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두치(咽頭齒) 9
꿈을 꾸었다. 중기는 어른 둘이 겨우 탈 수 있는 경차 안에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아버지의 표정을 창백하고 침울해 보였다. 꿈속에서라도 중기는 아버지는 돌아가신 분이니 저런 얼굴로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중기를 바라보는 대신에 그저 앞쪽의 어느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기도 아버지가 말을 거는 것이 무서웠다. 돌아가신 분이 꿈에 보이는 것은 어쨌든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중기는 그 말에 무어라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머니와 동생은 손을 잡고서 어딘가를 가고 있었다. 중기는 자신도 차에서 내려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외로울 것 같았다. 그래서 중기는 차마 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아버지, 저승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중기는 그렇게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저승은 마음에 들어서 사는 곳은 아닐 테지. 전화나 자주 하렴. 분명 아버지의 입은 닫혀 있었지만, 중기는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는 그새 복화술이라도 배운 것일까? 아버지의 얼굴이 점차 희미해지면서 부서지는 하얀 가루처럼 조수석에 내려앉았다. 마침내 아버지가 앉았던 자리에는 빛바랜 은색의 작은 열쇠만 남았다.
중기는 그 열쇠가 어디에 맞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 열쇠는 도무지 써먹을 수 없는 그런 열쇠일지도 모른다. 착하지만 무능하기 짝이 없었던 아버지가 남겨준 것이 거의 없었던 것처럼. 중기는 아버지의 장례 절차를 마치고 상속받을 재산이 있는지 행정 조회 서비스를 통해 샅샅이 살펴보았다. 본적지의 선산 골짜기에 쓸모없는 70평짜리 땅이 있었다. 이듬해에 나온 그 땅의 재산세 고지서 금액은 12만 8천 원이었다.
"수도회에서 이 요양원을 운영하는 것이 많이 어렵습니다."
전번에 어머니를 보러 갔을 때, 중기는 원장 수녀의 면담 요청을 받았다. 수녀원에서 요양원을 건립할 때, 보증금 예치 방식으로 신청자를 받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저조한 금리 때문에 운영이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일부 보증금을 돌려줄 테니, 매월 이용료를 내는 방식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중기는 처음에 예치한 1억에서 돌려받는 5천만 원으로 매달 180만 원이나 되는 돈을 얼마나 낼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어머니는 얼마나 더 사실까? 주기적으로 기흉(氣胸)으로 고생하는 동생보다 어머니가 더 오래 살 것 같았다.
"사람 앞일은 아무도 모른다지만..."
아버지의 꿈을 꾼 날 저녁에 중기가 분리수거하러 나갔을 때, 영천 아줌마가 중기를 보더니 그렇게 운을 떼었다. 중기는 수선스러운 그 아줌마가 영 마뜩잖았다. 원래대로라면 페트병과 일반 플라스틱을 정확히 구분해서 수거함에 넣었을 텐데, 그냥 얼른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대충 던져넣었다. 그런 중기를 보면서 영천댁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글쎄 5년을 누워만 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숨이 넘어갔다지 뭐요. 그 양반 혼자서 애들 키우기 힘드니 뭐 나라에서 무슨 혜택이라도 받았나 봐. 시흥의 17평 임대 아파트가 거저 떨어진 거야. 죽은 마누라가 남편과 애들 살렸지."
중기는 방짜 유기를 들고 어두운 복도에 서 있었던 박 차장의 음울한 얼굴을 떠올렸다.
"방짜 유기인지 뭔지 팔러왔었는데, 공무원 선생네도 찾아갔을까?"
영천댁이 중기의 얼굴을 힐끔 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중기는 눈을 마주치기 싫어서, 맥주캔을 손에 넣고 천천히 아귀힘을 주며 우그러뜨리고 있었다.
"딱 봐도 바가지 씌우는 게 분명해서 난 안 사줬거든. 그런데 이젠 뭐 그런 장사 안 해도 된다 그럽디다. 나라에서 뭔 계약직 일자리도 마련해줬다는 거야. 나 원 참. 그 뭐냐, 속담에도 있잖수.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어쨌든 팔리지도 않는 방짜 유기 장사도 끝이지."
사람의 죽음을 유용함으로 평가하는 것은 뭔가 내키지 않지만, 분명 박 차장 아내의 죽음은 그 가족에게는 쓸모가 있었다. 일주일 후에 중기는 작은 용달차 인부들이 박 차장네의 빈한한 살림살이를 차에다 꽉꽉 욱여넣는 것을 보았다. 토요일 오후였다. 중기는 여느 토요일처럼 맥 빠지는 소설 창작 강의를 듣고 오던 길이었다. 박 차장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희어지고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아내의 죽음에 슬퍼하는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중기는 약간의 소름마저 돋았다. 중기는 아주 잠깐, 저 남자가 어쩌면 아내의 죽음을 너무나도 간절히 원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