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희(이혜영 분)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소설가이다. 예전에는 열정적으로 써내던 소설을 이제는 좀처럼 쓰지 못하고 있다. 오래전에 알고 지냈던 후배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우연히 여배우 길수(김민희 분)와 마주친다. 여배우의 소탈한 면모에 호감을 갖게 된 작가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꿈을 털어놓는다. "길수 씨와 영화를 찍고 싶어요." 마침 여배우의 조카와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영화 전공생이다. 금상첨화. 과연 소설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수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 캐릭터에서 홍상수의 영화적 자아를 찾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사실 그것이 전혀 터무니 없는 나만의 허황된 공상도 아니다. 홍상수는 자신을 비롯해 영화쪽 관계자들, 주변인들의 일상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세상과 관객을 향한 메시지 박스 같다. 그렇다면 '소설가의 영화(The Novelist's Film, 2022)'에서 홍상수의 본심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누구일까? 이전까지는 '감독'으로 나왔던 캐릭터들이 그러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소설가 준희'가 그 역할을 떠맡는다. 관객은 준희가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에서 홍의 본심을 엿본다.

  준희는 도시의 전망대에서 예전에 알았던 감독 부부와 마주친다. 감독 효진(권해효 분)은 준희의 소설을 영화로 찍으려다가 그만 둔 적이 있다. 효진과 그 아내(조윤희 분)와의 대화에서 준희는 그때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다. 효진은 그 영화가 엎어진 이유가 투자자들 때문이었다고 둘러댄다. 하지만 준희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준희는 효진이 돈을 밝히는 감독이라서 돈 안되는 영화를 접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효진의 아내를 향해서는 '돈에 악착스러워 보인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과연 준희의 소설을 좋아하고, 그 영화를 정말로 찍고 싶었다는 효진의 말은 진심일까? '그렇다면 어떻게든 찍었어야지.' 준희는 효진에게 냉소적으로 답한다.

  홍상수는 자신이 만들어낸 영화 속 인물들의 진심과 거짓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처음 만난 이들에게 어찌 보면 입에 발린 아부같은 말을 늘어놓는다. 후배 세원의 서점에서 만난 동네 아가씨 현우는 준희의 팬이라며 만나서 영광스럽다고 말한다. 그런데 관객은 이 아가씨 현우가 노시인 만수(기주봉 분)와의 술자리에서 비슷한 소리를 하는 것을 발견한다. 현우는 만수에게 열렬한 팬이며, 그의 모든 시집을 다 갖고 있다고 말한다. 과연 현우는 시인의 시집을 전부 다 갖고 있을까? 그런가 하면, 효진은 길수를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길수의 재능에 대한 상찬과 작품을 함께 하고 싶은 자신의 열망을 내비친다. 그 모습은 준희의 소설을 무척 좋아한다고 말한 효진의 이전 모습과 기묘하게 겹친다. 준희의 소설은 돈벌이가 되지 않아 찍지 않은(그렇게 추정되는) 효진에게 길수는 돈 되는 영화에 적합한 배우일까?

  홍상수는 우리가 타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허상임을 드러낸다. 영화의 도입부, 준희는 후배 세원의 서점에 들어갔다가 세원의 높은 언성에 놀라 조용히 서점을 나온다. 세원은 동네 아가씨 현우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는다. 그런데 책방 손님으로 세원과 가까운 사이가 된 길수는 준희에게 세원이 정말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세원에 대한 길수의 평가는 정확한 것일까? 우리는 언제든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타인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에 대한 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어설픈 관찰자는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준희가 첫 만남에서 마음이 통한 길수와 분식집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을 보자. 식사가 끝날 무렵, 분식집의 창 밖에서 어린 소녀가 길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아이는 한참을 서있다가 사라진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타나서 또 그렇게 바라본다. 길수는 가게를 나가서 아이와 뭔가 이야기하고는 어디론가 간다. 왜 꼬마 여자 아이가 길수를 그렇게 쳐다보았는지, 길수는 그 아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어떤 면에서 그 꼬마 아이는 우리의 삶 바깥의 낯선 타자일 수 있다. 아마도 홍상수에게는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관심을 갖는 대중일지도 모른다. 길수가 아이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홍상수는 자신이 만든 영화로 세상 사람들에게 답한다.

  이 영화 속에서 그것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은 길수를 두고 벌어진 효진과 준희 사이의 대화 장면이다. 효진은 연기를 쉬고 있는 길수에게 재능이 아깝다는 말을 여러 번 한다. 그걸 듣고 있던 준희는 '아깝다'는 말은 길수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다고 일갈한다. 길수가 원한 삶을 스스로 선택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걸 가지고 제 3자가 무슨 말을 할 자격이나 되냐는 뜻이다. 그래도 인생에서 '때'라는 것이 있잖아요. 효진은 길수가 재능을 낭비하고 있다고 거듭 말한다. 준희는 그런 효진에게 퍼붓는다. '때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러는 댁이나 잘 사셔.'

  "당신들 다 사랑할 자격 없어!" 홍상수는 '밤의 해변에서 홀로(On the Beach at Night Alone, 2017)'에서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대중의 비난에 그렇게 응답했다. 재능있는 여배우의 앞길을 막고 있다는 세간의 비난에 대한 자격지심일까? '소설가의 영화'에서 홍상수는 그런 속내를 구태여 감추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길수(김민희 분)의 삶에 대한 판단은 세상의 몫이 아니다. 현재 자신과 삶을 함께 하는 여배우에 대한 사랑과 연민 또한 절절하게 드러낸다. 영화 속에서 준희가 만든 영화는 아주 일부분만 제시된다. 준희의 영화 속에서 길수는 들꽃 부케를 들고 결혼 행진곡을 흥얼거린다. 그 장면은 홍상수의 지독한 자기 연민과 극대화된 예술가적 자의식의 정점을 보여준다.  

  '소설가의 영화'를 홍상수 개인의 삶과 분리된 전혀 별개의 텍스트로 해석하는 일은 쉽지 않다. 홍상수에게 있어 영화와 실제의 삶은 분명 다른 것이다. 그렇지만 그 두 세계는 서로의 영역을 끊임없이 공유하며 새로운 이야기의 물줄기를 만들어낸다. 영화 속에서 준희는 자신이 찍고 싶어하는 영화에 대해 한참을 설명한다. 배우 길수의 인간적 모습과 삶을 담되, 거기에서 파생되는 어떤 다른 무언가를 찍고 싶다... 경우는 그럼 그것은 '다큐멘터리' 같은 것이냐고 묻는다. 준희는 다큐멘터리는 아니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준희가 만들고 싶은 영화는 과연 무엇일까?

  현실과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의 간극을 자유롭게 탐험하는 것. 어떤 면에서 홍상수가 만들어온 영화들의 궤적은 준희의 바람과 일맥상통한다. "그건 이야기 같지 않아! 이야기가 이야기 같아야지." 술자리에서 노시인 만수는 준희가 만들려는 영화에 대해 딴지를 건다. '이야기 같지 않은 이야기'로 자신의 영화 세계를 확장해온 사람. 나는 '소설가의 영화'를 보며 홍상수의 뻔뻔한 궤변에 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번에도 이 감독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영화 속에서 '소설가 준희의 영화'가 어떤 것인지 관객은 결코 알 수 없다. 아직도 홍상수에게는 말하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홍상수 영화 리뷰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 201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on-beach-at-night-alone-2017.html

도망친 여자(The Woman Who Ran, 202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9/woman-who-ran-2020.html

 

당신 얼굴 앞에서(In Front of Your Face, 202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5/10-in-front-of-your-face-20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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