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커피를 즐겨하지 않는다. 어쩌다 한번 마음이 동할 때, 그리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의견 물어보지도 않고 커피를 사람수에 맞춰서 뽑아 왔을 때 그때 먹는다. 음식 남기기 싫어하는 내 성미는 즐기지 않는 커피에도 적용된다.

사람들은 커피를 먹지 않는 나를 신기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물어보곤 한다. 난 대충 이렇게 말하곤 한다. 담배를 피워볼 생각을 안해서 지금껏 피우고 있지 않듯이 커피도 별로 안해봐서 지금도 먹고 싶지 않다고.

커피를 하루종일 몇잔씩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맛있길래 저렇게 입에 달고 다닐까 싶기도 하고, 솔직히 측은한 생각이 드는 때도 있다. 그야말로 커피를 사랑하여 세계 각지의 커피의 맛과 향을 구분하며 좋은 커피 찾아다니면서 즐기며 먹는 모습을 볼 때는 내가 왜 이리 향기나는 취미와 미각을 갖지 못했나 슬퍼지기도 한다. 그러나 쉬는 시간 또는 별 이유도 없이 담배를 하나 물고 자판기 커피를 자연스럽게 뽑아 마시는 것을 보면, 그리고 꼭 그 담배재와 꽁초를 다 마신 종이컵에 버리는 모습을 보면 이건 취미가 아니라 굴레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실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였지만 내가 커피를 마시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데 있다고 본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유는 사실 세속적 표현으로 쪽팔려서다.

대학시절 지금 생각해보면 어설픈 학과 동아리에서 이른바 '학습'을 지금 생각해보면 주체적이지 못하게 한 적이 있었다. 그 시절의 기억과 생각이 아직까지 지배하는 경우가 많은데, 커피가 그 중 하나이다. 어느 책을 읽었나, 한울에서 나온 '날아라 장산곶매'이던가? 이 책에서 나온 내용인지 아니면 이 책을 읽고 우리끼리 나눈 대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이 책은 제목에서 유추가 되듯이 우리 주위의 외국성향의 소비 문화에 대해 까발리고 우리의 문화를 되찾자는 취지로 쓰여진 글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입고 다니는 티셔츠에 얼마나 영어 알파벳이 많은줄 아느냐, 만두는 원래 중국음식이고 우리에겐 아픈 과거가 있는 음식이기 때문에 만두 먹을 때는(먹지 말란 소리는 하지 않는다) 중국놈들 머리 씹듯이 씹어먹어야 한다느니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봐야지...), 코카콜라와 햄버거와 같은 미국 음식을 즐겨 먹는 문화에 대한 비판 등의 내용이 있었다.

지금 보면, 구구절절히 맞는 부분도 있고 배워야할 점도 많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유치하리만큼 국수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아무튼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세미나 토론때 나온 말. 우리는 코카콜라 먹지 말고 커피 먹지 말자! 커피를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저개발국가들의 노동착취로 재배된 농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의 기억이 얼마나컸던지, 아직까지 커피를 보면 거의 매번 이 기억이 떠오른다. 물론 지금 내가 이런 생각에 절대 동의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상하게 그 때의 생각이 지금의 나를 지배한다.

물론 소위 미식가들과는 대척점에 서있다고 자부하는 나의 무난하다 못해 형편없는 미적 감각 때문에 커피를 멀리 할 지도 모르고, 오늘도 대충 수습하고 살자는 모토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대충당의 당원이기 때문에 커피 마시기조차 귀찮은지도 모르지만, 그 때의 기억이 아직까지 나를 붙잡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때 같이 책을 읽었던 그들은 이 사실을 기억도 못하겠지. 작년 어느날 저녁 모임 후 자연스럽게 커피를 청하던(물론 100% 흠잡을 데 없는 행동이지만) 그때의 그 후배를 보면서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절대로 이성적이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치기가 아직까지 내 발목을 잡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커피 안마시는 내 행동이 별로 올바르지 않은 소비를 하는 지금의 나와는 전혀 소통하지 않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내가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하는 행동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서 아직까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철없던 시절의 사고가 차마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어정쩡하고 고집스럽게 남아 새로운 사고를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일종의 바이러스처럼 기생하여 내 뇌를 퇴보시키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니 어찌 쪽팔려서 커피 안마시는 이유를 주위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을까? 익명성이 보장되는 이런 곳에서나 말하지... 

그나저나 조금 심각하게 글쓰면 덧글이 별로 안올라오던데, 오늘도 악수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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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5-03-20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댓글 달아 드리지요. 님이 착하셔서 그런 겁니다ㅎㅎ

icaru 2005-03-20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개발국의 노동 착취로 재배된 농산물...아...그렇군요....
님은 어린 시절의 치기로 그랬다지만~ 그 때의 결심과 느낌으로 시작해 취향으로 굳히기 한 판을 하는 님이 저는 대단해보이시는데요??
안마시는 사람에게 커피를 권하는 사회는 지양되어얄텐데...
살다보면 종종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식습관의 문제 때문에 공격의 대상이 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참...그렇죠~

엔리꼬 2005-03-20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 솔직히 말하면 저도 제가 착하다고 자부했습니다. 착하다는 것을 대놓고 자신의 강점으로 내세울 수 없는 것이 이 경쟁사회이지만 말이죠. 그런데, 저희 아내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 착함이 이중적이라는군요... 겉과 속이 다르다고요.. 흑흑 내부자의 말이 더 맞는 것이겠지요?
복순이 언니님/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말씀드렸지만 제가 어떤 신념으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는 점은 결코 아니란 것이 문제입니다. 또한, 저개발국 생산된 물건이 한두개겠습니까?
그리고 이 땅의 채식주의자들은 그 신념을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상당히 비관적입니다.

날개 2005-03-20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하튼, 커피는 맛있습니다..^^     - 커피광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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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꼬 2005-03-21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학교앞 원두커피점에서 자주 사먹곤 했었어요...물론 그때마다 꼭 누구랑 같이 있었지만... 내 돈주고는 잘 안사먹죠.. 비싸기도 하고.. 아무튼 카페라테니 카페모카니 맛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