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땅히 쓸 글도 없고, 그냥 쉬어 가기로 했다. 대신, 지난 9월부터 블로그에 다시 글을 올리면서 느꼈던 이런저런 소회들을 써보려고 한다.


  원래 내가 쓰려던 글은 영화나 매체에 관련된 비평글은 아니었다. 너무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일종의 습작, 글쓰기 훈련처럼 매일 무언가를 써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해서 어느날 갑자기 소설이 짠, 하고 써지는 것은 아니므로 어쨌든 하나의 글쓰기 일과를 만들고 싶었다. 처음에는 일상의 이야기들 위주로 써나갔는데, 문제는 내가 일상이 화보인 연예인도 아니고 나올 수 있는 소재의 한계라는 벽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 무슨 마른 행주 쥐어짜는 느낌이었다.


  영화에 대한 글은 그다지 쓰고 싶지 않았지만, 배운 가락이 있으니 그게 또 자연스럽게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영화에 대해 말하자면... 오손 웰스가 말년에 회고했듯, 나에게 '망할 놈의 마법 상자' 같은 애증의 대상이기도 했다. 너무너무 사랑했지만, 결국에는 밀쳐내는 그런 존재 같았다. 그럼에도 어떻게 쓰다보니 그것도 '미운 정'이 단단히 들었는지, 다시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이들은 너무도 많기 때문에, 내가 쓰는 글 어디에 '차별점'을 둘 것이냐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이건 마치 유투버를 하기로 마음먹은 초보가 작은 촬영장비 하나 들고 찍을 때 드는 당혹감, 그런 느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이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팔기 위해 글을 쓴다는 것, 그 생업전선의 치열함과 엄중함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도 글이란, 그것을 읽어주는 독자를 상정할 수 밖에 없으므로 나름의 고민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 즈음에 EBS 클래스e에서 최장순의 '기획의 세계' 강의를 우연히 들었다. 비단, 물건을 파는 마케팅에만 기획이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도, 그러니까 내가 글을 쓰는 블로그에서도 기획의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준 강의였다. 내 글을 읽어줄 독자를 만나기 위해 내가 해야하는 것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블로그 글 가운데에서 반응이 괜찮았던 글들이 드라마와 영화와 관련된 글이었다. 그래서 나름의 고민 끝에 내가 쓰게 될 글들의 방향을 영화와 매체 비평으로 잡았다. 글은 가급적 평이하게 쓰려고 노력한다. 현학적인 글은 가장 피하고 싶은 글이다. 그래도 글 안에 생각의 깊이, 성찰의 자료들은 담아야 하기에 흔한 인상비평도 지양하려고 한다.


  사실,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 플랫폼이 대세인 이 시대에 글 위주로 채워진 텍스트로 블로그를 꾸려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에 대한 생각도 해본다. '*런치' 같은 블로그 플랫폼 화면을 보면 어찌나 다들 화사하게도 채우던지, 그 쪽은 나와는 맞지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같은 볼거리 위주의 시대에, 나처럼 오직 '생짜' 문자로만 채워진 글을 올리는 이들도 드물 것이다. 사진이나 포스터 올리는 일이 드문 것은 첫째로는 내 귀차니즘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쓰는 글에 덕지덕지 뭔가 볼 것을 붙여서 가독성을 떨어뜨리고 싶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저작권 법에 명시된 공정이용 항목은 잘 숙지하고 있으므로, 출처 표기를 전제로 포스터 정도 올리는 일은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글을 읽는 이들이 텍스트 자체에 집중해주었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좋은 영화 리뷰라고 느낀다면 나중에 독자가 스스로 자료를 찾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음, 이렇게 써놓고 보니 참 불친절한 블로그 주인의 변명 같기도 하다.


  아마도 이 블로그를 우연히 들르게 된 이들은 그 생경함에 움찔, 하고 놀랄 수도 있다. 오직 글로만 채워진 텍스트에, 주인장과 방문자 사이에 그 어떤 댓글 교류도 없는데, 매일 글은 올라오고, 누군가는 그걸 읽는 희한한 시스템이라고나 할까. 뭐랄까, 블로그 주인장도 무진장 내성적인(introvert) 사람이고, 이곳을 오는 이들도 다들 수줍음이 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댓글이 올라오면 읽지만, 그걸 읽고나서 드는 생각은 '아, 어떻게 답글을 달아야 하지', 고민하면서 결국은 답글을 달지 못한다...


  좀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블로그에 글 쓸 때는 '춥고 배고픈' 상태에서 글을 쓴다. 뭔가 '거지 모드', 그런 약간의 긴장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이 잘 써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글을 쓰게 되면서, 커피가 전보다 늘었고, 다시 애정을 가지고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조회수가 신경쓰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 보다는 '좋아요'에 신경이 더 쓰인다. 적어도 '좋아요'에 1이라도 찍히면, 어제도 '망글'은 쓰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칭찬에 인색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렇게 표현해주는 독자들에게는 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내가 계속 글을 쓸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한다.


  모두가 유튜브로 몰려가는 시대에, 이런 구닥다리 블로그를 찾아서 글을 읽어주는 독자들이 '특별한' 이들일 거라는 짐작은 하고 있다. 무어라 표현은 할 수 없지만, 나름의 연대감을 느끼며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언제까지 글을 올리게 될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동안에는 나도 보람을 느끼고, 이 곳을 찾아주는 이들에게도 유익한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이 자리를 빌어, 이렇게 글을 읽어주는 독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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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산책 나가는 길에 이른바 '효도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오는 아줌마를 보았다. 무슨 노래인가 했더니, 요새 유행하는 '미스터 트롯'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들이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가려는데, 마침내 나와 거리가 좀 가까워졌을 때 그 아줌마가 라디오를 내 쪽으로 불쑥 내밀었다. 나는 우아하고, 잽싸게 그걸 피해서 옆으로 비켜섰다. 아마도 그 아줌마는 자신이 듣는 노래를 나한테도 한번 들어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은 해본다. 물론 내 마음 속 대답은 'No, thank you'였지만.


  요새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리면 계속 나오는 이야기가 그 미스터 트롯 가수들에 관한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머니의 음악 취향은 가요를 좀 듣기는 하셨어도, 트롯은 아주 질색을 하셨다. 그런데 우연히 그 트롯 프로그램에서 젊은 가수들이 노래하는 걸 보고 트롯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하시게 된 듯하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젊고 세련된' 트롯이었다. 게다가 그 7명의 트롯 가수들(그들은 항상 팀으로 예능에도 출연한다)의 인생사는 어찌나 다들 기구한지, 특히 어머니는 그 가운데 당신이 좋아하는 가수 K의 불운한 성장기를 자주 언급하셨다. 가수 K의 노래가 클래식 음악 방송에서도 소개되어서 한번 듣기는 했는데, 확실히 음색이나 창법이 남다르게 느껴지기는 했다. K는 높은 인기만큼이나 이런저런 구설수도 많아서 연예 뉴스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건 걔가 철 없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야. 난 K가 잘 되었으면 한다. 노래를 너무 잘해."


  어머니는 K를 둘러싼 이런저런 구설에 대해 그리 말씀하셨다. '팬심'이란 게 있다면 저런 건가 보다, 하면서 내가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모습에 새삼 놀랐다.


  내 음악 취향은 그쪽은 전혀 아니었으므로, 모 방송국의 '미스 트롯'으로 작년부터 일기 시작한 트롯 열풍이 광풍이 되어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다만, '미스터 트롯'이 올해 방영된 이후, 공중파는 물론이고 케이블 채널을 점령하다시피한 트롯 관련 방송들에 피로감이 느껴지기는 했다. 한편으로는 도대체 이 현상의 근원에는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한 마음도 들었다.


  이것과 관련해서 자료들을 찾다가 방송국 관계자들의 익명의 인터뷰들을 보니, 시청률 문제가 가장 커보였다. 인기가 바닥이었던 예능 프로그램도 미스터 트롯 가수들이 특별 출연하고 나면 저조했던 시청률이 급등했다고 한다. '시청률 깡패'인 트롯 프로그램 앞에서는 답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좋은, 참신한 예능 프로그램 기획안을 내놓아도 윗선에서는 트롯 관련 프로그램을 언급한다고 했다.


  젊은 연령대의 시청자들이 공중파와 케이블에서 이탈해서 OTT(Over The Top Service: 인터넷 기반 미디어 콘텐츠 제공 서비스)로 가는 동안, 기존의 시청방식에 익숙한 중장년층들이 케이블 채널의 주요 시청자층을 차지한 것을 트롯 열풍의 한 요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보는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에 만든다'라는 것이다. '미스터 트롯' 경연 대회는 진작에 끝났지만, 그들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이 계속 만들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특히 '사랑의 콜센터'라는 예능 프로는 이 글을 쓰는 현재, 30주 연속 목요일 예능 프로그램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다. 


  며칠 전 그 프로그램을 한번 보니, 내가 모르는 세상이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오는 신청곡들을 미스터 트롯 7인방 가수들이 불러주는 형식의 이 프로그램은 전화 연결에서부터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전화 연결이 된 시청자는 300번 넘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신청자 가운데에는 네팔 이주민 여성도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전화기 앞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걸까 싶은 궁금증이 밀려왔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가수 K는 구창모의 '희나리'를 불렀는데, 뭔가 확실히 내가 전에 알던 그 노래와는 달랐다. 진중했고, 울림이 있었으며, 잘 다듬어진 창법으로 부른 그 노래는 비록 노래방 기기 점수 판정으로 낮은 점수를 받기는 했으나, 내게는 나름 새로운 충격이었다. 


  '맛있는 녀석들'이라는 인기있는 대표적 '먹방'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의 열렬한 팬들은 요새 불만이 많은데, 트롯 예능 프로그램의 폭발적 인기로 이전에는 재방 삼방까지 되었던 '맛있는 녀석들'이 밀려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케이블 채널의 인기있는 재방 목록을 트롯 예능이 차지하고 있다. 그야말로 '트롯 전성시대'인 셈이다.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내가 읽은 자료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빈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이 언급되었던 리뷰였다. 성장한 자녀들이 집을 떠난 후, 중년 여성이 겪는 고독과 슬픔의 감정을 의미하는 이 말을 트롯 열풍의 원인에 대입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트롯을 즐겨 듣고 좋아하는 주 연령층이 중장년층 여성이라 하더라도 '빈둥지 증후군'은 좀 과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기는 해도 한편으로 수긍이 안가는 것도 아니다. 최근에 읽은 인터넷 게시판의 글이 그러했다. 트롯 열기에 극도의 짜증과 피로감을 느낀다는 게시글에 누군가 댓글을 달았다.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제가 하지 못한 효도를 미스터 트롯 가수들이 해주고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줄 모릅니다. 저희 어머님은 그 친구들의 노래를 들으며 삶의 의미를 다시 찾고, 매일매일을 활기차게 지내십니다." 


  그러자 거기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효도는 님이 해야 하는 것이지, 미스터 트롯 가수들이 대신 해주는 거 아닙니다."


  아니 뭘 저렇게 '뼈 때리는' 글을 쓰나 싶었다. 그 말을 들으니 과연 '효도'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자식으로서 부모의 마음을 다 헤아리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어쩌면 트롯 가수가 불러주는 노래를 들으며 어떤 누군가의 어머님이 진정한 위로와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진정한 효도의 '아웃소싱(outsourcing)'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다음엔 어머니의 이야기를 더 잘 들어드리기 위해서, 결코 내 취향이 아닌 미스터 트롯 가수들의 노래를 찾아 들어 보았다. 어머니가 칭찬해 마지않는 임영웅이 부르는 '고맙소', 그리고 신나는 이찬원의 '진또배기'도 들었다. 나는 효도의 길이 쉽지 않음을 새삼 느끼며 유튜브 창을 조용히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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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클린 뒤 프레, 라는 여성 첼리스트가 있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이 놀라운 첼리스트는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내었다. 열일곱 살 때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그야말로 전설이 되었다. 적어도 이 협주곡 만큼은 자클린의 연주를 뛰어넘는 음반을 꼽기가 어렵다. 그렇게 자신의 경력을 눈부시게 쌓아가던 그에게 이십대 후반,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불치병이 찾아온다. 삼십대 초반의 은퇴, 그 이후로 자클린은 첼로를 다시는 연주할 수 없었다. 육체적인 질병과 함께 정신적으로도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4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녀의 외로움과 고통을 나눌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남편이 있기는 했다. 그 유명한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21살 때 결혼했다. 유대인이었던 남편을 따라 개종까지 했다. 야심에 찬 바렌보임은 자클린과 함께 엄청난 연주일정을 소화해가며 자신의 경력을 쌓아갔다. 자클린의 팬들 가운데에는 바렌보임의 자클린에 대한 그런 혹사가 발병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어쨌든 명성에 굶주린 늑대같은 이 남자는 자클린이 병으로 첼로를 하지 못하게 되자 그야말로 '헌신짝'처럼 버린다. 이혼을 요구했지만 자클린은 들어주지 않았고, 그래서 러시아 피아니스트와 살림을 차린 후 아들 둘까지 낳았다. 그러는 동안 클래식 음악계에서 바렌보임의 위상은 더 커져갔다. 자클린의 죽음 이후 어느 정도의 비난을 받기는 했어도, 그의 명성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영화 '힐러리와 재키(1998)'는 그런 자클린의 생애를 담았다. 이 영화가 나오자 바렌보임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세상 사람들이 기다려 줄 수 없는 거냐고 짜증 섞인 반응을 내놓았다. 이 영화도 진실을 온전히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언니 힐러리와 그 남편의 회고록을 기반으로 만든 이 영화에서 힐러리 남편을 자클린이 유혹한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은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의 자클린을 유린한 것이라는 조카의 증언이 나중에 나왔다. 자클린은 이래저래 철저하게 고독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던 여성 예술가였다.


  영국의 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짧았던 삶을 담은 다큐 '에이미(2015)'에도 그러한 비극이 또 다른 방식으로 재현된다. 눈부신 재능을 가진 싱어송라이터였던 에이미는 블레이크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삶이 망가지기 시작한다. '나쁜 남자'의 전형적 표본 같은 블레이크는 에이미를 술과 약물의 세계로 안내한다. 사랑에 목말랐던 에이미는 야수같았던 남자에게 정신적으로 예속되어 온전한 판단능력을 상실한 채 중독자의 길을 걷는다. 개기름 좔좔 흐르는 얼굴로 다큐의 인터뷰에 나온 뻔뻔한 블레이크를 보고 있노라면, 그 면상을 한대 후려치고 싶은 충동마저 느끼게 만든다. 블레이크는 에이미 사후에도 에이미의 사생활을 까발리며 돈벌이로 삼기도 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Rehab'을 들을 때마다, 저 노래 만들 시간에 재활원에 갔어야 했는데, 한탄을 하게 된다. 그걸 못하게 한 것은 에이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 또한 블레이크와 비슷한 부류의, 에이미에게 '빨대' 꽂고 사는 더럽게도 한심한 인간이었다. 이 다큐는 그런 '포식자들' 사이에서 상처받고 고통받다가 결국은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한 여성 가수의 이야기인 셈이다.


  1979년에 나온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라는 영화가 있다. 메릴 스트립, 더스틴 호프만이 나온 이 영화는 다른 의미로 '미투(Me Too)'운동에 소환되었다. 애슐리 저드의 폭로와 소송으로 시작된 하비 와인스틴의 성범죄는 헐리우드 일각에서 와인스틴과 친분관계가 있는 유력 인사들의 침묵과 방조 때문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거기에 메릴 스트립도 언급되었는데, 와인스틴과 친했고 영화계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여배우로서 그런 상황을 모를 리 없다고 맹공격을 받았다. 메릴 스트립은 그 사실을 완곡히 부인했다. 그 과정에서 메릴 스트립은 과거 일화를 털어놓으며 자신을 변호한다. 영화 촬영 당시 더스틴 호프만에게 뺨을 맞은 일화를 공개한 것이다.


  그 장면은 명백히 대본에 없는 장면이었다. 이 영화는 아내의 갑작스러운 이혼 요구에 혼란과 고통에 빠진 남편의 육아, 법정 투쟁기를 다루고 있다. 메릴 스트립은 아내 역할을 맡았는데, 집을 떠나는 장면에서 갑자기 더스틴 호프만이 뺨을 때렸다고 한다. 감독과 영화 스텝들 모두가 놀랐고, 감독은 이 일 때문에 메릴 스트립이 고소를 하거나 촬영을 중단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대범한 여배우는 프로페셔널한 자세로 영화를 끝까지 잘 찍었다. 더스틴 호프만에게 나중에 사과를 받기는 했지만, 메릴 스트립에게 이 사건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스틴 호프만이 메릴 스트립의 뺨을 때린 데 대한 변명은 이러하다. 배역에 대한 사실감 있는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서였고, 자신은 당시 이혼 소송 중인 부인에 대한 악감정을 메릴에게 느꼈다는 것이다. 메릴 스트립은 영화의 식당 장면에서도 호프만의 폭력을 경험했는데, 식당 벽에다 유리잔을 내던져 버려서 공포감을 유발시켰다고 언급했다. 그 역시 대본에 없는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서 크레이머 부인의 놀랍도록 차가운 적의로 나타난다. 나는 오래전에 그 영화를 보면서, 도대체 메릴 스트립은 왜 저렇게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남편에게 무섭도록 적대적일까 의문을 가졌었다. 그 의문은 몇십 년이 지나서야 풀렸다. 더스틴 호프만의 그런 '끔찍한' 행동은 영화에서 엄청난 적개심을 보여주는 데에 도움이 되었지만, 그런 것이 없었어도 자신은 잘 해낼 수 있었다고 스트립은 회고했다. 


  메릴 스트립은 그 영화를 찍을 당시 경력이 별로 없는 완전 초짜 배우가 아니었다. 브로드웨이 연극계에서의 나름대로의 경력도 있었고, 연기력도 검증된 배우로서 신인이기는 했지만 뺨 맞을 정도로 무시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호프만은 아무렇지 않게 상대 여배우의 싸다구를 '날려버린다'. 아마도 '너 정도는 별거 아니니까, 앞으로 조심해서 잘 해라', 같은 기선 제압의 성격이 강했을 것이다. 식당 장면에서 물컵 내던진 일도 그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메릴 스트립은 그 이야기를 2017년이 되어서야 공개했다. 자신 또한 헐리우드에서 영화 경력을 쌓아오는 동안 오만 말못할 부당함과 어려움을 겪었음을 미투에 힘입어 말하는 것이기도 했고, 후배 여배우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비난에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 일화를 흘렸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런 일화를 공개하는 메릴 스트립의 속내는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너희들, 내가 어떻게 이 영화판에서 살아남았는지 알기나 하냐? 나 신인 시절엔 아무 이유없이 연기 잘하라며 뺨을 맞기도 했어. 오만 더러운 꼴 다 봤지. 너희들 겪은 어려움도 알겠는데, 내가 경험한 일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 같은 거지."


  생존자(survivor). 메릴 스트립은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결국 살아남았고, 자신의 배우 경력도 지켜냈다. 대체 당신은 다른 후배 여배우들 안돕고 뭐했느냐고 메릴 스트립이 비난을 받는 것은 내 생각에 그다지 정당하지 못하다. 그런 비난을 하려면 와인스틴의 절친 타란티노에게도 공평히 주어져야 한다. 타란티노는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의 영화 작업을 와인스틴과 계속 이어왔다. 심지어 한때 연인 사이였던 미라 소르비노가 와인스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알려줬는데도, 타란티노는 그것을 무시했다. 모두가 그저 '왕의 부하들'이었을 뿐이다.


  이런 무수한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우리를 감동시키는 예술을 만들어 내는 세계가 마치 정글과도 같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그 속에는 무지막지한 포식자들이 있고, 그 아래에서 숨죽이며 겨우 생존을 이어가거나, 더러는 소리없이 사라지는 생명도 있다. 물론 뛰어난 생존력으로 포식자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겪었던 공포와 위협의 순간들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그 정글을 자유롭게 탐험하며 포식자들과 공존하고 있다. 어쩌면 예술 작품이란, 결국 그 정글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투쟁들의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살아남는다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살아남는 사람은 그 정글의 이야기를 글로 쓸 수도, 노래를 부를 수도, 연기로 보여줄 수 있다. 생존자가 승리자가 되는 순간이다. 

 


*위로부터 차례로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힐러리와 재키', '에이미'

 포스터 출처:IM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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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동생과 전화 통화를 하다가 무슨 이야기 끝에 동생이 이런 핀잔을 주었다.


  "에휴, 무슨 쌍팔년도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건 구식이라고, 구식!"


  정확히 내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아주 옛날 사고방식으로 뭔가를 말했기 때문에 동생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구닥다리 같은, 시대에 한참이나 뒤떨어진 어떤 것. 그런데 쌍팔년도는 서울 올림픽이 있었던 1988년을 가리키는 건가? 그 말의 어원을 찾아보니 재미가 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이 말은 단기 4288년인 1955년을 의미하는 말로 '구식의 시대'를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실제로 당시의 신문과 소설에 이 표현이 등장한다. 이제는 시대가 흘러서 지금의 세대에게 쌍팔년도는 1988년, 그러니까 시쳇말로 '꼰대'들의 후진 마인드와 가치를 대표하는 말이 된 듯하다.


  내 기억 속의 1988년은, 온 나라가 서울 올림픽으로 들썩였던 해였다. 나에게는 아직도 그것이 최근년도의 일 같은데, 헤아려 보니 벌써 32년 전의 일이다. 기억의 왜곡된 보정이란 게 그렇다. 확실히 그 시절이 '구식'이라는 건 맞다.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정보 혁명이 오기 직전의 시대, 그러니까 아직은 아날로그가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라디오 신청곡은 편지나 엽서로 신청해야 했고, 우체국 전보가 있었던 시절. 내가 이메일 계정을 처음으로 만든 시기가 1990년대 중반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 느려터진 넷스케이프, 천리안 PC 통신...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ness in Seattle, 1993)'은 그런 구식의,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가득찬 영화다. 가끔 케이블 영화 채널을 돌리다 보면 예전에 본 영화를 또 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내게는 '로마의 휴일', '대부 1, 2', '쇼생크 탈출', 그리고 이 영화가 그러하다. 채널을 돌리려다가 뭔가 흠칫, 하고 멈춰서 그냥 보게 되는 영화들이다. 그거 다시 볼 시간에 새 영화를 보게 되면 좋으련만,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이 영화들은 뭔가 '마법'을 걸어버리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죄다 구닥다리 영화들이구먼.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다보면, 영화가 보여주는 그 시대의 정서들을 요즘 세대들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나의 청춘이 지나온 시절이라서 나는 그 시대를 잘 알고 있고, 또 이제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시절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뭐랄까, 저런 시절이 다 있었구나, 하는 생경한 느낌이 아닐까. 상처(妻)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샘에게는 어린 아들 조나가 있는데, 조나는 자신의 새엄마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전화로 연결된 심야 라디오 프로에서 털어놓게 된다. 그 라디오 방송이 나가고 난 후에 샘에게는 '종이' 구혼 편지가 그야말로 폭탄처럼 쇄도한다. 이메일 따위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샘은 아들 조나가 구혼 편지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애니를 직접 만나러 비행기 타고 가출을 감행하자 아들을 찾기 위해 생고생을 하게 된다. 휴대폰이 없는 시대니까, 휴대폰 위치 추적은 꿈도 꿀 수 없다.


  영화 속에서는 멕 라이언이 분한 애니가 아주 좋아하는 영화가 등장하는데, 그 영화는 무려 1957년에 만들어진 '러브 어페어(An Affair to Remember)'. 케리 그란트와 데보라 커가 주연을 맡은 그 영화는 말 그대로 구시대적 감성이 흘러내리는 로맨스 영화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떠난 여자가 어려움 끝에 마침내 사랑을 되찾는 그 영화를 보며 애니는 매번 눈물을 흘린다. 애니는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다. 


  "그것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어요."


  샘은 세상을 떠난 아내와 처음 만났을 때의 순간을 회고하면서 그렇게 말한다. 애니는 심야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샘이 그렇게 말하는 대목에서 'magic'이라고 똑같이 말하는데, 마치 종이에 겹쳐친 데칼코마니의 형상처럼 그 두사람이 운명처럼 연결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 '마법'과 '운명'이란 단어로 영화는 현실과 동떨어진 개연성을 아름다운 로맨스로 승화시킨다.


  여러번 봐도 질리지 않게 만드는 데에는 톰 행크스와 멕 라이언의 연기가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샘의 아들로 나온 조나 역의 아역 배우도 당당히 한 몫을 차지한다. 톰 행크스는 '터너와 후치(1989)'에서 보여주었던 코믹적인 면모를 이 영화에서도 잘 살려내는데, 나는 그가 연기 경력을 거듭할수록 드라마 장르에 무게 중심을 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을 한다. 마치 모범생이 쓴 시험 답안지 같은 느낌이라, 차라리 이 영화를 비롯해 그의 초기작들에서 볼 수 있는 생동감이 더 보기 좋았다. 멕 라이언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가 인생작처럼 여겨지지만, 내게는 이 영화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두 배우의 연기 경력에서 모두에게 좋은 작품이었다.


  그러고 보니, 애니의 약혼자로 나온 배우 빌 풀먼을 빼놓을 수가 없다. 한때 헐리우드의 미남 배우의 계보를 이었던 그를 얼마전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해설자로 보게 되었다. 스미소니언 채널에서 만든 '요세미티 공원의 사계'라는 다큐였다. 이제는 중년을 넘어 노년에 접어든 모습은 내게는 꽤나 충격이었다. 나의 청춘을 지나온 영화 속 배우들은 이제 그렇게 늙어가고 있다. 나는 그 시절 배우들의 최근작들을 잘 안보는데, 한편으로는 그들의 나이든 모습을 보며 내 나이를 헤아리는 것이 괴롭고 귀찮기 때문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와 발렌타인 데이 때에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케이블 채널에서 잊지않고 틀어주곤 한다. 그럴 때마다 그걸 다시 또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샘이 말했듯, 그냥 그 영화가 나에게 '마법'을 걸어둔 것이라고 하자. 김연아 선수가 2007년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연기한 쇼트 프로그램 '록산느의 탱고'는 당시 쇼트 점수 최고점을 갱신하며 역사를 썼었다. 내가 그 동영상을 얼마나 많이 돌려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볼 때마다 새로웠고, 김연아 선수의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좋아했었다. 그런 마법과도 같은, 매혹적인 순간들이 담긴 영상들이 있다.


  쌍팔년도, 구식 시대의 빛나는 감성들로 가득찬 이 영화를 나는 앞으로도 계속 보게 될 것 같다. 영화 속의 애니는 오래전 로맨스 영화 '러브 어페어'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눈물 대신, 지나간 내 청춘의 기억들과 그 시절을 돌아본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그땐 그랬었지."


  한번쯤 뒤돌아 봐주길 바라는 청춘의 긴 그림자 위에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그렇게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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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 화면에서는 태풍 예보가 계속 나오고 있다.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에서는 비가 세차게 쏟아진다. 이런날에 만두가 먹고 싶어지다니, 여자는 시장통 골목의 만두가게가 계속 생각이 난다. 그래, 잠깐 나갔다 오는 것은 괜찮겠지.


  제법 튼튼하다고 생각되는 우산을 골라본다. 문을 열자 거센 바람이 집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이 정도면 견딜 만하다고 생각한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우산이 펄럭거린다. 몸이 휘청거리지는 않지만, 바람의 세기가 좀 버겁게 느껴진다. 겨우 시장통에 도착했다.


  시장은 한산하다. 만두 가게의 벽면 TV에서도 태풍 소식이 쉴새없이 나온다. 이 집의 만두는 언제나 한결같은, 놀라운 맛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이렇게 태풍이 부는 날에도 만둣집에 오는 것을 그만 둘 수 없었다. 가게 주인은 비바람이 창문을 때리는 것을 보며, 오늘 장사는 영 글른 모양이군, 혼잣말을 한다. 여자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고기만두를 산다. 주인은 잘 살펴 가라며 인사를 건넨다.


  바깥을 나와보니, 아까보다 빗줄기도 세지고, 바람의 소리도 무섭게 들린다. 괜히 나왔나,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어쨌든 만두를 산 건 잘한 일이다. 손에 들린 비닐 봉투에서 만두 하나를 꺼낸다. 따뜻하다. 입에 만두를 넣고 한입 베어무는 순간, 바람에 우산이 제껴진다. 이건 정말 센 바람인 걸, 얼른 집에 돌아가는 게 좋겠네...


  2016년 9월 27일, 태풍 '메기'가 대만에 상륙했다. 4명이 사망하고, 오백 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한 대형급 태풍이었다. AP연합 뉴스 사진에는 타이베이 시내에서 악천후 속에서도 우산을 쓰고 만두를 먹고 있는 이 여성이 찍혔다. 이 사진은 보는 이들에게 약간의 웃음과 여러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아마도 이런 생각일 것이다.


  "도대체 태풍 부는 날, 우산까지 쓰고 저렇게 만두를 먹어야 하는 건가?"


  또는,


  "저 만두가 얼마나 맛있길래 우산이 제껴질 정도의 바람에도 만두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거지?"


  이 사진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당시에 대만에 체류했던 한국 여행객의 블로그에까지 이르렀다. 블로그에는 대만 TV에서도 이 사진의 주인공에 대한 분석(?)보도를 뉴스에 내보냈다고 쓰여 있었다. 이 여자는 누구며, 여자가 먹고 있는 만두를 만든 가게는 어디에 있는가 등등. 아무튼 이 아주머니는 대만에서 뿐만 아니라, 외신 뉴스에서 이 사진을 본 나에게까지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처음 이 사진을 보았을 때는 그냥 웃어 넘기고 말았다. 그런데 가끔씩, 이 사진이 생각날 때가 있었다. 뭐랄까, 이 사진에서 아주 견고하고, 순전한 삶의 의지 같은 것이 느껴졌다. 작년이었던가, 이 사진을 찾아보려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지만 쉽지가 않았다. 날짜를 특정할 수 없었으므로, 태풍과 만두를 연관 검색어로 입력해서 겨우 찾아냈다. 그 결과, 이 사진이 2016년 태풍 메기가 강타한 9월의 대만 타이베이의 사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사진과 관련된 인터뷰가 그 당시에 올라왔던 기억도 난다. 사진 속 아주머니는 자신의 사진이 그토록 엄청난 화제가 된 것에 약간의 창피함과 당혹감을 느꼈다고 했다. 왜 그 험한 태풍이 부는 날씨에 만두를 먹고 있었냐는 질문에, 바람이 좀 세게 불었지만 자신은 그저 만두를 먹고 싶었을 뿐이라며 다소 쿨(!)한 답변을 남겼다. 


  사진을 찍은 기자는 태풍이 부는 날, 바깥 풍경을 담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가 우연히 이 사진을 건졌을 것이다. 연속으로 찍은 이 사진은 매체에 따라 각각 실리기도 하고, 두 장이 같이 나오기도 했다. 나는 두 장을 같이 보는 것이 더 생동감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렇게 어렵게 찾아낸 이 사진들을 컴퓨터 하드에 잘 저장해 두었다.


  이 사진을 본 사람들은 그다지 곱지 않은 인상을 지닌 중년 여성의 만두 먹는 장면에 더러는 조롱 섞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고, 저 만두 맛집은 타이베이 시내 어디에 있는가에 엄청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사진 속 인물이 젊고 매력적인 여성이었다면, 이 사진은 다른 의미에서 대단한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 이 사진은 #대만 태풍#예쁜 처자#만두, 아마도 이렇게 올라오지 않았을까?


  어떤 면에서 다소 거칠고 우왁스럽게까지 보이는 사진 속 중년 여성의 이미지는 호감 보다는 웃음과 놀림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나는 이 사진에서 순수한 삶의 의지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오래전, 사진 비평 수업 시간에 보았던 수많은 유명 사진 작가의 그 어떤 사진들 보다 이 사진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태풍이 오는 날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만두를 손에서 놓지 않는 그 꿋꿋함은 조롱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다는 대범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그것이 내가 이 사진을 컴퓨터 하드에 저장하고서, 가끔씩 찾아 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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