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다 오늘은 머리를 자르러 가야 한다
시장 뒷편에 있는 작은 미용실은 언제나 손님으로 복작댄다
9시, 미용실 아줌마가 문을 여는 시간이다 시장통(市場通)은
한산하다 그래도 댕기 머리 여자의 가게는 손님이 좀 있다
여자는 십몇 년째 댕기 머리 가발을 쓰고 있다 가발에는 언제나
먼지가 그득했다 하지만 가져다 놓은 채소는 정갈했고, 가격도
저렴했다 그래서 손님이 많은 것이다 전에는 좌판에서 팔더니,
이제는 번듯한 가게도 갖고 있다 여자에게는 아들이 둘 있다
아들 하나가 법대에 갔다고 자랑했다 이제 세월이 흘렀으니
그 법대를 졸업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여자의 먼지 낀 댕기 머리는
여전했지만, 찌들린 얼굴은 조금 펴졌다 조금 지나가면 반찬 가게가
나온다 그 집에서는 전도 부쳐서 파는데, 더럽게도 맛이 없다
어느 해 명절에 엄마는 더이상 제사 음식을 만들지 않겠다며,
그 가게에서 전을 샀다 그 집 전에는 맛의 영혼이라고는 1그램도
들어있지 않았다 주인 여자는 매우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
여자는 자기 아들을 데리고 재혼했는데, 새 남편의 재산을
자기 아들 앞으로 해놓으려고 애를 썼다 새 남편의 자식은
구박을 받고 산다고 들었다 사람 사는 곳에서 소문이란 연기처럼
흐르며 스며든다 드디어 미용실이 보인다 가게 문 앞에 덥수룩한
머리의 중년 남자가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다 남의 가게 앞에서
저게 뭐람, 그런데 미용실의 네온등이 돌지 않는다 가게 안에는
수건이 줄줄이 널어진 건조대가 보였다 10시에 온대요, 10시
남자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남자도 아침 일찍 머리를
자르러 와서는 미용실 문이 닫혀 있으니 짜증이 치밀었을 것이다
남자의 외투에는 허연 시멘트 가루가 묻어 있었다 몸을 쓰는 거친
일을 하는 모양이다 오늘 머리 자르는 일은 글렀네 나는 얼른
발길을 돌린다 다음번에는 아줌마가 제 시간에 나오겠지
늘 TV 조선을 틀어놓고, 야당놈들은 죄다 나쁜 놈이며, 돈 벌어서
땅과 집을 사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즐거움인 미용실 아줌마의
정갈한 커트 솜씨는 여전할 것이라 기대하면서 시장통을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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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길


수학능력시험이 끝나고 며칠 후, 강남의 어느 아파트에서
고 3학생이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도 투신
자살이었을 것이다 오래전, 청소년 자살에 대한 다큐를
만들려고 준비를 했었다 이런저런 자료를 찾다가 알아낸
중요한 사실은 청소년들이 죽음을 결심할 때 아주 확실한
방법을 택한다는 것이었다 청소년 자살에서 투신자살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어느 과학고등학교에서
여고생이 투신자살했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나는
그 죽음의 이유를 캐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했다
좋은 다큐를 만들겠다는 내 결심은 공수표(空手票)가 되어
멀리멀리 날아갔다 아주 가끔, 나는 그 여고생이 왜 죽었을까,
생각하곤 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살아있는 사람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많은 죽음이 어스름 저녁놀처럼 금세 잊혀진다
죽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있다고 누군가 말해준다면, 그들은
다른 길을 향해서 걸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부서지고
잃어버리고 병들고 시간에 뒤틀린 다리를 질질 끌면서 묻는다
살아있어서 행복한가? 다른 길이 낫다고 말할 자신이 있는가?
어차피 죽음은 뚜벅뚜벅 다가온다 죽음을 향해 더 빨리 달려가지
않겠다고 자그맣게 되뇌면서, 오늘도 옥상에서 바람의 방향을
가만히 가늠하는 너에게 다른 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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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락할미새


과일칼을 씻다가 엄지손가락을 쓱, 베었다
칼이 들어오는 느낌은 너와의 이별과도 같다 이 칼은
주름이 진 칼이라 손가락 안쪽에 주름의 상처를
만들었을 것이다 피가 점점이 배어 나온다
왜 다쳤을까? 딴 데 정신이 팔려서 그랬을 것이다
널 생각했기 때문이다 엊그제 꿈에 알락할미새가 보였다
날개를 접었다 폈다 느리게 빠르게 기울이며 새는
쓰레기통 위에 잠시 앉았다 그러다가 날아가 버렸다
나는 알락할미새의 소리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 새는
곁을 쉽게 주는 새가 아니었다 네가 나에게 준 손톱 같은
곁을 생각했다 손톱이 부러졌고 너는 날아갔다 나는
쓰레기통 앞에서 붉어진 눈으로 오래도록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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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點)


우리는 한 점에서 만났다 봄이었다 함께 걸어갈 수 없다
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제, 너는 다시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끝이다 우리는 처음 만날 때부터
서로 그 한 점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빛나던 너의 얼굴은 노래를 잃어버렸고,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가을이다 뒤돌아 걷는다 한 점이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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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하오마(你好吗)?


엄마가 화장실의 전등불을 깜빡하고서는 끄지 않으셨다
엄마, 화장실 불을 꺼주세요 엄마는 화장실 안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뭐하세요 아, 그게 말이다, 화장실 불을 끄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생각하고 있었어 엄마, 스위치는 화장실
밖에 있잖아요 그렇지, 그렇구나, 그게 생각이 나질 않았어
나도 모르게 웃었다 예전 같으면 심각한 일이겠지만 이제는
그저 웃음이 나온다 허탈한 웃음 오늘은 엄마가 저렇구나, 하고
웃는다 엄마의 뇌는 무지막지하게 기억을 지워나가고 있으므로
화장실 불 끄는 법을 잠시 잊는 것은 대단한 일도 아니다
나의 노후 대비는 근력 운동인 크런치(crunch)를 매일 60개
하는 것과 중국어 공부이다 근력 운동을 하는 이유는 나중에
요양원에 가게 되더라도 나 혼자 힘으로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이다
노년에 대한 다큐를 보는데 일본의 아흔 살 넘은 할머니가 요양원에서
매일 틈만 나면 체조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 할머니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남의 손 빌리지 않고 자기 힘으로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그렇게 체조를
한다고 했다 할머니는 아주 천천히 걷고 움직이며 맨손 체조를 했다
그 할머니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내가 중국어 공부를 하는
이유는 외국어 공부가 치매 예방에 좋기 때문이라는 과학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제 5년 되었나, 중국말을 들으면 대충 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있다 물론 독학이라 회화는 거의
초급 수준에 머물러 있다 니하오마(你好吗)? 당신, 잘 지내나요?
나는 머리가 허옇게 된 미래의 나에게 미리 그렇게 말을 걸어본다
그 안부 인사에 대답을 하게 될 나는 내 힘으로 화장실에 갈 수 있고,
치매에는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아주 소박한, 그렇지만 간절한
바람으로 오늘도 중국어 공부를 하다가 묻는다 니하오마(你好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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