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박 다시 한번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제가 알기로는, 가르치는 경험은 충분한 자격을 갖는 윤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책임-의무에 더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윤리적이고자 계획을 세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아요. 《시학》의 첫 페이지에는 미메시스와 포이에시스 사이에서 진행되는 연극이 나옵니다. 아이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정말로 할 수 있는당신의 미메시스 안에서 가능한 한 양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투케tuche를 통해서 포이에시스가 출현할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것은 우리가 이야기 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델입니다. 당신은 가르치면서 "나는 윤리적이야"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이 정말로 생각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 완수할수 있을까?"겠죠.
샌더스 맞습니다.
스피박 어떻게 완수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움직여야 하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어요? 그저 그것에 대해서 완전하게 의지를 가지는 겁니다. 그렇죠? 중요한 것은 그런 노력이 언제나 강압에 매우 근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강압 말입니다. 심지어 설명조차 강압과 매우 가깝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욕망이 움직이도록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것의 비강압적인 부분은 당신의 개입 없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투케를 통해서 오는 포이에시스와 같습니다. - P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