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벽에서 읽었던 작품 소개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구절을 발견했다. 모네가 지베르니의 마지막 시기에 그렸던 그림들이 추상 회화의 초기형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지베르니에서 그린 모네 말년의 작품들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일본식 다리 연작이 그러한데, 보고 있노라면 저것이 과연 다리인가 싶을 정도로 형태와 색채의 왜곡이 심하다. 그런데 그것은 모네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모네로서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 바로 그의 시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백내장은 모네의 시력을 점차적으로 악화시켰으며 그러한 상황은 화가인 모네의 작업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어려움을 무릅쓰고 감행한 수술의 결과는 더욱 참담해서 모네 말년의 그림들은 거의 장님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그려졌다. 그런데 그렇게 그려진 그의 그림들이 추상 회화의 시초가 된다고 써놓았으니 웃음이 나올밖에. 모네의 회화적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추상이 아닌 구상에 있었다.

  전시를 보는 동안 나의 머리를 맴돈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어쩌면 모네가 추구했던 인상주의와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적어도 회화의 진정성에 대한 믿음이 남아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모네가 살았던 시대는 미술사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사진의 발명이란 사건이 있었다. 사진은 회화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는데, 그것은 회화가 사물의 단순한 재현이 될 수 없다면 과연 무엇으로 남아야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은 자신들의 그림 속에서 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이 회화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기에 인상주의는 미술사에 남을 수 있었다.

  인상파 화가들이 사라지는 길목을 한번 떠올려본다. 그들의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이들은 재현을 포기한 표현주의와 추상 회화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회화는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구상과 추상, 그 둘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은 찾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회화는 다시금 재현으로 복귀하는 경향을 보이는 듯 하다. 독일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극사실적 회화도 그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만약 모네가 오늘날의 회화 작품들을 본다면 어떤 말을 할까? 그가 회화의 진정성이 남아있던 시대에 그림을 그렸던 행복한 작가였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그는 어쩌면 현대의 회화들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회화들에서 회화에 대한 근원적 믿음을 찾는 일은 점차로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화가도, 관람객도 더 이상 그림을 통해 숭고함과 구원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회화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 내면은 황폐해져가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모네의 그림들은 회화의 진정성, 그것을 보는 이들의 내면적 충만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시회에서 특히 네덜란드의 튤립 밭을 비롯해 영국의 체링크로스 다리, 항구와 선착장 등을 그린 풍경화가 인상적이었다. 모네가 여행을 하며 느꼈던 정취가 그림을 통해 그대로 전해오는 듯 했다. 나는 모네가 보았던 풍경들 속에서 그와 함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쁨과 충일한 감정이 마음을 잔잔히 물들였다.

  한편, 그러한 감상 외에 전시 기획과 관련하여 문제점을 지적해야겠다. 사실 이번 전시회에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서양 유명 화가들의 이름을 내건 기획 전시회에 갔다가 실망하고 돌아온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이번  “빛의 화가 모네 전”도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모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수련 연작의 소개에 중점을 두었다는 이번 전시에서 정작 수련 연작 작품은 몇 점 되지 않았다. 사실 모네의 수련 작품이 처음 소개된 것은 1996년 가나 아트 센터에서였다. 단 한점의 수련 연작을 보기 위해 전시장을 찾았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때와 비교하여 본다면 이번 전시회의 수련 연작은 몇 점이 더 많기는 하지만, 크기나 내용 면에서 대표작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 보다는 모네의 가족 초상과 그의 초기 풍경화가 오히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 전시회의 어느 부분이 “모네 전”이라고 내걸만한 근거가 되는 것일까? 단지 모네 작품만 몇 점 가져와서 전시하면 되는 건가? 만원이라는 관람료는 결코 적지 않다. 매번 이런 식의 기획 전시를 보고 사기당한 기분으로 전시장을 나오는 것이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오직 상업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전시 기획사, 미술관과 갤러리, 해외의 수준 낮은 컬렉션들, 그렇게 그들이 손을 잡고 만들어낸 것이 바로 대형 기획 전시인 셈인데, 그 결과물이란 것이 속빈 강정이나 다름없다. 서울 시립 미술관의 경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매번 이런 식의 기획 전시를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하고 있는 미술관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절대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성과와 상업적 이윤에 대한 강박관념은 공공미술관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닌 것이 되었다. 그림을 보겠다는 관람객이 구름같이 몰려오는데 어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이전 전시였던  “르네 마그리트 전”의 경우엔 관람기간을 보름이나 연장해야 했을 정도로 관람객이 많았다.

  아마 이번의 “모네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보러올 것이다. 빈약한 작품 구성에 실망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에서였을까? 전시가 끝나는 곳에는 다음 전시를 알려주는 게시판이 있었는데, 세상에, 다음엔 고흐가 온단다. 시립 미술관과 전시주관사인 한국일보사는 이제까지 터뜨려온 것 보다 더 큰 대박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미술 전시에도 바야흐로 한탕주의가 유행하고 있다. 벌써부터 오는 11월의 고흐 전시회에 가야할지 고민이다. 이번의 모네 전과 같은 양상이라면 그다지 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을 것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대형 기획 전시의 폐해를 얼마나 더 목격해야할까? 미술관의 전시 기획 풍토가 명분과 내실을 갖춘 것으로 변모해야할 필요성을 모네 전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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