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상가상(雪上加霜)


올해 내가 응모한 마지막 공모전의 결과를 확인했다
떨어졌다 기분이 더럽게 나쁘다, 아니 나쁘다 못해
허무함을 느낀다 며칠 전, 꿈을 꾸었다 집에 들어가는데,
아파트 동호수가 적힌 문패가 보이질 않는다 심지어
아파트가 거의 폐가 직전의 흉한 모습이었다 집에서는
어느 이상한 여자가 무어라 지껄이며 나오고 있었다
참으로 괴이한 꿈이었다 조심해야지,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 오늘은 병원에 갈 일이 있었다 진료
다 보고 약도 짓고, 이제 버스 타고 집에 가면 되었다
그런데 버스를 17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그냥 운동 삼아서
좀 걷자, 그러고 좀 걷는데 식당의 주차장이 나왔다
마침 차가 나오던 참이었다 급하게 종종걸음을 하는데,
그냥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엎어졌다 안경이 깨지고,
얼굴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다 지나가던 어떤 아주머니가
일으켜 세워주며, 괜찮냐고 연신 물었다 얼른 치료받아야
겠어요,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빨리 버스를 타고
집에 가고 싶었다 그렇게 멍하니 10분 동안 정류장에
서있다가, 이대로 집에 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발길을
돌려서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은 의외로 한가했다
의사가 보더니 입술도 찢어졌고, 머리에 무슨 이상이 생겼는지
모른다고 CT를 찍자고 한다 CT를 찍었다 그런데 아무도
상처를 소독해주거나 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 구강외과 의사가
내려와서 봐야 한단다 1시간을 기다렸다 레지던트가 와서
흔들리는 이를 그냥 놔두면 치아가 빠질 수 있다고 한다
치과로 올라가서 철사로 이를 동여맸다 찢어진 입술도
꼬맸다 휘어진 안경테를 바로잡아서 겨우 얼굴에 걸쳤다
화장실에 들러서 얼굴을 본다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1925), 영화 속 총알에 안경이 부서진 아줌마
설상가상(雪上加霜), 참으로 더러운 꿈땜이다 치아는
겨우 붙여놓기는 했는데, 1달 후에나 이게 멀쩡한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왜 이렇게 기분 나쁜 꿈은
잘 꾸는지, 또 그런 건 왜 그렇게 기가 막히게 잘 맞는지
생각해 본다 문패도 없는 폐가 같은 집, 꿈에서 본 그 집이
꼭 지금의 내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얼굴은 마구 얻어터진
복싱 선수처럼 부어올랐다 이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그래도 다행이야,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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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님이 알려주신대


재수생 시절의 일이다 학원 선생 가운데 전직이
박수무당이었던 선생이 있었다 신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던 선생은 갑자기 신내림이 와서 무당이
되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당 노릇을
그리 오래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결국 본업인
학원 선생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학원생들에게
무당에게 점 볼 때 속아넘어가지 않는 법에 대해
간결하게 알려주었다 무당이 잘 맞추나 보려면
아주 최소한의 정보만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선생은 대개의 무당이 앞일에 대해서는 열 가지
가운데 한두 가지만을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것조차도 신령님에게 기도를 많이 해야 겨우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우리나라에서
제일 영험한 산은 계룡산, 이라고 엄숙하게 말했다
가끔 그 이야기가 생각나곤 했다 정말 무당이 앞날을
맞추기는 맞추나? 예전에 수원의 점집 골목을 찍은
TV 다큐를 본 적이 있다 거기에 나오는 늙은 무당의
일화가 재미있었다 그 무당은 하루 일과가 끝나면
다방에서 커피를 시켜다 먹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리고 다방 마담에게 그날의 자기 수입을 은행에다
입금하는 일을 맡겼다 그렇게 마담을 믿고 통장을
맡겼는데, 그 마담이 나중에 통장을 털어서 도망가 버렸다
할머니 무당은 다방 커피를 마시면서 자신이 사기당한
일을 담담히 말했다 그러고는 커피 배달을 온 새로운
마담에게 통장을 내어주며 입금을 하라고 시켰다
이분은 믿으세요? 다큐를 찍던 PD가 무당에게 물었다
응, 얘는 나한테 사기 칠 애는 아냐, 그렇게 말하면서
무당은 호호호, 웃었다 신령님도 모든 걸 다 알려주는 건
아니군, 나는 점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그 늙은 무당의 느슨한 웃음 소리를 떠올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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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금치나물


인터넷으로 시금치 1kg을 샀다 주문한지 하루만에
박스에 담긴 싱싱한 시금치가 배송되었다 시금치가
깨끗해서 뿌리만 조금씩 다듬었다 커다란 스텐 냄비에
소금을 조금 넣고 물을 끓인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다듬어 놓은 시금치를 넣는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오래 삶으면 물크러진다 시간을 재보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손으로 시금치 잎을 만져보며 감을 잡는다
됐어, 이 정도면, 재빨리 시금치를 건져낸다
그릇에 받아놓은 찬물에 얼른 시금치를 넣는다
다시 또 한 무더기의 시금치를 냄비에 넣고는,
데친 시금치를 헹구어 낸다 그 사이에 시금치가
얼마쯤 물러지는지 살펴본다 냄비에서 시금치를
건져낸다 깨끗이 바락바락 주물러 헹구어 낸다
잎 사이에 모래나 흙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씻은 시금치를 있는 힘을 주어 물기를 꽉 짜낸다
대략 밥그릇 정도 크기의 덩어리 3개가 나온다
시금치를 무칠 양념을 준비한다 참기름병을 꺼낸다
나물은 참기름 맛으로 먹는 거지 참기름을 들이붓는다
진간장을 조금 넣는다 간은 소금으로 해야 깔끔하다
매실 엑기스를 조금 넣는다 간이 맞는가 본다 조금
싱겁다 집간장을 아주 조금 넣는다 대충 괜찮다
그런데 볶은 깨가 없구나 깨를 볶았어야 했는데,
그걸 볶으려면 깨를 씻어서 물기를 빼고, 두꺼운
팬에다가 볶아야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깨 좀 없으면 어때, 밀폐 용기를 꺼낸다 시금치나물을
두 개의 그릇에 나누어 담는다 무치지 않은 한 덩어리는
김치냉장고에 넣는다 이런저런 그릇 설거지가 기다린다
시금치를 나물로 먹으려면 이 번잡스러움을 감수해야 한다
나물이란 얼마나 비효율적이며 노동집약적인 음식인가
나는 한식의 미래가 암울하다고 생각했다 갈수록
사람들은 반찬 만드는 데에 시간을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 온갖 종류의 즉석 국과 반찬이 쏟아져 나오지만
나물은 어떻게 대체할 수가 없다 이것은 아주 순전한
노동의 결정체이다 나는 식탁에 앉아서 방금 무친
시금치나물을 밥도 없이 몇 젓가락이고 먹었다
달큰한 맛이 나는 시금치나물,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나는 맛, 하지만 이걸 또 해 먹으려면 결심을 해야하는
귀찮고도 번거로운 맛, 그냥 안 해 먹고 말지 하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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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비가 온다


12월이다 지난 1년 동안 내가 써왔던 글을 떠올려
본다 시를 쓴다고 골머리를 썩여가며 열심히 쓰기는
썼다 여기저기 공모전에도 보내봤다 죄다 떨어졌다
나는 아주 늙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아니다 그냥 늙은
것이다 나중에는 내가 쓴 것이 시인지 산문인지 알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런데 시란 무엇인가, 그것을 분명히 말해줄
사람이 있기는 있는가? 나는 산문시를 너무나도 싫어했는데
나중에는 시를 줄이고 압축해서 쓰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래서 그냥 시가 아닌 산문을 시처럼 쓰게 되었다 솔직히
이건 시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래, 나는 시의 새로운 형식을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trailblazer, 얼마나 멋진 말인가?
따끔, 저녁 설거지를 하는데 귀가 신호를 보내온다 내일은
반드시 비가 올 것이다. 오래전에 크게 아픈 뒤로 내 귀는
궂은 날을 예보하는 초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초능력이라기
보다는 손상된 신경이 보내오는 서글픈 신호인 것이다
내일은 비가 와, 아니, 겨울이니까 눈이 올 수도 있겠군
몇 달 전에 유통기한이 임박한 다즐링 차를 사두었는데,
뜯지도 않고 그냥 놔두었다 이제 유통기한이 9개월이나
지나버린 다즐링 차를 뜯는다 뜨거운 찻물을 붓고 차가
우러나길 기다린다 아, 이 홍차는 향도 별로고 맛도 없다
제값을 주고 샀다면 참 비싼 차였을 텐데, 그 돈을 주고
샀으면 이 차의 맛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유통기한 따위는
차의 맛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어떤 보이차는 오래 묵을수록 
그 가치가 올라간다고 들었다 결국은 차의 맛이란 돈의 맛이다
좋은 글은 시간의 맛이며 세월의 맛이다 오래도록 우라지게
고생하고 깨지고 부서진 다음에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쓰는
글이야말로 좋은 글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그런
글을 읽어줄 독자를 만나는 건 또 다른 문제겠지 아무튼
내일은 비가 온다, 올 것이다, 눈이 올지도 모르는 내일,
작가도 뭣도 아니면서 또 이렇게 글을 쓰고 있을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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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 때리기


내가 자주 들리는 커뮤니티 사이트에 누군가
오랫동안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다는 글을 썼다
글을 쓴 이는 너무 슬퍼서 크게 울었다고 했다
이어진 댓글에는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의 위로가
이어졌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토끼를 키운 이야기를
했다 애완 토끼, 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 사람은
어쩌다 토끼를 키우게 되었는데 집에서 방 하나를
토끼 방으로 하고 애지중지 키웠다고 했다 아, 토끼도
그렇게 키울 수 있구나, 신기해하면서 댓글을 읽었다
토끼도 생각보다 꽤 오래 사는 모양이었다 글쓴이는
그 토끼가 죽어서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고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고양이를 키우다가 고양이를 떠나
보냈는데,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 글을 쓴 이는 지금 자기가 항암 투병 중인데, 먼저
떠난 고양이 생각이 더 많이 난다는 말도 썼다 아이고,
저 사람은 참 힘들겠네 전혀 알지도 못하는 타인의 삶,
그 편린들을 들여다보다가 내가 애정을 가지고 뭘
키워온 것이 있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있기는 있다
15년째 게발 선인장을 키우고 있다 그동안 분갈이도
한 번도 해준 적 없고, 몇 년 전에는 화분의 윗부분이
깨진 데다가 선인장의 절반이 죽어서 떨어져 버렸다
그래도 이맘때쯤이면 화사한 꽃을 늘 피워주었다
그 선인장이 올해는 단 2개의 꽃봉오리만 만들어 내었다
엄마한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고얀 것 같으니, 때려줘라 엄마는 선풍기가 고장나도
때려주라고 하고, 컴퓨터가 잘 안될 때도 때려주라고 한다
밤에는 추우니까 선인장을 집안에 들여놓고 마침내
나는 마루 바닥을 두들기며 선인장을 야단쳤다
열심히 물 주고 키웠는데, 왜 꽃을 2송이 밖에
피우지 않느냐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 나는 선인장을
차마 때릴 수는 없었다 올여름은 너무 더웠으니까,
얘도 사는 게 힘들어서 그랬나 보다 사는 건 누구에게나
다 힘들다 힘든데도 어떻게든 있는 기운을 끌어내어
꽃을 피우는 것, 그렇게 삶은 견디고 견디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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