는 이 세계란 그처럼 인과론(因果論)으로 촘촘히 짜여진 그물망 속에 우연(偶然)이 슬그머니 끼어드는 곳이다. 중래가 처음에 구상한 영화가 우연히 일어난 세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탐구해 가는 인물에 대한 것이란 점도 그러한 감독의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처음 던진 곳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부메랑처럼 우리네 삶은 아주 사소해 보이는 사건들이 전혀 다른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결정론적 숙명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홍상수는 여기에 우연성이 선사하는 헐거운 매력을 덧붙인다. 문숙과 선희가 맺은 유대 관계를 생각해보면 그 점을 잘 알 수 있다.  
  문숙과 선희는 술을 마시며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다. 문숙은 그 다음날, 침대 밑에서 아무렇지 않게 지갑을 빼내어 든다. 그 지갑은 선희가 그토록 찾던 것이었지만 문숙이 결코 보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것을 마침내 문숙은 선희에게 돌려준다. 중래라는 한 남자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던 두 여자 사이에 적대감이 아닌 새로운 유대감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과연 이전의 홍상수 영화에서 무시당하고 소홀히 다뤄져왔던 여성성에 대한 변모된 시각을 반영하는 것일까? 혹자는 이것을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여성들간의 연대의식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한다. 일면 수긍이 가는 말이기도 하지만, 홍상수의 관심은 그와는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는 두 여자의 만남 그 자체가 갖고 온 우연한 결과에 더 무게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중래와 문숙, 선희는 우연히 서해안의 해변가에서 만났다. 그리고 떠났다. 중래는 새 영화의 시놉을 건지고, 선희는 잃어버린 지갑을 찾으며, 문숙은 해변 모래사장에 빠져버린 차를 빼내어 마침내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그들은 함께 지내는 동안 즐거웠을까? 아마 충분히 즐거웠을 것이다. 그들이 새롭게 발견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삶은, 이 거대한 우연성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그 자체로 놀랍고 의미 있는 것이다. 그 발견의 여정을 홍상수는 여유와 유머를 담아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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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겐 1
나카자와 케이지 글.그림, 김송이.이종욱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만화의 저자인 나카자와 케이지는 가슴 아픈 가족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가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으로 가족을 잃었으며, 작가 자신도 피폭의 후유증을 앓으며 당뇨병으로 투병하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맨발의 겐』은 바로 그러한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하여 그려진 만화입니다.

  『맨발의 겐』은 쉽고 편하게 볼 수 있는 만화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다루고 있는 진실이 너무나도 참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원폭이 떨어질 당시의 끔찍한 상황과 그 속에서 죽어갔던 사람들의 모습을 가감없이 그려냅니다. 살이 녹고 온몸에 파편이 박힌 채 죽어간 사람들의 모습은 아무리 만화라도 해도 보는 것이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작가가 이 만화를 그린 이유는 바로 그러한 데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또는 알고 싶어하지 않는 참혹한 진실에 대해서 알리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맨발의 겐』은 단지 원폭 투하의 처참한 실상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작가의 고발정신은 전쟁으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일본 천황과 군국주의자들, 일본에 원폭을 투하한 미국 정부를 향하고 있습니다. 만화의 주인공 겐과 가족, 친구들은 모두 작가의 대변인이 되어 죽음과 공포만을 가져다준 이들에게 준엄하게 책임을 묻습니다. 졸업식에서 천황에 대한 맹세와 국가 부르기를 거부하는 겐의 모습에는 작가 뿐 아니라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굳은 의지가 담겨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만화에서 겐이 살아가야 하는 현실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싹을 틔우는 생명력 있는 보리처럼 살아가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기억하며 겐은 꿋꿋하게 살아갑니다. 겐이 보여주는 생존에 대한 강한 의지와 사람들을 배려하고 아끼는 마음을 나는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겐이 우연히 만나 동생으로 삼게된 원폭 고아 류타가 보여주는 낙천주의 또한 이 만화에서 놓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특히 노래부르기를 좋아하는 류타는 기쁘거나 슬플 때 자신의 심정을 담은 노래를 부르며 주변 사람들을 위로하고 힘을 줍니다. 철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류타에게는 현실의 고통을 견뎌내는 긍정의 힘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감이 있습니다. 류타도 겐처럼 보리의 생명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지요.

  『맨발의 겐』은 화려한 색감의 그림체로 그려진 만화가 아니며, 또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도 않습니다. 이 만화를 보는 동안 마음이 불편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만화가 들려주는 진실은 참으로 감동적인 것입니다. 원폭이 투하된 히로시마의 비극을 딛고 삶을 이어가는 이들에게서 강한 생명력과 희망의 위대함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이 만화를 그리게 된 이유를 다시는 전쟁과 원폭의 비극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신념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자신과 가족에게 닥친 참혹한 고통을 넘어서서 보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작가의 의지가 『맨발의 겐』에는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겐이 결국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한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입니다.

  보리처럼 살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기억하며 겐은 어떠한 어려움이나 괴로움이 있어도 견디어냅니다. 고통을 이겨내는 삶은 위대한 것입니다. 원폭의 비극을 딛고 일어선 겐이 들려주는 가슴뭉클한 이야기 속에서 여러분도 보리의 생명력을 느끼고 배우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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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8과 1/2〉은 잘 만든 영화이다. 펠리니는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갈등과 고뇌를 현실과 무의식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드는 매혹적 영상으로 승화시켰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나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왜 그랬을까? 문득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작가는 자기 자신의 고통을 후벼 파내어 팔아먹고 사는 존재라는. 펠리니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가톨릭에 대한 부채의식, 복잡한 여성 편력, 제작자와의 갈등, 창작의 어려움, 언론과 대중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들이 이 영화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화는 펠리니의 삶과 예술에 대한 근원적 태도를 이해하는 데에는 정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8과 1/2〉은 감독 자신에게는 일종의 자기 고백이자, 세상과 사람들을 향한 예술적 선언을 했다는 면에서 의미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8과 1/2〉에서 펠리니가 추구하는 작가적 태도에는 독선의 가능성도 내포되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펠리니의 후기 작품들이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이고 탐미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사티리콘〉은 그 결정판이었다. 펠리니는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구원의 가능성으로서의 영화 만들기를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내면과 상처들로 침잠하는 것을 선택했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펠리니가 〈8과 1/2〉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에 작가가 상업성을 떠나 생존한다는 것, 그것도 자신의 예술적 태도를 포기하지 않고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8과 1/2〉과 같은 영화는 시간이 갈수록 제작이 불가능한 프로젝트가 되어가고 있다. 그와 동시에 감독의 작가적 지위는 불안하고 모호한 것으로 변해간다. 

  오늘날 멀티플렉스의 폭주하는 관객들을 떠올려본다. 그들에게 감독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는 일이 관심사가 되고 있는가? 결코 아닐 것이다. 대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시각을 압도하는 볼거리이다. 제작자와 투자자가 원하는 영화는 돈이 될만한 영화이며, 감독이 가진 역량은 그러한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의 시대에 펠리니가 추구하는 예술적 태도, 작가적 역량은 그다지 유용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구이도는 자신이 만들려는 영화 속의 모든 인물들을 불러모아 서로 손을 맞잡고 춤추게 만든다. 구이도를 통해 펠리니는 자신의 과거와 진실하게 조우하고, 그가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과 화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진정한 작가가 탄생하는 순간은 허위의식과 겉치레를 포기하고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게 직면하게 될 때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8과 1/2〉은 펠리니의 작가적 정체성을 명시적으로 알리는 이정표와도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예술로서의 영화적 위치가 자본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이 시대에 과연 펠리니가, 그리고 〈8과 1/2〉과 같은 영화가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해 한번 생각해본다. 이 영화는 우리가 진정으로 작가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는지, 그리고 작가의 예술적 선택에 얼마나 인내하고 관심을 보여줄 수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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