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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와 치카의 [계절의 모노클]에 실린 전주곡의 일부를 읽었습니다. 정수윤 번역가가 번역했습니다. 봄날, 동네 친구에게 꽃을 선물받았고 저 환한 노란 빛깔이 자꾸 어른거려 두 눈을 즐겁게 하는 모양새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인간의 생이란 참 찰나에 불과하면서도 영원을 내내 말하는구나 싶어 웃음이 잠깐 났습니다.

바다가 가까이 있는 곳으로 정착지를 옮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언제고 어디에서고 내내 친구들이 평안하기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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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내 태양이 되고 싶다고 그랬어.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여겼던 거 같아. 김안의 입춘을 읽다 말고 아 그래, 그래서 우리가 쉰이 다 되어서도 이렇게 살고 있나 보다, 안아, 라고 소리내어 말했어. 딸아이가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왜 너희들이 시를 재미없어하는지 아냐고 물어보셨어. 아이들은 모두 황망하게 고개를 내저었고. 시는 분석하면 안 되는데 시는 해체하면 안 되는데 우리는 그렇게 시를 배우지, 아이들에게 그렇게 시를 가르치지. 그러니 어디 시가 재밌겠냐고 국어 선생님이 말씀하셨대. 엄마는 시를 사랑하지. 유일하게 엄마가 되고 싶은 열망이었어. 하지만 이 에미는 재능이 특출나지 못해 시인이 되지 못했지. 하지만 철학자보다 더 멋진 이들이지. 언젠가 타락하고 추악하고 마치 악마처럼 묘사되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시인과 김안과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는데 그때 시인들 사이에 뒤섞여 있으면 내 마음이 마치 무당이 된 것마냥 저절로 말로 흘러나와서 그게 그렇게 좋았지. 엄마가 술담배를 하던 옛날 고려 적에. 말하니 아이는 엄마는 집시잖아. 그러니까 시를 좋아하는 거 아닐까. 나는 이상을 읽고 있으면 기분이 묘해져. 이건 엄마 피일까. 아이가 뜨끈하게 김이 오르는 죽을 맛나게 떠먹으면서 물었다. 김안의 시집을 읽다 말고 그러고 보니 불면증에 시달려서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내 괴로웠던 이십대 시절이 떠올랐다. 온라인 친구였던 닉네임이 무엇인지조차 까먹었던 서대경이 곧잘 새벽에 내가 투덜거리면 이런저런 댓글로 나를 위로해주곤 했지. 그가 김안의 친구 서대경이라는 건 나중에 안이가 말해줬던 것도 같고. 선문답 같은 이야기를 새벽에 주고받으면서 다 지나갈 것들 아니겠냐고 그랬는데 시인이 해주는 위로라는 건 역시 특별하군, 새구름처럼 금세 포근하게 잠에 빠져들 수 있었지. 내게 와서 태양이 되고 싶다고 한 사람은 시를 읽더라구. 나도 모르게 그에게 내 마음을 말하고 말았는데 시를 읽는 남자는 당신이 처음이야, 놀라워 그랬네. 빛살 사이로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풀이름과 꽃이름을 모두 다 알고 있는 그가 마치 파랑새처럼 느껴져서 자 이제 둔갑술을 그만 부리고 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보련, 파랑새야, 말했더니 그는 파도와 똑같은 음향으로 웃었어. 그때 처음으로 그에게 반하고 말았지. 나는 언젠가 이 남자의 품에 안기겠구나. 마음과 마음이 닿는데 살과 살이 닿는 느낌이었거든. 다초점 안경은 괴롭다. 눈이 금방 피로해져, 머리도 무거워지고. 밤이 깊었어. 하늘과 바다 사이로 내게 다가오고 있는 내 태양을 그리워하다가 잘래, 일찍. 갱년기 증상 때문에 새벽에 벌떡 일어나는 때가 잦아서 요즘은 일찍 잠들어.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나중에 이 모든 것들을 겪어나가는 와중에 그 가운데 자리쯤에 있다 싶을 때 그때 다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 아 맞다, 안아, 친구로서 이야기하는 건 아니고 네 팬으로서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데 이번 시집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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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달고 싶은 글을 읽고 그냥 댓글을 달지 않았다. 혐오 발언은 누구나 할 수 있기에. 여긴 열린 공간이고. 나도 알게 모르게 그렇게 하고. 근데 돌려 깐다고 해야 하나, 그게 좀 더 혐오를 포함하고 있어도 세련되게 들린다는 걸 알았다. 강신주가 하는 장자 강의를 듣다가 결국 그의 장자 개론서를 샀다. 장자가 왜 좋은가 헤아려봤더니 장자는 혐오를 표현해도 좀 세련되게 한다는 걸 알았다. 그 문장들은 결국 쓰는 이의 모든 걸 드러낸다, 이걸 다시 깨달음, 오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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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3프로의 남자의 여자로 사는 게 어떤 건지 누군가 물어봤다. 사는 건 다 똑같은데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상위 3프로의 남자의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별 느낌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제가 상위 3프로의 소득을 내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냥 상위 3프로의 남자의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기생하는 느낌입니다. 상위 3프로에게. 너무 솔직했던가, 다들 당황스러워했다. 먹고 자고 싸고 먹고 자고 싸고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 라이프에서 상위 3프로라는 형용사가 그 무엇을 더 덧댈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다른 이들의 상상력에 내 상상력을 조금 보태어봤다. 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겠노라고 한 남자 입술을 쓰다듬으면서도 그렇게 이야기를 했던 거 같다. 대략 20년 전에. 난 그런 건 바라지 않아, 그냥 내가 읽을 수 있는 만큼 책을 살 테니 그 책을 다 사줘, 커피를 좋아하니까 커피를 넉넉히 준비해주고, 술은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덜 마시겠지. 하지만 좋은 술을 마시고 싶어, 나이가 들수록 좋은 걸 갖고 싶은 욕망이 더 심해질 테니까. 나는 그 정도면 충분해. 아마 아이가 생기겠지. 내가 딸아이가 갖고 싶으니까 너의 정자가 만일 내 뜻을 알아차린다면 우리는 딸아이를 갖게 될 거야. 그 아이도 책을 좋아하면 좋겠다, 너와 나만큼. 그 아이도 커피를 마시겠지, 사춘기가 다가올 무렵. 아마 성인이 되기 전에 술을 접하게 될 거야, 우리 아빠가 내게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때 처음 맥주를 따라주었던 것처럼. 그럼 그렇게 같이 오순도순 살면 될 거야. 난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아. 결혼을 하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내가 간절하게 원했던 그 오순도순 꿈은 파탄이 나버렸다. 아이가 생겼으니 이혼은 지금 안 된다, 우리 엄마는 단호했다. 버석버석. 버석버석. 아침이면 영혼에서 버석거리는 소리가 나곤 했다. 그때부터 쭉 이혼 이야기가 나올 적마다 내 친구들과 엄마는 나를 말리곤 했다. 유일하게 이혼을 지지해주는 이는 여동생 진이뿐이었다. 상위 3프로의 남자의 여자로 사는 게 어떤 기분이냐고 어떤 모임에서 물어보더라고. 그 이야기를 진이에게 했더니 진이가 말했다. 한번 살아보라고 해, 어떤 기분인지, 어떤 인생인지. 둘이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푸후후 웃었다. 


샌드위치 가게라도 해볼게, 그러면서 살고 싶어, 아이 키우면서 둘이서. 남자는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어디에서 감히 이혼 이야기를 꺼내냐는 반응이었다.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나는 네가 이혼을 하자고 할 적마다 응했어, 그러다가 번번이 끝을 맺지 못해 여기까지 온 거고. 네가 내 손을 더 이상 잡지 않겠다고 했을 때 항상 고개를 끄덕였어. 마음은 잡을 수 없는 거니까. 그런데 우리가 맞잡고 있는 두 손은 헐거워. 그냥 서로 마지못해 잡고 있는 것처럼 걸쳐져 있어. 나는 이제 네 손을 놓을 거야. 자유롭고 싶어. 가난이 두렵지 않냐고 능력도 없으면서 전업주부가 아무 준비도 없으면서.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두려운 건 두려운데 그렇게 있다가는 그냥 네 돈만 보고 너한테 기생해서 계속 살아야 돼. 네가 죽거나 내가 죽을 때까지.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 할머니가 되어있을 거야. 할머니가 되어서 은발이 되어 얼굴과 몸이 온통 주름으로 뒤덮여 너를 탓하고 나를 탓하게 될 거야. 나 스스로를 그 누구보다 탓하겠지. 내가 나를 잃어버린 삶을 택했으니까. 근데 이제는 내가 소중해져버렸어. 나를 나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을 만나서 한 번뿐인 이번 인생을 살 거야. 더 이상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은 이어갈 수 없어. 남자는 비웃었다. 나이 오십이 되어 그 누가 여자로 봐줄 거 같냐. 예순 먹은 할배들이라면 모를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나는 이제 여자로 살 거야. 나를 여자로 봐주지 않는 네 옆에서 오래 있었어. 그러니까 이제 나를 여자로 봐주는 남자를 만나서 뭐 만나지 못할 수도 있지, 내 환상일 수도 있지, 그래도 나는 이제 네 곁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아. 그 후로 남자는 몇 번 나를 더 설득하려고 했다. 언제나 돈 돈 돈 이었다. 당신이 나를 매어둘 수 있는 게 겨우 돈뿐이구나, 그래서 가련했다. 이혼을 준비하면서 알았다. 돈과 사랑. 사랑과 돈.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게 그것들이라는 걸. 슬기롭다는 생각을 했다. 이혼을 하지 않기로 하고 다시 한 번만 더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6년 전, 1년이 흐르고 시댁에 갔을 때 어머님이 이야기하셨다. 능력도 없는 별볼 일 없는 게 어디서 감히 이혼을 하겠다고 설치고 다녔냐, 라고 눈도 안 마주치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당신 아들이 내게 이혼을 원한 거다, 난 응한 거다, 그 이야기를 했는데도. 그때 나 혼자 시댁 마당에서 울면서 그랬다. 아이가 스물이 되면 자유를 찾아 떠나겠다고. 좀 앞당겨졌다. 슬기롭게 올바른 판단을 했다고 내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블랑쇼를 읽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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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7 2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3-09 0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약속 장소로 이동을 하던 중에 마음에 드는 패턴이 새겨진 스타킹이 보여서 그걸 골랐다. 딸아이 스타킹도 사려고 했으나 아이는 나를 닮아 스타킹을 싫어해서 교복 치마를 거의 입지 않고 바지를 입고 다닌다. 내 스타킹을 하나 사서 값을 치루기 위해서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를 돌려주시면서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사모님, 감사합니다. 오늘 좋은 결실 맺으시기 바랍니다. 좀 어리둥절했다. 사모님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어리둥절한 것은 아니었다. 사모님이라는 소리는 자주 듣는 소리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는데 그 뒤에 이어진 말, 오늘 좋은 결실 맺으시기 바랍니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네, 사장님도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약속 장소에 너무 일찍 도달하는 바람에 근처 스타벅스에 앉아서 점심을 먹기 위해 샌드위치 섹션을 얼쩡거리다가 그냥 우유가 들어간 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왜 아까 그 아저씨는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마치 내 모든 상황을 아는 사람처럼. 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네 앞에 나타날지 그건 모르는 일이다. 그런 거 비슷한 건가. 약속 시간이 다 되어 이동했고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은 더 오래 걸렸다.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복도에 한그득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청바지를 입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패딩을 벗고 헤드폰을 여전히 귀에 끼고 이동하는데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양복을 입은 사람들 옆에 앉아있던 나이든 아줌마들도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개의치 않고 이동했다. 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났고 상황이 거칠게 흘러가자 다음에 다시 날을 잡을지 의향을 물어봤고 우리는 동시에 답했다. 오늘 무조건 끝낼 겁니다. 그럼 나가서 10분 시간 드릴 테니 이야기하고 들어오세요. 그래서 복도에 나가자마자 나는 욕설을 거칠게 내뱉었다. 그깟 5천만원을 더 받겠다고. 그러니 그깟 5천만원 포기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잠깐 1분 동안 생각했다. 포기하고 얻을 것들과 얻기 위해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헤아렸다. 판사는 말하고 말했다. 나는 이혼이 처음인지라 변호사도 없었고 좀 얼떨떨해보였나 보다. 50대 초반의 판사는 여성이었다. 너 이거이거이거 명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 으이구, 하면서 힌트를 주시긴 했지만. 그건 포기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니 판사가 말했다. 좀 금액을 자세히 알아보고난 후에 다시 기일을 잡아서 오시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내게. 아뇨, 포기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니 판사가 아이구 이 바보등신아, 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도 알고 있어요, 판사 언니. 지금 제가 얼마나 손해 보는 흥정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요, 라고 눈빛으로 말하니 판사 언니도 알아듣고 오케이, 확정 지읍시다, 했다. 다만 판사 언니는 내가 법의 보호를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눈치인지라 물론 피신청인이 그러실 분은 아니겠지만 신청인을 위해서 이건 이렇게 명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내가 모르는 것들까지 하나하나 넣어주셨다. 판사 언니, 고마워요, 라고 나도 눈빛으로 말했다. 


집에 돌아와 여동생과 통화를 했다. 계산기를 재빨리 두드린 동생이 말했다. 그깟 5천만원이 아니야, 이 여자야. 넌 대략 최소 2억에서 4억을 손해본 거야. 또 넘어간 거야, 그 새끼 농간에. 통화를 끝내고 4억이란 돈을 대충 헤아려봤지만 잘 감이 오지는 않았다. 


아이의 점심과 저녁까지 챙겨준 동네 친구와 간단하게 다음날 점심을 같이 했다. 어머님이 무당이셔서 신기가 있는 녀석이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했다. 앞으로 어마어마한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난 그런 것들을 바라지 않아. 바라건 바라지 않건 봐라, 집에서 살림만 하면서 애 키우며 책 읽으며 노닥거리던 인생은 이제 없는 거야. 푸훗 웃음이 나왔다. 웃냐? 좋냐? 물어봐서 응, 지금은 좋아. 웃음도 저절로 나오고. 법원을 나오자마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랬더니 엑스가 그러는 거야. 그렇게 좋냐? 라고. 그래서 응, 좋네. 자유네. 했더니 좋겠다, 해서 나만 자유냐 너도 자유야. 이제 마음껏 연애 해라. 누구 속이고 그럴 일 없으니. 하고 둘이 마주 보고 웃었다. 석양의 해가 반짝거렸고 퇴근길이 가까워서 사람들의 발걸음은 총총거렸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 다음 생에는 만나지 말자, 부디. 그 이야기를 해줬더니 동네 친구는 둘 다 자유로운 영혼들이구나 했다. 이 아줌마 영혼 신경쓰지 말고 님 앞일이나 신경 써라, 했더니 다른 사람들 앞길 보이는 것처럼 내 앞길도 보이면 좋겠는데 내 앞길은 안 보여, 라고 말했다. 다 보이면 다 알면 그게 인생이냐. 말했다. 


한 페이지가 끝났다. 

새로운 페이지를 넘긴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냥 지금 느낌은 그때 처음 그 영화를 봤을 때, 그러니까 신혼 초 책을 읽다가 심심해서 홀로 다시 봤던 영화가 떠오른다. 그 영화를 다시 보고난 후 내 삶이 저렇게 되지는 않겠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저 길을 걷겠구나 언젠가는, 싶었고 그 막연한 느낌이 결국 16년이란 시간을 흘려보내고난 후 들어맞았다는 사실이다. 


며칠 전에는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잔뜩 내뱉었다. 그래서 둘 다 소리소리를 질렀다. 서로의 가슴에 일부러 깊게 생채기를 냈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우리는 오랜만에 통화를 한 건데 미친듯 지독한 말만 내뱉었다, 둘 다. 우리는 싸울 때 지독히 미친 년놈들이 되는구나 그것도 알았다. 우아한 척, 지적인 척 한껏 교양있는 척 평상시에는 그러면서. 짐승처럼 며칠을 보내고 할 일을 끝내고 소주를 한잔 마시고나니 다시 서서히 원상태로 돌아왔다.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고 인스타그램을 삭제하려고 했으나 너무 많은 사진들이 많아서 비공개로 돌리고 앱을 폰에서 다시 삭제하고 아주 오래 애용해왔던 블로그 계정에 당분간 쉬겠노라 글을 올리고 이리저리 계속 울려대는 폰을 바라보면서 받을 전화만 받고 카톡을 무음으로 설정해놓고 알라딘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다가 당분간은 읽을 일만 있는데 알라딘마저 닫아놓으면 내가 너무 심심하겠구나 싶어 알라딘만 겨우 남겨놓고 충동적으로 글을 올린다. 그가 좋아하는 가와이 하야오의 책을 완독한 기념으로.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무모하게 시작하고 또 무모하게 나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긴다. 4억을 손해봐 이곳저곳에서 잔소리가 한없이 쏟아져 말했다. 이건 내 선택이고 이건 내 삶이니까 다들 닥쳐. 라고. 그제서야 모두 조용해졌다. 또 모르지, 내가 떼돈을 벌지, 했더니 웃음꽃이 피어났다. 지독하게 싸우고난 후 마치 서로 보지 않을 것처럼 미친듯 소리를 지르고난 후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고난 후 내 남자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 말을 했는지 그제서야 깨닫고 훌쩍훌쩍거렸다. 이혼을 하고 연애를 하고 싶다는 나의 말에 그는 우리 사랑이 완전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너무 크나큰 모험이잖아, 라고 말했다. 나는 내 남편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당신을 사랑하게 된다면 당신을 내 퍼스트로 두고 싶지 세컨드로 만들고 싶지 않아, 그건 너무 슬프잖아, 라고 말했더니 웃고 또 웃었다. 당신은 진짜 열일곱 같다, 아니, 열일곱이네. 라고 그가 말했다 다 웃고난 후에.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되면 난 열일곱 소녀처럼 너를 사랑할 거야, 라고 말하고 씨익 웃었다. 그냥 우리 둘 마음만 생각하면 되는 건데 내가 너무 어리석어서 사람들 말에 귀가 팔랑거려서 그를 미친듯 할퀴었다, 말로. 내가 할퀴니 그도 나를 할퀴었다. 둘 다 미친듯 소리를 지르고 울고 그 지랄들을 하고. 그가 내게 지금 오고 있는데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내게 오면 너는 너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아. 그러니 도망쳐, 라고. 나는 그런 거 상관 없어. 그냥 당신만 있으면 돼, 라고 그가 말했지만 나는 소리를 지르고 소리를 지르고 소리를 질렀다. 아마도 겁이 났던 거 같다. 겁에 질린 우리가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서로에게 소리를 질렀다, 두렵고 두렵고 두려워서. 더 이상 통신이 연결되지 않는 영역에서 나 홀로 훌쩍거리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용서를 구했다. 할퀴어서 미안해. 할퀴고 또 할퀴어서 미안해, 내 사랑. 울면서도 알았다. 


봄날이 오고 있구나. 

그는 내게 오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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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6 09: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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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6 09: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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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6 10: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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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7 06: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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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7 07: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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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9 06: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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