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타카미네 히데코(高峰秀子)가 TV 대담에서 나루세 미키오 감독을 회고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나루세 미키오는 거의 말이 없었고 배우들에게 별다른 연출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나루세 미키오는 당대 최고의 배우들과 작업하면서, 그들의 연기를 무척 신뢰했던 모양이다. 아역 배우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던 연기 천재 타카미네 히데코였지만, 이 배우에게도 버겁게 느껴진 작품이 있었다. 영화 '야성의 여인(Untamed, Arakure, 1957)'이었다. 고민 끝에 타카미네 히데코는 나루세 미키오에게 '어떻게 연기해야 할까요?'하고 물었다. 감독의 대답은 이러했다. "아, 그거? 어렵지 않아. 금방 끝날 거야."

  영화 '야성의 여인'은 원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일본의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토쿠다 슈세이(徳田秋声)가 1915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あらくれ)이 그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오시마(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나루세 미키오 영화의 여느 여성 캐릭터들과 확실히 다르다. 이 여성은 매우 강단있고 주체성이 강한 인물이다. 오시마는 자신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남자들에게 과감히 맞선다. 작가 토쿠다 슈세이가 살았던 시대 뿐만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진 1950년대에도 이런 여성은 보기 드물었다. 그 시대의 여성은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갇혀있는 삶을 살았다. 그러니 '오시마'라는 여성의 존재는 더욱 유별나고 특이하게 여겨질 수 밖에 없었다. 타카미네 히데코가 오시마를 연기하면서 느꼈던 어려움도 거기에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가게의 창문을 열심히 닦는 여자가 보인다. 오시마는 부유한 상인 츠루(우에하라 켄 분)의 후처로 들어왔다. 츠루는 전처를 병으로 잃었다. 그런데 이 남자가 새 아내를 바라보는 눈빛은 영 마뜩잖다. 인색하기 짝이 없는 그는 낡은 기모노를 입고 있는 아내에게 옷도 사주지 않는다. 술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데다 바람까지 피운다. 오시마가 임신하자, 아이 아빠가 자신이 아닌 것 같다고 대놓고 모욕을 준다. 결국 불행하게 끝난 첫 결혼, 오시마는 어디고 몸을 의탁할 데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친정 오빠가 소개해준 산골 온천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다 온천장의 주인집 아들과 눈이 맞는다. 그런데 이 남자 하마야(모리 마사유키 분)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 그의 병든 아내는 요양을 떠난 상태이다. 가정을 버릴 생각이 없는 하마야에게 시간이 갈수록 오시마의 존재는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유부남의 내연녀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오시마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그리고 무작정 도쿄로 상경, 재봉일을 배워 자신의 삶을 꾸려나간다. 오시마는 일하면서 알게된 상인 오노다(카토 다이스케 분)와 가정을 꾸리고 의상실을 연다. 잘 되던 의상실이 불황에 문을 닫으며 다시 한 번 인생의 시련과 마주한 오시마. 오시마의 인생에 해뜰 날이 있을까...

  이 영화에서 오시마의 남자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매우 폭력적이다. 첫 번째 남편 츠루는 오시마와 몸싸움을 벌이다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게 만든다. 그 일로 오시마는 유산한다. 두 번째 남편 오노다는 어떠한가.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다고 뺨을 때리는 일은 다반사다. 이 남자도 무능함과 뻔뻔스러움으로 치자면 첫 남편 츠루와 막상막하. 틈만 나면 바람 피울 생각에 가게일은 뒷전이다. 또한 술고래 아버지 봉양까지 오시마에게 강요한다. 오시마라고 참고만 있지 않다. 급기야 오노다의 손찌검에 물건을 내던지며, 빗자루로 남자를 후드러팬다.

  이 영화 속에서 좀 괜찮은 남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전형적인 구시대 인물인 오시마의 아버지는 어떻게든 딸을 남자에 묶어둘 생각만 할 뿐이다. 유부남 하마야는 온화한 품성을 지닌 사람이지만, 그가 오시마에게 보여주는 태도는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다. 그는 아내가 돌아온 이후에도 오시마와 계속 관계를 유지한다. 오시마는 오직 하마야에게만 마음을 준다. 그는 오시마의 불같은 성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유일한 사람이다.

  비록 결혼 생활은 삐걱거리지만, 오시마는 자신의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간다. 오시마가 서툴게 넘어지면서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히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나중에 화려한 양장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활보하는 오시마에게서는 진정한 자유가 느껴진다. 대단한 사업 수완을 보이며 의상실을 꾸려나가는 오시마의 모습은 독립적인 근대 여성의 초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주체적인 여성이 남편의 불륜에 대처하는 방식도 남다른 데가 있다. 오시마는 남편의 뒤를 밟아 내연녀의 집을 알아낸다. 내연녀와 드잡이질을 하고 나오는 길, 예기치 않게 비까지 쏟아진다. 우산을 하나 사고, 오시마는 의상실에 전화를 건다. 오시마는 유능한 재단사와 일꾼을 데리고 나와 자신만의 의상실을 차릴 생각이다. 그깟 바람난 남자는 알아서 살게 내버려두면 그만이다. 오시마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진다. 비오는 거리를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오시마의 뒷모습은 당당하다. 

  영화의 일본어 제목 'あらくれ'는 '거친, 폭력적인'이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주로 '사나운 남자'를 묘사할 때 쓰인다. 영화 속에서 오시마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여자답지 않다고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견고한 가부장적 사회 체제하에서 이 여성이 보여주는 담대한 모습은 결코 폄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나루세 미키오는 원작 소설이 지닌 힘과 아름다움을 영화 속에 그대로 재현한다. 후대의 관객은 시대의 인습에 저항하는 강인한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발견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