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가끔 드는 생각이 있다. 학교 다닐 때 과제로 중간 기말 보고서 쓰듯이 매일 보고서 한 편씩 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매우 건조한 문체로 꽤나 긴 글을 써내려가고 있는데, 이런 글을 찾아서 읽는 독자들은 어떤 이들일까, 때론 궁금해지기도 한다. 오늘 쓰는 글은 희곡 수업 기말 과제 같은 글이 될지도 모른다. 스위스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희곡을 독일의 SWF 방송국에서 TV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흑백 화면 속에 담긴 '노부인의 방문(Der Besuch der alten Dame, 1959)'은 원작에 충실한 무대 장치와 고전적 연출이 돋보인다. 이 작품은 뒤렌마트에게 극작가로서의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그의 대표작이다.


  원래 보려고 했던 영화는 지브럴 좁 맘베티 감독의 'Hyenas(1992)'였다. 그런데 영화 자료를 구할 수가 없었다. 이 영화의 원작이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이어서, 그럼 연극 공연으로 된 것을 한 번 보는 건 어떨까 싶었다. 희곡 수업도 내가 무척 좋아하는 수업이었다. 희곡 창작과 비평 수업을 열심히 들었었다. 오래 전 그 수업 시간들에 뒤렌마트는 만난 적이 없다. 성균관 대학교 출판부에서 내놓은 그의 희곡 '혜성'을 읽은 기억은 난다. 우선 '노부인의 방문' 희곡 대본을 읽어 본다. TV 영화에는 독일어 자막만 있어서 대본을 머릿속에 들여놓고 볼 수 밖에 없다.


  쇠락한 도시 귈렌의 역 앞은 부산스럽기만 하다. 이 도시 출신의 백만장자 클레르 차하나시안 여사가 이제 막 도착할 예정이다. 궁핍한 귈렌의 사람들은 부자의 투자를 받아서 도시를 재건할 꿈에 부풀어 있다. 그들 앞에 마침내 등장한 노부인은 엄청난 돈으로 가득한 장밋빛 미래를 약속한다. 단, 조건이 하나 있다. 자신이 가져온 관에 들어갈 사람 하나의 목숨이 필요하다는 것. 바로 노부인의 17살 때 연인이었던 알프레도이다. 노부인의 끔찍한 제안에 시장은 인간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며 즉각 거부의 뜻을 밝힌다.


  "그렇다면 기다려야 겠군요."


  그렇게 클레르가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은 차츰 변해간다. 식료품점을 하고 있는 알프레도의 가게에 찾아와 비싼 물건을 마구 가져가면서 외상 장부에 달아놓는다. 언젠가 노부인에게서 받을 돈을 생각하며 도시의 사람들은 분에 넘치는 소비를 하게 된다. 알프레도는 자신을 향한 무언의 압박이 커지고 있음을 느낀다. 시장과 경찰, 목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그들은 모두 거절한다. 궁리 끝에 도시를 떠나려 하자 사람들은 그를 막는다. 과연 그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뒤렌마트의 작가 경력의 시작은 추리 소설이었다. 생계를 위해서 쓴 추리 소설이었지만, 그 작품들은 꽤나 인기를 끌었다. 그가 추리 소설에서 보여준 법과 정의, 죄와 심판에 대한 관점은 독특해서 그에 대한 법학 쪽 논문들도 많다. 희곡 '노부인의 방문'도 뒤렌마트의 추리 소설과 같은 주제를 다룬다. 과연 법은 정의를 실현하는가? 공정한 심판이 법 제도로 가능하지 않다면, 다른 방식을 택하는 것은 어떠한가? '노부인의 방문'은 이런 질문들을 차례차례 쏟아놓는다. 


  왜 클레르는 알프레도의 목숨을 원하는가? 클레르가 17살 때, 사귀던 알프레도의 아이를 가졌지만 그는 부유한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클레르를 버린다.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했던 클레르는 패소한다. 알프레도가 증인을 매수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온갖 비난을 받으며 비참하게 귈렌을 떠나야 했던 클레르는 이제 돈으로 자신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흑백 화면 속에 재현된 귈렌은 음울하고 퇴락한 인상을 준다.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세트들은 인물들에게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중간 중간에 들어가는 음악들은 귀에 거슬리는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객들은 그 어긋난 음조들에 깃들인 불안과 공포가 서서히 커져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알프레도의 죽음이 예정되어 있으며, 귈렌의 사람들은 노부인이 요구한 정의를 실현하고 돈을 받을 것임을 알게 된다. 


  클레르 역을 맡은 엘리자베스 플릭켄쉴트(Elisabeth Flickenschildt)의 연기는 거울처럼 정확하다. 응축된 분노를 냉혹한 얼굴 속에 드러내는 압도적 연기는 TV화면을 가르고 나올 것만 같다. 알프레도 역의 한스 만케(Hans Mahnke)는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고 서서히 무너지는 인물의 내면을 절제된 연기로 보여준다. 이 영화의 분위기는 마치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영화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과장되거나 지나친 상징을 내세우지 않는다. 뭐랄까, 중용의 미덕을 잘 지킨 아주 표준적인 무대 연출 같은 인상을 준다. 오늘날의 화려하고 다양한 현대적 연출 방식과 비교하자면 교과서처럼 보인다. 이 연극을 영화로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노부인의 방문'은 표면적으로는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뒤렌마트의 신랄한 경고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연극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죄의 심판, 법 제도와 정의에 대한 여러 의문들을 던진다. 관객은 알프레도의 죽음이 귈렌의 모든 사람들이 모인 시민 법정에서 언도된 것임을 알고 있다. 귈렌의 사람들은 자신들은 정당하며, 그 죽음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없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들은 알프레도를 죽이고(이 장면은 여러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표현된다. 희곡 대본에도 그렇게 써있다) 모두 손수건으로 손을 닦는다.


  뒤렌마트가 바라본 인간은 탐욕에 찌들어 있으며, 법과 제도는 탐욕으로 인한 범죄를 공정하게 징계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인간이 만든 그 어떤 형식적 제도와 규범도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로 기능할 수 없다고 본다.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귈렌을 찾은 방문자 클레르 차하나시안의 정의는 돈과 타락한 시민들의 도움으로 구현된다. 노부인은 오래전 자신을 짓밟은 남자와 법 제도를 그렇게 심판한다. 



*사진 출처: prism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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