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라디오키드였다.
낮 2시엔 김기덕 아저씨와 8시엔 황인용 아저씨가 있었고, 지금은 싫어진 10시 이종환 아저씨, 언제나 함께 할 것만 같던 박원웅 아저씨, 새벽을 책임지는 전영혁 아저씨, 그리고 대학 시절엔 지금 그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정은임 누나가 있었다.
중고등학생 시절 남녀공학 학교라고는 광역시 통틀어 1, 2개 밖에 없던 그 삭막한 도시에서 보낸 재미없는 시절들. 재미없다고 표현하기엔 너무나 미화된 것 같은 그 전쟁같던 시절들. 음악이 있기에 라디오가 있기에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라디오와 조금은 멀어진 듯 했다. 그만큼 내 정서가 삭막해졌다는 것을 뜻함이니라. 주위를 둘러봐도 정기적으로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이제 이 세상에서 라디오는 없어질 것인가?
실제 그 일을 하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가장 동경했던 직업은 바로 은은하게 라디오를 틀어놓고 느긋하게 업무를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별로 없는 동네 개인 병원 대기실에서 듣는 시끄럽지 않은 라디오 음악소리는 너무나 여유롭다. 전쟁통같은 응급실 간호사들보다 그런 한적한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이 적어도 마음의 평온을 느끼기엔 좋지 않을까 하는 한가한 생각을 해본다.
갈수록 들을만한 프로그램이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주옥같은 프로그램들이 있다. kbs 1fm의 모든 프로그램이 그러며, 10여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는 배철수 아저씨도 있고, 극악의 저녁 8시를 홀로 외롭게 사수하는 cbs의 김형준 아저씨가 있으며, 들은지 수개월 아니 수년이 지났을지도 모르지만 아직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전영혁 아저씨가 있다.
결혼 당시 구입했던 리시버에서 언제부터인가 라디오가 잡히지 않는다. 전파상 아저씨께 여쭤봤더니 리시버 한번 가져오라고 그러신다. 그런데, 그 큰 리시버 뒤에는 마치 어릴 적 내셔널지오그래피류의 책에서 봤던 호주 늪지대의 수십 마리 뱀처럼 많은 선과 선들이 얽혀 있었다. 그것을 다시 정리하기도 귀찮고 엄두도 나지 않을 뿐더러 이 리시버에서 라디오 주파수 잡기가 시원찮았던 기억도 스치고, 라디오 하루종일 켜고 있다간 겁도 없는 둘째 아이가 마구 볼륨을 높여 온 집안이 하루에 한번씩은 꼭 난리가 날 것만 같은 예감도 들었다.(지금은 어른이 딱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cd를 튼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다.
TV를 하루종일 틀어놓고 아이들을 본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계속 CD를 바꿔가며 듣자니 거추장스럽다. 그래도 cd로 구매한 음악들은 그야말로 백그라운드 뮤직이 아니고 작정하고 감상해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컴퓨터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을 별로 즐기지 않는데다가 아이들 재우고 혼자 있을 때 잔잔한 라디오 음악소리를 듣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 작은 라디오 하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티볼리란 라디오를 알게 되었다.
너무나 맘에 드는 외관에 한번 놀랐고, 어디서나 잘 들린다는 고음질의 성능에 또 한번 놀랐고, 마지막으론 20만원이나 하는 가격에 뒤로 나자빠졌다.
스테레오도 한물 갔고, 이제 5.1ch도 넘어서 9.1ch까지 나오는 시대. 모노라는 소리는 도대체 어떤 소리일까? 기억조차 안나는 모노 소리를 구현한다는 이 라디오를 들어본 사람들의 탄성은 이어진다.
'어떤 시대에 나온 음반은 어떤 시대 당시의 기계로 들어야 소리가 좋다' 50년대 이전 모노 음반의 소리를 그대로 잘 들려준단다. 특히나 우리 국악, 판소리와 같은 뭔가 거친 야생의 소리를 잘 구현한단다. 그 음악들을 평소에 잘 듣지는 않지만 그 말에 한번 더 정이 가고, 속된 말로 땡긴다.
알아보니 티볼리 라디오의 종류도 여러가지다. 최근엔 아이팟과 연동되는 기능을 가진 것도 출시되었단다. 그러나, 진보가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닌 듯. 나는 가장 간단한 기능이 있는 이 깔끔한 Model One이 가장 맘에 든다.
어젯 밤 마트에 갔는데, 옆지기는 4만원짜리 Sanyo 라디오 & 테이프 기능이 있는 기계를 사자고 한다. 가격도 가격이거니와 우리집 오디오에는 없는 테이프 기능이 된다고. 알라딘에서 품절이 대다수인, 그래서 아직은 버리지 못한 음반들이 우리 집엔 tape로 많이 남아있다. 그 추억의 테이프들을 살릴 것인가? 쏙 마음에 드는 새로운 기계친구를 들일 것인가?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한적한 동네 병원에서 편안한 소리를 내는 라디오, 한 밤 경비실에서 외로운 아저씨들의 유일한 동무가 되어 주는 라디오가 이렇게 비싸고 좋을 리 없다. 사물에 대한 욕심은 더 이상 자제하자고 맘속으로 백번도 더 다짐하지만 이런 명물에 눈이 가고 마음이 가는 것이 또 사람 맘이니라.
오늘도 허접한 서재 방 인테리어와 전혀 안어울리는 이 멋진 model one을 틀어놓고 음악의 향기에 취해 스르륵 잠이 드는 나를 상상한다.
여러분은 어느 색깔이 맘에 드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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