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文身)


너의 시는 미친 여자애의
웅얼거리는 소리 같아
어긋난 말들의 천치(天痴)

너와 너의 시 선생은 판박이지
너, 판박이 알아?
내가 어렸을 적에 말이지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들
얇은 스티커에 그려진 그거
팔에다 문대기면 그대로 그려져

시간이 지나면 닳아 없어지는
그딴 판박이 따위
차라리 너만의 문신을 새겨

먼바다를 향해가는 조타수
언젠가 정착하길 바라면서
작지만, 무거운 닻 모양은 어때?
검푸른 잉크로 한 땀 한 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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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시


망설이다가
하릴없이 걷다가
쓰린 속을 부여잡고도 쓴다

마음에 들지 않은 애새끼
얼굴을 괜히 쓰다듬어보듯
그래도 나가서 잘 놀거라
짐짓 따뜻한 말 한마디

그렇게 뒤돌아서면
살짝 얼굴을 찡그리면서
괜히 내보냈나 싶어져
많이 쓰다 보면 나아지겠지
그런 우스운 말은 하지 말아

모든 시는 실패한 시야
누군가 슬며시 웃으며 말했어
그렇군,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언제고 다시 두드려 보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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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골당


네 아빠는 명이 짧았지 그렇게 일찍 갈 게 뭐냐
엄마는 납골당에 올 때마다 그 말을 한다

남자는 납골당에 들어서자마자 처절하고 격렬한
울음을 쏟아내었다 나는 남자가 편하게 울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지만 그는 단 5분 만에 울음을
그치고 편안해진 얼굴로 납골당을 떠났다 아마도
그의 눈물이 짜디짜질 때쯤, 다시 이곳을 찾을 것이다

스물셋 나이의 아가씨는 엄마와 함께 그곳에 잠들어 있다
엄마가 먼저 떠난 길을 한 달 후에 딸이 따라갔다
그곳에서 엄마와 함께 잘 지내렴
나는 위패(位牌)에 적힌 글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았다
이제 홀로 남은 그가 잘 살아주길 바라면서

비쩍 마른 몸으로 흔들흔들 그네를 타던 아빠를 기억한다
아빠는 소설을 하나 쓰고 싶어했는데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나는 영화를 한 편 찍고 싶었지만 여적지 아무것도 찍지 못했다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를 생각한다 어떤 인생의 이야기는
속으로 삼켜질 뿐이고 옷장 속에서 미소를 짓는 해골처럼
나는 옷장문을 열었다가 가만히 도로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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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도선(扁桃腺)


만성 편도선염, 입니다
일단 항생제를 좀 드리죠
낫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고
편도선을 잘라내면 됩니다 그런데
나이들어서 그런 수술 하는 거,
쉽지는 않겠죠

환자 말 잘라먹기
심기 마구 긁어놓기
무례함으로 번들거리는
재수없는 저 상판대기
그래봤자 목구멍 전문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차가운 진찰실을 나오면서
너 같은 인간이 잘라내었을
무수한 편도선의 울음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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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명의 여자


다섯 명의 여자가 지나갑니다
수인(囚人)처럼 줄줄이 하지만,
손은 묶여있지 않아요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어두워서 얼굴을 볼 수는 없어요
먹빛으로 떨어지는 슬픔의 죄

아주 오랫동안 꿈을 기록하고 연구했어요
아, 꿈 같은 거 믿지 않으신다구요?
그렇군요, 예전에 나도 그랬답니다
그런데, 이게 한 번 두 번 뭔가 맞아떨어지면
믿음이 생깁니다 말하자면 오래된 미래의 목소리
나보다 먼저 미래를 살아본 이가 알려주는
뭐, 그렇다고 예정된 불운을 막아낼 수는 없죠
끈적거리는 모래바람처럼
눈꺼풀을 닫고, 입술을 뜯어내며,
아픈 부스럼을 퍼뜨리며

나는 네 귀퉁이가 닳아버린, 두꺼운 꿈의 공책에
다섯 명의 여자를 천천히, 언제나 만년필로
목소리가 그물을 가만히 찢고
자신의 입으로 말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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