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自敍傳)


재미없는 인생이야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래
진실과 거짓의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무언가를
써야 하지 솔직하게 쓰자는
마음가짐은 무익해

그런데 쓰고 싶은 이야기가
딱히 없거든 글 쓰는 사람이
뭐 팔아먹을 이야깃거리
하나쯤 있어야 하는데

쇠고기의 양지머리처럼
뭉근히 우려내어서 국을
끓일 수도 없고 참으로
인생이란 우습고도
눈물이 나 찔끔

예정된 죽음의 시간
또박또박 내게로 걸어오지
꼬깃꼬깃 구겨진 마음
잊어버리자 되뇌지만
꼭 만나야 하는 너처럼
그 순간이 오고야 말 테지

문이 열린 차의 조수석
늙고 아픈 노인은 입을
벌리고 단잠에 빠져 있어
건너편의 놀이터에는
분홍색 옷을 입은
조그만 아이가 엄마를
향해 웃으며 달려가

봄의 마지막 날
포플러 나무의
휘어지는 손짓
자서전의 가운데
페이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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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자객(刺客)


뱀눈의 남자는
암만 봐도 무서워
겁먹지 않은 것처럼
짐짓 태연한 척하지만
결국 눈을 떠버리지

하루 종일 꾸물거리는
흐린 날 하수구로
시어진 포도주 냄새가
올라와 나는 그걸 죽음의
냄새라고 생각해

이 집으로 이사 오고
그 이듬해, 윗층의
젊은 아가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아주
오래전 일이야 어떤
죽음은 기억의 둥지에
철끈을 매고 기다리지

할머니는 나쁜 꿈을 꾸면
액운을 내어 쫓는다며
새벽 마당 바닥에
날이 반듯하게 선 칼을
세게 내려치곤 했지
나에게는 잘 들지 않는
칼이 세 자루 있을 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뱀눈의
남자와 싸우는 수밖에 없겠어
사박사박 숫돌에 칼을 갈고
꿈으로 길을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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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원(怨)


하루종일 나무는
몸을 뒤틀며 앓았다
끅끅거리는 울음소리는
퍼렇게 날이 서 있다

무도(無道)한 세상의
비뚤어진 웃음
구겨진 너의 넋을
반듯하게 펼 수 없구나

원(怨)으로 채워진
커다란 바람이
작은 창문으로
미어지게 들어온다

가난하고 힘없는
작은 아이야
사뿐사뿐 가거라
가여운 눈물이
마르기 전에 얼른
바스러지는 봄의
바람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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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있는 부엌


저녁 7시 45분
어제 내린 빗물의 때
흐린 부엌 창문으로
흐르는 누추한 노을을
바라본다

노을이 붉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모르는 많은 것들이
흐트러지는 노을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다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네온사인 간판이
끔뻑거리며 생소한
눈인사를 건넨다
멀고 먼 저 간판의 가게는
무얼 하는 곳일까

나이트클럽일 리는 없다
쇠퇴하는 구도심의 한 켠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관광호텔은 이제
폭파를 앞두고 있다

경양식집 같은 게
남아 있을 리가 없지
넙데데한 노란 돈까스와
곱게 채 썰어진 양배추
그런 식당이 아니라면

병원일지도 모른다
24시간 문을 여는
정형외과는 장사가
잘된다고 들었다

밤의 혓바닥으로
삼켜지는 노을을
지켜보며 오도독
호두를 씹다가
탈각이 덜 된 껍질이
쿡, 찌르며 표독스럽게 말했다

이제 그만
창문을 닫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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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고양이


너에게로 가는 길은
멀고도 길다
지쳐버린 몸을
늦은 밤 낡은 소파가
가만히 삼킨다

새벽 2시 33분
아픈 눈이 떠진다
익숙하고 역겨운
밤의 고양이들
애타게 짝을 찾는
울음을 토해내며

나오너라 너는
어디에 있느냐
나 없이도
순전한 행복으로
웃음을 흘리는
너를 잊어야 하지만

울음소리를 삼키는
후덥지근한 초여름 밤
고양이들은 그렇게
짝을 찾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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