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춘(早春)〉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인물이 아닌 시간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른 봄에서 여름에 이르는 시간이 그것인데 영화 속의 인물들은 마치 그 시간의 흐름을 증거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는 영화 내내 그러한 증언들을 듣게 된다. 한번 예를 들어 보자.

  영화 초반부에 남자 주인공 스기야마는 오랜만에 도쿄 본사에 올라온 자신의 상사를 집에서 묵게 한다. 손님의 이부자리를 마련한 부인에게 그는 묻는다. 

  “밤에 추울지도 모르는데 이불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닌가?”

  아직 쌀쌀한 기운이 밤에 남아있는 그 때가 바로 이른 봄이다. 영화는 제목이 말해주는 이른 봄이라는 그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렇듯 초봄에서 시작된 시간적 배경은 계속해서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제시되는데 스기야마의 친구인 미우라에게 이르면 초여름으로 변화한다. 

  미우라는 스기야마의 회사 동기로 병을 얻어 누워있는 처지이다. 거의 거동을 못하고 투병생활에 지친 미우라에게 스기야마의 방문은 너무나도 반갑고 고마울 따름이다. 투병생활의 외로움을 토로하면서 미우라는 말한다.

  “내가 병을 얻어 누워있게된게 벌써 백일째군. 그새 봄에서 초여름이 되었네 그려.”

  이제 시간은 초여름에서 성하(盛夏)로 이르게 되는데, 그 때는 바로 영화의 끝부분에 해당한다. 샐러리맨 생활에 대한 회의와 부인과의 불화를 떠안고 지방의 공장으로 전근온 그에게 사무실의 동료는 무더위에 대해 말하며 그에게 묻는다.

  “도쿄도 여기처럼 더울까? 여긴 산으로 둘러싸여 열기가 빠져나갈 곳이 없어서 더 덥게 느껴져.”

  이러한 대사들 외에도 시간은 여러 다른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영화 내내 제시된다. 그렇다면 왜 인물들은 계절에 대한 이러한 단서들을 마구 흘려대는 것일까? 과연 〈조춘(早春)〉에서 계절은 어느 정도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 우리는 거기에 부여된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즈가 말하는 계절이란 일차적으로는 시간적인 변화를 포함하고 있는 물리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춘(早春)〉의 인물들이 말하는 시간들은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오즈는 여기에 좀 더 다른 차원의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 또한 인물의 대사를 통해 제시된다. 우리는 그것을 스기야마와 상사 오노데라의 대화 속에서 볼 수 있다. 

  부인을 남겨두고 홀로 전근지로 떠나온 스기야마는 자신의 괴로운 심사를 상사에게 털어놓는다. 마치 다정한 부자(父子)처럼 두 사람은 강물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데 그들 주변으로 조정 연습을 하는 젊은이들의 배가 지나간다. 그것을 보고 오노데라는 말한다.

  “저들이야말로 인생의 봄이군.” 

  사실 인생의 봄을 살고 있는 것은 주인공 스기야마에게도 해당된다. 이제 막 서른의 초입에 들어선 그는 자신의 삶에 산적한 문제들과 직면하는 어려움을 겪는데, 그러한 갈등과 고통이야말로 〈조춘(早春)〉의 주요한 테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 스기야마는 매일 반복되는 회사생활에서 회의를 느끼고 별다른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그러던 그는 같이 전철로 출퇴근하면서 알게된 여성과 급속도로 가깝게 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부인과의 관계는 급기야 별거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오래전에 병으로 아들을 잃은 상실감과, 거대 조직을 떠받치는 일개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샐러리맨으로서의 비애가 그로 하여금 좀처럼 삶에 천착하지 못하고 떠다니게 만들었던 것이다.

  영화 〈조춘(早春)〉에서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끊임없이 제시되는 계절, 즉 시간의 의미는 눈에 포착되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영화가 진행되어갈수록 관객은 눈에 보이는 즉자적인 의미로서의 계절과, 그와 동시에 인생의 한 시기, 즉 상처와 고통 속에서 혼란을 겪으며 부유하는 삼십대 초반의 남자의 내면과 조우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오즈는 항상성(恒常性)에 따르고 있는 자연의 시간과 그 법칙을 조화의 이상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계절은 마치 자신이 오고 가야할 때를 아는 존재처럼 여겨진다. 사람들은 계절이 자연 속에 머물다 가는 궤적을 명확히 추적해낼 수 있다. 그러나 남자 주인공의 내면은 얽힌 실타래와 같아서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혼란과 고통을 야기시킨다. 

  결국 〈조춘(早春)〉에서 오즈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조화로운 시간, 자연에로의 회귀이다. 이것은 이 영화의 처음과 끝장면을 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기차가 지나가는 장면으로 시작된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역시 시골 마을을 지나가는 기차와 그것이 지나간 뒤의 산을 잠시 동안 보여준다. 기차는 얼핏 보기에 기계적이고 인위적인 산물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고 출발한다는 사실은 자연의 법칙과 유사함을 떠올리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는 부부는 창 밖 너머 멀리 지나가는 기차를 함께 바라본다. 그리고 그 기차가 지나간 곳에는 산이 그들의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든든하게 서있다. 이제 한 남자의 내면에 일렁이던 고통과 상실의 감정은 잔잔해질 것이며, 그것은 그가 견뎌온 시간에 의해 마침내 선물처럼 주어졌다.

  이렇듯 오즈에게 있어 시간은 상처입은 것과 잃어버린 것의 재건과 복귀를 의미한다. 영화 〈조춘(早春)〉에는 계절과 자연에 대비되는 한 남자의 흔들리는 내면의 부조화가 포착되어있다. 이것은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결국 치유와 회복으로의 여정을 가져오게 만드는 동인(動因)으로 작동하게 되고, 우리가 영화의 끝부분에서 목격하는 것도 화합과 평화의 대단원인 셈이다. 하지만 〈조춘(早春)〉에서 그러한 성숙과 변화, 조화와 통합의 시간에 이르게 되는 이는 스기야마 뿐만은 아니다.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주인공 스기야마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의 주변 인물들을 부수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즈에게 있어서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시간이며, 그러한 이유로 영화 속 각각의 인물들은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동등한 중요성을 획득한다고 할 수 있다. 

  아이를 잃은 후 겉도는 남편의 마음을 잡지 못해 속앓이를 하는 부인 마사코, 자신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달래기 위한 상대로 늘 유부남을 택하고 스스로를 상처 속에 가두는 스기야마의 애인, 시집간 딸의 결혼 생활에 노심초사하며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마사코의 어머니, 30년을 다닌 직장에서의 퇴직을 앞두고 생겨난 걱정과 근심을 술로 달래는 술집의 손님,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마에 시달리다 젊은 날에 생을 마감하는 스기야마의 동료 미우라, 한직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삶의 여유와 즐거움을 발견하고 그 지혜를 스기야마에게 일러주는 상사 오노데라와 같은 인물이 그러하다.

  이렇듯 점점이 흩어지고 열려진 개개의 시간들은 극의 흐름에 따라 하나의 아상블라주(assemblage)를 형성한다. 개별적으로는 작고 알아보기 어려운 조각들이 한데 어우러져 인식 가능한 덩어리, 즉 3차원적 형상을 획득하게 된다. 오즈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삶 안에 내재된 다양한 문제적 국면들에 대해 보여주면서, 그것을 작동하게 만드는 반복적이고 동일한 기제를 성찰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인간과 세계를 넘어 우주라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사유에까지 맞닿는 지점을 보여준다.

  〈조춘(早春)〉은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오즈가 만들어낸 시간의 아상블라주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보기에 인생은 그렇게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며, 그렇게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조화를 깨뜨리는 인간의 무질서 때문이다. 무질서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어리석음과 욕심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과 대비되는 항으로서 시간은 존재한다.  

  오즈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바로 그러한 시간에 대한 찬미를 아낌없이 바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갈등과 고통, 혼란과 무질서적 상황들에 처한 자신의 영화 속 인물들에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오즈가 보기에 그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시간뿐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춘(早春)〉의 인물들은 시간 속에서 삶의 의미를 되찾고 구원받는다. 남편의 외도를 용서하지 못하고 집을 나간 부인은 결국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남편은 그런 부인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시금 부인과 함께 하는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기억들은 이제 과거로 흘러가 버렸다. 마지막 장면에서 스기야마는 부인에게 작은 시골 마을에서의 3년을 견딜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부인은 답한다. 

  “3년이란 시간도 금새 흘러가버릴 거에요.”

  오즈는 그들의 미래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겪더라도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살아낼 것임을, 시간은 이제까지 그래왔듯 그들 삶의 유일하고 힘 있는 증인이 되어줄 것이라고 일러주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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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쥬코 - 프랑스 희곡선 1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지음, 유효숙 옮김 / 연극과인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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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영문 위키 백과에서 로베르토 쥬코에 대해 찾아보니 이 인물의 간략한 전기가 나와 있었다. Succo 또는 Zucco로 불리는 이탈리아 태생의 이 연쇄 살인범은 1962년에 태어났다. 그는 19살이 되던 해, 차를 빌려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부모를 칼로 찔러 죽였다. 같은 날 경찰 한명을 더 죽였는데 법정은 그가 정신이상이라는 이유로 10년 감호 선고를 내렸다. 정신 병원에 수감되었던 그는 정치학 학위를 따기도 했다. 『로베르토 쥬코』에서 쥬코가 신사에게 자신을 학생으로 소개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년째 되던 해 탈옥을 한 쥬코는 유럽 일대를 떠돌며 강간과 납치, 살인과 같은 갖가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다. 1987년과 1988년에 유럽에서 그의 이름은 공포와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다 자신의 고향에서 붙잡힌 그는 다시금 탈옥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결국 자신의 감방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는 AIDS에 걸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지하철에 나붙은 쥬코의 사진을 보고 영감을 받아 이 희곡을 썼다고 했다. 왜 콜테스는 이 살인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콜테스는 쥬코가 저지른 끔찍한 범죄에 대해서 보여주기만 할 뿐, 왜 그가 그런 살인을 저지르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콜테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쥬코의 범죄행위가 아니라 쥬코가 만나게 되는 인물들처럼 보인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집안에서 갇혀 지내다시피 하는 소녀와 깊은 고독과 상실감에 시달리는 귀부인 같은 인물은 모두 자신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들은 현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성을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콜테스는 그들을 소녀, 귀부인, 신사, 형사와 같은 일반명사로 지칭한다. 이 극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은 로베르토 쥬코 뿐이다.

 

  콜테스가 보기에 스스럼없이 살인을 저지르고 돌아다니는 쥬코나 쥬코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깊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그들은 그 누구와도 진정으로 소통하지 못한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마저도 죽여버리는 쥬코의 범죄는 혈육과도 단절된 마음의 무서운 심연을 엿보게 한다. 콜테스는 왜 쥬코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어쩌면 그는 동성애자로서, 또 AIDS로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생을 돌아보며 자신이 느낀 세상과 사람에 대한 소외와 고독을 쥬코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까? 콜테스는 자신이 느낀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심연을 연쇄 살인마라는 거울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쥬코는, 또 쥬코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소통을 갈구하지만 그 시도들은 결국 파국으로 끝나버린다. 『로베르토 쥬코』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 앞의 생에 대해 결국 혼자일 뿐이라는 뼈저린 진실을 보여준다.

  과연 작가와 그가 쓴 작품을 엄밀하게 분리해서 보는 것이 가능할까? 콜테스의 경우엔 그것이 어렵다. 작가는 자신의 상처를 피가 날 정도로 파고 또 파내어 그것으로 작품을 써서 먹고 사는 존재이다. 나는 이 말이 잔인하지만 진실이라고 믿는다. 고통스러운 상처 하나 없이 순결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작가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상처를 통해 세상과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이, 그는 바로 작가이다. 콜테스는 자신의 삶과 작품을 통해 그 점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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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요 엄마
마샤노먼 지음 / 예니 / 199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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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샘 세퍼드의  『매장된 아이』와 마샤 노먼의 『잘자요 엄마』두 작품 모두 알라딘에서는 품절이군요. 도서관에서는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본의 유명한 감독이며 배우이기도 한 기타노 다케시는 한 토크쇼에서 당신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했다.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내다버리고 싶다.” 가벼운 농담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 말은 한편으로는 개인에게 있어 가족의 존재가 갖는 무게감을 떠올리게 만든다. 1978년 샘 세퍼드가 발표한 『매장된 아이』와 1983년에 마샤 노먼이 쓴 『잘자요 엄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가족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이다. 두 작품은 미국 가정이 겪고 있는 근본적 문제와 위기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두 작품이 모두 퓰리처 상을 수상한 데에는 그 안에 미국 사회의 고민과 문제의식이 들어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과연 미국의 가정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매장된 아이』에서는 뒤뜰에 묻혀있는 매장된 아이가 문제가 된다. 근친상간에 의해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는 죽임을 당하고 땅 속에 묻히지만 가족들의 기억 속에서는 살아서 고통을 주는 존재이다. 『잘자요 엄마』에서는 자살을 결심하는 한 여성이 나온다. 어릴 때부터 간질 발작에 시달리고 있는 제시는 원하지 않은 결혼과 그로 인한 이혼, 아들의 비행, 홀로 남은 엄마의 뒤치다꺼리를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다. 두 작품은 모두 미국의 가정이 병들어 있고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는 곳임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기에 나온 가정의 모습이 미국 가정이 겪고 있는 근본적 위기라는 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어디에 있을까?  

  샘 세퍼드는 그것을 서부라는 강력한 공간적 지형 속에서 구현해내고 있다. 서부는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곳이다. 가진 것 없는 자들이 일구어낸 도시, 개척자들이 실현해낸 일확천금의 꿈, 가족과 종교로 강력하게 결합된 공동체, 이 모든 것이 서부 개척의 역사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서부의 모습 이면에는 미국이 감추고 싶어하는 학살과 차별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인디언 학살과 인종 차별과 같은 미국의 근원적 원죄가 마치 매장된 아이처럼 미국민의 기억 속에서 살아있다. 『매장된 아이』를 단지 한 가정에 일어난 비극으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서부라는 공간의 상징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들에 의해 머리를 다 깎여버린 아버지, 과거의 추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머니, 정신을 놓아버린 큰 아들, 한쪽 다리를 잃은 작은 아들, 그런 가족 속에서 이상행동을 보이는 손자, 그들의 모습은 모두 병들어 있다. 매장된 아이가 있는 원죄의 대지가 키워낸 것은 기형적 가정이며, 그것은 샘 세퍼드가 바라본 미국의 가정이기도 하다.

  

  마샤 노먼은 세퍼드가 보여준 상징성과는 다른 측면에서 사실적인 희곡의 언어로 미국의 가정을 그려낸다. 『잘자요 엄마』에서 제시가 어릴 적부터 앓고 있는 질병인 간질은 벗어나기 어려운 천형(天刑)처럼 묘사된다. 간질 치료약조차 제시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다. 제시의 간질은 제시가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이 되는데 바로 그 병 때문에 제시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의 통제력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살은 제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삶에 대한 온전한 통제력을 가지려는 시도가 된다. 그 무엇도 제시의 자살을 막아내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가정은 치유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가정의 모습은 미국의 가정이 겪고 있는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병들고 고통받는 개인에게 가정이 더 이상 위안과 사랑을 주는 삶의 근거가 되어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혼율의 증가, 마약과 약물중독, 성문제, 빈부 격차로 인한 하층계급 가정의 붕괴와 같은 현상은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 사회의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잘자요 엄마』에서 제시는 총으로 자살을 하는데, 이것은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첨예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총기 소지문제와도 일면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국의 가정은 그러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원적 동력이 되지 못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잘자요 엄마』는 치밀한 극적 구성과 놀라운 흡인력을 보여주는 작품이지만, 그 안에 내재된 윤리적인 딜레마는 우리를 매우 곤혹스럽게 만든다. 자살을 한 개인, 또는 가정의 문제로만 볼 수 있는가? 사회는 그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마샤 노먼은 미국 사회를 향해 마치 그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샘 세퍼드와 마샤 노먼은 『매장된 아이』와 『잘자요 엄마』를 통해 병들어 신음하고 있는 미국 가정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과연 위기에 처한 미국의 가정을 구해낼 방법은 있는가? 작가는 침묵한다. 답은 찾는 이들의 몫이다. 어쩌면 작가란 그렇게 답을 찾는 이들에게 한 자락 빛을 던져주는 존재일런지도 모른다. 세퍼드와 노먼은 그러한 작가의 전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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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롤드 핀터 전집 2
해롤드 핀터 지음, 이현주 옮김 / 평민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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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베케트 전집은 알라딘에서 볼 수가 없군요. 핀터의 전집만 있길래 그것으로 올립니다. 


  최근에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로 화제를 모았던 〈인베이젼 Invasion〉은 원작의 세 번째 리메이크 작이었다. 1957년에 나왔던 〈신체강탈자의 침입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은 바로 그 영화의 원작이다. 이 작품은 SF 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할 수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외계의 힘이 보여주는 공포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도시의 사람들은 똑같은 표정과 말투를 하며 자신들과 다른 것을 표현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작품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중요한 조건은 ‘감정을 가진 존재인가’하는 것이다.

  

  베케트와 핀터가 〈게임의 종말〉, 〈덤 웨이터〉를 통해 보여주는 현대인의 초상은 어떤 면에서 앞서 언급한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닮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은 신체강탈자들은 사람들이 자는 사이에 생각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기능을 빼앗아 가버린다. 〈게임의 종말〉의 함과 클로브, 〈덤 웨이터〉의 구스와 벤은 정상적으로 사고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잃어버린 인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클로브는 함의 뒤치다꺼리와 무의미한 행위로 반복된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구스와 벤은 살인청부업을 아무렇지 않게 주어진 임무로 받아들여 해내고 있다. 왜 그들은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무기력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이 두 작품은 발표된 년도가 같다. 1957년이다. 전후 깊게 드리워진 상처의 그림자를 이 두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제 2차 세계 대전은 무엇보다 전대미문의 학살극이라 할 수 있는 유대인 대량학살의 끔찍한 기억을 남겼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러한 치열하고 철저한 자기 성찰의 분위기는 특히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베케트와 핀터가 자신들의 시대와 호흡하며 뛰어난 작품을 내놓은 문제적 작가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들의 작품 속에서 그 시대를 읽어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게임의 종말〉에서 끊임없이 피를 흘리는 부상당한 함이나 〈덤 웨이터〉의 도입부에서 나온 늙은 노인의 죽음과 어린아이의 고양이 살해 기사는 끊임없이 위험에 노출된 폭력적 현실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런 상황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고통에 대해 보여준다. 

  베케트와 핀터는 그러한 상황에 처한 인간이 보여주는 위악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두 작가는 어떠한 해결책이나 구원을 제시하는 대신에 파국의 국면을 보여주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클로브는 함의 위협에 떠나지 못하고 무의미한 일상의 소극(笑劇)이 반복되는 무대(삶)에 남는다. 구스는 자신에게 끊임없는 희생과 복종만을 강요하는 인물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반항을 선택한 대가로 죽음을 맞이한다. 베케트와 핀터가 보여주는 이러한 결말은 그들이 바라본 현대세계가 얼마나 우울하고, 희망을 꿈꿀 수 없게 만드는 곳인지를 증명한다.

 

  〈덤 웨이터〉의 구스는 외친다. “왜, 왜 그는 이런 게임을 하는 거야? 이게 바로 내가 알고 싶은 거야. 왜 그는 이런 게임을 하는데?” 그 게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게임을 그만 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하나 말해주지 않는다. 핀터는 게임에서 패배하기로 결정되어 있는 인물에게 연민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독자와 관객에게 게임의 규칙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누구도 그 게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결코 그 누구와도 진정한 감정의 소통을 하지 못하고 단절된 채, 모두가 무표정한 표정을 짓고 주어진 명령에만 복종하는 기계와 같은 존재를 인간으로 규정하게 된 시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는 현대이다. 두 작가는 그 황량하고 슬픈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분열증적인 언어의 희곡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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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바흐 : 바이올린과 하프시코드를 위한 소나타 전집 [2CD]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포저 (Rachel Podger) / Channel Classics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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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만약 무인도에 가게 되었는데 가져가야할 단 한가지를 선택한다면 무엇으로 하겠는가? 아주 오래전부터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변함이 없었다. 바흐의 음반들이다. 무인도에서 바흐의 음반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아무튼, 심정적으로는 그 음반들만 있으면 아주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바흐는 여전히 나의 음반 구매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번에 구입한 레이첼 포저와 트레버 피녹의 연주 음반은 정말 근래에 보기드문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쳄발로 연주자이기도 하고 지휘자로도 좋은 평가를 받는 트레버 피녹에 비한다면 포저는 내게 다소 낯선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미 음반을 구입한 이들의 호평이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역시, 레이첼 포저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포저가 들려주는 바흐의 선율은 정말이지 너무나 포근해서 추운 겨울의 따뜻한 외투를 연상케 한다. 유려할 뿐만 아니라 명료한 포저의 연주는 트레버 피녹의 반주와 훌륭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두 명의 연주자가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며 놀라운 화음을 들려주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개성이 뛰어난 연주자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트레버 피녹의 반주가 돋보이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제 가을이 깊어가게 되면 옷깃을 여미게 될 날들이 많아질 것이다. 이 음반이 든든한 겨울 외투처럼 내 옆에 있어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 한켠이 뿌듯해짐을 느낀다. 따뜻한 바이올린의 음색과 매력적인 하프시코드와의 화음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꼭 들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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