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으로 떠나는 명상 여행'. 오늘 본 KBS '동물의 왕국'의 제목은 그러했다. 바다 속에서 부유하는 해파리떼, 새끼와 함께 깊은 바다를 여행하는 혹등고래, 시시각각 변하는 사막의 모래... 뭐 이런 자연 세계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명상을 하듯 편안히 호흡하고, 마음을 편히 갖자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좀 특이한 구성이기는 하다. 오늘 본 내용에서는 사자나 하이에나, 상어나 독수리 같은 동물은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 명상하는 마음으로 보다가 그런 포식자들 나오면 시청자는 기겁할 것이다. 평화롭고 아름답지만 재미는 없다. 비로소 새삼 깨닫는다. 이런 자연 다큐에도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Ken Burns가 2001년에 만든 PBS TV 다큐 시리즈 'Jazz'는 모두 1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1917년부터 2001년에 이르는 재즈의 역사를 아우른다. 내가 이번에 본 것은 3편 'Our Language(1924-1928)'과 4편 'The True Welcome(1929–1935)'이다. 그 두 편을 보면서 느낀 것은 그렇다. 무엇보다 감독 Ken Burns가 얼마나 재즈를 마음 깊이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냥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잘 전달하기 위해 서사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애썼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음악 다큐에 아무리 좋은 음악이 내내 흐른다고 해도, 거기에 매혹적인 이야기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Ken Burns가 생각한 방식은 재즈 뮤지션들의 인생 이야기를 옷감을 짜듯 씨실과 날실로 엮어가는 것이다.


  "야, 너 그따위로 연주할래? 한 번만 더 그런 거지 같은 연주하면 패버린다."


  이렇게 험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은 누굴까? 1920년대와 30년대에 활동했던 블루스의 여왕 베시 스미스(Bessie Smith)다. 타고난 재능으로 9살때부터 길거리 공연을 했던 베시 스미스는 처음엔 가스펠 공연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 블루스로 전향했는데, 베시는 술 문제와 더러운 성격으로 유명했다. 반주를 맡은 연주자가 시원찮은 연주를 하면 걸걸한 입담을 보여주었다.


  3편은 재즈가 어떻게 흑인들의 영혼과 정서를 대변하는 음악이 되어갔는지 그 기원을 살펴본다. 'Our Language'는 재즈 음악에 깃들인 흑인들의 정체성을 가리킨다. 그 중심에는 가장 중요한 두 명의 뮤지션이 있었다.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과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이 그들이다. 그 두 명이 흑인으로서 재즈 초창기의 독창성을 확립해 나갔다면, 또 다른 한 편에는 백인 재즈 뮤지션들이 있었다. 베니 굿맨(Benny Goodman)과 빅스(Leon Bismark, 일명 Bix)는 자신들만의 재즈 언어로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재즈 연주자들의 어린 시절은 대개가 불우했다. 베니 굿맨은 뛰어난 재능으로 어려서부터 연주활동을 했는데, 그는 부모를 대신해 가장 역할까지 감당해야했다. 'Am I Bule?'로 유명했던 에델 워터스(Ethel Waters)는 사창가에서 태어나서 강한 성격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밑바닥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고, 그 정서는 재즈라는 음악의 태생과도 맞닿아 있었다. 가난하고 주변부의 인생을 사는 흑인들에게 재즈는 삶이고 호흡이었다. 그러나 재즈는 흑인들만의 음악에서 벗어나 경계를 넓혀가기 시작한다. 4편 'The True Welcome'은 재즈가 대중적 인기를 얻어가는 데에 기여한 루이 암스트롱과 듀크 엘링턴의 삶과 음악을 비중있게 다룬다.  


  즉흥 연주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만능 연주자 루이 암스트롱, 재즈에 '우아함'과 '긍지'를 불어넣은 듀크 엘링턴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재즈의 거목들이었다. 우선 그들은 대공황의 힘겨운 파고를 넘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인종차별이었다. 백인들만 출입할 수 있는 클럽에서 백인들을 위해 연주할 때가 많았으며, 대규모 공연이나 연주는 하기 어려웠다. 그들을 반겼던 것은 유럽이었다. 유럽 순회 공연을 통해 루이 암스트롱과 듀크 엘링턴은 독보적 명성을 얻는다. 


  'White Only'라는 글씨가 곳곳에 선명하게 있었던 시대. 흑인 재즈 뮤지션들이 이런 저런 활동의 제약을 받았던 반면에, 백인 재즈 밴드를 이끌었던 베니 굿맨은 많은 환영을 받았다. 특히 전국으로 생중계되었던 CBS의 라디오 프로그램 'Let's Dance'로 그의 명성은 커져갔다. 베니 굿맨은 재즈의 새로운 기원 '스윙'을 만들어 낸다. 그런 걸출한 재즈 뮤지션들이 있었던 시대가 바로 1930년대였다. 

 

  켄 번즈는 재즈의 역사가 바로 뛰어난 재즈 뮤지션들의 이야기임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들 각각의 인생 이야기는 재즈에 다양한 색채를 입힌다.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공기가 재즈의 언어를 만들어냈다는 점도 분명하게 드러낸다. 인종차별, 대공황과 금주법, 마피아가 활개를 치던 시대를 관통해야했던 재즈 뮤지션들의 역경과 비애가 바로 그것이다. 그 시절, 루이 암스트롱은 마피아 매니저 때문에 혹사당해서 입술이 찢어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기까지 했다. 


  지나친 음주 문제로 28살에 요절한 백인 코넷티스트 겸 작곡가 빅스(Bix), 현란한 기교로 '4손의 사나이'로 불리웠던 피아니스트 아트 테이텀(Art Tatum)도 그 시절의 재즈 뮤지션들이었다. 그런 다채로운 뮤지션들의 음악으로 꾹꾹 눌러담은 이 놀라운 재즈 다큐는 결코 자막 같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재즈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 다큐 시리즈를 며칠에 몰아서 볼 것이 아니라, 진짜 아껴두었다가 하나씩 보는 것을 추천한다.


  3편과 4편은 재즈라는 음악이 어떻게 그 시대 사람들과 더불어 호흡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제 바야흐로 스윙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흑인들만의 음악에서 벗어나 인종적 경계를 허물며 미국의 음악, 그 영혼의 중심에 다가서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켄 번즈는 다양한 스틸 사진과 영상 자료, 여러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 길고 놀라운 여정을 흥미있게 이끌어 나간다. 이 다큐를 보는 이들은 그가 진정한 '재즈 이야기꾼'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사진 출처: pb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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