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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 조선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
김태완 엮음 / 소나무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시대는 과거시험의 나라였다.
과거를 통해서 인재를 선발하고 그 인재들이 나라를 경영해 나가는 나라였다.
물론 과거의 폐단은 있었으나 과거제라는 제도를 통해 조선의 역사가 지탱될수
있었던것도 분명하다 할것이다.
이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이 '책문'이었다.
시험에 응시한 수많은 선비들중에서 33명이 최종합격이 되고 이들중에서 다시
시험을 쳐서 등수를 매기는것이 책문이었다.
이때는 왕이 직접 문제를 내고 선비들이 답을 하는 형식이었는데 이 문답이
당대의 모습을 치열하게 대변하는것이다.
왕은 질문한다.
그대가 왕이라면, 그대가 재상이라면, 그대가 국가경영자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것인가.
그 질문은 정치,경제,사회,외교,국방등 다방면에 걸쳐서 그 시대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시급한 문제들을 닮고있다.
왕은 단순히 등수를 매기기위해서 질문하는것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백성의 안위를 살펴야하는 최고통치자로서의 고뇌가 담긴 질문인 동시
에 지혜로운 답변을 구하는 것이었고 또 인물을 시험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러했기에 그 질문에 답하는 선비들의 자세또한 엄정했으니 임금에게 대놓고
꾸짖기까지 하였다.
바로 임숙영의 예에서 찾아볼수있는데 그때의 임금인 광해군이
'지금 가장 시급한 나랏일은 무엇인가' 라고 묻자
'전하께서는 스스로의 실책과 국가의 허물은 거론하지 않았습니다.나라의 병은 임금
의 잘못에 있습니다' 라고 바로 직격탄을 날린다.
딴은 맞다. 국정의 최고통치자로서 모든 문제의 최종책임자는 임금이지 누구겠는가?
하지만 절대군주시절에 그렇게 대놓고 임금을 통박할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하는
생각에서 보면 소름이 끼치도록 대범함을 느낄수있었다.
물론 그 대답으로인해서 임숙영의 목숨이 위태롭기까지는 했어도 죽지는 않았을
뿐만아니라 비록 등수가 떨어지긴했어도 당당히 과거에 최종합격하게된다.
어쩌면 이것이 조선 과거제의 강점이었다고도 볼수있겠지만 한편으론 갈수록 약화
되어가는 왕권의 한 모습이라고도 할수있겠다.
또 한편의 흥미로운 책문이 있다.
세종이 내린 책문인데 여기서 답한 사람들이 잼있다.
바로 성삼문과 신숙주다. 당대의 일급 지식인이었지만 나중에 다른길을 걷게되는
사람들로 한쪽은 절개로,한쪽은 변절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게되는 인물들이다.
이 사람들이 당시의 임금인 세종이 내린 질문에 각각 답한것을 보면 각기 일리있는
말을 하면서도 나중의 행동에 대한 단초를 알수있는 내용도 보인다.
세종이 법의 폐단을 고치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자
성삼문은 법을 고치기전에 임금님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할일이라고 답했고
신숙주는 법의 폐단을 고치는것의 근본은 인재를 얻는데 있으니 언로를 열어
직언을 들으라고 답했다.
이 두사람의 글을 읽어보면 둘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왠지모를 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느끼는것이 성삼문은 임금의 입장에서
서술한것이고 신숙주는 신하의 입장에서 서술한것인거 같다.
성삼문은 왕이 중심이되어서 왕이 늘 성찰하고 반성하여 왕의 마음이 주관할것을
촉구하지만 신숙주는 적합한 인재를 등용해서 그 인재가 정권을 올바르게 담당해
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있다.
이런 답에서 단종에게 일편단심 목숨을 바친 성상문과, 자신을 알아주는 세조에게
협력하여 새로운 시대를 연 신숙주의 모습의 한 조각을 느낄수있다면 너무 큰
비약인것일까?...
또다른 책문을 보자.
중종은 외교관은 어떠한 자질을 갖추어야 하느냐고 묻고있다.
이에 김의정은 재능보다 덕을 우선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재능보다 덕이라...외교관은 나라를 대표하는 자리이다. 이런 자리의 인물이
덕으로 상대국을 대하지 못한다면 나라의 격도 떨어진다는 뜻일것이다.
최근 이라크에서의 김선일씨 사건에서도 보듯이 오늘날의 우리나라 외교관들이
재능있고 똑똑하기는 하나 지나친 엘리트의식으로 재외국민들에게 좋은 소리를
못듣고있는것을 생각해보면 이 답이 얼마나 현답인것을 느낄수 있었다.
이 책은 이런 질문과 대답 형식의 책문 수백편중에서 오늘날에 되살려도 좋을 것을
여러편 골라 해설과 함께 엮는 책이다.
쉬운 우리말로 잘 번역해서 본문 내용만 봐도 뜻을 헤아리는데 부족함이 없지만
한편한편의 책문뒤에 지은이의 자세한 설명도 함께 붙어있어서 내용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책의 뒤에는 부록으로 출전문집과 인용문헌이 자세하게 나와있어서
좀더 깊이있게 알고자하는 사람들을 배려했고 책 본문 중간중간에 지은이의 자세한
각주를 책 뒤쪽에 실어서 좀더 자세한 상황을 알수있게 하였다.
전반적으로 어려울것이란 선입관과는 달리 책 내용이 쉽게 잘 읽히고 활자가 읽기
에도 편하다.
아주 어려운 전문적인 대책이 아니라 오늘날에서도 잘 적용할수있는 상식적인 내용
이기에 쉽게 읽히는것 같다.
여기 나온 질문과 대답들은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쉬운 답변들이다.
그러나 수백년전에 우리 조상들이 주고받았던 치열한 고민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또 그 당연한 대답들을 실천을 못해서 어지럽게 돌아가는 요즘 세상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여기에 나온 임금의 질문들을 스스로에게도 답해보면서 세상을 넓게보는 기회도
될수있을것같고 자기 자신이 임금앞의 신하라고 생각하거나 국가경영자라고 생각
하거나 하면서 답을 생각해보는것도 재미있을것 같다.
오랫만에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좋은책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