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pbs-3-ken-burns-prohibition-2011-1.html
2편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pbs-3-ken-burns-prohibition-2011-2.html



되찾은 자유의 감각


3편: A Nation of Hypocrites 1시간 45분


  콜럼버스, 워싱턴, 링컨, 볼스테드. 누군가 미국 역사는 이 네 명의 인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했다. 볼스테드 법은 금주법의 시대를 열었다. 무려 13년 동안 미국인들에게 음주는 불법이었다. 자유롭게 술을 마실 권리, 이제 누군가는 그 대의명분을 위해 나서야만 했다. 1926년 6월, 뉴욕의 공화당 의원은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기자들 앞에서 '시원하게 맥주 한 잔을 들이켰다'. 정치인들도 금주법이 가진 폐해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표를 주는 유권자들의 마음이 변했던 것이다. 1920년대의 미국은 급변하고 있었다. 대도시들이 급속도로 성장했고, 문화적인 면에서도 자유의 분위기가 흘러 넘쳤다. 흑인 음악으로 시작한 재즈가 일반 대중의 삶으로 스며들었다. 클럽은 재즈 음악과 춤추는 젊은 남녀들로 미어터졌다. 거기에 술이 빠질 수 없었다. 물론 몰래 파는 술이었다.

  주류 산업은 지하 세계에서 번성하고 있었다. 금주법이 시행되던 1920년대에 70만개의 증류소에 50만 명이 그 사업에 종사했다. 'speakeasy'라고 불리는 무허가 술집이 얼마나 많은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뉴욕의 밤문화를 지배한 비밀 술집은 경찰의 단속에 의해 사라졌다가 다른 곳에서 문을 열기를 반복했다. 술집에는 남자 손님만 있지는 않았다. 젊은 독신 여성들에게도 술은 인기였다. 금주법 이전 시대에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여성은 매춘부로 여겨졌다. 세대가 변했고, 여성들은 훨씬 더 술에 관대해졌다.

  시카고에서는 한바탕 피바람이 일었다. 카포네는 경쟁자 Bugs Moran을 제거하는 데에 혈안이 되었다. 1926년과 1927년에 갱단원들은 시카고 도심 한복판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살인자들은 기소되었으나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배심원들을 비롯해 검사와 판사 모두 돈을 받았다. 증인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로 일관했다. 언론에서는 증인들이 'Chicago amnesia(시카고 기억상실증)'를 앓고 있다고 조롱했다. 다른 대도시 갱단 리더들에게도 시카고는 기막힌 곳이었다. 뉴욕을 지배하던 갱단 일파의 우두머리 Lucky Luciano는 시카고를 둘러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여긴 진짜 미친 도시야(a real goddamn crazy place)!'

  카포네는 어둠 속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매우 미디어 친화적(!)인 독특한 마피아였다. 그는 기자들을 불러 모아 회견도 자주 했다. 기자들이 써내는 기사에서는 카포네로부터 받은 돈이 흘러다녔다. 사람들은 신문에서 카포네의 생각을 읽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화제가 되었다. 그는 악당이면서 동시에 인기스타였다. 사람들은 카포네를 보기 위해 그가 가는 곳마다 몰려다녔다. 시카고는 사실상 그가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이었다.

  점차 많은 미국인들이 금주법에서 돌아설 무렵인 1928년, 미국의 31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치뤄졌다. 민주당 후보는 뉴욕 주지사였던 Al Smith, 공화당은 Herbert Hoover를 내세웠다. 앨 스미스는 금주법 폐지론자였다. 후버도 금주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금주법을 찬성하는 지지자들의 표 또한 소중했다. 안티 살롱 리그는 스미스의 낙선 운동에 열을 올렸다. 법무부 장관 빌레브란트는 아예 대놓고 앨 스미스를 비난하며 노골적인 선거 운동을 했다. 금주법 옹호의 여전사로서 빌레브란트는 큰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후버가 당선이 되면 자신의 공을 알아줄 것이라 생각했다.

  토사구팽(兔死狗烹). 대통령이 된 후버의 새 내각 명단에 빌레브란트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후버는 금주법이 끝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게된 빌레브란트는 사표를 던지고 공직을 떠났다. 그리고 곧 새로운 직함을 얻는다. 포도 농축액 회사의 법률 자문이었다. 그곳은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 포도 원액을 제조하는 회사였다. 금주법 투사는 전직 공무원의 이해상충이라는 비난도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퇴직 관료로서의 명예보다 소중한 것은 돈이었다.

  1927년, 웨인 휠러가 세상을 떴다. 그는
'Anti-Saloon League'를 이끌며 금주법을 구체적으로 설계한 인물이었다. 빌레브란트의 퇴진과 함께 금주법 지지자들에게 휠러의 죽음은 뼈아픈 손실이었다. 그들은 구심점을 잃었다. 금주법은 점점 쪼그라드는 풍선처럼 되어갔다. 그와는 달리 금주법을 폐지하자는 이들의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한 명의 여성이 있었다. Pauline Sabin, 매우 부유한 뉴요커였던 사빈은 공화당 지지자로서 후버의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후버가 금주법에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자 과감하게 돌아섰다. 사빈은 '전국 금주법 개혁을 위한 여성 단체(WONPR)'를 설립했다. 금주법의 제정에 앞장섰던 이들도 여성이었고, 그것을 없애기 위해 가장 역동적으로 움직였던 이들도 여성이었다.

  처음엔 자신의 두 아들에게 금주법이 지배하는 세상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부유층의 여성 인사는 그렇게 금주법 폐지의 선봉장이 되었다. 1929년에 세워진 이 단체의 회원은 곧 150만 명에 달했다. 이 숫자는 반대 진영의 여성 단체 'WCTU'의 3배였다. 'WONPR'은 사빈이 가진 유명 인사로서의 아우라에 기대고 있었다. 중산층 주부들에게 그곳은 부유하고 지적인 이들의 모임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마치 팬클럽에 가입하는 것처럼 많은 여성들이 사빈의 단체에 회원이 되었다. 사빈이 이끄는 'WONPR'은 이후 금주법 폐지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렇게 금주법 폐지를 외치는 깃발이 휘날릴 무렵, 'Scarface' 알 카포네의 좋은 시절도 끝나가고 있었다. 라이벌 벅스 모란과의 일전은 그 유명한 1929년의 '발렌타인 데이의 대학살(Saint Valentine's Day Massacre)'로 정점을 찍었다. 1931년, 카포네는 탈세 혐의로 기소된다. 결국 카포네는 감옥에 갇혔다. 미국 대도시 갱단 리더들의 이권 다툼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그들에게 금주법은 계속해서 돈을 쏟아내는 화수분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 화수분은 어느 날 갑자기 금이 가버렸다. 1929년, 미국에 대공황의 강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후버 정부는 대공황의 여파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늘어나는 실업자들을 구제하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재정이었다. 안정적인 세수(稅收)의 확보가 시급했다. 재정이 쪼들리는 판국에 금주법 단속에는 여전히 돈이 나가고 있었다. 금주법을 폐지하면 주류 산업이 합법화되면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고, 세금도 거둘 수 있었다. 금주법 폐지를 당론으로 내건 민주당 의원들이 상원과 하원에서 점차로 세를 불려나갔다. 1932년, 금주법 폐지를 공약으로 내건 민주당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수정헌법 21조는 금주법을 명시한 수정헌법 18조를 폐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미국 헌정 사상 다른 헌법 조항을 폐지하기 위해 새로운 헌법을 만든 경우는 전무후무했다. 1933년 12월 5일, 수정헌법 21조가 미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13년 10개월 18일' 동안 미국인들의 삶을 지배했던 금주법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많은 이들이 술집에서 환호하며 자축했다. 금주법과 함께 흥했던 암흑가 갱단들에게 그 소식은 폐업신고서 같았다. 주 수입원의 상실로 그들의 세력 확장은 잠시 중단되었다. 그들은 이후 '마약 밀매'라는 새로운 사업 수단으로 눈을 돌린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금주법이 미국 내 범죄 조직을 고착화시킨 주요한 요인이라고 평가한다.

  술을 자유롭게 마실 수 있는 권리. 이제 술로 인한 문제는 법이 아니라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여전히 알콜 중독자들은 사회 문제로 남아있었다. 1935년, 알콜 중독자들을 위한 치료 모임 'AA(Alcoholics Anonymous)'가 민간인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미국인들은 과도한 음주가 가지는 위험성과 함께 그것을 국가가 강제적으로 해결하려고 나섰을 때의 폐해 또한 목격했다. 과연 금주법이 미국인들에게 남긴 유산은 무엇일까? 금주법 시대를 거치면서 미국인들의 주류 소비량은 상당 부분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미국인들은 되찾은 '자유의 감각'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국가가 결코 침해할 수 없는 '개인의 소중한 권리'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금주법이 미국인들의 내면에 남긴 가장 강렬한 흔적이었다.


*사진 출처: pbs.org 후버의 대통령 당선을 도왔지만 결국 외면당한 금주법 여전사 빌레브란트


**사진 출처: pbs.org     '잘 가라, 금주법!'   금주법 폐지에 환호하는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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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Call 이후의 세상

2편: A Nation of Scofflaws 1시간 50분


  1920년 1월 16일, 마침내 금주법이 시행되었다. 발효 알콜의 제조, 판매, 운송을 금지하는 수정헌법 18조는 미국을 알콜 중독의 재앙에서 구할 법으로 여겨졌다. 금주법의 시행 이전에 술집들은 마지막 재고 세일 간판을 내걸었다. 'Last Call'이라는 간판 앞에 사람들은 줄지어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부자들은 선견지명을 가지고 엄청난 술을 사들여 창고에 쌓아두었다. 위스키 증류소를 비롯해 양조장도 문을 닫을 채비를 했다. 수많은 이들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금주법은 주류 관련 산업 전체의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수정헌법 18조에는 '취하게 하는 음료'라고 명시가 되어있을 뿐, 알콜 도수를 명시하지 않았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할 후속 법안이 필요했다. 법안을 입안한 의원의 이름을 딴 'Volstead Act'는 알콜 도수를 0.5%로 제한했다. 법안을 실제로 기획한 이는 'The Anti-Saloon League'의 웨인 휠러였다. 그는 미국에 남아있는 술 한 방울까지도 다 말려버릴 기세였다. 그러나 금주법의 본격적인 시행에서도 예외는 있었다. 의사들은 치료 목적에 한해 술을 처방할 수 있었다. 종교적인 목적의 술 소비도 인정되었다. 가톨릭의 미사주, 유대교의 제례에 쓰이는 술이 그러했다. 의사들은 술 처방전 장사로 갑자기 돈방석에 앉았고, 유대교는 급증하는 신자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웃지못할 촌극이었다.

  많은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금주했으나, 술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의 대도시 뉴욕은 곧 밀주업자와 무허가 술집의 천국이 되었다. 뉴욕은 캐나다 국경과 가까워서 술의 밀수가 상대적으로 쉬웠다. 밀주업자들은 공무원과 경찰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뇌물을 살포했다. 볼스테드법의 더 엄격한 뉴욕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Mullan-Gage Law'가 만들어졌다. 4000명이 넘는 이들이 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으나, 뉴욕 시민들은 금주법 자체에 냉소적이었다. 1923년에 그 법은 폐지되었다. 뉴욕은 그렇게 일찌감치 금주법과 멀어졌다.

  미국 전역의 법원에는 판결을 기다리는 금주법 위반자들이 넘쳐났다. 미국 변호사들의 44%가 금주법 관련 소송에 매달렸다. 판사들은 늘어난 업무량에 진저리를 쳤고, 경찰들은 뇌물에 취약해졌다. 밀주업자들이 뿌리는 뇌물은 그 직업군의 평판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그럼에도 단속은 중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정부는 단속에 쓸 재정이 별로 없었으므로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자 연방 정부가 나섰다. 당시 대통령 하딩은 자신의 의지를 보여줄 여성 전사를 임명했다. 법무부 차관보로 임명된 Mabel Walker Willebrandt는 1921년에 장관이 되어서 열정적으로 금주법 단속에 임했다.

  빌레브란트에게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밀주는 미국 전역에서 이루어졌다. 탄광과 협곡, 농장, 주차장, 어느 곳에서도 밀주업자들은 술을 만들었고, 사람들은 'speakeasy'라고 불리는 비밀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빌레브란트의 요원들은 그 모든 곳을 누비며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빈약한 급여와 뇌물에의 유혹, 밀주업자들의 저항은 연방 단속 요원들에게 걸림돌이었다. Frank Allen Mather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밀주업자 단속에 나섰다가 총을 맞고 사망했다. 다큐에서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회고한다.

  "나중에 금주법이 폐지되었을 때, 저는 그 모든 것이 낭비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금주법의 시대를 일생일대의 사업 기회로 이용한 이들이 등장했다. 시애틀 경찰이었던 Roy Olmstead는 술이 엄청난 돈을 벌어다줄 것임을 간파했다. 경찰직을 때려친 그는 곧 밀주 사업에 나섰다. 그가 뿌리는 뇌물에 경찰들은 자발적으로 부하가 되었다. 옴스테드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 또 있었다. 변호사 George Remus는 처음에는 밀주업자들의 소송을 맡아서 일하다가 밀주업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금주법의 헛점을 발견했다. 금주법 이전에 만들어진 보세 증류주는 의약품 목적의 판매가 가능했다. 그는 밀주 판매를 위한 제약 회사를 설립하고 증류소를 사들였다. 엄청난 돈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신시내티로 근거지를 옮긴 그는 곧 미국 밀주업계의 대부가 되었다. 그의 회사 직원은 무려 3000명에 달했다. 해외의 위스키 밀수도 큰 돈벌이가 되었다. 플로리다의 선장 William McCoy도 그렇게 떼돈을 벌었다.

  갱단들은 금주법으로 새로운 어둠의 제국을 구축해나가고 있었다. 필라델피아는 유대인 갱단이 장악했다. 뉴욕에서는 여러 갱단들의 싸움으로 12년 동안 수백 명이 죽어나갔다. 그리고 시카고, 거기에는 'Scarface' 알 카포네가 있었다. 그는 밀주 사업을 비롯해 도박과 매춘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위해 시카고 시장 선거에도 개입했다. 이른바 정치 깡패의 일도 겸업했다. 시카고는 알 카포네의 도시가 되어갔다. 무려 시카고 경찰의 60%가 주류 밀매에 연루되어 있었다.

  술로 흥했던 옴스테드와 리무스에게는 쓰디쓴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1925년에 금주법 위반으로 기소된 리무스는 감옥에 갇혔다. 남편이 감옥에 있는 동안, 리무스의 아내는 연방 요원 Franklin L. Dodge와 바람을 피우며 리무스의 재산을 비밀리에 처분했다. 출소한 리무스는 아내를 쏘아 죽였다. 살인 혐의로 체포된 리무스의 재판은 미국민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는 배심원단의 무죄 평결을 받아 풀려났다. 옴스테드도 기소되었다. 연방 정부는 도청 자료를 근거로 제시했으나, 옴스테드는 개인의 사생활 보장의 권리가 침해당했다며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Olmstead v. United States 소송에서 옴스테드는 5대 4로 승소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감옥에서 4년을 살다 나왔다.   

  이제 사람들은 금주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술을 마실 수 없게 되자 공업용 알콜로 만들어진 독주를 마시다 죽음에 이르는 이들이 금주법 시대에 1만 명에 달했다. 그 법은 온갖 위선과 범죄, 부패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미국에는 금주법 지지자들(Dry)의 세력이 우세했다. 그렇지만 폐지론자들(Wet)은 조금씩 자신들의 목소리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Dry vs. Wet, 마침내 그 전쟁을 끝내기 위한 비전을 가진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사진 출처: pbs.org  '마지막 술'과 '버려지는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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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A Nation of Drunkards 1시간 34분


1. 들어가며
 

  영화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2008)'의 조커를 특징짓는 것은 입 가장자리부터 눈가에 이르는 긴 흉터이다. 금주법 시대의 악명높은 갱 '알 카포네(Al Capone)'에게도 그와 같은 흉터가 있었다. 그가 풋내기 갱이었던 시절, 젊은 형제 일행과 시비가 붙었는데 그 일로 카포네의 얼굴에는 조커와 비슷한 흉터가 생겼다. '스카페이스(Scarface)'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카포네는 말 그대로 금주법 시대를 대표하는 '무법자'였다. 그는 온 나라가 술을 금지하는 시대에 술로써 자신의 제국을 세웠으며, 결국 그 술로 인해 몰락했다. 'Prohibition'이라는 영단어를 '금주법'을 의미하는 고유명사로 만든 시대. 미국인이 아닌 국외자의 시선으로 보아도 그 시대는 매우 기이하고도 흥미로운 시대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자신의 역사이기도 했던 현대의 미국민들에게도 그러하다.

  "지금을 사는 미국인들에게도 금주법의 시대란 놀랍게 느껴져요. 어떻게 국가가 나서서 전국민의 음주를 금지시킬 수 있었을까요? 정말이지 그런 정신나간, 미친 시대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지거든요."

  그 시기는 무려 13년 동안 이어졌다. 미국의 다큐멘터리 제작자 Ken Burns는 미국의 공영방송 PBS와의 협업을 통해 미국 역사에 대한 일련의 다큐멘터리들을 선보였다. 재즈 음악의 연대기를 다룬 10부작 'Jazz(2001)'와 서부 개척기를 다룬  8부작 'The West(1996)'는 그의 대표작이다. '금주법(Prohibition, 2011)'은 3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러닝 타임이 5시간이 넘는 이 다큐를 통해 번즈는 많은 미국인들이 그다지 들여다 보고 싶어하지 않는 그 '정신나간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얼핏 보기에 도무지 말이 안되는 '금주법'의 시대는 어떻게 도래했으며, 그 시기 미국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누군가는 그 시대를 진정으로 반기고 환호했으며, 다른 누군가는 불만과 고통 속에서 견뎌야 했다. 이제 그 시대를 살았던 다양한 목소리들이 켄 번즈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흘러나온다.


2. 금주법으로 향하는 여정

  미 의회에서 금주법이 통과된 것은 1919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시작점에는 무려 한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절주 운동(Temperance Movement)'이 있었다. 왜 '술과 음주의 절제'가 사회 운동의 화두로 등장했던 것일까? 미 동부 연안에 처음 발을 내딛었던 이주민들의 '메이플라워호(Mayflower)'에 가득 실렸던 것은 다름 아닌 맥주였다. 술은 초창기 미 개척지 역사에서 매우 중요했다. 낯선 곳에서의 삶은 예측하기 어려운, 고되고 힘든 것이었다. 술이야말로 일상의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음료였다. 많은 미국의 도시에서 하루에 두 번 'Grog-time(술 한 잔 하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약한 도수의 술은 1800년대에 이르기까지 점차 독해졌다. 술을 마시는 인구도 늘어났다. 1830년대에 이르면 미국인 한 명이 1년에 소비하는 위스키는 88갤런으로, 그것은 오늘날 현대 미국인이 마시는 소비량의 세 배에 달하는 양이었다. 그야말로 그 시대의 미국인들은 술을 '너무나도 많이' 마셨다.

  주취자에 의한 가정 폭력, 아동 학대, 매춘, 간경화로 인한 높은 사망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술이 자리하고 있었다. 첫 움직임은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Lyman Beecher 목사는 여신도들의 고통에 개탄했다. 술 취한 남자들은 일도, 가정 생활도 꾸려나갈 수 없었다. 술은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되었다. 1840년, 'Society of reformed drunkards'가 조직되었다. 개신교는 본격적으로 절주 운동을 교회 밖으로 확장시켰다.

  거기에 여성 운동가들도 동참했다. Susan B. Anthony는 그 운동의 선구자였다. 술을 마시는 남편으로 인해 가장 고통받는 이들이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 주를 비롯해 의회에 청원 운동을 전개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1851년, 메인주의 포틀랜드에서 시장 Neal Dow에 의해 처음으로 금주법이 시행되었다. 당연히 많은 이들이 반발했고, 시위가 잇따랐다. 그럼에도 술은 의사의 처방에 의해서만 가능한 '의약품'이 되었다. 밀주 판매자들은 자신들의 옷 속에 술을 숨겨서 팔았다. 'Boot-Leggers'라는 단어는 그렇게 생겨났다. 1860년대에 이르면 몇몇 주들이 포틀랜드를 따라 금주법에 동참했다.

  그런 움직임을 중단시킨 것은 '전쟁'이었다. 'Civil War', 미국은 남과 북이 갈리어 치열하게 싸웠다. 전쟁의 공포와 슬픔, 고통을 달래기에 술만한 것은 없었다. 술 소비는 다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재건을 위해 부족한 세수()를 메꾸려는 연방 정부에게도 술은 효자였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온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술 문화도 함께 가져왔다. 특히 독일 이민자들은 맥주 제조 비법을 가지고 양조장 사업에 뛰어들었고, 그것은 곧 그들에게 안정된 부를 약속했다. 1870년대에 이르면 맥주 제조업자들은 본격적으로 단체를 세워 정부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로비를 하기에 이른다. 맥주는 그렇게 미국인들의 삶에 자리잡는다.

  드디어 여성들이 들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1876년, 오하이오 주지사의 딸 Eliza Jane Thompson은 목사였던 아들이 알콜 중독으로 사망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 톰슨은 오하이오 여성 금주 십자군을 조직했다. 그리고 술집 앞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기도를 하며 연설을 했다. 1883년에는 뛰어난 여성 운동가이며 리더였던 Frances Willard가 'WCTU(Woman's Christian Temperance Union)'를 설립했다. 이후 금주법의 제정을 위해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될 단체였다. 여성 참정권 운동(Suffragette)과 금주법 청원 운동은 궤를 같이 했다. 그들은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공립 교과서에 금주 교육 메시지를 싣는 대가로 리베이트를 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아이들은 일주일에 세 번, 학교에서 금주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남자들의 사회 생활에 있어 술은 매우 중요했다. 술집(Saloon)을 중심으로 사교와 모임, 정보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특히 이민자들에게 술집은 고된 노동의 일상을 달래주는 활력소였다. 노동자 계층과 중산층 백인 개신교도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자신들만의 술집을 가지고 있었다. 포주와 깡패, 정치인들도 술집을 끼고 돈을 벌었다. 곳곳에서 알콜 중독자들이 쏟아져 나왔고, 술은 곧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많은 이들은 술집을 없애는 것을 그 해결책으로 생각하게 된다.

  '캐리 네이션(Carry Nation)'이란 이름의 여성이 포문을 열었다. 네이션은 매우 기구한 인생 이력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는 정신병으로, 첫 남편은 알콜중독으로 죽었다. 재혼은 이혼으로 끝났다. 자신의 고통스런 삶이 모두 '술' 때문이라 생각한 네이션은 기도 중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모든 술집을 없애는 것'이었다. 네이션의 무기는 '손도끼(hatchet)'였다. 네이션은 가는 술집마다 닥치는 대로 깨부수었다. 네이션이 사는 캔자스주에서는 이미 금주법이 실행되고 있었으나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그것을 네이션은 진짜 실행으로 보여주었다. 체포와 석방이 반복되는 동안 네이션의 이름은 열광과 비웃음을 동시에 받는 대명사가 되었다.

  1893년, 목사 Howard  Russell이 'The Anti-Saloon League'를 조직한다. 성공회를 제외한 개신교 교파들의 금주 연합 단체였다. 루터파 교회들은 참여를 거부했다. 독일계 개신교도들에게 '맥주'를 죄악시한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었다. 기민한 조직가이며 행동가였던 Wayne Wheeler는 안티 살롱 리그를 이끌며 정치적 힘을 키워나갔다. 맥주 제조업자들의 힘은 갈수록 커졌다. 맥주 제조업자 Adolphus Busch는 대통령을 친구로 둘 정도였다. 그러자 한편에서는 술이 이민자들의 문화이며 미국적인 것이 아니라는 반감의 정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13년에 이르는 기간에 금주법에 찬성하는 주들이 점차 늘어났다.

  1차 세계 대전은 미국 내 반독일 정서에 불을 붙였다. '독일' 딱지가 붙은 모든 것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독일계 학교가 파괴되었고, 심지어 독일 견종 닥스 훈트가 돌에 맞아 죽는 경우도 빈번했다. 맥주 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그러나 금주법으로 향하는 여정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우선 48개주의 헌법 제정 청원이 있어야 했다. 하원과 상원에서는 제적 인원 3/2의 찬성표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그 어려워 보이는 과정은 마침내 1919년에 마침표를 찍었다.

  금주법을 명시한 수정헌법 18조는 1년 후인 1920년부터 시행될 예정이었다. 과연 그 법은 정말로 시행될 것인가? 많은 미국인들은 모든 것이 잘 굴러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법을 제정하는 것과 현실에서 적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미국인들의 낙관적인 감각과는 달리 그들 앞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 출처: pbs.org   캐리 네이션을 풍자한 만평과 금주법의 의회 통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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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모어 레너드가 수정주의 웨스턴(Revisionist Western)에 드리운 빛;

Hombre(1967)와 Valdez Is Coming(1971)   


*이 글에는 두 영화의 결말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1886년 3월, 아파치족의 위대한 전사이며 지도자였던 제로니모(Geronimo)가 미군 토벌대의 조지 크룩(George Crook) 장군에게 붙잡혔다. 인디언 전쟁(American Indian Wars)은 막바지에 달했다. 미군은 제로니모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했으며, 결국 제로니모와 부족민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포로들을 인계하는 과정에서 미군은 아파치 부족 사이에서 남다른 외모의 소년을 발견한다. 소년은 인디언의 복식을 하고 있었으나 백인임이 분명했다. 아파치족에게 납치되어 그들과 함께 지낸 것처럼 보였다. 미군은 소년을 데려가서 헤어진 가족과 만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소년은 완강히 거부했다. 자신은 아파치족을 떠나지 않겠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소년의 이름은 Jimmy Mackin, 나이는 12살이었다. 소년이 아파치 인디언들에게 납치당한 것은 1885년 8월, 함께 있었던 17살 형은 죽었다. 소년이 인디언들과 함께 지낸 시간은 고작 6개월이었다.

  그 사건은 작가 엘모어 레너드(Elmore Leonard)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소설 집필에 착수했고, 1961년에 'Hombre'를 내놓았다. 마틴 리트(Martin Ritt) 감독은 그 소설을 가지고 폴 뉴먼을 주연으로 영화를 찍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어두운 피부색의 인디언으로 분장한 폴 뉴먼이 등장한다. 이 특별한 외모의 남자를 결코 인디언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의 '푸른 눈'에 있었다. 원작에서도 주인공 존 러셀은 푸른 눈(blue-eyed)을 가진 백인으로 나온다. 이렇게 원작이 있는 영화를 볼 때, 각색 과정에서 생략된 서사의 맥락을 파악하는 일은 다소 번거롭고 까다롭기까지 하다. 그런 경우에는 할 수만 있다면 원작을 구해서 보는 것이 낫다. 엘모어 레너드의 이 소설은 번역본이 없어서, 영문본의 e-book을 찾아서 읽었다. 'Valdez Is Coming(1971)'의 원작도 엘모어 레너드의 동명 소설이다. 그 소설도 그렇게 구해서 읽었다.

  두 소설 모두 단편 보다는 좀 더 긴, 중단편 정도의 분량으로 매우 간결하고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서부극과 추리 소설의 대가였던 엘모어 레너드의 문체는 번역기의 어설픈 품질을 뚫고 나와 독자의 마음을 파고든다.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영화 보다 소설이 더 재미있고 강렬하다고 느꼈다. 그가 소설 'Hombre(1961)'와 'Valdez Is Coming(1970)'을 내놓았던 시절은 미국 사회의 격변기였다. 흑인 민권 운동을 비롯해 여성주의와 반전 평화 운동이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역사와 문화 연구에 있어서도 이른바 '수정주의적 관점(revisionism)'이 새롭게 부상한다. 고착화된 기존의 시각에서 탈피해서 다각적인 면으로 현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영화와 소설에서도 포착되었다. 엘모어 레너드는 자신의 주특기인 서부극 소설에서 바로 그런 수정주의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소설 'Hombre'의 주인공 존 러셀은 11살에 아파치족에 납치되어 17살까지 인디언과 함께 지낸 인물로 나온다. 실존 인물 지미 맥킨의 6개월은 그렇게 러셀이 보낸 6년이 되었다. 6개월을 인디언과 함께 살았던 맥킨이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동화되었다면, 소설 속 러셀은 외양만 백인이다 뿐이지 그 내면은 인디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 존 러셀의 그러한 내력은 생략되어 있다. 그가 어떻게 '옴브레(hombre; 스페인어로 '사나이', '남자'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은 17살에 가족 곁으로 돌아간 러셀이 적응을 하지 못하고 떠돌았을 때, 미군 기병대와 함께 하며 노새 짐꾼으로 살았던 시절에 얻었던 별칭이었다. 

  영화의 도입부, 인디언 말몰이꾼으로 살던 러셀은 부친의 부고 소식을 듣는다. 그의 아버지가 상속 재산으로 남긴 하숙집을 처분하기 위해 러셀은 어쩔 수 없이 백인 사회로 돌아온다. 다시 백인의 외모를 되찾았지만, 그에게는 '인디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인디언들과 그들의 땅임을 아는 러셀은 집을 처분한 돈으로 말들을 사려고 한다. 그 일을 위해 러셀은 먼 길을 떠나야만 한다. 마을을 떠나는 역마차에는 러셀과 하숙집 여주인 제시, 하숙집에 머물던 젊은 부부 도리스와 빌리, 페이버 박사와 그 아내 오드리, 그리고 수상쩍은 남자 그라임즈가 오른다.

  마차 안에서 러셀이 인디언들과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페이버 박사는 불쾌감을 표시한다. 한편, 그라임즈는 본색을 드러내며 자신의 갱단과 함께 박사의 돈 가방을 강탈하려고 든다. 러셀의 빠른 총격으로 그라임즈와 갱단은 내쫓기지만, 박사의 아내 오드리가 끌려간다. 박사에게 돈 가방과 아내를 교환하자며 제안하는 그라임즈. 그러나 박사는 결코 돈 가방을 내놓을 생각이 없다. 잡혀간 여자를 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힌 러셀과 일행, 과연 이 여정은 어떻게 끝날 것인가...

  페이버 박사의 돈 가방에는 그의 과거가 들어있다. 인디언 보호 구역에서 정부 관리로 일했던 그는 보호 구역으로 들어오는 물품 액수를 속여 횡령했다. 보호 구역의 인디언들은 자체적으로 식량을 조달할 수가 없어서 정부의 공급에 의존해야만 했다. 터무니 없이 부족한 양으로 공급되는 식량에 인디언들은 늘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런 식량을 가지고 박사는 부정 축재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마차 안에서 나눈 약간의 대화를 통해 러셀은 박사의 돈이 동족 인디언들의 고통과 맞바꾼 것임을 알아챈다. 그러므로 그는 그라임즈가 박사의 돈을 노리고 일행을 위협할 때, 거기에 개입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막 한 가운데에서 길을 아는 사람은 러셀 한 사람뿐이다. 거기에다 박사의 아내가 그라임즈의 손에 있다. 러셀은 어쩔 수 없이 일행과 함께 한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목숨을 건 것임을 직감한다. 아내의 안위 보다 돈 가방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박사의 탐욕은 이 사건에서 국외자인 러셀의 고뇌와 명백하게 대비된다. 엘모어 레너드는 '서부'라는 물리적 공간을 윤리적 가치가 충돌하는 정신적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악당 그라임즈, 국고 횡령범 페이버 박사, 그리고 한 사람이 더 있다. 마을의 보안관 프랭크이다. 그는 쥐꼬리만한 급료를 받는 보안관의 삶을 내던지고 돈 때문에 강도로 돌변한다.

  엘모어 레너드는 'Valdez Is Coming'에서도 그러한 윤리적 주제를 또 다른 방식으로 변주한다. 멕시코와 인접한 국경 지대 마을의 보안관 발데즈는 총잡이들이 집결한 현장에 출동한다. 지역의 유지이며 목장주인 태너는 탈영병 흑인이 사람을 죽였다면서 사적으로 처벌할 기세이다. 발데즈는 어떻게든 참사를 막으려고 흑인에게 다가가지만, 총잡이 데이비스가 총을 쏘아대는 통에 발데즈는 예기치 않게 흑인을 죽이게 된다. 죽은 흑인에게는 곧 아이를 낳게 될 인디언 아내가 있었다. 자신이 죽인 흑인이 무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발데즈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현장에 있었던 목장주 태너와 마을 유력 인사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발데즈. 그는 인디언 미망인을 위한 돈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런 그의 청원은 거부되고, 마침내 발데즈는 행동에 나서는데...

  에드윈 셔린(Edwin Sherin) 감독의 첫 영화 연출작인 'Valdez Is Coming(1971)'에서 발데즈는 버트 랭카스터가 맡았다. 멕시칸으로 보이기 위해 랭카스터는 피부색을 어둡게 하는 분장을 해야만 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늙고 힘 없어 보이는 마을 보안관을 연기하는 랭카스터를 보며 팬들을 물론이고 당시 비평가들도 뜨악했던 모양이다. 거기에다 이 영화에는 속시원한 총싸움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발데즈는 태너와 정면으로 대결하는데, 결국 그들은 서로를 겨눈 총을 내려놓는다. 기존의 서부극에 익숙한 영화팬들 입장에서 이 결말은 무척 맥아리 없게 여겨졌을 것이다.

  결국 죄없는 흑인을 죽인 사람은 발데즈인데, 왜 그는 그 죽음의 책임을 목장주 태너와 마을 사람들에게 묻는가? 태너는 게이 그린이라는 여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여자의 전남편이 살해되었는데, 그 살인 용의자로 흑인 존슨이 지목된다. 태너는 자신과 자신의 아내가 될 여자가 그 어떤 범죄의 의혹에 휘말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희생양이 필요했다. 총잡이를 고용해 체포를 한다고 난리를 피우는 과정에서 흑인은 죽음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발데즈는 태너에게 자신이 생각한 미망인의 연금 200달러 가운데 100달러를 요구한다. 어떤 식으로든 그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발데즈는 태너와 그 부하 총잡이들에게 모욕과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묶여서 사막을 걸어간다. 그 과정은 명백하게 성서 속 예수의 수난 장면과 이어져 있다. 엘모어 레너드는 소설 'Valdez Is Coming'에서 기존의 서부극에서 배제되었던 주변부 인물들을 부각시킨다. 남북 전쟁이 끝나고 흑인들은 자유민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불가촉천민(outcast)'과도 같은 존재였다. 인디언들은 그들과 비슷한 처지로 백인들에게 내쫓기고 무차별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소설 속에서 백인 목장주의 윤리적 정당성을 얻기 위한 명분에 희생되는 사람은 흑인 탈영병이며, 인디언 아내는 미망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인디언 미망인의 연금을 위해 기필코 돈을 받아내려는 발데즈는 멕시칸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윤리적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오랫동안 들지 않았던 총을 든다.

  그렇다고 해서 발데즈가 매우 고결하고 도덕적인 인물인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영화 속에서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발데즈가 변모하는 순간은 그가 자신의 침대 밑에 보관된 짐을 풀 때이다. 먼지가 더깨처럼 얹힌 누런 천을 벗겨내자 한 장의 사진과 총들이 나온다. 사진 속의 그는 미군 기병대 복장을 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아주 짧게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소설 속에서는 그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George Crook 장군이 이끄는 기병대의 정찰대원으로 활약했다. 크룩 장군은 인디언 전쟁에서 매우 놀라운 전적을 기록했는데, 그것은 장군이 지리에 밝은 멕시칸을 비롯해 인디언들을 정찰대원으로 썼기 때문이다. 발데즈는 그 전투에서 인디언들을 죽이는 데에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다시 그 기병대의 군복을 입은 발데즈는 태너와 부하 총잡이들 수십 명을 상대로 싸움을 선포한다. 자신을 쫓아온 하수인 총잡이를 반쯤 죽게 만들면서, 태너에게 전할 말을 일러준다.

  "Valdez is coming!"

  어쩌면 발데즈에게는 인디언들의 죽음에 대한 과거의 부채의식이 남아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부채의식과 윤리적 의무감은 'Hombre'의 백인 인디언 러셀에게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러셀은 그라임즈와의 마지막 담판에 나선다. 돈 가방을 들고 박사의 아내와 맞바꾸기로 한 자리에서 그가 가지고 간 가방에는 돈 대신에 천뭉치가 들어있었다. 그는 결국 진정한 자신의 고향인 아파치족의 땅에 돌아가지 못한다. 왜 그는 진짜 돈 가방을 들고 가지 않았을까? 페이버 박사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것과 박사가 횡령한 돈을 동족인 인디언들에게 돌려주는 것, 그 두 가지를 위해 러셀은 목숨을 건 도박을 감행한다. 그렇게 백인들이 저지른 패악과 범죄의 속죄는 '인디언의 영혼을 가진 푸른 눈의 백인'의 희생으로 이루어진다.

  영화 'Hombre'의 엔딩 크레딧과 함께 올라가는 사진에는 인디언처럼 보이는 소년의 모습이 있다. 그가 바로 작가 엘모어 레너드에게 영감을 준 실존 인물 지미 맥킨이다. 당시 크룩 장군 휘하의 사진사가 찍은 그 사진 속 인물 맥킨은 결국 부모에게로 돌아가서 평범한 삶을 살다 갔다. 작가의 손에 의해 재창조된 맥킨의 캐릭터는 러셀이 되었다. 폴 뉴먼은 비밀스런 과거를 지닌, 그로 인해 고통받는 러셀이란 캐릭터를 절제된 연기로 보여준다. 그의 존재 자체가 영화 'Hombre'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Hombre'와 'Valdez Is Coming'은 원작의 일부분이 생략된 서사적 빈틈에도 불구하고, 기존 서부극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또 다른 구부러진 길이 있음을 알려준다. 두 편의 영화 모두 인디언 전쟁이 끝난 1890년대의 서부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 속 서부의 공간은 어떤 면에서 1960년대 미국 사회의 반영이기도 하다. 진정한 평등과 자유, 평화를 외치는 다양한 목소리가 분출하던 시대에 엘모어 레너드는 서부 역사에서 소외된, 가장자리에 있는 이들의 존재를 불러낸다. 그렇게 그가 새롭게 써낸 서부극 소설은 '수정주의 웨스턴'에 독특한 빛을 드리운다. 



*사진 출처: facebook.com      'Hombre(1967)'의 폴 뉴먼



**사진 출처: tumbral.com   'Valdez Is Coming(1971)'의 버트 랭커스터
이 영화는 스파게티 웨스턴의 주요 촬영 장소인 스페인의 남부 지방에서 촬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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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씩 EBS에서 하는 '비즈니스 리뷰'를 본다. 다양한 분야의 비즈니스 전문가들이 나와서 업계의 현황과 주요 흐름을 짚어준다. 나 같은 마케팅 문외한인 사람도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초간결 마케팅 강의쯤 되겠다. 거기에서 들은 인상적인 일화가 있었다. 그날의 주제는 아마도 '고객의 필요를 파악하라'였던 것 같고, 예시로 든 것이 일본 신칸센의 어느 판매원 이야기였다.

  중년의 이 여성 판매자는 신칸센(
新幹線)에서 최고로 높은 매출을 기록하는 판매왕이었다. 정확한 액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기차 한 량(輛)에서 파는 매출액이 대략 100만원을 웃돈다고 했다. 그러니까 기차 한 대를 열 량으로 보면 한 번에 천만 원대의 물건을 파는 이였다. 어떻게 이 판매자가 그런 매출을 올릴 수 있었을까? 그는 승객이 무언가를 주문하기 전에 제안을 했다. 예를 들어 아기를 안고 가는 여성 승객이 있으면 이렇게 말했다.

  "샌드위치는 아기를 안고도 한 손으로 먹을 수 있어요. 시장하시면 샌드위치를 선택하는 것은 어떨까요?"

  아기 엄마들이 애를 보느라 식사를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관찰하고 그런 제안을 궁리해낸 것이다. 이 판매자가 올리는 기록적인 매출에는 고객의 필요를 끊임없이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그것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객의 필요에 응답하고자 하는 진정성에서 나온 것이다. 아니, 물건 팔아먹는 데도 진정성이 필요한가? 장사를 하는 이들, 그리고 기업의 주요한 목적은 이윤을 내는 것이므로 어떻게든 고객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오래전에 배우다가 그만둔 중국어를 다시 독학해 보려고 학습 애플리케이션을 이것저것 깔아보았다. 대부분 무료로 제공되는 앱들은 그 속을 들여다보면 무료가 아니라, 광고로 범벅이 된 짜투리 컨텐츠를 제공해놓고 유료 결제를 유도하는 식이었다. 당신들이 우리 앱을 제대로 쓰려면 돈을 내야해요, 아님 광고를 열심히 봐주시던가... 앱 개발자가 자선사업가가 아니라는 점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사용자들에게 합리적인 제안을 해야한다. 그런데 이건 아예 앱을 열자마자 광고를 들이부으면서 '이래도 공짜로 우리 앱을 쓸래?' 하는 것을 보고 아주 질려버렸다. 내가 본 어학 앱들 거의 대부분이 그랬다. 나는 그런 앱들이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사용자의 돈을 빼내기 위해 혈안이 된, 오만 광고를 퍼붓으며 짜증을 선사하는 방식.

  '우리는 당신의 어학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에 관심이 있습니다'가 아니라, '우리는 당신이 유료 결제를 하도록 만드는 컨텐츠 제작에 더 관심이 있답니다'라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그런 앱들... 무료로 그 앱을 쓰면서 너무나도 좋고,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고객은 진심으로 지갑을 열 것이다. 고객을 함께 성장해 나가는 진정한 파트너로 여기는 회사가 잘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마케팅을 1도 모르는 나의 생각은 그러하다.

  아, 물론 치열한 기업 마케팅의 세계에서 진정성이 항상 성공을 담보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을 밑바닥에 깔고 가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문득 글쓰기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정말로 좋은 글은 무엇일까? 늘 마음으로 고민하는 주제이다. 내가 가진 어떤 글쓰기 비법 책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 '작가는 교사이자 코미디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그 말은 좋은 글에는 유익함과 재미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동안 내가 써왔던 영화글들에서 독자가 건질만한 나름의 유익한 지식들이 있었겠지만, 재미는 글쎄... 내가 코미디언이 되어 사람을 웃게 만드는 재주가 없다는 점은 잘 알고 있다. 아마도 그런 재주가 있는 이들이 베스트셀러 작가이겠지.

  한 해동안 꾸준히 블로그를 찾아준 독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그다지 재미는 없는 글이지만, 글을 쓰는 이로서 '진정성'을 글에 담기 위해 늘 노력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새롭게 시작되는 내년 한 해는 그 진정성과 함께 '재미'도 더할 수 있는 그런 영화글을 쓰고 싶다. 독자 여러분들 모두에게 2022년이 복된 한 해가 되길 바라며 글을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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