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마음 깊이 놀라움과 두려움도 느껴졌다. 정치 학습이라는 이 중대한 일이 문화대혁명 이후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순간도 느슨해진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편벽한 두메산골이라 해도 여전히 문화대혁명 때와 다르지 않았다. - P299

내가 책에서 읽은 문학작품의 이야기나 구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위대함과 풍부함, 비통함과 즐거움을 돌이켜볼 때, 내 고향 마을에는 그 수많은 작품이 표현하고 있는 것보다, 그리고 내가 내 소설 속에서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실하고 감동적인 일이 많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우매함과 둔함 때문에 그 마을에서 발견하고 감지할 수 없었던 진실도 많을 것이다. 나는 그 마을의 거리와 가옥들, 농지와 사계절,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사람들의 일상과 생로병사를 너무나 많이 봐왔다. 나는 그 마을의 일상과 중국화된 물질적, 물리적, 생리적 생활에 엄몰되어버려 물질과 물리, 생리를 초월하는 그 마을의 정신과 예술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30년 넘게 글을 써온 지금에 와서야 알고 보니 우리 고향의 그 마을 자체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이었다는 것을, 이 세상에 문학이 존재한 이래로 모든 성취를 다 합친다 해도 절대로 초월할 수없는 거작이라는 사실을 점점 깨닫는다. - P305

책을 읽거나 읽지 않는 것은 익숙함과 낯섦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 마을 사람들은 글을 읽을 수 있고 어느 정도의 문화도 갖추고 있지만 루쉰과 선충원, 샤오홍의 책을 읽지 않을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루쉰과 선충원, 샤오홍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와 인물들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고전 무협소설과 진융의 작품을 읽는 것은 자신들의 신변과 생활 속에 그런 이야기와 사건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환주공주」를 비롯하여 과거 궁중에서의 사건과 일화를 다룬 영화나 연속극을 보는 것은 그들이 꿈속에서도 그런 장면과 스토리를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익숙함과 낯섦에 따른 독서의 효과와 반응이 그 마을과 마을 사람들의 몸에 결정적 작용을 하는 것이다. - P309

그 마을의 독자들은 정말로 자기네 삶과 영혼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은 읽지 않는다. 읽을 마음도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자기 땅과 마을을 가진 모든 위대한 작가가 그 마을과 그 땅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이 보편적으로 읽히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헛되고 불가능한 일이다. - P309

영혼이 갈라진 사람은 자기 영혼의 피를 볼 수가 없다. 이는 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이다. ‘옌안문예좌담회에서의 연설‘의 가장큰 오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학예술로 노동자, 농민, 병사를 표현해내고 노동자, 농민, 병사들에게 그들의 책을 읽게 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구름과 연기의 운동이나 요란하게 울리다 멈춘 구호와 같아서 문학과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 P310

이제 30년이 넘는 글쓰기를 거쳐 나는 비로소 그 마을과 땅,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존재했는지, 무엇을 도모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선택하여 글을 쓰게 한 뒤로 내 글쓰기를 통해 그 마을,
그 땅이 중국과 세계의 중심이라는 이치와 존재를 증명하려 했을 뿐이다.
나를 선택하여 문학의 명예를 통해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임을 밝히는 증인이 되게 했던 것이다.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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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항상 존엄이 없는 생활 속에서 살아 있다는 존엄을 위해 노력해왔다. 이는 모든 보통 사람의 기본적인 바람이다. 이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바람이 하나 또 하나 쌓이면서 인류의 이상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 P263

존엄 없이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중국 인민들의 생존 현실이다. 따라서 중국의 문학작품들도 대부분 각종 문학적 양식으로 인간의 그 존엄한 삶이 아니라 중국인들의 존엄 없는 삶을 체현하고 있다. 삶이 이렇다보니 문학적 체현도 이럴 수밖에 없다. - P264

오늘날의 중국 사회에서 상업과 공업은 권력과 결탁되지 않으면 이윤과 자본, 자본의 축적을 실현할 수 없다. 오늘날의 중국에서는 법률이 인간 존엄의 근본이 아니라 권력이 모든 사람의 존엄의 근본이요 그 보장이다. 존엄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권력이 있는 삶을 사는 것과 같다. (중략) 이 세계에는 중국 작가들처럼 글쓰기에 있어서 권력에 대한 인식과 묘사에 그렇게 집착하는 나라와 작가들이 없다. 중국에는 작품에서 권력을 묘사하지 않는 작가가 없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중국 문학의 한 가지 특별한 현상이다. 왜 이렇게 문학이 집중적이고 보편적으로 사랑과 미움보다 권력에 집착하는 것일까? 권력이 바로 오늘날 중국의 모든 사람의 존엄에 대한 보장인 동시에 살인 무기이기 때문이다. 권력뿐만 아니라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그렇다. - P266

한마디로 말해서, 누구도 현실 앞에서 존엄하게 살고 있거나 생활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중국의 현실이자 사실이다. 또한 유일함이자 필연이기도 하다. 이처럼 존엄이 없는 삶이 중국에서는 매우 보편적일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운명으로 결정되어 있어 도피도 불가능하다. 그런 까닭에 이런 상황은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진다. - P267

중국 작가들이 존엄을 지닌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속적인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세속적인 삶을 인정하려면 또 반드시 체제와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고 의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많든 적든 권력과 명예를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 작가들이 필연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노선이다. - P272

우리는 신앙 없이도 살 수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믿음과 명예가 없이는 살 수 없다. 진리를 찾지 못할 수는 있지만 애써 찾아낸 진실과 성심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모든 사물에 대해 저항하고 투쟁할 수는 없지만 이 열악하고 용속한 환경에서 어떤 일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타협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말을 할수 없다면 침묵하면 된다. 침묵 속에서 길거리 한쪽에 서 있을지언정 화려한 꽃과 박수 소리 속에서 길 한가운데를 걷거나 무대에 서지 않으면 된다. 이렇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이렇게 하려는 노력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존엄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다. - P277

작가들의 생활은 용속함을 피할 수 없지만 글쓰기는 장엄할 수 있고, 또 반드시 장엄해야 한다. 존엄하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존엄한 글쓰기는 가능한 것이다. 존엄한 글쓰기가 있다는 것이 작가가 작가일 수 있는 유일한 기초다. 작가의 글쓰기가 이러한 독립과 장엄을 상실할 때, 그들의 글쓰기는 글쓰기라 할 수 없고 그저 먹고살기 위한 ‘일‘이 되고 만다. 배불리 먹고 따스하게 입기 위해, 살아 있기 위해 하는 출퇴근 같은 일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세속적으로 살고 있다고 해도 글쓰기는 반드시 장엄해야 한다.
여기서 장엄한 글쓰기는 몇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문학 자체에 대한 장엄성이다. 중국 작가들은 현실 생활에서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문학과 생활이 분리되는 양상을 보인다. 생활 속에서는 살아가기 위해 세속을 탈피하지 못한다. 하지만 글쓰기에서는 세속을 벗어나는 것이 가능해진다. 장엄해질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둘째는 세속적 삶에 대한 장엄한 인식이다. 다시 말해서 세속적인 삶 속에서 세속을 써내는 것이 아니라 장엄함을 써내야 하는 것이다.
(중략) 20세기 문학에서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상대적으로 자아와 근본을 위한 쪽으로 흐르고 있다. 그런 까닭에 문학의 장엄성도 더욱 돌출되고 두드러진다.
셋째, 중국 작가들은 어떻게 장엄하게 글을 쓰는가 하는 것이다. 장엄하게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태도이자 입장이요 자각적 선택이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그다지 엄숙하고 장엄하게 생활하지 않는 사람도 남들처럼 장엄한 작품을 써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장엄하게 사는 사람들이 반드시 장엄한 작품을 써낼 수 있다고 보장하기가 어렵다. 이는 개인적인 생활 방식이 작품의 장엄성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품의 장엄성은 생활과 문학에 대한 작가의 인식과 문학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작가의 생활관과 인생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 P281

나는 여기서 몇 가지 구호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고 싶다. 세속적 삶을 인정하더라도 그 세속 속에서 존엄을 갖춘 사람이 되자! 속세에 산다고 해도 세속적인 글쓰기는 하지 말자! 억지로 타인의 글쓰기의 존엄성을 요구하지 말고 자신의 글쓰기의 존엄성을 반드시 추구하자!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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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와 시장경제는 호랑이와 고기의 관계가 되어버렸다. 정치가 시장경제에 일정한 관용과 부양을 제공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권력의 기둥과 기반을 무너뜨릴 수도 있지만, 지나치게 넓은 관용과 운신의 공간을 제공하면, 당연히 누려야 할 자유를 철저하게 확보한 뒤 그런 자유를 위해 힘차게 달리고 약동하게 될 것이고, 그때부터 집중된 권력의 기반과 자리를 넘어뜨리거나 무너뜨리게 된다.
중국식 권력 집중과 상대적으로 느슨한 자유가 바로 중국식 정치와 시장경제의 관계다. - P234

문학은 한쪽은 상대적으로 개방된 경제와 한쪽은 고도로 집중된 권력의 모순된 조건 하에서 생존하고 호흡하며 발전하고 글쓰기를 진행한다.
권력의 집중은 문학의 음산한 하늘이다. 상대적 느슨함은 하늘에서 새어나오는 밝고 아름다운 햇빛이다. 그리하여 문학은 이처럼 때로는 흐렸다가 때로는 비가 오고, 때로는 햇빛이 쨍쨍하다가 때로는 바람이 부는 하늘 아래서 생장하며 꽃을 피우고 춤추고 탄식한다. - P236

문학이 권력과 정치를 만나 비문학적이고 무비판적이어서는 안 된다. - P239

중국인들이 직시해야 하는 문제는 문학이 정치를 멀리할 수는 있지만 생활은 정치에서 도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 P240

정치와 권력은 사람들의 생활과 생명의 모든 공간에 스며들어 있다. 이 때문에 중국 작가들은 역사적으로 정치가 문학을 주기적으로 인도하고 간섭해온 상태에서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다) 문학이 정치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집단적 공통 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문학이 정치에서 멀리 벗어날 수는 있지만 정치가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일부가 될 때 사람들은 이런 생활과 인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제시하게 된다. - P241

정치가 모든 개인의 일상생활에 스며들어 있을 때, 작가들이 집단적으로 정치를 멀리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인동시에 슬픈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중국의 느슨하면서도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문학이 정치와 권력에서 이탈하여 거리를 두려고 한다면, 이는 정치와 제도가 싸우지도 않고 승리하게 하는 것이며 바로 정치와 권력이 생각하는 바를 만족시키는 것이 된다. - P242

지난 100년 동안, 특히 1949년 이후 예술 영역에서 중국 작가들이 혁명과 정치, 권력으로부터 받았던 지나치게 강렬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압박과 간섭에 기초하여 말하자면, 작가와 독자, 비평가들이 형성하고 있는 공통의 인식은 문학이 정치에서 멀어지면 일종의 ‘순수 예술‘이라 할 수 있고 현실과 정치에 가까이 다가가면 ‘엄숙‘하지만 순수하지 못한 예술적 가치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의 순수 관념과 현행 중국의 문학예술 정책은 문학이 현실에 대해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회피할 것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격려하기까지 한다. - P246

‘강경한 글쓰기‘는 좀더 충분한 문학적 의미를 갖춘 ‘부드러운 글쓰기‘ ‘더 높고 큰 글쓰기‘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부드러운 글쓰기의 자양과 에너지를 흡수하여 이처럼 ‘더 높고 큰 글쓰기‘가 커포티의 ‘냉열혈‘을 뛰어넘고 20세기의 부조리 문학과 마술적 리얼리즘 문학의 장막을 뛰어넘어 좀더 새롭고 현대적인 ‘더 높고 큰 글쓰기‘ 이후의 중국식 소설 ‘홍루몽‘을 써낼수 있어야 한다. - P254

사람들의 머리 위에 있는 권력과 정치,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 때문에 나는 지금 보통 사람들과 보통 마음, 보통 사건들에 대한 감수성과 장악력을 상실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의 ‘작음‘에 대한 민감성과 추구를 상실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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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를 떠날 때, 사병들이 전부 나와 엉엉 울면서 나를 보내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사병들과 나 사이의 감정이 전부 내가 직권 남용하고 자신의 권력을 확대했던 감정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중략) 이 모든 것이 나 때문이 아니라 권력 때문이었고, 지도원이라는 하찮은 직권을 마구 남용하고 확대한 결과였다. - P202

이때를 기점으로 반년 가까이 나는침대 위에 올라가 검토서를 써야 했다. 한장 또 한 장 반복해서 검토서를 썼지만 한 번도 통과되지 못했다. 당시 나는 이미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농사를 지을 준비까지 해놓고 있었다. 아무리 써도 통과되지 못할 검토서라면 더 이상 수정할 것도 없고 더 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부대의 최고 수장이 과일을 한 바구니 들고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게 벌일 없을 거라면서 앞으로 부대를 예찬하고 조국과 영웅들을 찬미하는 작품을 좀 쓰면 된다고 말했다. 수장이 우리 집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너무나 감격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수장이 가고 나서도 나는 집 안에서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한편으로는 운명의 급전직한 반전에 감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 깊은 곳에서 권력에 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이 솟아나왔다. - P208

권력은 오만함과 사악함, 그리고 음흉한 힘으로 가득 찬 거대한 악마의 지팡이 같았다. 이 지팡이가 사람들에게 은덕을 베풀 때는 많은 돈과 신선한 꽃을 가져다주지만 조금이라도 화가 나면 개인뿐 아니라 그 가족 전체의 운명까지 어디서 왔는지 모를 바람이 열심히 길을 가고 있는 개미의 몸을 덮치는 것과 같은 꼴이 되고 만다. 개미는 바람에 날려 어디로 가게 되는지도 알지 못한다. - P211

두려움은 이렇게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글쓰기가 내 생명의 일부가 된 것과 마찬가지다. 살아 있는 한 나는 글을 써야 하고, 글을 쓰는 한 필연적으로 초조와 불안, 두려움이 따라다닌다. 그리고 두려움과 두려움으로부터의 도피로 인해 내 글쓰기에는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자세가 형성되었다. 고요한 밤에 아이가 들판을 걷고 있을 때,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나는 무섭지 않아! 무섭지 않다고!"라고 외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이는 무섭기 때문에 "무섭지 않아!"라고 외치는 것이고 큰 소리로 "무섭지 않아!"라고 외치기 때문에 더더욱 무섭고 겁이 나는 것이다. - P220

내가 진정으로 쓰고 싶었던 책은 이런 것이 아니라 ‘나는 왜 매일 한바탕씩 울고 싶은 것인가‘라는 제목의 책이다. 이 책은 허구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마음속 감정의 실록‘이다. 이 책에서 기술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는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렵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쓸 수 있는지는 나 자신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몇 년 전 어느 날, 우연한 순간에 "매일 한바탕씩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 항상 그런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 P221

결국 삶이 반드시 나의 글쓰기인 것은 아니지만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나의 삶이다. 삶이 반드시 나의 생명에 영향을 미치진 않지만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나의 생명이고 필연적으로 나의 생명에 영향을 미친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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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창문은 최대한 활짝 밀어젖히면서 정치의 창문은 완전히 닫거나 최대한 닫아걸려고 노력한다. 문화는 반쯤 열려 있어 때로는 열렸다가 때로는 닫히는 창문의 빛과 그림자 아래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를 들었다가 숙이기를 반복하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리고 문학, 즉 작가들의 글쓰기는 바로 이런 위치에 멈춰서 있다. 다시 말해서 창문이 때로는 열렸다 때로는 닫히고, 빛이 때로는 밝았다 때로는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이 창문 앞에 모여 호흡하고 생존하는 사람들, 즉 14억의 중국인은 밝기와 어둡기가 일정치 않고 냉기와 열기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보니 인간의 정신과 영혼, 인성마저 항상성을 나타내지 못해 갈수록 타락하고 어두워지는 것이다. - P169

모든 계획경제의 최종 목적은 경제 번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영혼을 국가가 소유하고 당이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다. 국유경제 (기업)라고 하는 것보다 인간의 ‘국유‘ 혹은 정신 및 영혼의 ‘당유(黨有)‘라고 하는 게 나을 것이다. - P169

정치는 작가들에게 불꽃과 환한 빛, 눈에 보이는 이른바 ‘긍정적 에너지‘의 현실과 존재를 쓸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문학 자체는 작가들에게 ‘긍정 에너지‘만 쓸 것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긍정적 에너지가 아닌‘ 존재와 진실,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와 존재하지 않는 진실도 쓸 것을 요구한다. - P171

그리고 작가들은 절반은 열려 있고 절반은 닫혀 있는 이 창문 아래서 생존과 명예, 지위를 위하여 글을 쓴다. 그 과정에서 이 창문을 관리하는 사람의 휘하에서 세 가지 글쓰기 방식을 취하게 된다.

첫째는 빛을 받아들여 글을 쓰는 것이다. 빛을 보고 빛을 얻는 것이다. 빛을 써서 더 빛날수록 명예와 지위가 아침에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일처럼 자신의 팬과 인생을 온통 찬란한 빛으로 비춰줄 것이다.
둘째는 빛을 차용하여 쓰는 것이다. 빛을 빌려 쓰는 작가들은 전부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고 일정한 양심과 지혜를 갖춘 사람들이다. 빛을 받아들여 쓰고 싶지 않지만 내면의 예술적 감정과 심리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은데, 이 절반은 열려 있고 절반은 닫혀 있는 창문의 그림자 아래서 어쩔 수 없이 남의 빛을 차용해서 글을 써야 한다. (중략) 그리하여 이처럼 남의 빛을 차용한 글쓰기는 어둠과 빛 사이를 떠다니면서 예술이라는 평형의 장치를 사용하여 양자 모두에게 손해가 나지 않는 문학적 이상을 완성하는 것이다.
셋째는 빛을 넘어서 곧장 어둠 속의 진실로 다가가는 것이다. 이러한 글쓰기는 일종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빛을 넘으면 빛을 배반하게 되고 빛과 어둠의 주변을 오가며 글을 쓰는 대다수 작가의 인정된 글쓰기를 배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빛과 빛 주변의 존재는 전부 일종의 공통된 인식이라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어둠 속의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직접 가서 접촉하고 느끼며 증명해야 한다. 때문에 글을 써도 종종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거나 공통 인식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모든 사람에게 회의와 쟁론, 비난의 대상이 된다. 또한 바로 이런 이유로 이처럼 빛을 뛰어넘어 곧장 어둠에 다가가는 글쓰기, 밝은 창문을 벗어나 닫힌 창문 뒤로 다가가는 글쓰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좀더 큰 재능과 창조력이 필요하다. (중략) 작가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밝은 곳에서의 인간의 즐거움과 순조로움, 그리고 어둠 속에서의 몸부림과 한숨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절반은 닫혀 있고 절반은 열려 있는 창문의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빛과 어둠의 상호 변화, 그 빈번한 상호 변화 속에서 인간의 내면이 겪어야 하는 불안과 구체적인 상황이다. - P174

국가의 검열에 대해 작가들은 마음속으로 매우 익숙해져 있다. 아들이 폭력적인 아버지를 잘 알고 현신이 폭군의 기질을 잘 아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작가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어느 쪽을 따라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게 만드는 것은 구체적인 문학예술 정책을 집행하고 당을 대신하여 장악하는 구체적인 집행자들이다. - P176

문학에 대한 심사와 검열에 있어서는 범죄나 과실이 아니기 때문에 대응할 수 있는 명확한 법률 조문이 없다. 또한 변호사도 없고 검찰도 없기 때문에 범죄에 대한 변호도 없고 법원과 법관의 집행에 대한 감독도 없다. 모든 것이 집행자들의 정책 기준에 대한 감각과 파악, 양심의 깊이에 따라 결정된다. - P177

상황은 종종 집행자들이 머리에 ‘오사모‘를 쓰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당에 충성하기 위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함으로써 권력을 확대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원래 탄력적인 검열의 수준을 최대한 확대하고 삼엄하게 만들어 중국식 운동과 혁명에 일관되었던 확대의 습성이 검열에서 더욱 강화되게 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털을 불어 헤쳐서 상처를 찾듯이 억지로 결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중략) 검열은 검열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권력이 되기도한다. 수많은 책이 검열 과정에서 ‘관계‘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검열을 집행하는 권력이 임의로 통과될 수 없는 책을 통과시켜 출판할 수 있게 해주고 통과되어야 할 책을 통과시키지 않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 P178

검열을 집행하는 과정에서의 권력 남용과 출판사들의 과도한 긴장이 오늘날 검열의 집행 단계에 나타나는 두 가지 가장 큰 특징이다. 출판사들은 너무 신중하여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하고, 그럴수록 검열은 더 확대된다. 권력의 남용은 중국의 모든 권력 기관이 공유하고 있는 특징이다. - P179

검열 집행자는 위에서 아래로, 또 아래에서 위로 철저한 검열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소리나 형태도 없이 검열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이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는 문학예술 정책의 제정자들이 있고 중간에는 검열 제도의 집행자들이 있으며 맨 아래층에는 출판기구의 편집자들이 있다. - P181

작가들의 자기 검열의 자각성과 본능성이 예술에 미치는 피해는 사람들이 가시적으로 파악하는 검열과 삭제, 금지의 폐해를 훨씬 초과한다. 자기 검열은 출생하기도 전에 거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인에 의한 거세다. 심지어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거세라고 할 수 있다. - P182

전업 작가 제도의 근본적인 목적은 예술의 멀고 높음과 자유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글쓰기와 사상, 상상에 대한 관리 및 규제, 통제를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로 이러한 장점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소수의 작가만이 이러한 집단적인 관리 속에서 작가로서의 글쓰기의 독립성과 문학 인격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다.
전업 작가 제도의 가장 큰 폐단 가운데 하나는 작가들로 하여금타성에 빠져 창조성을 잃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 내에서 전업 작가들은 지금까지의 국유화와 당유화, ‘큰솥 밥‘처럼 노동을 하든 안 하든 보수가 같고 창조를 하든 안 하든 같은 결과를 맞게 된다. - P183

전업 작가의 두 번째 폐단은 작가들이 글쓰기의 개성을 상실하여 쉽게 집단화되고 국유화된다는 것이다. - P184

작가들이 기본적인 생활의 보장을 바란다면 반드시 전업 작가의 대오에 들어가야 한다. 전업 작가의 대오에 들어가면 반드시 사상의 깊은 곳이 집단화되고 당유화되며 국유화되어야 한다. 또한 글쓰기에 대한 국가의 모든 정책과 권력의 규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출판에 임해야 하고 이러한 출판은 수십 년 동안 양성해온 독자들의 가치관을 반영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개체에서 집단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로써 문학의 국유화와 당유화를 완성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대단히 통속적이고 효과적인 연계이자 체제의 가장 효과적인 사상 관리의 사슬이 된다. 작가가 이런 사슬의 한 고리 또는 마디가 되면 그의 문학관과 세계관 내지 인생관과 가치관이 독립성과 개성을 상실하게 되고 집단과 국가의 글쓰기 이데올로기만 남게 된다. - P186

전업 작가 제도의 세 번째 폐단은 작가들로 하여금 자아를 잃고 독립적 인격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다. (중략) 작가의 업무는 글을 쓰는 것이고 언행은 그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회사는 중국의 위에서 아래까지의 모든 작가협회 조직이고 사장은 인민을 대표하며 이끄는 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체제 안에서 조직이 작가를 양성하고 키워주면 작가는 자신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글쓰기와 자기 상상의 궤적 및 역동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조직을 위해 일을 하고 글을 쓰고 복무하게 된다. - P187

한마디로 말해서 중국작가협회의 근본적인 목적은 수많은 특수시기에 그랬던 것처럼 모든 작가를 ‘당의 작가‘가 되게 하는 것이다. (중략) 중국작가협회의 목적은 전혀 변하지 않고 방법만 변할 뿐이다. 강제성과 압박성, 학생들에 대한 억지 주입식 교육 같은 정치적 주입으로 유도와 교육, 회의와 학습을 통해 전통적 방식인 명예와 수상, 문학예술 가치의 훈육과 양성 등의 방식으로 ‘당의 작가‘가 되게 하는 목적을 달성하고 작가들에게 ‘순수한 예술의 자유‘이기는 하지만 인격의 독립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가 아닌 일종의 타협의 방법으로 글을 쓰게 하는 것이다. - P188

오늘날 중국 작가들 가운데 중·노년층의 80퍼센트는 모두 이런 전업 작가 대오에 속해 있다. 1980, 1990년대에 출생한 작가들에 대해서도 중국작가협회는 회원제로의 흡수와 정기 회의(전국작가대표대회나 청년작가창작대표대회), 평가 및 장려 제도(마오둔문학상이나 루쉰문학상 등) 등의 표창 및 수상 방식을 통해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젊은 작가들과 새로 등장하는 인터넷 작가들을 흡수하여 당을 중심으로 ‘단결‘시키고, 더 나아가 동화시키거나 양성하고 변화시킨다. 우선은 이런 대오의 일원이 되게 한 다음, 점차 독립된 인격이 없는 문학의 가치 판단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작가들의 글쓰기에서 독립과 자유, 사상을 상실하게 하는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 P189

문화대혁명처럼 철두철미한 극좌의 독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민주와 자유가 보장되지도 않고 부분적이며 가변적인 정치 개방과 경제의 시장화, 정치의 폐쇄화 등의 이중 모순을 보이고 있는 환경에서 작가들은 독립적 사유와 상상의 가능성을 갖추고 있고 동시에 거대한 정체성의 장애 및 유혹에 직면해 있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작가는 나름의 대응 방법을 갖고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순종과 호응으로 이익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문학과 재능을 명예와 지위, 물질적 이익의 교환 조건으로 삼는 셈이다. (중략)
두 번째 방법은 거리 두기와 도피다. 이는 대단히 숭고하고 가치있는 글쓰기 전략으로서 "나의 모든 것은 문학 자체를 위한 것이다"라는 숭고한 신념의 발현이기도 하다. 문학을 상아탑‘의 부속물로

여기거나 혹은 ‘상아탑‘의 명예로 주류와 권력, 복잡한 사회의 온갖 어지러운 현상에서 이탈하여 혼자 서재 안이나 무릉도원에서 조용하고 한적한 마음으로 산보하는 것, 문학을 귀삼아, 장자의 출세를 이유와 근거로 삼아 맑고 조용한 생활과 글쓰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중략)
세 번째 방법은 문학에서는 독립된 사유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독립 인격을 갖춘 작가가 되는 것이다. 이런 작가들은 과감하게 인간의 경과 현실을 직시하고 용감하게 글쓰기에 임하며 현실 속에서 문학의 존재를 직시하고 용감하게 문학 속에서의 인간과 현실적 존재를 직시한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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