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동어미화전가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16
박혜숙 편역 / 돌베개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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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시대가 되었든지 간에 그 시대에 가장 힘든 삶을 살아가는 계층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서민이라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과거에는 민초 내지 백성들이라 불렸던 계층이다. 부자가 아니라면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위기를 맞이하면 가장 먼저 고통을 받는 존재일 것이다. 과거를 보더라도 조선시대 난리가 나면 백성들이 가장 먼저 죽거나 다쳤고 지배층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현대에 들어서면서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지키겠다고 큰소리치다가 몰래 내뺀 놈이 대통령이니 말이다. 그렇듯 일반 백성들의 삶은 가장 고단하고 힘든 삶이 아닐 수 없는 듯하다. 이 덴동어미화전가를 보노라면 정말 일반 백성들의 삶이 고달프고 힘든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봄에 여성들이 모여 진달래 화전을 부쳐 먹으며 꽃놀이를 하던 풍습이 있는데 이 화전놀이를 한글 가사로 기록한 것이 화전가인데 그중에서도 덴동어미의 이야기를 담은 가사가 바로 이 덴동어미화전가이다. 이 화전가를 읽다보면 힘겨운 모습이 절로 그려져 참 안타깝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약 100년의 전의 봄날에 경상도 순흥에서 화전놀이가 있었다. 화전놀이를 하기 위해 저마다 부잣집이건 가난한 집의 여인네건 여건에 맞게 참기름, 들기름 등의 준비를 하는 것을시작으로 이 화전가는 시작한다. 유교적인 내외법에 집안에서만 있던 여인네들이 1년에 단 한 번 외출이 허용된 것이 바로 이 화전놀이 하는 날이기에 그녀들의 기대에 부푼 모습이 절로 그려지는 듯 했다.


  타인의 슬픔을 보듬어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이야기-자신의 슬픈이야기-를 함으로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자신만이 이런 슬픔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하여 위안이 되도록 말이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 라는 실현시킨다. 이 화전가 속에서 화전놀이를 즐기지 못하고 자신의 슬픔을 내보이는 청상과부를 달래는 덴동어미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러한 이치를 다시금 알게 된다. 삼종지도를 내세우던 조선은 이런 젊은 청상과부의 아픔에 대해서는 거의 외면했기에 그녀는 더욱 슬펐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남편은 죽고, 자식도 두지 못한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슬퍼했을지 그 서러움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이내 덴동어미가 구구절절 말한 그녀의 처지를 알게 되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덴동어미는 아전 집안의 딸로 완전 하층의 계층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듭되는 흉사로 인해서 밑바닥을 전전하게 되었다. 처음 시집을 갔는데 혼인 후 이듬해 남편이 단옷날 그네를 타다 줄이 끊어져 죽고 만다. 이후 개가를 갔는데 이포-아전이 관가의 공금이나 곡물을 사사로히 축내는 것-로 인해 집안이 결단난다. 먹고 살기 위해 걸식하며 다니다 경주에 이르러 객줏집에서 더부살이 하며 이제는 좀 먹고 살만한 돈을 모았으나 괴질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고 남편까지 죽는다. 그렇게 또다시 절망을 맞이한 그녀는 홀로 떠돌다 울산에 이르러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황도령을 만나 다시금 부부의 연을 맺어 지낸다. 그렇게 10년을 같이 지냈는데 갑작스런 산사태로 또 남편을 잃게 된다. 삶을 포기하려는 그녀를 이웃여자가 설득하고 그녀는 다시 살아본다. 그러다가 엿장수 조서방을 만나 나이 50에 첫아이도 낳게 된다. 이제좀 삶이 편안해지나 했더니 집에 불이나서 조서방은 죽고 아이는 화상에 병신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온갖 풍파를 겪고 덴동어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것이 그녀의 한편생이다. 당연히 청상과부는 슬픔을 가실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엉송이 밤송이 다 쪄보고 세상의 별 고생 다했네”  


  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기나긴 인생에 대해 마치는 덴동어미는 너무 불쌍했다. 정말 불우했던 인생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마치 신이 그녀는 결코 행복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을 내린 듯 보여주는 그녀의 고난과 절망의 인생사를 보노라니 정말 나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 나는 과연 저런 삶 속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자신의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다시 일어난 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절망 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그녀는 만인에게 귀감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그녀는 절망 속에서 일어났지만 그럴 수 있던 것은 그녀 자신만의 의지는 아니었다. 처음 남편을 잃고는 그냥 주위 권유에 의해 재가를 갔지만 두 번째 남편까지 잃은 후에는 그냥 자포자기한 듯 했다. 세 번째 남편까지 잃은 후에는 삶을 포기하려 했지만 주막집 주인댁의 설득에 마음을 돌린 것이다. 네 번째 남편을 잃게 되었을 때는 이웃집 여인이 설득을 했다. 앞서 주막집 주인댁이 삶의 희망을 일깨웠다면 이웃집여인은 자식을 말하여 삶의 책임을 일깨웠다며 역자는 말하고 있다. 이렇듯 조선시대에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호의를 가진 이웃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끔 한다. 너무나도 개인화된 현대사회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점은 차라리 조선시대에 낫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더군다나 오늘날 이렇게 개인화됨으로 인해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지 않은가. 비록 같은 하층민이기에 생기는 유대감에서 그러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사람과 사람간의 서로를 챙겨주는 마음씨는 우리에게 이웃 간의 연대를 생각하게 한다. 최근 스테판 에셀이 후속작에서 강조한 연대의 활성화가 충분히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것을 같은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지속되는 시련과 절망을 마주한 덴동어미가 종국에는 더 놀라움을 독자에게 안겨준다. 주어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지 한 후 덴동어미는 삶에 대해 달관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거친 풍파 속을 살아온 덴동어미는 인생의 끝 언저리에 도착하고서야 인생은 본래 그런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시련과 고통이 자신에게 다가와도 삶에 대해 희망과 의지를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찌보면 너무나도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거듭된 시련에도 희망과 의지를 잃지 않고 살아왔던 덴동어미의 삶을 보노라면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 그녀가 도달한 정신적 경지는 여느 도인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다. 굴곡있는 삶 속에서 몸으로 겪고 정신적으로 깨달은 그녀의 태도야 말로 우리가 진정 본받아야 하는 삶에 대한 방식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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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티아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6
플라톤 지음, 이정호 옮김 / 이제이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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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가 변해도 인간의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은 한결같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자신이 사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세계를 꿈꾸며 살아간다. 조선시대에는 조정에서 동해의 울릉도에 출입을 금하는 명을 내림으로 해서 도리어 울릉도가 이상향이 되기도 했다. 그곳에 가면 아무런 걱정없이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유토피아 말이다. 이와 비슷한 대명사가 되어 버린 곳이 있다. 바로 아틀란티스. 저 깊은 바다 속으로 잠겨버렸다고 알려진 환상속의 섬이다. 가수 보아의 노래 제목에도 나왔던 그 아틀란티스는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단어가 된 듯하다. 한 통계학자에 의하면 이 신비의 섬을 소재로 하여 쓰여진 책이 5천권이 넘는다고 하니 정말 아틀란티스는 만인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아틀란티스가 최초로 등장한 것이 위대한 철학자인 플라톤의 저서 <크리티아스>라는 것은 나도 처음 알았다. 등장한 이래로 수많은 곳에 등장한 이 신비의 섬을 플라톤이 처음 언급했다는 사실이 왠지 생소하게 다가왔다.


 <크리티아스>에 담겨진 내용은 매우 짧다. 완성의 빛을 보지 못한 작품이라 더욱 그렇다. 소크라테스와 티마이오스, 그리고 헤르모크라테스와 크리티아스가 등장하는 이 작품은 아틀란티스에 대적해 승리를 거둔 고대 아테네에 대한 찬양과 아테네의 건국배경 등에 대한 설명과 아틀란티스에 대한 건국설명 등을 다루고 있다. 표면적으로 쉽게 알 수 있는 아테네의 건국에 대한 이야기와 아틀란티스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한 흥미를 끈다. 특히 이름만 알던 그 아틀란티스에 대한 건국신화는 매우 흥미로웠다. 아틀란티스가 사실 포세이돈의 땅으로 내려진 장소라거나 포세이돈이 클레이토와의 사이에서 5쌍둥이를 낳았다는 내용은 처음 알게된 사실이었다. 그렇게 진행되다가 새로운 내용의 암시와 함께 중단된 내용은 매우 아쉬웠다. 초기에는 덕성있게 살아가던 그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타락해가고 그로 인해서 제우스가 벌을 내리기 위해 신을 소집한다는 내용에서 반전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참으로 안타까웠다.


 이 책은 원문 해석만을 담고 있지 않았다. 앞부분에는 역자의 해설이 담겨있기도 해서 본문을 읽고 아쉬워하던 내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본래 이 크리티아스는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와 헤르모크라테스까지 이렇게 3부작으로 계획했던 것이라고 한다. 티마이오스의 마지막부분과 이 크리티아스의 초기부분이 딱 이어진다는 점이 그것을 그것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증거가 될 듯하다. 그런데 이렇게 크리티아스가 완성을 보지 못한 것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담고 있어서 매우 흥미진진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날 흥분하게 한 사실은 기존에 계획된 3부작에 대한 내용이다. 티마이오스는 우주론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우주와 국가와 인간을 하나의 통일된 유기체로 묶어내려고 했다는 플라톤의 말년의 계획에서 그런 것이었다고 하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국가에서 초기에 올바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점점 국가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끌어내는 그 놀라운 플라톤의 치밀한 구성과 논리에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플라톤의 말년의 야심찬 계획을 알게 되니 정말 화이트헤드의 “유럽철학의 전통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 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느낄 수 있었다. 다만 플라톤의 이 야심찬 3부작을 온전히 볼 수 없다는 점이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다. 책에는 이 크리티아스의 중단된 부분까지만 플라톤이 쓰고 나머지는 쓰지 않았다고 추정하는데 부디 그 추정이 틀리길 빈다. 플라톤이 다 썼지만 유실되어 어디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언젠가 발견되지 않을까? 정말 미완의 작품이라 너무나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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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근담 동양고전 슬기바다 6
홍자성 지음, 김성중 옮김 / 홍익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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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에 유대인들의 지혜의 보고로 알려진 탈무드가 있다면 동양에는 채근담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채근담에 담긴 내용이 알차고 귀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제목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정작 읽게 된 것은 어른이 되고서였다. 제목부터 왠지 그 뜻을 가늠하기 어려운데 이 책의 앞부분에 그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어 전부터 궁금해하던 점을 충족시켜 주었다. 송대의 유학자인 왕신민이 한 말인 “나무뿌리를 씹어 먹을 수 있다면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다.” 라는 문장에서 인용한 것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명심보감처럼 판본이 하나가 아니라고 하니 역시나 정말 오래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에 보았던 명심보감이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가르쳤다면 이 채근담은 그보다 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읽다 보면 이 책이 독자에게 도를 얻는 경지에 이르도록 조언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머리카락은 성글고 이가 빠짐은 덧없는 육체가 시들고 늙어 가는 대로 내맡기고,   

                      새 우짖고 꽃 피는 모습 속에서 만물의 변함없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자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속에서 자신을 완성시킬 수 있는 도를 얻어야 한다는 어조의 글들을 상당 수 볼 수 있다. 어느 시대가 되었든 자신을 수양하고 완성시켜 가는 것은 정신적인 성장을 나타나게 하는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흔히 한국은 급속도로 발전했음에도 그에 걸맞는 정신적인 면모를 갖추지 못했다고 말한다. 소위 물질문명에 비해 정신문명이 성숙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이 책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느정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비단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정신적인 도야에는 도움이 될 성 싶다.


  구체적인 것보다 추상적이며 이현령비현령한 표현이 많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고전으로서의 면모는 충분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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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천재가 된 홍대리 천재가 된 홍대리
이지성.정회일 지음 / 다산라이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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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감명깊게 보았던 “리딩으로 리드하라”의 작가인 이지성씨와 독서로 인해서 인생이 바뀐 정회일씨의 공동 작품이다. 그 전에 홍대리 시리즈를 몇 권 본 적이 있어서 그리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처음 홍대리 시리즈를 볼 때 엄청 기대했지만 결과적으론 기대이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볍게 책을 들었다. 독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들이 많이 나왔지만 이 책처럼 쉽게 와닿게 쓴 책은 없지 않나 싶다. 단순히 독서를 강조하는 설명식의 글이 아니라 가상인물을 통해서 그 인물이 독서의 효과를 체득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썼다는 점에서 독서를 시작하는 독자들에게 공감을 갖게 할 듯하다. 


 어린 나이에 일찍이 책에 관심을 가지며 독서에 재미를 알았던 나로서는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다만 방법에 대해서는 흥미가 생겼다. 처음에는 무조건 2권을 읽고, 그 다음에 100일간 33권을 보는 것, 그리고 자기의 전문분야에 대한 책을 100권을 볼 것, 마지막으로 365일 책읽기. 물론 마지막에는 그냥 책을 읽는 수준이 아니라 치열하고 자신의 뇌가 바뀌도록 하는 책읽기는 하는 것이다. 이지성작가의 전작 “리딩으로 리드하라” 와 일맥상통하는 주장을 담고 있는 책이었지만 나에겐 그리 큰 도움은 되지 않을 섶 싶다. 다만 책에 담긴 책 목록과 독서에 대한 마음가짐 정도는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책읽기를 통해서 나 자신이 바뀌고 종국에는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저자들의 생각에는 깊히 공감하며 이 책을 다 읽었다. 초보독자에게는 놀라움이 독서 좀 한다는 독자에게는 쉬어가는 책이 될 듯하다. 가볍게 보면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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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9
플라톤 지음, 이기백 옮김 / 이제이북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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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살면서 간혹 국가의 불합리성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는 한다. 국가가 행하는 것이 대체로 다수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항상 그 일이 옳다고만은 볼 수 없다는 사실은 결국 인간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으로 돌아오곤 한다. 인간이 하기에 완벽할 수 없으며 인간이 하는 것이기에 잘못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최근 이슈가 되는 영화 “두개의 문”을 통해서 우리는 국가가 행하는 일의 정당성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일명 용산 참사로 일컬어지는 사건을 초래한 것이 국가의 잘못이냐 아니면 국가가 집행하는 것을 막은 주민들의 잘못이냐 하는 것에 대한 갈등을 하게 한 지금의 시대를 바라보며 우리는 플라톤의 저작 “크리톤”을 펼침으로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현 시점의 주제와 완벽히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의 법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는 국가의 법이 옳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존중해야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할 수 있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알기를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을 통해 많은 사람이 “국가가 하는 일은 옳다.” 라는 의식을 암암리에 갖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크리톤을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은 전혀 근거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뉘앙스가 풍기는 글은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이 크리톤은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를 현혹하고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크리톤이라는 사람과 대화를 한 것을 기술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허구이나 플라톤이 썼다는 점에서 아마도 현실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을 관통하는 중심주제는 “국가의 법과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이다. 일명 시민불복종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사형받기 직전에 감옥에 찾아온 크리톤은 탈출을 권유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를 면밀히 따져본 후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결국 사형을 당하기로 한다는 내용이 이 책의 줄거리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고, 거의 플라톤의 작품을 통해서만 대략 “그는 어떤 인물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아마도 자신의 올곧은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임을 대략 추정케 한다. 물론 자기가 갖고 있는 생각보다 옳다고 여겨지는 원칙이나 신념을 깨닫는다면 바로 그것을 최우선에 둔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유연성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상사 모든 것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생사가 달린 시점에서 그 행동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를 검토해 보다니..


  “크리톤”에서 국가가 행하지만 옳지 않은 일이라면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소크라테스는 법률과 국가를 의인화해서 차근차근 흔히 말하는 악법을 거부할 수 있다는 논리를 반박해 나간다. 물론 그 전에 확실한 원칙을 세우고 크리톤이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박논리를 펼쳐나간다. 의인화된 법률과 국가가 설파하는 논리는 탈옥이 나라와 법률의 파멸을 가져온다는 점이 제일 반박논리이다. 그리고 탈옥이 국가와 합의한 것을 파기한다는 것도 주장한다. 그동안 국가에서 잘 먹고 잘 살아갔는데 이제야 국가의 명령을 행하기 싫다고 탈옥하는 것은 무엇이냐 이것이다.


  변론에서 보여준 소크라테스의 시민불복종에 대한 강한 의지와는 다르게 크리톤에선 국가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이것은 일면 소크라테스의 역설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시민불복종이라는 이 주제는 정말 만만치 않은 주제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다시 생각하면 아닌 것 같기도 한 이 주제에 대해 확고한 판단을 내리기가 참 어려웠다. 나는 본래 잘못은 고침으로서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국가의 경우에도 잘못된 법이라면 마땅히 고치고 개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국가가 행하는 옳지 못한 명령에 대하여 우리는 거부할 수 있다고 볼 것이다. 하지만 옳지 못한 명령이라고 사사건건 거부하는 것이 당연하게 된다면 이 책에서 법률이 말한 것처럼 국가와 법의 근간을 뒤흔들어 파멸로 이끌게 되지 않을까. 너도나도 자신만의 생각으로 악법이라 생각되는 것을 거부한다면 누가 그것을 지키고 행하겠는가 말이다. 물론 일명 악법이라 부르는 옳지 못한 법에 대해서는 수정해야 하지만 그것은 정당한 절차를 밟아나가야 한다. 비록 그 전에 그 법에 대한 불이익을 받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개개인이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이 사회에 살기로 국가와 암암리에 합의했음을 보여준다. 자신이 싫다면 다른 곳으로 가야말 것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하지만 불만을 가지더라고 이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면 자신은 이 사회의 법률을 지키며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은연중에 나타낸 것이 아닐까.


  시민불복종에 대한 찬성과 반대를 딱 결정짓는 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이 글에서 이 문제의 반대를 밝혔지만 찬성에 대한 생각도 갖고 있다 다만 원칙과 법이 우선이라는 판단을 했을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더 나은 의견이 나온다면 모를까 아직은 이정도 판단밖에 내리지 못하겠다. 현 사회가 법을 너무나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집행한다는 점이 안타깝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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