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EBS 클래스 e에서 고인류학자 이상희 교수의 '사람의 기원' 강의를 들었다. 처음부터 들은 것은 아니고, 4강부터 들었는데 생각보다 재밌고 유익한 강의였다.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고인류학적인 지식을 업데이트하는 계기였다고나 할까, 이상희 교수는 그 분야의 새로운 연구결과를 찬찬히 일러준다. 그런데 강의를 도와주는 보조 도구는 호미닌 화석들이 전부였다. 뭔가 자료 화면으로 한번에 눈에 들어오는 그림이나 그런 것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보게 된 다큐가 NHK에서 제작한 'Out of the Cradle; The Origins of Humanity(2018)'이다. 


  러닝 타임이 2시간 가량인데,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으로 제작한 화면과 아주 섬세하게 재연된 초기 인류의 사냥과 생활 모습들이 흥미있게 펼쳐진다. 이런 다큐들은 보다보면 그렇다. 정말 돈이 꽤나 드는 다큐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우리나라의 기술력으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텐데 제작비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겠다 싶다. 아무튼 이 다큐는 지금 시점에서 고인류학의 최신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인류의 기원에 대한 지식을 멋지게 포장된 상자에서 선물꺼내듯이 풀어놓는다.


  오늘날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사람 속(Homo)의 유일한 종으로 살아남았지만, 호미닌(Hominin, 이족 보행 영장류)에는 20여 종이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440만년 전에 살았던 '라미두스(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는 화석으로 밝혀진 최초의 이족 보행 영장류로 여겨지는데, 라미두스에서 발 모양이 진화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로 이어진다. 그 이후에 등장하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는 도구를 제작하고 육식을 하기 시작한다. 거기에서 나온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는 본격적인 사냥꾼의 면모를 보이며, 그들은 육식을 통해 커진 뇌와 작은 소화기관을 택함으로써 인류 진화의 신기원을 마련한다.


  다큐에서는 호모 사피엔스와 공존했던 네안데르탈인에 대해서도 아주 비중있게 다룬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보다 더 큰 뇌용량과 상대적으로 큰 체구를 가졌음에도 결국 소멸에 이른 네안데르탈인의 삶의 모습이 생생한 화면으로 펼쳐진다. 그들의 사냥 장면을 보면 네안데르탈인들이 정교한 도구 대신 육탄전으로 사냥감에 맞선 소모적인 방식이 멸종에 이른 원인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극심한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사라졌지만, 그들의 유전자는 오늘날의 인류 안에 남아있다.


  그런 네안데르탈인과 달리 현생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도구'였다. 정교하고 다양한 도구를 제작함으로써 인류는 지구 여러 곳으로 퍼져서 살 수 있었고, '인간다움'의 여러 요소를 획득해 나가게 된다. 다큐에서는 그런 도구들과 관련해서 실제로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극지방에서 발견된 뼈바늘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뼈바늘은 추위를 막기 위한 털옷 제작에 반드시 필요한 도구였다. 초기 인류가 극한의 환경에서도 어떻게든 적응하고 생존해나간 비결은 결국 '창의성'이었다.


  라미두스가 두 발로 아프리카 초원을 처음 밟기 시작한 이후로 호미닌들에게 아프리카 대륙은 안온한 요람과 같은 곳이었다. 극심한 기후변화로 사막화되어가는 그곳을 떠나 낯선 대륙으로 향해야 했던 호모 사피엔스는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해변가에서 그 요람과 작별을 고했을 것이다. 그들이 두려움과 설렘, 희망과 불안을 안고서 바다를 바라보는 다큐에서의 그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이 다큐는 인류 조상들의 삶을 복원해내면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때론 이런 과학 다큐를 통해서도 깊이있게 성찰해 볼 수 있다.    



*사진 출처: docuwiki.net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글쓰기 로드맵 101
스티븐 테일러 골즈베리 지음, 남경태 옮김 / 들녘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읽을만한 책이 없나 책장을 뒤적거리다 아주 오래전에 산 이 책을 발견했다. 사서 한번 보고는 그냥 처박아 두었던 것 같다. 매우 짧은 101개의 글쓰기 조언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경박스러움에 무척이나 실망했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대체 이걸 왜 샀을까... 지금은 품절이 된 책이지만, 누군가는 도서관에서 기대하고 대출할 수도 있겠지.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시작하는 일은 아마도 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사들이는 것이다. 내가 산 글쓰기 책들도 여러 권이다. 그 가운데 그나마 기억에 남는 책은 일본 작가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쓴 '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 정도이다. 나머지는 읽고 나서 돈만 버렸구나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요새 불고 있는 주식 열풍에서 주식을 처음 시작하거나 좀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그럴 것이다. 가장 잘 팔리고 있는 책들이 주식과 재테크 관련 책들이라고 들었다.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를 시작하려고 할 때 제일 손쉬운 방법이 '책 사는 일'이기는 하다. 


  글쓰기 책들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글이 저절로 써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진실이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건질만한 조언이 있다면 '무조건 쓴다'이다. 그냥 써보는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괜찮은 글쓰기 책을 읽었다 해도 정말로 자신이 직접 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글쓰기 책 대부분은 별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뭐랄까, 이렇게 글쓰기 책을 읽었으니 더 잘 쓸 수 있겠지, 하는 약간의 자기 위안을 느낄 수는 있겠다. 나는 그렇게 한동안 글쓰기 책들을 열심히 읽고도 글을 쓰지 못했다. 정말로 써야겠다는 절박함이 없었으니까 그랬을 것이다.


  물론 '무조건 쓴다'고 해서 좋은 글이 당장 나오는 것도 아니다. '글쓰기'는 어쩌면 오랜 시간과 경험과 노력의 축적이기도 하다.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생각을 했는지, 삶의 이력과 그 경험의 깊이는 어떤 것인지 누군가가 쓴 글에는 그런 많은 것들이 압축되어 있다. 독자는 자신이 읽는 어떤 '글'에서 그 모든 것들을 가늠해 본다. 그 글이 나오기까지 작가가 보낸 세월과 그것을 알아봐 주는 독자가 만나는 것. 어쩌면 그것이 글을 쓰는 이들이 소망하는 나름의 지향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무엇이든 시작은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 좋다. 무슨 대단한 작품을 써내겠다는 마음은 살짝 내려놓자. 매일, 꾸준히, 작은 것이라도 써보는 습관을 들여 본다. 일기를 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내가 작년 가을부터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느낀 것은 그렇다. '글쓰기'는 매일 하지 않으면 녹이 슬고 잘 돌아가지 않는 기계와 같다는 점이었다. 하루를 건너뛰고 나서 다음날 글을 쓸 때는 어떻게 글머리를 열어야 할지 뭔가 영 어색한 느낌이 든다. 


  작년 가을쯤에 EBS 'Class e'에서 작가 장강명의 글쓰기 강의를 들었다. 정말 유용하고 좋은 강의였다. 그가 알려준 글쓰기의 조언들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조언이었다.


  '그냥 가만히, 시간이 얼마나 흘러가든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모니터(또는 종이)를 응시하세요.'


  일단 글을 쓰려고 마음먹었으면 오직 글쓰기만 생각하라는 것이 그가 찾아낸 답이었다. 나는 그렇게 글쓰기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 그리고 진심을 담은 글이라면 언젠가는 그것을 알아봐주는 독자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믿음을 갖고 오늘도 글을 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새 다큐 찍는 사람들마다 만나면 그 소리야. 찍을 게 없대. 하긴 이 좁은 나라에서 뭐 얼마나 찍을 게 있겠어. 그러니까 좀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싶은 사건 현장에 가보면 다큐 찍는 팀들이 여럿 모여있는 거야. 일본만 해도 찍을 사람이나 이야기가 많다던데. 내가 장담하건대, 다큐의 새로운 개척지는 중국이 될 거야. 두고 봐봐. 한 10년만 지나도 다큐들이 쏟아져 나올 걸. 큰 땅덩어리에,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냐구..."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다큐 수업에서 선생님이 했던 말이다. 중국의 다큐 감독 왕빙의 작품을 보면서 문득 그 말이 떠올랐다. 왕빙의 2013년작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Til Madness Do Us Part)'를 보았다. '미세스 팡(2017)'에 이어 두 번째로 보는 그의 작품이다. 이 다큐는 윈난 지역의 어느 정신 병동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말 그대로 3시간 50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미친 사람들만 나온다. 광인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그들의 하루 일상은 어떻게 채워지는지, 가족들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지, 그런 모든 것들을 가감없이 다 보여준다. 꽤나 긴 러닝타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큐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에게는 각각이 가진 사연과 특색이 있으므로 그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다. 물론 광인과 직접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을 보는 자체가 버거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다큐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비슷해 보인다. '정신 병동에 갇힌 미친 사람들은 저렇게 지내는구나', 하는 것과 '근데 저거 어떻게 찍었지?' 하는 의문이다. 나도 그랬다. 무엇보다 어떻게 촬영 허가를 받고 찍을 수 있었나 궁금해졌다. 그에 대한 답을 2014년 Jihlava IDFF(체코 이흘라바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있었던 왕빙의 마스터 클래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왕빙은 윈난 지역에서 작업하고 있었을 때 우연히 지역 정신 병원 의사를 알게 되었다. 그에게 자신이 가진 아이디어를 이야기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촬영 허가를 받았다고 했다.


  정신 병동에 대한 촬영 허가를 받은 것과는 별개로 다큐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에게는 어떻게 동의를 얻을 수 있었을까? 엔딩 크레딧에는 촬영에 동의해준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글이 나온다. 그러나 나는 그 부분이 그다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환자의 가족들에게 동의를 얻은 것은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그곳 환자들의 동의는 과연 촬영 전반에 걸친 그 모든 것에 대한 진정한 동의라고 볼 수 있는가? 병동의 환자들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그들은 모두 이성적인 사고나 판단이 가능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카메라를 들이대었을 때 별다른 거부 의사가 없으면 동의한 것인가? 아무리 미친 사람들이라고 해도 인권이란 게 있다. 대부분은 그곳에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더러는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이들이라고 해도 저렇게 찍어도 되는 건가? 도대체 나는 왕빙이 엔딩 크레딧에서 언급한 환자들의 '동의'가 어떤 것인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그것이 이루어진 모든 과정에서 과연 그가 다큐 제작자로의 윤리를 얼마나 지켰는지도 모르겠다.


  왕빙의 2017년작 '미세스 팡'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제 의식을 느꼈다. 임종 직전의 치매 노인을 찍으면서 가족들의 촬영 동의는 구했지만, 정작 치매 노인 당사자에게서 동의를 구했다는 증거는 다큐 전체를 통털어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왕빙이 자신이 찍고 싶은 이야기와 사람에 대해 아주 집요한 의지와 끈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런 대단한 열정과는 별개로 왕빙은 자신의 촬영 대상이 되는 이들에 대한 윤리적 관점과 지침이 매우 흐릿하다.


  과연 'Til Madness Do Us Part' 같은 다큐를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찍는 것이 가능한가? 아마도 촬영 허가부터도 쉽지 않을 것이며, 환자들은 물론 그 가족과 관련해서 동의를 받는 것도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왕빙에게는 그 모든 것이 가능했고, 그 결과로 관객들은 광인들이 사는 세상을 '관람'할 수 있는 초대권을 받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마워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이것을 끝까지 보았던 것은 왕빙의 다큐 제작자로서의 윤리적 태도에 대한 의문을 푸는 열쇠가 엔딩 크레딧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였다.


  왕빙의 카메라 앞에서 대부분의 환자들은 별다른 거부감을 보이지 않거나, 때론 흥미롭게 바라보고, 어떤 환자들은 아주 친근감있게 다가선다. 그러나 어떤 환자는 취침 시간인데도 불 켜진 방에서 촬영하는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불 좀 꺼. 그러면 그가 못볼 거 아냐'라고 말하기도 한다. 때로는 환자들이 문을 닫고 들어가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고 들어가서 찍는다. 거의 대부분의 장면은 핸드 헬드로 찍어서 흔들리며, 그렇게 매우 정신사나운 쇼트들은 어쩌면 미친 이들을 담아내는 방법이 그것 뿐이라고 강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왕빙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관심을 가진 피사체를 도구적으로 담는 것이며, 거기에 그 어떤 조화나 균형 감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은 그 거칠고 조악한 화면들이 왕빙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 거기에 미학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을까?


  왕빙은 2014년 Jihlava IDFF 마스터 클래스에서 이 다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 병동의 환자들이 갇혀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자신은 그들이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곳에 있는 이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특별한 자유, 그러니까 병동에서 그 어떤 것이라도 다 할 수 있는 자유, 예를 들어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 법은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가 이 다큐에서 관객이 느끼기를 바라는 지점은 정신 병동의 환자들이 누리는 한계를 넘어선 어떤 자유에 대한 감각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다큐에서 온갖 종류의 광기의 나열과 아무 희망도 없는 무기력의 극치를 보았다.


  병동의 환자들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창살 밖을 바라보거나 복도를 배회한다. 왕빙이 말한 어떤 '자유'의 형태가 있다면 유령처럼 끊임없이 배회하고 출몰할 자유일 것이다. 단, 창살로 폐쇄된 방안과 복도에 한해서. 이 다큐를 본 관객들은 자신이 목격한 그 다양한 광기와 그 비인간적인 공간에 대한 고통스러운 성찰을 하게될 뿐이다. 왕빙이 보았던 미친 자들의 특별한 자유에 대한 것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대다수의 관객들은 자신들이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할 것이다. 더 나아가 광인들을 가두고 격리하는 그 어떤 방식이라도 찬성하는 편에 서 있게 될지도 모른다.


  왕빙의 카메라는 직설적이고 거침이 없지만, 거기에는 피사체에 대한 그 어떤 인간적 배려나 윤리적인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 다큐를 제작하는 이들은 무엇보다 촬영 대상자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적 의무와 관점을 갖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 찍고 싶은 것을 찍을 자유가 그 윤리적 의무 보다 앞선다면, 그리고 그렇게 찍은 다큐가 아무리 좋은 결과물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 다큐는 본질적으로 심하게 어그러진 것이나 다름없다. 이 다큐의 중국어 제목은 '瘋愛', 그 뜻은 '미친 사랑'이다. 카메라에 대한 미쳐버린 사랑으로 정말로 지켜야할 다큐멘터리 제작자로서의 중요한 윤리적 자세와 관점은 놓쳐버린 것이 아닌지, 왕빙의 이 다큐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사진 출처: listal.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최근의 다큐멘터리 제작의 세계적 경향을 다룬 뉴스를 읽었다. 예전에 제작되는 다큐들이 대부분 독립 제작사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었다면 요새는 차별되는 지점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다큐 제작자들과 감독들도 적극적으로 흥행 수익을 생각하면서 아주 감각적이고 흥미있는 주제를 다룬다는 것. 거기에는 N사로 대표되는 스트리밍 서비스 회사의 역할이 컸다는 분석이었다. 아예 N사가 제작비를 대고 자체 제작하는 다큐들도 많다. 독립 다큐 제작사들도 그 회사와의 계약을 염두에 두고 주제 선정과 관객들의 취향에 맞춘 다큐를 제작하는 것이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잡았다고도 했다. 


  2014년에 나다브 쉬르만이 만든 다큐 'The Green Prince'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다큐를 극장에서 상영한다면 과연 관객은 얼마만큼 들 것이며, 흥행 수익은 얼마나 낼 수 있을까? 또는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와 배급 계약을 맺는다면, 시청자 수는 얼마나 될까?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 다큐에 나오는 주요 인물은 두 사람이며, 재연 화면은 대개가 흐리고 뿌연 감시 카메라 화면과 별다른 색감도 들어가지 않는다. 여기에서 매력적인 요소는 바로 '이야기'에 있다. 정말로 손에 땀을 쥐게 할만큼 흥미진진하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두 사람의 인터뷰 화면으로만 엮어 나간다. 이런 다큐를 요새처럼 빠르고 감각적인 영상과 이야기 전개에 익숙한 시청자들을 견뎌낼 수 있을까? 아마 나다브 쉬르만이 이 다큐를 지금 다시 만든다고 한다면 이전의 방식으로는 제작비를 건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다큐 제작에 있어서도 이제 '수익'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최근 2, 3년간 제작된 해외 다큐들을 보면 확실히 관객의 눈길을 끌만한 소재(때론 커다란 논란까지 불러일으키는)와 직관적인 촬영으로 승부를 본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제는 다큐도 잘 만들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다큐 제작자와 감독이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자본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이 시대의 다큐가 과연 좋기만 한 것인지 약간은 회의적이 되기도 한다.


  서론이 길었다. 'The Green Prince'는 관객을 극심한 분쟁 지역 한가운데로 안내한다. 팔레스타인의 무장 정치 단체 '하마스(Hamas)', 그 조직의 창립 멤버 셰이크 하산 유세프의 아들 모사브가 주인공이다. 모사브는 17살 때 총기 소지 혐의로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체포되었다. 공포스러웠던 수감 기간 동안 첩보 책임자 고넨은 그를 이스라엘 편에 서서 일하는 스파이가 되도록 회유했다. 그렇게 10년 동안 모사브는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해 하마스 내부의 기밀을 이스라엘 측에 넘긴다. 그런 모사브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하마스가 저지르는 자살 폭탄 테러를 비롯해 여러 무장 투쟁에 심한 반감을 가졌다. 자신의 행동이 더 큰 인명피해를 막고, 더 나아가 자신의 아버지의 목숨을 위협받지 않게 하는 안전핀으로 작동할 거라 믿기도 했다.


  모사브가 건넨 첩보를 바탕으로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내부 동향을 훤히 꿰뚫게 된다. 그러는 동안 모사브에게 여러 번의 위기가 닥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책임자 고넨은 모사브와의 인간적 유대를 쌓아가며 그를 다독인다. 그러나 그런 고넨이 그때문에 상부의 문책을 받게 되고, 책임자가 바뀌면서 모사브의 위치는 흔들린다. 결국 가족들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나서 망명신청을 하게 된 모사브. 과연 미국에서 그는 정착할 수 있을까...


  'The Green Prince'는 매우 흥미있는 첩보 스릴러물의 얼개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 모사브와 고넨의 인터뷰, 별로 성의있게 만든 것 같지도 않는 재연 화면이 전부인 이 다큐를 지탱하는 것은 온전히 '이야기'다. 무장 정치 투쟁 세력을 이끄는 핵심 인물의 아들이 적국의 스파이 노릇을 10년 동안 하다니... 생각만으로도 손에 땀이 나지 않은가? 아주 단촐한 영화적 구성도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는다. 관객들은 저 이야기 다음에는 어떤 일이 펼쳐질까를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보다 보면 그렇다. 이렇게 얼굴 내놓고 다큐까지 만들어도 주인공 모사브의 신상은 괜찮을 걸까? 모사브는 미국이 그의 망명 신청을 거부하고 팔레스타인으로 송환하려고 하자,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냈다. 가족으로부터는 절연당했고, 팔레스타인에서는 배신자로 찍혔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미국의 입장은 변화가 없었다. 그러자 고넨이 전면에 등장한다. 그는 'Green Prince' 모사브를 위해 미국 당국에 호소한다. 바로 이 다큐의 제목은 이스라엘 첩보기관에서 모사브를 부르는 별칭이었다.


  이 다큐는 모사브가 쓴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무척 흥미있게 보기는 했지만, 감독 나다브 쉬르만이 다큐 제작자로서 윤리적인 책임감을 더 무겁게 느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어쩌면 이 다큐로 인해 모사브의 목숨이 더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 모사브 본인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촬영에 협조한 것이라도 해도 그렇다. 그는 아직도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닌다는 뉴스를 읽었다.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현실로 이어지지는 못한 모양이다. 저런 극적인 삶을 사는 인물의 이야기가 눈길을 끄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다큐는 뭔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첨예한 정치적 문제와 함께 인물의 신상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단지 책의 내용을 다큐로 만들었을 뿐, 무언가 새로운 다큐적 성취라던가 대단한 성찰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내가 새삼스럽게 다시 확인한 것은 '이야기'가 가진 매혹적인 힘이었다. 정말로 괜찮은 이야기는 포장이 허술하기 짝이 없어도 관객을 휘어잡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뿐이다. 다큐 그 자체로는 실망스럽고, 그다지 주목할만한 무언가가 없다. 하나 꼽으라면, 현대 음악 작곡가 막스 리히터가 담당한 음악이다. 관객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시종일관 낮게 깔리면서 불안과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이 놀랍다.    



*사진 출처: hollywoodreporter.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래전 케이블에서는 NHK 위성방송이 나왔었는데, 거기서는 매일 저녁 8시인가 9시쯤에 영화를 틀어주었다. 세계 유명 영화들, 때로는 일본 영화들이 나왔다. 쉽게 접하기 힘든 영화들도 있었는데 문제는 오직 일본어 자막만 나온다는 점이었다. 어느 날은 린제이 앤더슨의 'If....(1968)'를 보았다. 영어라고 해도 영국식 억양의 영어는 내게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처럼 들렸다. 아무튼 대충 일본어 자막으로 꿰맞추어 가며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그 엄청난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다. 그 장면을 보고 나서야 나는 영화의 모든 것이 마치 벼락치듯 다가오는 느낌과 마주했다. 영화에서 언어란 그렇게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티베트어 이름으로는 페마 체덴(Pema Tseden), 중국어 이름으로는 완마 차이단(Wanma Tsaidan)이라는 두 가지 이름을 가진 감독이 있다. 1969년생인 이 티베트 출신의 감독은 '최초'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것이 여러가지다. 티베트어로 된 영화를 최초로 촬영한 감독, 티베트인으로는 최초로 북경 전영학원을 졸업한 사람. 그 페마 체덴 감독의 2011년작 '老狗(Old Dog)'을 보았다. 이 영화는 유일한 자막이 있기는 한데, 중국어 자막이다. 어쩔 수 없다. 그냥 본다. 그나마 대사가 별로 없어서 다행이다. 아는 한자(字)들이 나오면 대충 헤아려서 본 다음에, 줄거리도 검색해 본다.


  티베트의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 양을 치는 늙은이가 아들 내외와 살고 있다. '곤포'라는 이름의 아들은 별 다른 할 일도 없이 빈둥거리며 지낸다. 어느날 그는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집에서 기르는 양몰이 개를 중국인 개장수에게 팔아 넘긴다. 노인은 13년 동안 가족같이 지내온 개를 팔아넘긴 아들 녀석이 괘씸하기 짝이 없다. 돈을 주고 개를 다시 찾아오려 하지만, 개장수는 돌려주지 못하겠다며 완강히 버틴다. 하는 수 없이 공안(우리나라의 경찰에 해당)인 사위를 앞세워 겨우 돌려 받는다. 다른 개장수가 노인에게 개를 팔아 넘길 것을 권유하지만 노인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던 와중에 개를 훔치려는 도둑이 들기도 한다. 노인은 개를 산에다 풀어주지만, 개는 그 중국인 개장수에게 다시 붙잡힌 신세가 된다. 그걸 알게된 아들은 개장수와 시비가 붙어 유치장에 갇힌다. 노인은 다시 찾은 개를 평온히 키울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아주 단순한 서사와 롱테이크를 주로 하는 간명한 촬영 방식을 취하고 있다. 내가 느낀 것은 그렇다. 롱테이크는 이제 정말 한물 갔다는 것. 진짜 촌스럽다. 그렇다고 감독 페마 체덴이 영화를 어설프게 배워서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아마도 그는 당시 티베트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에 그런 영화적 방식이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영상 언어는 낡은 것이며, 그야말로 후졌다. 아마도 서구의 비평가들에게는 지금 시대와는 맞지 않는 그런 모습들이 자신들의 과거 영화를 연상케하는 향수를 가져다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면에서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느리게 흘러가는 인물들의 시간, 고요한 평원의 풍경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대 문명과 대비되는 지점이 있기도 하다.


  그렇게 영화 형식적인 측면에서 'Old Dog'은 별로 참신하다거나 칭찬받을만한 요소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를 끝내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페마 체덴이 엮어나가는 서사에는 티베트의 현실에 대한 여러 은유들이 다양하게 내포되어 있다. 영화에서 노인은 개장수들로부터 늙은 개를 팔아넘기라는 요구를 끈질기게 받는다. 티베트 양몰이 개는 중국인들에게 인기있는 애완견이 되어서 꽤나 큰 돈벌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노인의 아들 곤포는 덜덜거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읍내를 누비는데, 비포장 흙길은 양과 염소, 트럭과 자동차, 오토바이가 서로 엉켜서 다닌다. 곳곳에는 신축 중인 건물들이 보인다. 건축 자재를 싣고 달리는 덤프트럭은 티벳에 불고 있는 개발의 바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흙바람 부는 공간을 채우는 것은 어디선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불경 소리다. 가난하지만 영적이고 소박한 삶을 살았던 티베트인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다.


  페마 체덴은 자신의 고향에 닥친 거대한 흐름을 비관적으로 응시한다. 노인은 아들 내외가 결혼한지 3년이 되었는데도 아이가 없자 걱정을 한다. 그래서 아들에게 며느리와 함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게 한다. 게으르고 나태한 삶을 사는 아들, 그 아들이 하루종일 보는 TV에서는 중국 방송이 나온다. 술만 마시면 주정도 심하게 한다. 꿈도 희망도 없는 삶. 노인은 아들로부터 며느리가 불임이 아니라는 희소식을 듣지만, 이 가족이 이어갈 세대의 모습은 불투명하게 보인다. 'Old Dog'이 조심스럽게 펼쳐서 보여주는 티베트의 미래는 그런 것이다.


  티베트에서 급속도로 진행된 개발과 중국 중앙 정부의 영향력을 내가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EBS의 '세계 테마 기행'과 같은 프로와 여러 여행 다큐들에서였다. 티베트인들의 삶의 방식은 이전에 비해 많이 현대화되었고, 그것은 그들의 집과 옷차림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그들은 일상에서 티베트어가 아닌 중국어를 쓰고 있었다. 언젠가 티베트에서 탱화를 제작하는 장인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그리는 탱화를 중국인들이 얼마나 비싼 가격에 사가는가를 설명하면서 대단한 자부심을 보였다. 어쩌면 티베트인들은 과거에 그들이 제일로 추구했던 영적 가치를 물질과 맞바꾸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불모(不毛)의 미래. 노인은 집요하고 끈질긴 개장수와 개도둑이 앞으로도 자신의 근심거리로 남아있을 것임을 잘 안다. 그에게 삶 그 자체나 다름없는 양떼와 그것을 지키는 소중한 늙은 개는 더이상 평화롭게 살 수 없다. 마침내 그는 개의 목숨을 끊기로 결심한다. 이 영화의 보잘 것 없는 서사, 진부하기 짝이 없는 롱테이크, 배우들의 어설픈 연기는 그 마지막 장면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페마 체덴은 자신이 태어난 곳과 그곳 사람들이 처한 순탄치 않은 미래를 그렇게 짧지만, 통렬한 영화적 수사로 보여준다.



*사진 출처: filmex.jp


 

*내일은 글 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