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이후의 벵골 분할 시기, 캘커타의 난민촌에 사는 니타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니타의 아버지는 난민촌 학교의 선생이지만 그일은 결코 돈이 되지 않는다. 니타의 큰오빠 샹카르는 엄격한 스승 밑에서 Raga를 익히는 중이다. 여동생 기타와 남동생 만투는 아직 학생이다. 대학원생인 니타는 학생들의 과외수업을 하며 번 돈을 모두 집안 살림에 보탠다. 가족들은 니타만 보면 돈 이야기를 한다. 큰오빠는 이발비를, 여동생은 새옷을, 남동생은 축구화를 사달라고 보챈다. 니타는 너그럽게 형제들의 요구를 들어주지만, 엄마는 쓸데없이 돈을 쓴다며 니타를 닥달한다. 정작 니타는 낡은 샌들을 신고 다니다 끈이 끊어져 맨발로 걸어 집에 들어온다.

  리트윅 가탁(Ritwik Ghatak) 감독의 영화 '구름에 가린 별(The Cloud-Capped Star, 1960)'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영화에서 니타 가족은 벵골 분할 이후 동파키스탄에서 캘커타로 이주해온 힌두교 난민 가족이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 벵골 지역은 반영 운동의 중심지였다. 영국은 벵골 지역의 분열을 획책하기 위해 1905년에 이른바 벵골 분할령(Partition of Bengal)을 내놓았다. 벵골인들의 극렬한 반대에 분할은 철회되었지만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것은 1919년의 암리차르 학살(Amritsar massacre)로 이어진다. 영국은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1947년, 마침내 인도는 독립한다. 그러나 그동안 억눌려 있었던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 사이의 갈등이 터져나온다.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파키스탄의 독립에 이어, 동벵골 지역에 파키스탄의 자치주 동파키스탄(나중에 방글라데시로 독립)이 세워졌다. 그렇게 되자, 동벵골 지역의 힌두교도들은 한순간에 고향을 잃고 인도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 난민들이 가장 많이 정착한 곳이 캘커타였다. 말이 독립국 인도의 국민이었지, 벵골 난민들은 인도 사회에서 극심한 차별과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영화 속에서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이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리트윅 가탁은 '구름에 가린 별(1960)'을 시작으로 '사랑스런 간다르(Komal Gandhar, 1961)', '강(Subarnarekha,1962)'으로 이어지는 분할 3부작(Partition Trilogy)'을 만들어냄으로써, 벵골 난민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비록 난민촌에서 어렵게 살고 있지만, 니타 가족의 계층적 배경은 중산층에 해당한다. 니타의 아버지는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니타 또한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중이다. 이 가족의 계층적 몰락은 가장인 아버지의 갑작스런 발병에서 시작한다. 실성한 아버지는 곧 집안에서 유령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 니타는 가장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진다. 학업도 포기하고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한다. 니타의 부양 대상에는 연인 사낫도 포함된다. 박사 학위를 준비하는 가난한 연인은 니타의 도움을 받는다.

  그렇지만 오직 가족만을 생각하는 니타의 순수하고 착한 마음은 결코 보답받지 못한다. 니타의 엄마는 니타에게 끊임없이 돈을 요구하고, 여동생 기타는 언니의 연인을 가로채 결혼한다. 큰오빠는 봄베이에서 유명한 Raga 연주자가 되었지만,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다. 니타의 몸과 마음은 서서히 부서진다. 급기야 니타는 결핵에 걸린다. 그럼에도 사고를 당한 남동생의 병원비를 마련하느라 일을 쉬지도 못한다. 니타는 자신을 착취하는 뻔뻔한 가족 구성원의 행태를 오롯이 감내한다.

  리트윅 가탁은 서서히 망가져가는 니타의 영혼을 보여주기 위해 사운드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이 영화에서 인도의 전통 음악 Raga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샹카르는 틈만 나면 라가를 부른다. 주로 신과 자연을 찬미하는 라가의 가사는 역설적으로 이 가족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부각시킨다. 그것은 니타가 샹카르에게 기타의 결혼식에서 부를 라가를 가르쳐달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정점을 이룬다. 비감하면서도 아름다운 라가의 선율이 흐르다가 갑자기 날카로운 굉음이 들린다. 클로즈업 되는 니타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니타가 느끼는 내면의 고통은 그러한 소리에 의해 형상화된다. 

  가탁의 사운드에 대한 실험적 시도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극대화된다. 니타는 샹카르의 품에 안겨 울부짖는다. '나는 살고 싶어요!' 니타의 처절한 외침은 남매가 앉아있는 언덕 너머 사방천지의 산들에 울려퍼진다. 360도로 회전하는 카메라는 산에 반향되는 소리의 궤적을 따라간다. 어찌 보면 진부하기 짝이 없는 가족 멜로 드라마는 이러한 사운드와 음악의 활용으로 독창적인 영화가 되었다.

  샹카르는 요양중인 니타에게 가족의 낡은 집이 멋진 2층 집으로 개축되었다고 알려준다. 몰락했던 피난민 일가는 샹카르의 성공을 통해 세속적 욕망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몸과 마음이 병든 니타에게 그 집은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다. 과연 니타에게 닥친 비극은 누구의 잘못 때문일까? 샹카르가 니타를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 그는 난민촌 입구에서 동네 아가씨와 마주친다. 샹카르는 새삼 니타의 모습을 떠올린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느라 니타의 청춘은 부서져버렸다. 오래전의 니타가 그러했듯, 가난한 아가씨도 걷다가 샌들 끈이 끊어진 것을 발견한다. 아무렇지 않게 끈을 접어넣고 걸어가는 그 뒷모습에는 벵골 난민들의 고단한 삶이 투영되어 있다. 리트윅 가탁은 순수한 영혼을 지닌 니타의 고통 속에 벵골 분할기의 역사를 아로새겨 넣는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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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희(이혜영 분)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소설가이다. 예전에는 열정적으로 써내던 소설을 이제는 좀처럼 쓰지 못하고 있다. 오래전에 알고 지냈던 후배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우연히 여배우 길수(김민희 분)와 마주친다. 여배우의 소탈한 면모에 호감을 갖게 된 작가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꿈을 털어놓는다. "길수 씨와 영화를 찍고 싶어요." 마침 여배우의 조카와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영화 전공생이다. 금상첨화. 과연 소설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수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 캐릭터에서 홍상수의 영화적 자아를 찾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사실 그것이 전혀 터무니 없는 나만의 허황된 공상도 아니다. 홍상수는 자신을 비롯해 영화쪽 관계자들, 주변인들의 일상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세상과 관객을 향한 메시지 박스 같다. 그렇다면 '소설가의 영화(The Novelist's Film, 2022)'에서 홍상수의 본심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누구일까? 이전까지는 '감독'으로 나왔던 캐릭터들이 그러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소설가 준희'가 그 역할을 떠맡는다. 관객은 준희가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에서 홍의 본심을 엿본다.

  준희는 도시의 전망대에서 예전에 알았던 감독 부부와 마주친다. 감독 효진(권해효 분)은 준희의 소설을 영화로 찍으려다가 그만 둔 적이 있다. 효진과 그 아내(조윤희 분)와의 대화에서 준희는 그때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다. 효진은 그 영화가 엎어진 이유가 투자자들 때문이었다고 둘러댄다. 하지만 준희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준희는 효진이 돈을 밝히는 감독이라서 돈 안되는 영화를 접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효진의 아내를 향해서는 '돈에 악착스러워 보인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과연 준희의 소설을 좋아하고, 그 영화를 정말로 찍고 싶었다는 효진의 말은 진심일까? '그렇다면 어떻게든 찍었어야지.' 준희는 효진에게 냉소적으로 답한다.

  홍상수는 자신이 만들어낸 영화 속 인물들의 진심과 거짓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처음 만난 이들에게 어찌 보면 입에 발린 아부같은 말을 늘어놓는다. 후배 세원의 서점에서 만난 동네 아가씨 현우는 준희의 팬이라며 만나서 영광스럽다고 말한다. 그런데 관객은 이 아가씨 현우가 노시인 만수(기주봉 분)와의 술자리에서 비슷한 소리를 하는 것을 발견한다. 현우는 만수에게 열렬한 팬이며, 그의 모든 시집을 다 갖고 있다고 말한다. 과연 현우는 시인의 시집을 전부 다 갖고 있을까? 그런가 하면, 효진은 길수를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길수의 재능에 대한 상찬과 작품을 함께 하고 싶은 자신의 열망을 내비친다. 그 모습은 준희의 소설을 무척 좋아한다고 말한 효진의 이전 모습과 기묘하게 겹친다. 준희의 소설은 돈벌이가 되지 않아 찍지 않은(그렇게 추정되는) 효진에게 길수는 돈 되는 영화에 적합한 배우일까?

  홍상수는 우리가 타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허상임을 드러낸다. 영화의 도입부, 준희는 후배 세원의 서점에 들어갔다가 세원의 높은 언성에 놀라 조용히 서점을 나온다. 세원은 동네 아가씨 현우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는다. 그런데 책방 손님으로 세원과 가까운 사이가 된 길수는 준희에게 세원이 정말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세원에 대한 길수의 평가는 정확한 것일까? 우리는 언제든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타인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에 대한 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어설픈 관찰자는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준희가 첫 만남에서 마음이 통한 길수와 분식집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을 보자. 식사가 끝날 무렵, 분식집의 창 밖에서 어린 소녀가 길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아이는 한참을 서있다가 사라진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타나서 또 그렇게 바라본다. 길수는 가게를 나가서 아이와 뭔가 이야기하고는 어디론가 간다. 왜 꼬마 여자 아이가 길수를 그렇게 쳐다보았는지, 길수는 그 아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어떤 면에서 그 꼬마 아이는 우리의 삶 바깥의 낯선 타자일 수 있다. 아마도 홍상수에게는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관심을 갖는 대중일지도 모른다. 길수가 아이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홍상수는 자신이 만든 영화로 세상 사람들에게 답한다.

  이 영화 속에서 그것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은 길수를 두고 벌어진 효진과 준희 사이의 대화 장면이다. 효진은 연기를 쉬고 있는 길수에게 재능이 아깝다는 말을 여러 번 한다. 그걸 듣고 있던 준희는 '아깝다'는 말은 길수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다고 일갈한다. 길수가 원한 삶을 스스로 선택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걸 가지고 제 3자가 무슨 말을 할 자격이나 되냐는 뜻이다. 그래도 인생에서 '때'라는 것이 있잖아요. 효진은 길수가 재능을 낭비하고 있다고 거듭 말한다. 준희는 그런 효진에게 퍼붓는다. '때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러는 댁이나 잘 사셔.'

  "당신들 다 사랑할 자격 없어!" 홍상수는 '밤의 해변에서 홀로(On the Beach at Night Alone, 2017)'에서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대중의 비난에 그렇게 응답했다. 재능있는 여배우의 앞길을 막고 있다는 세간의 비난에 대한 자격지심일까? '소설가의 영화'에서 홍상수는 그런 속내를 구태여 감추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길수(김민희 분)의 삶에 대한 판단은 세상의 몫이 아니다. 현재 자신과 삶을 함께 하는 여배우에 대한 사랑과 연민 또한 절절하게 드러낸다. 영화 속에서 준희가 만든 영화는 아주 일부분만 제시된다. 준희의 영화 속에서 길수는 들꽃 부케를 들고 결혼 행진곡을 흥얼거린다. 그 장면은 홍상수의 지독한 자기 연민과 극대화된 예술가적 자의식의 정점을 보여준다.  

  '소설가의 영화'를 홍상수 개인의 삶과 분리된 전혀 별개의 텍스트로 해석하는 일은 쉽지 않다. 홍상수에게 있어 영화와 실제의 삶은 분명 다른 것이다. 그렇지만 그 두 세계는 서로의 영역을 끊임없이 공유하며 새로운 이야기의 물줄기를 만들어낸다. 영화 속에서 준희는 자신이 찍고 싶어하는 영화에 대해 한참을 설명한다. 배우 길수의 인간적 모습과 삶을 담되, 거기에서 파생되는 어떤 다른 무언가를 찍고 싶다... 경우는 그럼 그것은 '다큐멘터리' 같은 것이냐고 묻는다. 준희는 다큐멘터리는 아니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준희가 만들고 싶은 영화는 과연 무엇일까?

  현실과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의 간극을 자유롭게 탐험하는 것. 어떤 면에서 홍상수가 만들어온 영화들의 궤적은 준희의 바람과 일맥상통한다. "그건 이야기 같지 않아! 이야기가 이야기 같아야지." 술자리에서 노시인 만수는 준희가 만들려는 영화에 대해 딴지를 건다. '이야기 같지 않은 이야기'로 자신의 영화 세계를 확장해온 사람. 나는 '소설가의 영화'를 보며 홍상수의 뻔뻔한 궤변에 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번에도 이 감독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영화 속에서 '소설가 준희의 영화'가 어떤 것인지 관객은 결코 알 수 없다. 아직도 홍상수에게는 말하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홍상수 영화 리뷰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 201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on-beach-at-night-alone-2017.html

도망친 여자(The Woman Who Ran, 202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9/woman-who-ran-2020.html

 

당신 얼굴 앞에서(In Front of Your Face, 202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5/10-in-front-of-your-face-20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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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타카미네 히데코(高峰秀子)가 TV 대담에서 나루세 미키오 감독을 회고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나루세 미키오는 거의 말이 없었고 배우들에게 별다른 연출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나루세 미키오는 당대 최고의 배우들과 작업하면서, 그들의 연기를 무척 신뢰했던 모양이다. 아역 배우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던 연기 천재 타카미네 히데코였지만, 이 배우에게도 버겁게 느껴진 작품이 있었다. 영화 '야성의 여인(Untamed, Arakure, 1957)'이었다. 고민 끝에 타카미네 히데코는 나루세 미키오에게 '어떻게 연기해야 할까요?'하고 물었다. 감독의 대답은 이러했다. "아, 그거? 어렵지 않아. 금방 끝날 거야."

  영화 '야성의 여인'은 원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일본의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토쿠다 슈세이(徳田秋声)가 1915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あらくれ)이 그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오시마(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나루세 미키오 영화의 여느 여성 캐릭터들과 확실히 다르다. 이 여성은 매우 강단있고 주체성이 강한 인물이다. 오시마는 자신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남자들에게 과감히 맞선다. 작가 토쿠다 슈세이가 살았던 시대 뿐만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진 1950년대에도 이런 여성은 보기 드물었다. 그 시대의 여성은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갇혀있는 삶을 살았다. 그러니 '오시마'라는 여성의 존재는 더욱 유별나고 특이하게 여겨질 수 밖에 없었다. 타카미네 히데코가 오시마를 연기하면서 느꼈던 어려움도 거기에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가게의 창문을 열심히 닦는 여자가 보인다. 오시마는 부유한 상인 츠루(우에하라 켄 분)의 후처로 들어왔다. 츠루는 전처를 병으로 잃었다. 그런데 이 남자가 새 아내를 바라보는 눈빛은 영 마뜩잖다. 인색하기 짝이 없는 그는 낡은 기모노를 입고 있는 아내에게 옷도 사주지 않는다. 술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데다 바람까지 피운다. 오시마가 임신하자, 아이 아빠가 자신이 아닌 것 같다고 대놓고 모욕을 준다. 결국 불행하게 끝난 첫 결혼, 오시마는 어디고 몸을 의탁할 데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친정 오빠가 소개해준 산골 온천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다 온천장의 주인집 아들과 눈이 맞는다. 그런데 이 남자 하마야(모리 마사유키 분)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 그의 병든 아내는 요양을 떠난 상태이다. 가정을 버릴 생각이 없는 하마야에게 시간이 갈수록 오시마의 존재는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유부남의 내연녀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오시마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그리고 무작정 도쿄로 상경, 재봉일을 배워 자신의 삶을 꾸려나간다. 오시마는 일하면서 알게된 상인 오노다(카토 다이스케 분)와 가정을 꾸리고 의상실을 연다. 잘 되던 의상실이 불황에 문을 닫으며 다시 한 번 인생의 시련과 마주한 오시마. 오시마의 인생에 해뜰 날이 있을까...

  이 영화에서 오시마의 남자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매우 폭력적이다. 첫 번째 남편 츠루는 오시마와 몸싸움을 벌이다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게 만든다. 그 일로 오시마는 유산한다. 두 번째 남편 오노다는 어떠한가.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다고 뺨을 때리는 일은 다반사다. 이 남자도 무능함과 뻔뻔스러움으로 치자면 첫 남편 츠루와 막상막하. 틈만 나면 바람 피울 생각에 가게일은 뒷전이다. 또한 술고래 아버지 봉양까지 오시마에게 강요한다. 오시마라고 참고만 있지 않다. 급기야 오노다의 손찌검에 물건을 내던지며, 빗자루로 남자를 후드러팬다.

  이 영화 속에서 좀 괜찮은 남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전형적인 구시대 인물인 오시마의 아버지는 어떻게든 딸을 남자에 묶어둘 생각만 할 뿐이다. 유부남 하마야는 온화한 품성을 지닌 사람이지만, 그가 오시마에게 보여주는 태도는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다. 그는 아내가 돌아온 이후에도 오시마와 계속 관계를 유지한다. 오시마는 오직 하마야에게만 마음을 준다. 그는 오시마의 불같은 성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유일한 사람이다.

  비록 결혼 생활은 삐걱거리지만, 오시마는 자신의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간다. 오시마가 서툴게 넘어지면서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히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나중에 화려한 양장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활보하는 오시마에게서는 진정한 자유가 느껴진다. 대단한 사업 수완을 보이며 의상실을 꾸려나가는 오시마의 모습은 독립적인 근대 여성의 초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주체적인 여성이 남편의 불륜에 대처하는 방식도 남다른 데가 있다. 오시마는 남편의 뒤를 밟아 내연녀의 집을 알아낸다. 내연녀와 드잡이질을 하고 나오는 길, 예기치 않게 비까지 쏟아진다. 우산을 하나 사고, 오시마는 의상실에 전화를 건다. 오시마는 유능한 재단사와 일꾼을 데리고 나와 자신만의 의상실을 차릴 생각이다. 그깟 바람난 남자는 알아서 살게 내버려두면 그만이다. 오시마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진다. 비오는 거리를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오시마의 뒷모습은 당당하다. 

  영화의 일본어 제목 'あらくれ'는 '거친, 폭력적인'이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주로 '사나운 남자'를 묘사할 때 쓰인다. 영화 속에서 오시마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여자답지 않다고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견고한 가부장적 사회 체제하에서 이 여성이 보여주는 담대한 모습은 결코 폄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나루세 미키오는 원작 소설이 지닌 힘과 아름다움을 영화 속에 그대로 재현한다. 후대의 관객은 시대의 인습에 저항하는 강인한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발견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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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기차를 당장 세워라!
  (Stop that train!)"


  풍채 좋은 중년의 배우는 기차역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친다. 때는 2차 대전 시기의 영국. 순회 극단의 단장 Sir(Albert Finney 분)는 배우들과 함께 다른 도시로 이동중이다. 그런데 그들은 기차 시간에 늦었고, 기차는 이제 막 출발하려는 참이다. Sir의 말 한마디에 기차가 멈춘다. 의상 담당 노먼(Tom Courtenay 분)이 역장 붙잡고 아무리 애원해도 안되던 것을 배우는 단번에 해낸다.

  피터 예이츠(Peter Yates) 감독의 'The Dresser(1983)'는 영국 극작가 Ronald Harwood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한때 작가는 영국 연극계의 전설적 배우였던 Sir Donald Wolfit의 의상 담당을 했던 적이 있다. 할우드는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The Dresser'를 썼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대배우와 무대 뒤 사람들의 삶을 엿볼 기회를 얻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연극 오셀로의 막이 내리고 배우들은 커튼콜을 하고 있다. 그 커튼 뒤, Sir는 배우들을 향해 불호령을 쏟아낸다. 그는 자신이 연기할 때 방해되는 모든 요소들을 지적하면서, 배우들에게 인격적인 모욕을 주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경'으로 불리는 이 남자의 오만불손함과 자기 중심주의는 하늘을 찌른다. 극단의 재능있는 중견 배우 옥센비는 그를 '폭군'으로 부르기까지 한다. 노먼은 그 폭군 Sir의 충실한 의상담당이다. 말이 의상담당이지, 실제로 그는 Sir의 온갖 뒤치다꺼리를 하는 하인이나 다름없다. 그의 주인은 주체하기 힘든 변덕에다 폭언과 모욕 또한 일상적이다. 그런데도 노먼은 그 모든 것을 감내한다. 그것도 진심으로, 애정을 가지고 마치 어린 아이를 보살피듯 한다.

  노먼이 매혹된 것이 Sir이라는 인물과 그 재능인지, 아니면 연극이라는 예술 세계에 대한 동경인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어쩌면 둘 다 일 수도 있다. 분장에 필요한 밀가루를 구하기 위해 시장을 찾은 그는 가게 주인으로부터 '아가씨'라는 소리를 듣는다. 노먼의 말투와 행동은 매우 여성스럽고 다정다감하다. '동성애자'라는 그의 성 정체성에 대한 암시는 노먼과 Sir의 관계를 더욱 복합적으로 만든다. 노먼이 Sir에게 보여주는 모든 것들은 표면적으로는 '연극 예술'에 대한 헌신처럼 보인다. 노먼의 목표는 Sir의 불안과 고통을 달래어 어떻게든 무대에 오르도록 만드는 일이다. 무대 위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위대해 보이는 대배우는 시시때때로 광기에 사로잡힌다. 그가 도심 한복판에서 괴성을 지르며 난동을 부릴 때, 이 광인 배우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노먼이다.

  관객들은 무대 위 Sir의 리어왕 연기에 찬사를 보내며 감탄한다. 하지만 그 무대 뒷편에서 Sir가 보여주는 행태는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 차 있다. Sir는 극단을 이끄는 권력자로서 배우들 위에 군림한다. 이 지독한 이기주의자인 대배우는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입힌다. 그는 또한 단원들의 예술에 대한 열망을 자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으로 교묘하게 이용할 줄도 안다. 그에게 하인처럼 매여 있는 노먼, 오랫동안 Sir를 흠모하며 노처녀로 늙어버린 무대 감독 매지, 배역을 얻기 위해 Sir에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는 신인 여배우, Sir의 한마디 칭찬에 기뻐하는 나이든 조역 배우... Sir가 지배하는 무대 뒤의 세계는 서글픔과 함께 추악함이 존재한다.

  노먼은 늘 바지 뒷주머니에 브랜디 병을 넣어두고 수시로 홀짝거린다. Dresser의 대배우에 대한 헌신은 절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만은 아니다. Sir와 함께 하면서 느끼는 모멸감과 자괴감을 견디기 위해 노먼은 알콜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 점은 노먼과 Sir의 관계에 내재된 착취적이고 병적인 일면을 드러낸다. 노먼은 Sir이 쓴 자서전의 감사 서문에 자신에 대한 언급이 빠져있음을 알고 분노한다. Sir에게 노먼은 Dresser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신을 Sir의 예술적 동반자로 믿고 싶었던 노먼의 바람은 그렇게 산산조각난다. 영화 'The Dresser'는 무대 뒤의 숨겨진 삶을 찬찬히 펼쳐서 보여준다. 예술이 아름답고 위대하게 빛나기 위해, 때로 거기에 몸담은 이들의 삶은 파괴적으로 소모된다. 그것은 노먼 뿐만 아니라, 그가 Dresser로 헌신한 대배우에게도 적용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Peter Bogdanovich 'Noises Off(1992)' 리뷰
영화 'Noises Off(1992)'도 무대 뒤의 만화경 같은 인생을 그린다. 이 영화의 원작을 쓴 이는 영국의 극작가 Michael Frayn. 감독 Peter Bogdanovich는 이 영화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하지만 영화의 흥행은 처참히 실패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예술과 삶의 경계에 대한 흥미로운 탐구가 들어있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noises-off-1992.html

***앨버트 피니 주연 '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1960)'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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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아카풀코 해변에 있던 남자는 경찰에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여동생 엘리스는 그를 만나고 가는 길에 갱단의 습격을 받고 죽었다. 그는 여동생의 죽음과 관련된 혐의를 받고 있다. 교도소 샤워장에서 남자는 거대한 돼지가 바닥에 드러누운 것을 본다. 그의 변호사는 곧 그를 교도소에서 빼내어 준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현지에서 사귄 젊은 애인과 재회한다. 여자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피범벅이 된 돼지 사체가 현관 입구에서 그를 맞이한다. 그걸 본 남자는 놀란 나머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다.

  교도소 샤워장의 살아있는 돼지라니, 뭔가 초현실주의적인 설정같다. 그런데 그건 그 남자 닐에게만 보인 환시였다. 닐에게 돼지가 전혀 뜬금없는 대상은 아니다. 그는 대형 육가공업체를 소유한 사업가이다. 애인의 집에서 본 죽은 돼지는 그에게 닥칠 불운을 암시한다. 병원의 의사는 닐의 머리에 종양이 있다고 알려준다. 그에게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멕시코 감독 미셸 프랑코(Michel Franco)'Sundown(2021)'은 관객에게 매우 불친절한 영화이다. 러닝타임 83분, 그리 길지 않은 이 영화는 제대로 된 대사도 없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야 관객은 닐의 삶에 대한 아주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아카풀코의 특급 호텔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중년의 남녀와 두 명의 젊은이가 등장한다. 닐과 엘리스는 남매, 젊은 남녀는 엘리스의 자녀이다. 여동생 가족이 휴양지에서의 여유를 만끽하는 것과는 달리 닐은 무료해 보인다. 그런데 엘리스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평화로운 휴가는 끝이 난다. 엘리스는 모친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일행은 공항에서 급하게 귀국 비행기편을 알아보는데, 닐은 여권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카풀코로 돌아온 그는 싸구려 모텔에 짐을 풀고 무작정 해변에서 시간을 보낸다. 귀국을 독촉하는 엘리스의 전화도 차단해 버린다.

  닐은 현지 여인 베레니스와 연애도 시작한다. 둘은 따뜻한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맥주를 들이킨다. 가끔 고개를 들어 한낮의 태양을 바라본다. 휴양지 해변의 평화가 마냥 이어지지는 않는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갱단은 순식간에 사람을 죽이고 사라진다. 닐은 그것을 보고도 그다지 동요하지 않는다. 죽은 이의 피는 바닷물에 물감처럼 퍼진다. 그 장면의 불길한 기운은 닐의 피부 반점을 극도로 확대해서 보여주는 기이한 쇼트에서도 감지된다.

  미셸 프랑코는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에 대한 정보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닐이 보여주는 극도의 무관심과 냉정함이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관객은 그저 추측할 뿐이다. 그가 매우 부유한 사람이며, 생에 대한 그 어떤 열망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닐이 쌓은 부는 무수한 가축의 핏빛 죽음에서 나왔다. 닐과 엘리스, 두 명의 조카 콜린과 알렉사. 휴양지에서 그들의 모습은 그곳 대다수 가난한 주민들의 삶과 대비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인종과 계층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도시의 삶과 사업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가? 마침내 닐을 찾아낸 엘리스는 분을 터뜨린다. 어머니 장례식에도 오지 않고, 닐은 내내 여자와 노닥거리고 있었다. 이 영화를 본 이들이 닐의 패륜적 행태에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도대체 왜?', 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관객이 혼란스러워할 무렵에 닐에게 급박한 시한부 질병이 통고된다. 이제 이 불행한 남자의 마지막을 따라가야만 한다. 영화의 마지막, 테라스의 비어있는 의자에 그의 옷과 소지품만이 덩그라니 남아있다.

  "아니, 이게 정말 다인가?" 그렇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누군가 나에게 그래서 이 영화가 좋은 영화냐고 묻는다면, 나는 잠시 주저할 것이다.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분명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Sundown'은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것들을 오랫동안 곱씹게 만든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내러티브의 간극을 메꾸는 일등공신은 주연 배우 팀 로스(Tim Roth)이다. 그가 연기한 닐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생에 대한 깊은 절망과 허무가 감지된다. 그 삶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하며, 우리는 언젠가 불현듯 찾아올 죽음의 순간을 떠올린다. 미셸 프랑코의 이 소품같은 영화에는 서늘한 매혹이 존재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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