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은 독일 나치즘의 모태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노동당이 결성된 해였다. 이것은 후에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당으로 거듭나면서 히틀러의 확고부동한 통치기반이 되었다. 1920년에 제작된 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이 나치즘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지나친 추측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이후 독일 사회가 겪게 될 정치 사회적 격변을 예고하는 징후가 나타나 있다. 영화에 나타난 ‘밤’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제인이 밤에 몽유병자 케사르에게 납치당하는 장면은 마치 헨리 푸셀리의 그 유명한 그림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밤’은 침입, 강탈, 납치, 살인과 같은 악행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그것을 쉽게 은폐시킬 수 있는 시간적 배경이 된다. 칼리가리 박사는 밤의 악몽의 주재자이며 모든 악행의 중심에 서있지만, 직접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조종자, 감시자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박사가 원장으로 있는 방사형으로 설계된 정신병원은 푸코가 말한 ‘판옵티콘(Panopticon)’의 전형이며, 이것은 이후 독일 국민들이 처하게 될 국가적 감시와 처벌을 예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칼리가리 박사를 히틀러로 볼 수 있을까? 대답은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박사가 사랑한 ‘밤’을 히틀러 또한 사랑했을 것이다. 그는 독일 사회에 ‘밤’이 드리워지길 기다렸고, 마침내 그 ‘밤’이 오자 자신이 생각한 모든 것을 구현해내었다. 그런 의미에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전쟁과 살육의 광풍이 혹독하게 휘몰아쳤던 히틀러 치하 독일의 ‘밤’에 대한 전주곡처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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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10-09 13:5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수긍이 가는 멋진 해석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극의 시작은 다소 낯설다. 김 순경 역의 배우가 관객들에게 주의사항을 당부하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규회가 등장하면서 바로 극이 시작되어 버린다. 관객에게는 일상의 공간에서 곧바로 연극적 공간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동과도 같은 체험인 것이다. 그런데 규회라는 인물의 차림새가 심상치 않다. 온몸이 물에 젖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그는 김 순경에게 길이 어디 있는가를 묻는다. 

 

  연극은 황 마담과 엄 사장을 비롯해 호수 다방 주변 인물들의 걸쭉한 입담을 통해 심각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은 듯 마구 흘려놓는다. 그들의 대화 속에는 정신지체 장애자인 명숙이 섬 주민들의 그릇된 욕망의 희생자로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한 것에 대해서 그 어떤 동정심도 들어가 있지 않다. 명숙의 죽음과 그 사촌인 규회의 울분은 오히려 조롱과 멸시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마는데, 이것은 이 연극이 힘없고 소외된 인생들이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보듬는 데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음을 보여준다. 연극은 그 보다는 엄 사장의 입에 붙은 ‘개새끼’라는 욕설처럼 어떻게든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허세를 부리는 3류 인생들의 삶의 방식을 긍정적이며 생동감 넘치는 것으로 표현하는데 주력한다. 이러한 연출의 의도는 극의 결말에 가서 확연히 드러난다. 조합장에 당선된 엄 사장의 허장성세와 주변 사람들의 빠른 속물적 변모는 마치 섬의 번영과 부흥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섬과 뭍, 가해자와 피해자,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패배한 자와 승리한 자, 이러한 익숙한 대비구도는 극의 선명한 전개를 부각시키지만 동시에 그 한계마저도 끌어안고 있다. 관객은 그러한 명확한 구도가 주는 친근함과 안정감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함과 진부함도 동시에 체험한다. 그래서 극의 초반에 나온 규회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달라”는 절규에 가까운 대사는 어떤 면에서는 이 연극이 지닌 구조적 한계에 대한 자탄처럼 들린다.

 

  연극은 그 ‘길’에 대해 침묵하는 대신, 결말부분에 이르러 엄 사장을 비롯해 주변 인물들의 삶의 변화를 극적 반전으로 제시하며 서둘러 모든 갈등과 문제들을 봉합하려 한다. 이러한 미진한 결말과 함께 아쉬운 부분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정신지체 장애 여성인 명숙에 대한 묘사인데, 작가의 시선은 여성성과 열등한 것에 대해 노골적인 멸시와 불쾌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 모든 점을 종합하여 판단하여 볼 때, 연극 <선착장에서>는 익숙한 것이 주는 진부함과 친근함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경주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경계를 벗어나는 것은 일탈인 동시에 모험이기도 하다. 약간의 용기가 있다면 그 경계를 벗어나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연출자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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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다 보고나서 왜 제목이 "엘리펀트"일까가 궁금해졌다. 서양의 우화에서 '거실의 코끼리'는 피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을 뜻하는데,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극심한 폭력의 문제가 그러한 것일 수 있다는 것. 또 한가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이야기에서 나온 것처럼 하나의 사물, 사태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관한 것이라는 것. 어떤 것이 감독의 의도에 더 적합한지를 알아보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미국 콜럼바인 고교의 총기 난사 사건은 미국 사회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감독 마이클 무어에게도 이 사건은 하나의 화두가 되어 "볼링 포 콜럼바인"이라는 다큐를 만들게 했다. 마이클 무어가 바라본 이 사건의 본질은 미국 사회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사회에 대한 불만이 사람들을 절망과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었고, 그 결과 사람들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총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그것이 가져오는 폭력과 살상에 무감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어의 분석은 총기 난사 사건의 주범들의 범행 당일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좀 더 큰 사회학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구스 반 산트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보았을까? "엘리펀트"는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좋은 답을 제공해줄 것 같지만 사실 이 영화는 그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없다. 감독은 단지 "보여줄 뿐"이다. 카메라는 피해자와 가해자 학생들의 일상을 매우 건조하고 담담하게 훓어나간다. 서로 겹치는 시점 쇼트나, 롱테이크 같은 기법의 사용은 흥미있긴 해도 그다지 인상적인 것도 아니다(어떤 면에서는 졸립게 만든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영화는 후반부에서 가해자 학생들의 시점으로 전개되면서 여러가지 단서들을 보여준다. TV에서 나오는 히틀러와 나치에 관한 뉴스, 그들이 즐기던 인명 살상 컴퓨터 게임, 자주 보는 인터넷의 총기 구매 사이트 등.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것도 강조되어 있지 않고 그저 추측의 가능성만을 흘릴 뿐이다. 구스 반 산트는 처음부터 관점이라던가 해석이라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그 대신에,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했는지 섣불리 단정짓고 결론내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감독의 입장은 정치적으로 정당한 것일까? 그것은 어떤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문제화시키는 것에 비하면 매우 영리하고 세련되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작가의 태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작가란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하며, 자신의 작품으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어야한다.

  "엘리펀트"가 논란을 일으키는 지점은 바로 그곳이다. 서정적인 오프닝과 엔딩 신, 가해자 학생이 연주하는 평화로운 피아노 음악, 이런 것이 구스 반 산트의 작가적 관점이라면 더이상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그만의 독특한 시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사건의 본질을 직면하는 대신 유보하고 침묵함으로써 자신의 작가적 위치를 일정부분 포기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보여주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예술가는 그 이면의 진실을 응시하고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엘리펀트"가 나름대로 주목할 작품이기는 해도 보는 이의 마음 깊이 와닿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러한 부분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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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10-09 13:58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영화보고 리뷰 쓴 적이 있어요.^^ 이 영화에 대해 미국의 한 유명 평론가가 "무의미하고 무책임하다"고 말했데요.그런데 여기에 대해 감독인 구스 반 산트는 바로 그 무의미함이 자신이 의도한 것이라고 했답니다. 님의 글을 쭉 읽어보니 그 평론가가 그 한마디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는지 알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베리 베스트 오브 자클린느 뒤 프레
jacqueline du Pre (재클린 뒤 프레) 연주 / 워너뮤직(팔로폰)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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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 사람들에게 외로울 땐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다양한 나름의 해결책을 들을 수 있었지만 가장 인상적인 답을 해준 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헐리우드의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누군가 그 작가에게 외로울 땐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답했단다. “외로울 땐 시나리오를 쓰죠.”

 

 자끌린 뒤 프레의 음반을 들으면, 난 그가 외로울 때마다 첼로를 켰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불치병으로 고통받을 때, 사랑하던 사람이 곁을 떠났을 때, 이런저런 인생의 고비에서 어쩌면 그의 유일한 위로이며 희망은 첼로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외로움을 함께 할 무언가가 있는 사람은 그래도 고통스럽지만 행복하기도 할 것이다. 

 

  그가 연주하는 첼로는 편안하고 유려한 선율을 들려준다기 보다는 무언가에 호소하는 듯한 절절함이 느껴진다. 어떤 사람이든, 그의 굴곡어린 삶이든, 세상을 향해서든 자끌린은 첼로를 통해 외로움을 말해주려는 것 같다.

 

  자끌린은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세상을 떴다. 그러나 그의 연주는 세상에 남았고, 그것을 통해 나는 시간을 뛰어넘어 그의 외로움을 듣는다. 이 음반을 듣다보면 외로움이란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벼랑 끝에 선 막막한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도 첼로를 통해 자신을 응시할 수 있었던 용기를 지닌 한 사람의 삶이 나의 외로움에게 말을 건네고 위로를 전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음반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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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즈 1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9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종건 옮김 / 범우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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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의 문학 서가에서 늘 망설이게 했던 책들이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바로 그 책들이었다. 마치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거대한 산처럼 참으로 오래전부터 그 책들을 지나쳐왔다. 그러다 이번에 조이스의 “율리시즈”에 도전했다. 10권으로 번역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비하면 4권은 좀 수월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나 막상 읽기 시작하니 소설의 본문과도 맞먹는 엄청난 주해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비로소 “율리시즈”가 단순한 책이 아니라 거대한 수수께끼이며 책 읽기의 모험 그 자체임을 실감했다.

 

  조이스는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이 책에 쏟아 부었다는 생각이 든다. 파격적이고 탁월한 문체와 수사학적 실험들, 치밀하고 섬세한 묘사와 놀라운 문학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이 책이 20세기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불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율리시즈”는 그 책이 나온 이후의 문학 작품의 모든 것의 원형이 되는 요소들이 빠짐없이 들어있다. 내가 놀라고 열광해마지 않는 빼어난 현대 문학 작품들의 시작이 바로 그 책에서부터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학적 성취 이전에 “율리시즈”는 소설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독자가 난해하고 복잡한 글들 사이를 신나게 질주하게 만드는 이 책의 기이한 매혹이야말로 4권의 번역본을 전혀 긴 것이 아니라고 믿게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두 번씩 읽으면 그 빼어난 문체의 아름다움을 더 잘 느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율리시즈”를 읽는 것이 좀 버겁게 생각되는 독자라면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더블린 사람들”을 먼저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두 작품 모두 “율리시즈”를 이해하는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다’는 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은 직접 올라가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처럼 “율리시즈”도 읽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무수한 놀라움들이 감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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