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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텍스트를 읽는 경우 시니피앙이라는 이 용어는 이해하기가매우 까다롭다. 소쉬르가 사용하는 시니피앙이라는 용어는 언어를 구성하는 요소이자 일상 언어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그에 반해 라캉은 시니피앙을 매우 넓은 범위로 사용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이 시니피앙이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직 시니피앙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것, 예를들어 주체의 경험의 흔적으로서 무의식에 고여 있는 이미지조차 시니피앙이라고 부른다. 또한 프로이트가 사용하는 이마고 등도 시니피앙으로간주한다. 라캉이 사용하는 용어는 이렇게 매우 애매한 경우가 다반사이며, 그러한 애매함이 라캉의 텍스트를 독해할 때 큰 어려움을 야기한다. 나중에 라캉은 시니피앙을 S1과 S2라는 두 종류로 나누어 생각한다.
S1은 오히려 단독적인 시니피앙으로 기호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지만 지금까지도 시니피앙이라고 불려 독자를 크게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 P55

언어학자 야콥슨Roman Jakobson (1896~1982년)은 실어증에 이 두 축을 적용해 그것의 두 양상을 분류할 수 있는 점에 주목한다.

1) 공시성 기능에 장애가 있는 환자의 경우 문법적 기능은 작동하지만 특정한 상황에서 적절한 단어를 찾아내는 것, 즉 물건의 이름을 말하는 것에서 굉장히 어려움을 느낀다. 무엇인가를 표현하려고 할 때 늘 그것과 관련된 주변의 단어로 미끄러지는 현상에 빠지고 그곳에서 탈출할 수 없다. 상징화, 은유적 기능이 파괴되고 항상 환유적인 시니피앙의 용법밖에 쓸 수 없어 듣는 사람에게 종종 코믹한 인상을 주게 된다.

2) 통시적 기능의 장애는 단어를 문법적으로 연결시키는 기능이 파괴된 것으로 시니피앙의 선별 기능은 남아 있다. 이때 문장은 전보문 같은 문체가 되어버려 은유적 표현을 많이 사용하게 된다. - P57

Signorelli에서 억압된 것은 Signore이다. Signore 아래의 x는 프로이트의 개인적 사정이다. Signore는 독일어로 Herr에 해당되어 절대적주인, 죽음과 결부되며 죽음 앞에 무력했던 프로이트는 그것을 잊어버리려고 했기 때문에 잊혀진 이름으로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위에서는 은유적 창조가 만들어지고 familiar의 소실 뒤에 남은 구멍이 메워지는데 비해 Signorelli에서는 이 구멍이 공백으로 남게 된다.
여기서는 억압된 것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려는 힘이 언제나 작용하며 이 힘에 대항하기 위해 다양한 시니피앙의 조합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이 앞의 도식에 나타나 있으며, 그 결과가 Botticelli와 Boltraffio가만들어져 나타나는 대리 형성이다. 이 대리 형성은 은유와 다르게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기능은 없으며, 억압된 여러 요인이 조합되어 형성된 환유적 찌꺼기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여기서 소급적으로 억압된 단어를 찾아내는데, 그것은 억압된 것을 찾아내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이상의 결과로부터 이 두 가지 예에서 무의식의 수사학의 하나인 은유의 메커니즘이 하나는 성공한 것으로, 다른 하나는 실패한 것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작용하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 P69

남성적 시니피앙인 팔루스에 의한 라캉의 성 결정론은 남성 우위를주장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여성해방운동으로부터 큰 빈축을 샀는데, 그것은 완전히 오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에게 여성을 멸시하는 태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여성 쪽을 언제나 환상의 포로가 되는 남성에 비해 존재적으로 보다 진리에 가까운 존재로 보고 있다. 따라서 분석자로서 여성 쪽이 심적 구조로 볼 때 보다 적합하다고 말할 정도이다. 후기에 들어 라캉은 세미나 「앙코르」(1972년)에서 여성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이 세미나에서 남성은 팔루스적 향락을 한계로 인지하는 반면 여성은 그것을 초월한 향락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 P109

이 그래프는 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설명하는 것이라고도 할수 있다. 라캉의 이론적 공헌 중의 하나는 프로이트가 신화라고 생각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신화가 아니라 구조로 설명하려고 한 점이다. 라캉은 그러한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프로이트의 신화에 대한 고찰을여러 가지 관점에서 거듭했다. 그와 관련된 양상을 검토하기에 앞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신화로 확실히 제기된 프로이트의 후기 글 중의하나인 [토템과 터부]를 우선 소개한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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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와 [보바리 부인]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작품이 아니다. 어리석은 미치광이 돈키호테와 광기어린 사랑으로 자신을 망쳐버린 보바리는 세르반테스와 플로베르가 창조한 인물이지만, 그들에게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야기 속의 세계가 계속 되기를 바라고, 그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우리가 거기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인물들에 매료되고 자기도 모르게 책장을 넘기며 그들의 뒤를 따라간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우리의 의식에 침투해 우리의 일부를 돈키호테와 엠바 보바리로 바꾸어놓는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읽은 소설은 우리가 읽음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일부가 된다. 한번 읽어버린 소설은 더 이상 우리가 자신과 분리할 수 없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나가사와의 말은 그런 면에서 일리가 있다.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은 두 사람의 자아 안에 공유할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니까.
동시에 소설도 우리를 통해 증식을 거듭한다. 그렇게 이야기와 인간이 하나가 되면서 이야기의 우주가 무한히 확장해간다. 한때 나는 인간이 이야기의 숙주라 생각했다. 이야기가 유전자처럼 인간을 탈것으로 삼아 다음 세대로 전승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 세상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한 대부분을 이야기로부터 배웠고,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그런 인간은 과연 무엇일까?
그렇다. 인간이 바로 이야기다.
돈키호테와 엠마 보바리는 비록 현실의 존재는 아니지만 김영하라는 생물학적 존재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살아남을 것이고 앞으로도 증식을 거듭할 것이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라는 어떤 우월한 존재가 책이라는 대량 생산품을 소비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이야기가 책이라는 작은 틈을 통해 아주 잠깐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세계와 영겁의 시간에 접속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인간이 바로 이야기이고, 이야기가 바로 우주다. 이야기의 세계는 끝이 없이 무한하니까. (54-56)
  • 다다다김영하 지음복복서가 2021-02-26장바구니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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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6-02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죄송합니다. 원래 있었던 댓글은 다시 읽어보니까 넘 아닌 거 같아서 삭제했습니다. 수이 님, 미안합니다. ㅜㅜ

수이 2024-06-02 22:27   좋아요 0 | URL
원래 댓글이 아주 궁금한데 남아있지 않아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적어주셔도 되는데 😏
 
끝나지 않은 일 비비언 고닉 선집 3
비비언 고닉 지음, 김선형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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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언 고닉의 가벼운 에세이집을 읽고난 후 바로 마리 루티를 읽으면서 중간 틈틈이 펼쳐 휴식 삼아 읽은 건 김영하의 산문집이다. 그의 입을 빌려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전해 듣는 동안 왜 내가 다시 읽기 모드로 돌아섰는지 알 수 있었다. 고백삼아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혼을 할 수 없으리라 여기며 홀로 이혼하는 상상을 자주 하곤 했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넉넉한 생활비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액수가 더 커질 테고 나이를 먹으면서 누리고픈 것들은 더 누릴 수 있을 테니 남편의 따뜻한 눈길 따위 받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여기면서 좋아하는 책을 넉넉하게 사서 쟁여두며 맛집을 돌아다니며 딸아이를 등교시키고난 후 홀로 시간을 보내곤 할 때 이혼을 한다면 어떤 느낌일지 어떤 생활을 해나갈지 그곳에서 나는 어떤 인물로 생을 꾸려나갈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을 자주 상상하면서 시나리오를 써나가곤 했다. 더할나위 없이 불행해진 나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는 상상의 시나리오를 써나가면서 그냥 이렇게 살다 죽겠지_로 매번 결론을 내리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이혼을 하고난 후 이게 정말 내게 벌어진 일인가 자문하기도. 나이가 들어 폐경 조짐이 보이고 노안이 오고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싶은 나날들이 쌓여갈 때 바라는 풍경이 있다면 직접 내 손으로 그걸 그려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삶의 압력을 느끼려고 읽는다'는 비비언 고닉의 문장을 심장 한쪽에 새겨놓고 언어란 우리들이 만들어내는 집이라는 고다르의 영화 속 대사를 따라 읊으면서 우리가 나눈 것들은 기껏 말뿐이고 말은 허공 속으로 사라지면 그만이라는 그의 말이 떠오르면서 우리는 함께 했어도 언젠가는 파멸할 수밖에 없는 관계였겠구나 알았다. 시작이 어떠했는지를 말하면 사람들은 다 기겁할 것이다. 나 역시 장난으로 가볍게 대꾸를 했을 뿐이라고 여겼으니까. 비 오는 날 상상놀이를 이어가는 동안 어쩌면 나는 이렇게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낯선 말들이 오고가는 틈바구니 사이로 내 혀와 내 팔다리가 쏟아내고픈 말을 다이렉트로 내뱉으면서도_ 그랬다. 제대로 읽지 않는 사람들, 읽기라는 행위를 우습게 여기는 시선들, 책이 사라져가는 풍경들 사이로 어지간히 도망쳐보려고 했다. 얼마나 읽지 않았는지 그 시간을 헤아리는 건 나보다 내 친구들이 먼저였다. 분산된 신경들을 한데 억지로 모아 읽어봤자 의미를 헤아리려고 억지로 또 힘을 써야 한다는 걸 깨닫고 읽기를 포기했다. 너무 당차게 말야. 도망쳐봤자구나 그걸 다시 알게 된 건 비비언 고닉을 읽으면서부터였다. 읽는 존재에 대한 광폭한 사랑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소년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건 내가 말로 한다고 해서 깨닫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닌지라. 반복 강박. 전남편이 내게 처음 사랑한다 고백을 하는 순간에도 네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는 내가 아니다, 네 판타지다, 하고 수없이 말을 해도 그걸 마주하지 않더니 나중에는 사기를 당했네, 속았네 투덜거려서 어리석구나 아무리 타이르며 말을 해줘도 막힌 귓구녕을 더 스스로 막더니만_ 소년 역시 보이는 행태가 너무 전남편과 똑같아 현기증이 살짝 느껴지기도 했는데 다정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을 해도 아니 난 달라, 나는 안 그래, 하며 눈도 코도 귀도 막더니만 결국 자기가 만든 판타지 속에 갇혀 허우적대다가 신경질을 때때로 낼 때 뭐라 대꾸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홀로 쌍욕을 하면서 불러들인 것도 아니건만 이 무슨 리바이벌을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허참.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비비언 고닉을 차분하게 읽어나가는 동안 나를 자신의 반쪽이라고 여긴 그들의 태도도 그저 학습된 것일뿐, 더 지혜로운 척 하지 않고 덜 오만했더라면 또 다른 결과를 맞이했을 수도 있을 터인데 하고 이내 아쉬움을 느끼는 건 혼자 앉아 반추하는 동안이다. 5월 마지막 날이다. 불러들이지도 않고 올 사람은 오고 가라고 온갖 욕설을 내뱉어도 가지 않을 이들은 가지 않고 그런 게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라는 걸 알 것도. 무례하게 내 행복을 자신의 불행과 견주어 비웃는 이들은 내 친구가 아니다 싶어 그만 안색을 싹 바꾸고 말하고 말았다. 그렇게 부러우면 너도 이혼해. 그렇게 궁상맞게 살지 말고, 라고. 말을 내뱉는 순간 아 썰리는 건가 싶었지만 할 말은 하고 살아가기로. 읽는 동안 버릴 책과 버리지 않을 책, 다정함을 유지하되 무례한 경우에는 여지 없이 그 얼굴에 침을 뱉는 걸 특기로 삼아야겠다고 다시 인류애를 되새겨버림. 그러니까 다시 읽는다고 하는 말을 뭐 이렇게 장황하게 해버렸을까.

"남자가 완전체 인생을 살 용기를 낼 수 있게끔 여자는 반쪽짜리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사회의 암묵적 협약은, 저 깊이 흐르는 불안이라는 관점을 통해 보자 별안간 이해가 되었다. 이런 불안 때문에, 우주에서 인간은 혼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더라도 제정신으로 그 주장을 밀고 나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인간의 고독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성차별주의의 강력한 동기가 된다는 인식이, 근원적 이유를 사유하는 데 관심을 가졌던 우리 사이에서 득세하기 시작했다. "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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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5-31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줘서 정말 좋아요. 혹시라도 저한테는 침 뱉기 전에 한번만 반성하고 갱생 할 기회를 주세요.

수이 2024-06-02 06:49   좋아요 1 | URL
우리가 서로에게 침을 뱉을 상황이 생긴다면 침을 뱉는 대신에 이야기를 나누겠죠. 다시 읽어라 제발_이라고 누가 계속 잔소리했던 게 떠오르네요. 그 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읽기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나얼 노래와 벤슨 분 노래를 엇갈아 들으면서 오늘 하루를 시작한다. 어제 친구와 커피를 마시면서 나눈 대화를 떠올려보다가_ 기 빨려, 라는 표현을 쓰는 친구에게 말했다. 네가 말하는 선순환이라는 게 서로 좋은 기를 주고받는 걸 뜻하는 거잖아. 그런데 좋아하는 이들을 만나서 계속 기가 빨려, 그렇다면 그건 균형이 맞지 않다는 거야. 그러니까 봐봐. 뭔가 바뀌기를 원하고 변화를 원하는데 선순환도 같이 이루려고 하고 사람들을 만나 함께 하는 걸 좋아하면서도 기가 빨려서 지치고 쉬이 나가떨어져. 몸이 버티지를 못해. 그렇다면 바꿔야 하는 거야.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는 그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 거고. 안주와 변화. 그 사이에서 밸런스를 맞추는 일이 가장 어렵다. 그걸 알고 있다. 이마 라인에서 싹이 돋듯 하얀 머리카락이 뽕뽕뽕 솟아있는 모습을 거울로 보면서 외모를 두 단계 정도 업그레이드시킵시다_라고 어제 친구가 한 말을 떠올려본다. 어떻게 업그레이드 시켜야 합니까? 물어보니 일단 수영을 시작합시다. 그래서 네, 알겠습니다_라고 답했다. 변화와 안주. 친구가 말했다. 영어단어를 하나 더 외우고 영어책을 읽는다고 해서 삶이 업그레이드 되는 건 아니잖아_라고. 친구의 대답을 듣고 말했다. 영어단어를 하나 더 외우고 영어책을 읽는다고 해서 삶이 업그레이드 되고 인간이 업그레이드 되고 이런 건 물론 아니지만 뭔가를 새롭게 하고 그 낯선 걸 내 걸로 만들 때 기분이 좋아지고 영어를 할 줄 아는 너와 영어를 못하는 너를 바라봤을 때 네 마음을 들여다보면 어떨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곧이어 말했다. 안주하느냐 아니면 다른 변화의 요인을 내 삶으로 끌어들여와서 새롭게 필드를 바꿀 것인가, 이건 네가 선택할 일이야. 나는 지금 네게 변화해야만 해, 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야. 너를 잘 들여다봐, 뭔가가 바뀌기를 원하는 거잖아, 한편 만족하는 것도 알아. 만족하고 안주하면 그대로 나이드는 거야, 지금 네가 마흔다섯이니까 백살까지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거야_라고 이야기하니 악담하는 거 같은데! 하고 버럭 하는 친구에게 말했다. 인생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안겨줘. 그중에서 어떤 걸 받아들일지 내칠지에 따라 삶이 달라지는 거고. 그래서 언니는 전남편을 내친 거고? 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내 전남편이 나를 먼저 내친 거야. 절벽 아래로 밀었고 헤엄도 칠 줄 모르는데 나를 바닷속으로 내꽂았어. 물론 그게 그의 진심은 아니겠지만 그 의도가 어떠하든 간에 나를 배신하는 일을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돈과 시간이 있고 다른 여인들의 유혹이 있으니 그에 넘어가는 걸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긴다면 그런 사람을 믿고 어떻게 내 한평생을 함께 할 수 있겠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속이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면 그건 습관이 되고 버릇이 되어서 죄책감을 지닐 수조차 없게 돼. 내가 그를 버리고난 후에야 그도 알게 된 거야. 모르고 내내 살아간다고 해도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진이랑 통화할 때 소개팅들은 다 어떻게 됐어? 할 거야? 물어봤다. 모두 다 거절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홍대앞에서 길을 걷다가 문득 떠올라서 생각을 이어갔다. 만일 내가 그저 섹스만을 원한 거라면, 네 몸만을 원한 거라면 내가 지금 여기에서 손을 번쩍 들고 꽤 야한 옷을 입고 저랑 오늘밤 섹스하실 분 계실까요? 말하면 무척 쉽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 목선을 훔쳐보고 있는 저 잘생긴 청년과도 잘 수 있을 거 같은데_라는 생각을 하면서. 친구들 말이 그저 섹스만을 원하는 거라면 늦은 밤 클럽이나 술집에서 만나는 이들과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그렇게 살아가는 여성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젊은이들 뿐만 아니라 중년 여성들도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건너 건너 들었다. 언니 이야기를 듣고 물었다. 왜 그렇게 사는 건데 그 분들은? 그랬더니 호빠 가는 심정이랑 비슷한 거 아니겠는가? 다만 호빠를 가면 다정함과 몸을 돈으로 살 수 있는 거고 돈이 없으면 없는대로 찰나의 다정함과 찰나의 섹스를 할 수 있는 거고. 그래서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며 언니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게 다정함이고 사랑인 건 알겠는데 물론 플러스 몸도_ 그보다는 민이와 딸기주스를 마시면서 각자 좋아하는 책을 펼쳐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했을 때 서로에게 보여주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아이를 외롭게 했을 수도 있다. 그 죄책감뿐만은 아니지만 만일 소개팅을 했다가 마음이 맞거나 눈이 맞거나 그러면 내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려. 그러니 거기에 다른 인연의 실이 더해서 꼬인다면 또 어떤 장면이 펼쳐질지 알 수 없으니까 일단은 내 계획을 먼저 실행하는 게 우선인듯_ 말하니 진이는 잘 생각했네, 라고 했다. 어떻게 얻은 평정심인데_ 라는 말은 통화 끝내고난 후 나 홀로 했다. 이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만한 사람이 내 일을 하고 있노라면 알아서 잘 오시겠지 싶었다. 지나가다가 민이 잠옷 하나 사고 예쁜 가디건 보여서 가디건도 샀다. 민이가 보더니 엄마, 그거 예뻐, 나도 입을래, 해서 응, 입어 했다. 내가 나의 뮤즈다_라는 프리다 칼로의 말을 어젯밤 잠들기 전에 다시 매만져봤다. 결국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이들고 싶고 그 나이든 모습이 추악해지지 않기를 원하는 거구나 알았다. 친구와 제대로 이야기해보지 못했지만 아줌마들의 좋은 면모와 아줌마들의 추악한 면모들이 있지 않나. 그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이 친구와 내가 간절하게 바라는 게 겹치는구나 그것도 깨달음. 왜 신이 이 녀석을 내게 보냈는지 알 거 같았다. 내 각진 면을 자꾸 녀석이 둥글게 만들어준다는 걸 깨달음. The idea of you_는 소설보다 영화가 훨씬 좋다. 물론 소설이 더 리얼에 가깝긴 하지만. 리얼과 판타지를 적절하게 짬뽕시킬 때 만족감이 극대화된다는 것도 알았고. 1년 전 오늘 딸아이와 서로의 뒷모습을 찍어준 게 기록에 떠올라 덧붙인다. 친구들에게 선물받은 책들도 함께. 불과 1년. 1년 동안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는 게 때로는 놀랍기도 하고. 1년 후에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나 스스로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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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5-29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얻은 평정심인데_ 라는 말은 통화 끝내고난 후 나 홀로 했다. 이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만한 사람이 내 일을 하고 있노라면 알아서 잘 오시겠지 싶었다.

인생의 참 지혜를 얻은 아름다운 여인.... 이 제 친구입니다.

수이 2024-05-31 17:01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건 좀 빼주시면....... 감사하겠나이다
 

몇 년 전 어느 유명한 비평가가 5년 전 출간된 이래 거들떠보지 않았던 책을 어쩌다 다시 펼쳐 읽고는 곧바로 글을 써서 올렸다. 그 비평가는 책이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고, 출간 당시 자기가 그 책에 얼마나 무자비한 악평을 했는지에 또 경악했다고 했다. ˝그때는 틀림없이 내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그리고 술회했다. ˝확실히 수용적인 기분은 아니었다.˝
아, 수용성! 다른 말로는 준비된 상태라고도 한다. 책과 독자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는 말할 것도 없다- 이루어진 모든 성공적인 연결을 책임지는 건 인간의 신비 중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수수께끼, 바로 감정적 준비다. 모든 생의 형태는 결정적으로 여기에 달려 있다. 훗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가 될 - 혹은 될 수도 있었을 - 인연을 우리가 반가이 맞이하거나 내칠 때 끼어드는 무작위성을 생각하면, 인생이란 우울하리만큼 우연과 정황에 좌우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평생을 함께한 친구 사이나 연인끼리 ‘혹시라도 우리가 다른 때 만났더라면‘ 하는 생각에 몸서리치는 일은 또 얼마나 잦은가? 책과 독자의 관계도 똑같아서, 이제는 내밀한 인연을 맺은 책이라 해도 적당한 기분이 아닐 때 읽었더라면 자칫 열린 마음과 반가운 심장으로, 즉 준비된 상태로 조우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170-171)



‘감정적 준비‘ 라는 단어가 너무 적확해서 가만히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바로 뒤에 오는 문장_ ‘모든 생의 형태는 결정적으로 여기에 달려 있다.‘ 이 한 문장을 읽기 위해서 나는 이 책을 읽었구나, 하고 알았다. 녹음하고난 후에 바로 제인 오스틴 문장을 마주했는데 거기에서 또 웃음보 터졌다. 아까 친구와 인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겹쳐지는 것들이 있어서 더 중얼거릴까 하다가 관뒀다. 오늘 구름은 정말 아름다워서 걷다가도 보고 책을 읽다가도 고개를 들어 보고 친구와 동생과 통화를 하면서도 바라보았다. 다가오는 것들이 있어서 그것들을 마주하는데 나라고 해서 두렵지 않고 떨리지 않다면 어디 인간일까 싶지만 몸으로 부딪쳐 살아보기로 한 작정한 순간들_을 매듭으로 묶고 또 매듭으로 묶어놓았는지라. 오늘은 좀 춥더라. 아이스라떼는 에바였다. 하여 뜨끈한 카푸치노, 뜨끈한 라떼 맛집으로 순간이동하고픈 순간들도 잦았다. 책을 읽다 낯선 단어를 외우다가 문득 언니와 술잔을 기울이며 나눈 대화 한 조각이 떠올랐다. 제일 두려운 건 사랑의 좀비가 되는 일이야. 언니의 딕션은 정확히 그게 아니었는데 언니 말을 들으면서 나는 사랑의 좀비라는 단어를 떠올렸고 사랑의 좀비가 된다는 건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 언니와 나는 일견 다른 이들에게는 사랑의 좀비와 다를 바 없는 처량한 여자들, 사랑의 상실에 온몸을 내던진, 그런 어리석은 여자들로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다만 우리는 알고 있지. 우리의 결말이 어떻게 다다를지는. 하고 둘이 담배를 태우다가 미친듯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마가렛 애트우드가 말했던 문장을 떠올리면서 담배를 한대 더 태웠는데 그 역시 그런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던 뜨거운 경험을 한 걸 테지 싶었다. 로빈 리를 다 읽고난 후 리뷰는 쓰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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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5-27 20: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까악~~~~~~~~~~~~!! 이제 알라딘 TV 진출하시는 겁니까? 유튜브도요? 제가 구독과 좋아요!를 준비시키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수이 2024-05-29 08:59   좋아요 0 | URL
또 갑자기 삭제해버릴 수도 있는지라.........

단발머리 2024-05-27 2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근데.... 왜 로빈 리 리뷰는 안 쓰신다는 거에요? 저 광화문 나가서 시위라도 할까봐요. 가뜩이나 시위 많아 복잡하던데....
왜요, 왜 안 쓰신다는 겁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4-05-29 09:00   좋아요 0 | URL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아서요. 하지만 저는 그 마음을 알면서도 사랑도 하고 싶은 사람인지라 모순된 문장들이 많이 나올 거 같아 미리 쓰지 않기로.......

그레이스 2024-05-27 22: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받고 처음 몇페이지 읽었는데 쑤욱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어서 닫았습니다. 급하게 읽고 싶지 않아서요.

수이 2024-05-29 09:01   좋아요 1 | URL
펼치시면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쑤욱 빨려들어가시게 될 거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애써서 미루고 미루면서 읽었어요. 저는 이 책으로 처음 비비언 고닉의 면모를 알게 되어 좋았어요. 다른 책들도 찾아 읽어보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