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장소로 이동을 하던 중에 마음에 드는 패턴이 새겨진 스타킹이 보여서 그걸 골랐다. 딸아이 스타킹도 사려고 했으나 아이는 나를 닮아 스타킹을 싫어해서 교복 치마를 거의 입지 않고 바지를 입고 다닌다. 내 스타킹을 하나 사서 값을 치루기 위해서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를 돌려주시면서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사모님, 감사합니다. 오늘 좋은 결실 맺으시기 바랍니다. 좀 어리둥절했다. 사모님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어리둥절한 것은 아니었다. 사모님이라는 소리는 자주 듣는 소리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는데 그 뒤에 이어진 말, 오늘 좋은 결실 맺으시기 바랍니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네, 사장님도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약속 장소에 너무 일찍 도달하는 바람에 근처 스타벅스에 앉아서 점심을 먹기 위해 샌드위치 섹션을 얼쩡거리다가 그냥 우유가 들어간 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왜 아까 그 아저씨는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마치 내 모든 상황을 아는 사람처럼. 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네 앞에 나타날지 그건 모르는 일이다. 그런 거 비슷한 건가. 약속 시간이 다 되어 이동했고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은 더 오래 걸렸다.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복도에 한그득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청바지를 입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패딩을 벗고 헤드폰을 여전히 귀에 끼고 이동하는데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양복을 입은 사람들 옆에 앉아있던 나이든 아줌마들도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개의치 않고 이동했다. 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났고 상황이 거칠게 흘러가자 다음에 다시 날을 잡을지 의향을 물어봤고 우리는 동시에 답했다. 오늘 무조건 끝낼 겁니다. 그럼 나가서 10분 시간 드릴 테니 이야기하고 들어오세요. 그래서 복도에 나가자마자 나는 욕설을 거칠게 내뱉었다. 그깟 5천만원을 더 받겠다고. 그러니 그깟 5천만원 포기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잠깐 1분 동안 생각했다. 포기하고 얻을 것들과 얻기 위해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헤아렸다. 판사는 말하고 말했다. 나는 이혼이 처음인지라 변호사도 없었고 좀 얼떨떨해보였나 보다. 50대 초반의 판사는 여성이었다. 너 이거이거이거 명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 으이구, 하면서 힌트를 주시긴 했지만. 그건 포기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니 판사가 말했다. 좀 금액을 자세히 알아보고난 후에 다시 기일을 잡아서 오시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내게. 아뇨, 포기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니 판사가 아이구 이 바보등신아, 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도 알고 있어요, 판사 언니. 지금 제가 얼마나 손해 보는 흥정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요, 라고 눈빛으로 말하니 판사 언니도 알아듣고 오케이, 확정 지읍시다, 했다. 다만 판사 언니는 내가 법의 보호를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눈치인지라 물론 피신청인이 그러실 분은 아니겠지만 신청인을 위해서 이건 이렇게 명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내가 모르는 것들까지 하나하나 넣어주셨다. 판사 언니, 고마워요, 라고 나도 눈빛으로 말했다. 


집에 돌아와 여동생과 통화를 했다. 계산기를 재빨리 두드린 동생이 말했다. 그깟 5천만원이 아니야, 이 여자야. 넌 대략 최소 2억에서 4억을 손해본 거야. 또 넘어간 거야, 그 새끼 농간에. 통화를 끝내고 4억이란 돈을 대충 헤아려봤지만 잘 감이 오지는 않았다. 


아이의 점심과 저녁까지 챙겨준 동네 친구와 간단하게 다음날 점심을 같이 했다. 어머님이 무당이셔서 신기가 있는 녀석이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했다. 앞으로 어마어마한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난 그런 것들을 바라지 않아. 바라건 바라지 않건 봐라, 집에서 살림만 하면서 애 키우며 책 읽으며 노닥거리던 인생은 이제 없는 거야. 푸훗 웃음이 나왔다. 웃냐? 좋냐? 물어봐서 응, 지금은 좋아. 웃음도 저절로 나오고. 법원을 나오자마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랬더니 엑스가 그러는 거야. 그렇게 좋냐? 라고. 그래서 응, 좋네. 자유네. 했더니 좋겠다, 해서 나만 자유냐 너도 자유야. 이제 마음껏 연애 해라. 누구 속이고 그럴 일 없으니. 하고 둘이 마주 보고 웃었다. 석양의 해가 반짝거렸고 퇴근길이 가까워서 사람들의 발걸음은 총총거렸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 다음 생에는 만나지 말자, 부디. 그 이야기를 해줬더니 동네 친구는 둘 다 자유로운 영혼들이구나 했다. 이 아줌마 영혼 신경쓰지 말고 님 앞일이나 신경 써라, 했더니 다른 사람들 앞길 보이는 것처럼 내 앞길도 보이면 좋겠는데 내 앞길은 안 보여, 라고 말했다. 다 보이면 다 알면 그게 인생이냐. 말했다. 


한 페이지가 끝났다. 

새로운 페이지를 넘긴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냥 지금 느낌은 그때 처음 그 영화를 봤을 때, 그러니까 신혼 초 책을 읽다가 심심해서 홀로 다시 봤던 영화가 떠오른다. 그 영화를 다시 보고난 후 내 삶이 저렇게 되지는 않겠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저 길을 걷겠구나 언젠가는, 싶었고 그 막연한 느낌이 결국 16년이란 시간을 흘려보내고난 후 들어맞았다는 사실이다. 


며칠 전에는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잔뜩 내뱉었다. 그래서 둘 다 소리소리를 질렀다. 서로의 가슴에 일부러 깊게 생채기를 냈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우리는 오랜만에 통화를 한 건데 미친듯 지독한 말만 내뱉었다, 둘 다. 우리는 싸울 때 지독히 미친 년놈들이 되는구나 그것도 알았다. 우아한 척, 지적인 척 한껏 교양있는 척 평상시에는 그러면서. 짐승처럼 며칠을 보내고 할 일을 끝내고 소주를 한잔 마시고나니 다시 서서히 원상태로 돌아왔다.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고 인스타그램을 삭제하려고 했으나 너무 많은 사진들이 많아서 비공개로 돌리고 앱을 폰에서 다시 삭제하고 아주 오래 애용해왔던 블로그 계정에 당분간 쉬겠노라 글을 올리고 이리저리 계속 울려대는 폰을 바라보면서 받을 전화만 받고 카톡을 무음으로 설정해놓고 알라딘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다가 당분간은 읽을 일만 있는데 알라딘마저 닫아놓으면 내가 너무 심심하겠구나 싶어 알라딘만 겨우 남겨놓고 충동적으로 글을 올린다. 그가 좋아하는 가와이 하야오의 책을 완독한 기념으로.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무모하게 시작하고 또 무모하게 나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긴다. 4억을 손해봐 이곳저곳에서 잔소리가 한없이 쏟아져 말했다. 이건 내 선택이고 이건 내 삶이니까 다들 닥쳐. 라고. 그제서야 모두 조용해졌다. 또 모르지, 내가 떼돈을 벌지, 했더니 웃음꽃이 피어났다. 지독하게 싸우고난 후 마치 서로 보지 않을 것처럼 미친듯 소리를 지르고난 후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고난 후 내 남자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 말을 했는지 그제서야 깨닫고 훌쩍훌쩍거렸다. 이혼을 하고 연애를 하고 싶다는 나의 말에 그는 우리 사랑이 완전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너무 크나큰 모험이잖아, 라고 말했다. 나는 내 남편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당신을 사랑하게 된다면 당신을 내 퍼스트로 두고 싶지 세컨드로 만들고 싶지 않아, 그건 너무 슬프잖아, 라고 말했더니 웃고 또 웃었다. 당신은 진짜 열일곱 같다, 아니, 열일곱이네. 라고 그가 말했다 다 웃고난 후에.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되면 난 열일곱 소녀처럼 너를 사랑할 거야, 라고 말하고 씨익 웃었다. 그냥 우리 둘 마음만 생각하면 되는 건데 내가 너무 어리석어서 사람들 말에 귀가 팔랑거려서 그를 미친듯 할퀴었다, 말로. 내가 할퀴니 그도 나를 할퀴었다. 둘 다 미친듯 소리를 지르고 울고 그 지랄들을 하고. 그가 내게 지금 오고 있는데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내게 오면 너는 너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아. 그러니 도망쳐, 라고. 나는 그런 거 상관 없어. 그냥 당신만 있으면 돼, 라고 그가 말했지만 나는 소리를 지르고 소리를 지르고 소리를 질렀다. 아마도 겁이 났던 거 같다. 겁에 질린 우리가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서로에게 소리를 질렀다, 두렵고 두렵고 두려워서. 더 이상 통신이 연결되지 않는 영역에서 나 홀로 훌쩍거리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용서를 구했다. 할퀴어서 미안해. 할퀴고 또 할퀴어서 미안해, 내 사랑. 울면서도 알았다. 


봄날이 오고 있구나. 

그는 내게 오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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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6 09: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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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6 10: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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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7 06: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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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6 13: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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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9 06: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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