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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그림자 - 삼전도 항복과 조선의 국가정체성 문제
계승범 지음 / 사계절 / 2024년 6월
평점 :
조선에서 가장 큰 외침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다. 두 전쟁 모두 국제 전쟁의 성격을 띠었고 당시 조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각기 나름의 의의가 있는 전쟁인데 관련해서 많은 연구와 관심이 있는 임진왜란에 비해서 병자호란은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하다. 그 까닭은 병자호란은 별 힘도 못 쓰고 전쟁에 지고 치욕적인 항복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전쟁 모두 우리가 처한 지리적 상황 때문에 일어났고 이기던 지던 그 의미를 분석하고 대비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수 백 년 전의 그 상황이 아직도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은 우리보다 후진국이라고 여겼던 일본이 국가적인 역량에서 우리와 대등 혹은 넘어섰다는 것을 증명하는 전쟁이었다면 병자호란은 중국에 대한 우리의 시선이 얼마나 고정되어 있었나를 새삼 느끼게 하는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고정된 시선은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점에서 당시를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현재를 대비할 교훈을 얻게 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병자호란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로 명과 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조선에서 인조 반정이 일어나 청을 배척하고 명을 따르게 됨으로써 청의 침공을 받아 굴욕적인 항복을 했던 전쟁이다. 어쩌면 피할 수도 이길 수도 있는 전쟁을 어리석은 인조와 유교론자들에 의해 전쟁에 졌다는 식이다. 그래서 광해군을 좋게 해석하고 인조는 최악의 왕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것은 조금만 아는 사실이다. 광해군의 외교 노선은 명을 배척한 것도 청을 배척한 것도 아닌 어찌 보면 중간에서 관망하는 상태였다. 말하자면 애매한 자세를 취한 것이다. 그것이 인조 정권에 들어와서 확 바뀐 것은 아니다. 좀 더 선명한 친명을 선언하긴 했지만 청에 대한 태도는 유지를 했다. 청에 완전한 반기를 들어서 전쟁을 불러 온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당시 상황이 전쟁을 불러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책은 광해군 때의 상황과 외교 방향 그리고 뒤를 이은 인조 때의 상황을 비교하면서 전쟁이 일어나게 된 주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광해군은 명에 대한 사대를 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청(당시에는 후금)에 대해 더 우호적이었다. 후금과는 되도록 마찰을 줄이고 명과는 접촉 자체를 미루려고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런 광해군의 외교 노선에 조선 신료들이 강력하게 반대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광해군 때의 집권 세력인 북인 뿐만 아니라 남인, 서인 할 것 없었다. '양반' 이라면 전부 다 반대했다. 비록 시세를 봐서 후금과 교류는 하지만 오랑캐에 대한 사대는 있을 수 없다는 식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조선의 주된 지배 층이었던 양반들의 명에 대한 관념을 이해해야 한다. 사실 조선은 이미 건국 할 때부터 명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조선이라는 국호 자체를 명에서 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대로 중국으로부터 왕 책봉을 받아왔고 많은 교류가 있었다. 명이 다른 중국 왕조에 비해서 조선을 많이 착취하지 않았기도 했고 성리학이 보편화 된 당시 조선에서 명은 명백한 임금과 신하의 관계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 때 명군의 구원으로 더 큰 의리로 묶였다. 재조지은. 거의 망하게 된 나라를 구원하여 도와준 은혜라는 뜻인데 당시 지배층의 마음에 크게 박히게 되었다. 그것이 주자학적인 개념과 연결되어 명은 단순 군신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된다. 바로 군부 즉 황제이자 아버지의 나라가 된 것이다. 이것은 붕당을 초월한 그야말로 이념이었다. 당시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이자 조선 존재의 근간이었다. 이것은 어떤 논의의 문제도 아니고 그냥 고정된 이념이었기에 이것이 기본 정착되어 있는 상황에서 어떤 변화도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책은 이것을 조선의 국가 정체성의 입장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조선은 성리학적인 이념 바탕 위에서 건국을 하였고 주된 지배층인 양반은 유학의 교리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 중기 이후로 주자학이 대세가 되면서 너무 교조적인 관념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유학은 이단으로 취급을 했고 대외 정책에서는 명과의 관계가 군신을 넘어서 부자 관계로 격상하고 이것이 절대로 변하지 않는 관념이 되어 버린 상태에서 사상은 획일적으로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나중에 명이 멸망하고 나서도 '소중화' 의식으로 나아가면서 조선 말까지도 이어진다.
사실 만주에서 청이 세력을 키워서 대륙을 정복하는 동안에 조선은 광해군의 나름 실리 있는 정책으로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전쟁을 미룬 것에 불과 했다. 지배층이 명을 아버지처럼 따르고 청을 오랑캐로 여기는 이상 충돌은 불가피했다. 언제까지 그런 상황을 인내할 청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사고를 경직 시키는 유연하지 못한 교조적인 이념이다.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외교 정책이었던 명과의 사대 교린은 이해할 수가 있지만 무조건적인 명 숭배 의식은 너무나 피곤하게 한다.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이런 사상은 훗날 우리 현대사에서도 볼 수 있다. 바로 공산당 타령이다. 나랑 생각이 다르면 공산당이라고 숙청하고 죽이고 했던 것이 불과 몇 십 년 전이다.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그 개념이 확장되고 있는 이때에 공산주의라는 올가미는 일부 사람들에게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저 시절 중국 명이 아니라 미국이 중심이다. 물론 그때의 명의 위상과 지금의 미국의 세계적인 위상은 차이가 있긴 하다. 무조건 미국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전쟁에서 공산화를 막은 구원군으로의 미국에 대한 고마움과 현재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전쟁을 억제 시켜주는 미국의 역할 등은 충분히 미국 편을 들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불행하게도 주위에 미국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 대항하려는 중국이 위세 등등하고 조선을 멸망 시켰던 일본도 건재한 데다가 조선 말에 등장한 러시아의 위상은 미국과 더불어 한반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지금의 우리가 옛 조선은 아니고 국력도 그때보다 훨씬 세졌지만 주위 나라들이 모두 초강대국이기에 사안에 따라 협력하기도 하고 반목하기도 하는 복잡한 상황에 있다. 이 상황에 친미, 친중, 친일, 친러 로만 흐른다면 나라의 앞길은 험난할 것이다. 통일 한국이 아니라 여전히 위협적인 북한과도 대치한 상황에서 어느 때보다 세밀하면서도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미국은 우리의 최고 우방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철저히 그들의 이익으로 움직인다. 미국과 완전 대등할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 우리의 목소리도 높일 필요가 있는데 친미가 외교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된다.
조선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정체성으로 전쟁을 겪었어도 교조화 된 관념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우리는 분단과 전쟁, 독재의 세월을 보내느라 민주주의 학습이 축적되지 못했고 국가 정체성에 대한 국민적 합의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결과 조선 시대 못지 않은 고정된 사고를 하는 사람이 많다. 분명한 것은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보다 지금의 한국이 더 복잡하고 위험한 상황에 있다는 것이다. 그때 조선의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갖고 온 것 인가를 면밀히 살펴야 지금의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책은 병자호란의 전후 사정과 당시 지배층의 정체성을 알아봄으로써 시대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한다. 더불어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는 역사의 교훈을 남긴다. 좀 더 세상을 넓게 보는데 도움을 주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