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어느 유명한 비평가가 5년 전 출간된 이래 거들떠보지 않았던 책을 어쩌다 다시 펼쳐 읽고는 곧바로 글을 써서 올렸다. 그 비평가는 책이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고, 출간 당시 자기가 그 책에 얼마나 무자비한 악평을 했는지에 또 경악했다고 했다. ˝그때는 틀림없이 내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그리고 술회했다. ˝확실히 수용적인 기분은 아니었다.˝
아, 수용성! 다른 말로는 준비된 상태라고도 한다. 책과 독자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는 말할 것도 없다- 이루어진 모든 성공적인 연결을 책임지는 건 인간의 신비 중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수수께끼, 바로 감정적 준비다. 모든 생의 형태는 결정적으로 여기에 달려 있다. 훗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가 될 - 혹은 될 수도 있었을 - 인연을 우리가 반가이 맞이하거나 내칠 때 끼어드는 무작위성을 생각하면, 인생이란 우울하리만큼 우연과 정황에 좌우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평생을 함께한 친구 사이나 연인끼리 ‘혹시라도 우리가 다른 때 만났더라면‘ 하는 생각에 몸서리치는 일은 또 얼마나 잦은가? 책과 독자의 관계도 똑같아서, 이제는 내밀한 인연을 맺은 책이라 해도 적당한 기분이 아닐 때 읽었더라면 자칫 열린 마음과 반가운 심장으로, 즉 준비된 상태로 조우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170-171)



‘감정적 준비‘ 라는 단어가 너무 적확해서 가만히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바로 뒤에 오는 문장_ ‘모든 생의 형태는 결정적으로 여기에 달려 있다.‘ 이 한 문장을 읽기 위해서 나는 이 책을 읽었구나, 하고 알았다. 녹음하고난 후에 바로 제인 오스틴 문장을 마주했는데 거기에서 또 웃음보 터졌다. 아까 친구와 인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겹쳐지는 것들이 있어서 더 중얼거릴까 하다가 관뒀다. 오늘 구름은 정말 아름다워서 걷다가도 보고 책을 읽다가도 고개를 들어 보고 친구와 동생과 통화를 하면서도 바라보았다. 다가오는 것들이 있어서 그것들을 마주하는데 나라고 해서 두렵지 않고 떨리지 않다면 어디 인간일까 싶지만 몸으로 부딪쳐 살아보기로 한 작정한 순간들_을 매듭으로 묶고 또 매듭으로 묶어놓았는지라. 오늘은 좀 춥더라. 아이스라떼는 에바였다. 하여 뜨끈한 카푸치노, 뜨끈한 라떼 맛집으로 순간이동하고픈 순간들도 잦았다. 책을 읽다 낯선 단어를 외우다가 문득 언니와 술잔을 기울이며 나눈 대화 한 조각이 떠올랐다. 제일 두려운 건 사랑의 좀비가 되는 일이야. 언니의 딕션은 정확히 그게 아니었는데 언니 말을 들으면서 나는 사랑의 좀비라는 단어를 떠올렸고 사랑의 좀비가 된다는 건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 언니와 나는 일견 다른 이들에게는 사랑의 좀비와 다를 바 없는 처량한 여자들, 사랑의 상실에 온몸을 내던진, 그런 어리석은 여자들로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다만 우리는 알고 있지. 우리의 결말이 어떻게 다다를지는. 하고 둘이 담배를 태우다가 미친듯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마가렛 애트우드가 말했던 문장을 떠올리면서 담배를 한대 더 태웠는데 그 역시 그런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던 뜨거운 경험을 한 걸 테지 싶었다. 로빈 리를 다 읽고난 후 리뷰는 쓰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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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5-27 20: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까악~~~~~~~~~~~~!! 이제 알라딘 TV 진출하시는 겁니까? 유튜브도요? 제가 구독과 좋아요!를 준비시키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수이 2024-05-29 08:59   좋아요 0 | URL
또 갑자기 삭제해버릴 수도 있는지라.........

단발머리 2024-05-27 2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근데.... 왜 로빈 리 리뷰는 안 쓰신다는 거에요? 저 광화문 나가서 시위라도 할까봐요. 가뜩이나 시위 많아 복잡하던데....
왜요, 왜 안 쓰신다는 겁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4-05-29 09:00   좋아요 0 | URL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아서요. 하지만 저는 그 마음을 알면서도 사랑도 하고 싶은 사람인지라 모순된 문장들이 많이 나올 거 같아 미리 쓰지 않기로.......

그레이스 2024-05-27 22: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받고 처음 몇페이지 읽었는데 쑤욱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어서 닫았습니다. 급하게 읽고 싶지 않아서요.

수이 2024-05-29 09:01   좋아요 1 | URL
펼치시면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쑤욱 빨려들어가시게 될 거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애써서 미루고 미루면서 읽었어요. 저는 이 책으로 처음 비비언 고닉의 면모를 알게 되어 좋았어요. 다른 책들도 찾아 읽어보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