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t Call 이후의 세상
2편: A Nation of Scofflaws 1시간 50분
1920년 1월 16일, 마침내 금주법이 시행되었다. 발효 알콜의 제조, 판매, 운송을 금지하는 수정헌법 18조는 미국을 알콜 중독의 재앙에서 구할 법으로 여겨졌다. 금주법의 시행 이전에 술집들은 마지막 재고 세일 간판을 내걸었다. 'Last Call'이라는 간판 앞에 사람들은 줄지어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부자들은 선견지명을 가지고 엄청난 술을 사들여 창고에 쌓아두었다. 위스키 증류소를 비롯해 양조장도 문을 닫을 채비를 했다. 수많은 이들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금주법은 주류 관련 산업 전체의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수정헌법 18조에는 '취하게 하는 음료'라고 명시가 되어있을 뿐, 알콜 도수를 명시하지 않았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할 후속 법안이 필요했다. 법안을 입안한 의원의 이름을 딴 'Volstead Act'는 알콜 도수를 0.5%로 제한했다. 법안을 실제로 기획한 이는 'The Anti-Saloon League'의 웨인 휠러였다. 그는 미국에 남아있는 술 한 방울까지도 다 말려버릴 기세였다. 그러나 금주법의 본격적인 시행에서도 예외는 있었다. 의사들은 치료 목적에 한해 술을 처방할 수 있었다. 종교적인 목적의 술 소비도 인정되었다. 가톨릭의 미사주, 유대교의 제례에 쓰이는 술이 그러했다. 의사들은 술 처방전 장사로 갑자기 돈방석에 앉았고, 유대교는 급증하는 신자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웃지못할 촌극이었다.
많은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금주했으나, 술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의 대도시 뉴욕은 곧 밀주업자와 무허가 술집의 천국이 되었다. 뉴욕은 캐나다 국경과 가까워서 술의 밀수가 상대적으로 쉬웠다. 밀주업자들은 공무원과 경찰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뇌물을 살포했다. 볼스테드법의 더 엄격한 뉴욕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Mullan-Gage Law'가 만들어졌다. 4000명이 넘는 이들이 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으나, 뉴욕 시민들은 금주법 자체에 냉소적이었다. 1923년에 그 법은 폐지되었다. 뉴욕은 그렇게 일찌감치 금주법과 멀어졌다.
미국 전역의 법원에는 판결을 기다리는 금주법 위반자들이 넘쳐났다. 미국 변호사들의 44%가 금주법 관련 소송에 매달렸다. 판사들은 늘어난 업무량에 진저리를 쳤고, 경찰들은 뇌물에 취약해졌다. 밀주업자들이 뿌리는 뇌물은 그 직업군의 평판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그럼에도 단속은 중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정부는 단속에 쓸 재정이 별로 없었으므로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자 연방 정부가 나섰다. 당시 대통령 하딩은 자신의 의지를 보여줄 여성 전사를 임명했다. 법무부 차관보로 임명된 Mabel Walker Willebrandt는 1921년에 장관이 되어서 열정적으로 금주법 단속에 임했다.
빌레브란트에게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밀주는 미국 전역에서 이루어졌다. 탄광과 협곡, 농장, 주차장, 어느 곳에서도 밀주업자들은 술을 만들었고, 사람들은 'speakeasy'라고 불리는 비밀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빌레브란트의 요원들은 그 모든 곳을 누비며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빈약한 급여와 뇌물에의 유혹, 밀주업자들의 저항은 연방 단속 요원들에게 걸림돌이었다. Frank Allen Mather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밀주업자 단속에 나섰다가 총을 맞고 사망했다. 다큐에서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회고한다.
"나중에 금주법이 폐지되었을 때, 저는 그 모든 것이 낭비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금주법의 시대를 일생일대의 사업 기회로 이용한 이들이 등장했다. 시애틀 경찰이었던 Roy Olmstead는 술이 엄청난 돈을 벌어다줄 것임을 간파했다. 경찰직을 때려친 그는 곧 밀주 사업에 나섰다. 그가 뿌리는 뇌물에 경찰들은 자발적으로 부하가 되었다. 옴스테드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 또 있었다. 변호사 George Remus는 처음에는 밀주업자들의 소송을 맡아서 일하다가 밀주업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금주법의 헛점을 발견했다. 금주법 이전에 만들어진 보세 증류주는 의약품 목적의 판매가 가능했다. 그는 밀주 판매를 위한 제약 회사를 설립하고 증류소를 사들였다. 엄청난 돈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신시내티로 근거지를 옮긴 그는 곧 미국 밀주업계의 대부가 되었다. 그의 회사 직원은 무려 3000명에 달했다. 해외의 위스키 밀수도 큰 돈벌이가 되었다. 플로리다의 선장 William McCoy도 그렇게 떼돈을 벌었다.
갱단들은 금주법으로 새로운 어둠의 제국을 구축해나가고 있었다. 필라델피아는 유대인 갱단이 장악했다. 뉴욕에서는 여러 갱단들의 싸움으로 12년 동안 수백 명이 죽어나갔다. 그리고 시카고, 거기에는 'Scarface' 알 카포네가 있었다. 그는 밀주 사업을 비롯해 도박과 매춘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위해 시카고 시장 선거에도 개입했다. 이른바 정치 깡패의 일도 겸업했다. 시카고는 알 카포네의 도시가 되어갔다. 무려 시카고 경찰의 60%가 주류 밀매에 연루되어 있었다.
술로 흥했던 옴스테드와 리무스에게는 쓰디쓴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1925년에 금주법 위반으로 기소된 리무스는 감옥에 갇혔다. 남편이 감옥에 있는 동안, 리무스의 아내는 연방 요원 Franklin L. Dodge와 바람을 피우며 리무스의 재산을 비밀리에 처분했다. 출소한 리무스는 아내를 쏘아 죽였다. 살인 혐의로 체포된 리무스의 재판은 미국민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는 배심원단의 무죄 평결을 받아 풀려났다. 옴스테드도 기소되었다. 연방 정부는 도청 자료를 근거로 제시했으나, 옴스테드는 개인의 사생활 보장의 권리가 침해당했다며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Olmstead v. United States 소송에서 옴스테드는 5대 4로 승소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감옥에서 4년을 살다 나왔다.
이제 사람들은 금주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술을 마실 수 없게 되자 공업용 알콜로 만들어진 독주를 마시다 죽음에 이르는 이들이 금주법 시대에 1만 명에 달했다. 그 법은 온갖 위선과 범죄, 부패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미국에는 금주법 지지자들(Dry)의 세력이 우세했다. 그렇지만 폐지론자들(Wet)은 조금씩 자신들의 목소리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Dry vs. Wet, 마침내 그 전쟁을 끝내기 위한 비전을 가진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사진 출처: pbs.org '마지막 술'과 '버려지는 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