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정청은 이자성을 죽이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게 아닐까. 왜냐하면 ‘부자 아빠‘ 정청은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오래전에 ‘가난한 아빠‘를 버렸다. 그런데 믿었던 ‘부자아빠‘는 대중을 부자로 만들어주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골드만 삭스나 J. P. 모건으로 대표되는 이 ‘부자 아빠‘들이 고급 사기꾼에 불과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중은 돈과 집, 직업을 잃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 ‘부자 아빠‘들은 사망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부자 아빠‘를 선택한 대중의 무의식은 아직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따라서 정청의 죽음은 다소 연극적이고 신화적으로 채색될 수밖에 없다. 그는 마치 왕위를 물려주는 늙은 왕처럼 이자성에게, 어서 나가 적들을 물리치고 왕관을 차지하라는 식의 유언을 남긴다. - P51

귀족도 뭣도 아니면서 여행을 절대로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시인이 한 분 있다. 그분은 서울 태생으로 모든 학교를 서울에서 다녔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서울 밖으로 거의 나간 적이없다. 해외여행도 하지 않는다. 서울에서 시를 쓰고 음악을 듣고 책을 번역하고 친구를 만난다. 친구들이 해외로 나가면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 사람들이 "답답하지 않느냐"고물으면 그는 빙긋이 웃으며 "(서울 밖으로) 나갈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만 답한다.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고 위험을 무릅쓴 채 여행을 떠나 온갖 고생을 하고 돌아와서는 "너무 멋진 여행이었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이들보다는 "나갈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당당하게 응수하는 그가 좋다.
새삼 당연한 얘기지만, 여행을 하고 안 하고는 단지 선택의문제일 뿐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 P58

자기 욕망을 차마 들여다볼 수 없기에 승민의 욕망을 통해 자기가 누구이고 뭘 원하는가를 알아내고자 하지만, 과거의 뼈아픈 경험을 통해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겪은 바 있는 승민은 그녀를 두려워한다. 자신이 뭘 욕망하는지를 모르(는 척하)면서 오직 타인을 통해 그것을 알아내고자 하는 서연 같은 여자, 참 피곤하다. 그런데 남자들은 늘 그런 여자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남자 역시 여자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기를 원하기 때문일 터. 현실적인 관점에서라면 늙고 병든아내를 끝까지 책임지는 크레이그 같은 성숙한 남자가 최고겠지만 우리는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승민 같은 남자나 자기 욕망을 모르면서도 당당한 서연 같은 여자에게 더 끌린다.
우리의 내면은 자기 안에 자기, 그 안에 또 자기가 들어 있는러시아 인형이 아니다. 우리의 내면은 언제 틈입해 들어왔는지모를 타자의 욕망들로 어지럽다. 그래서 늘 흥미롭다. 인간이라는 이 작은 지옥은. - P75

인간사가 정의와 무관하다는 걸 발견하게 될 때마다 씁쓸하다. 아이가 자기를 덜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더 노력한다거나 어릴 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 연인과의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반대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를 사랑하지 않은 부모는 아이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어려서 불행하게 자란 사람일수록 연인과의 관계가 더 원만하다면 얼마나 바람직할까. 그런데 불행히도 인간사는 정의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기독교나 불교 같은 종교들은 정의의 실현을 사후 또는 내세로 미룬 게 아닐까. - P78

밀주에 대한 중독적 탐닉은 이성과 과학으로 자신을 포장한 ‘마스터‘ 랭커스터의 숨은 약점이었고, 가족들은 그것을 눈치채고 경계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일방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을 포착했다. 아버지들도 한때는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그들 역시 언제나 아버지를 찾고 그 아버지는 때로 자기를 숭배하는 자들 속에 있을 수 있다. 영악한 아들들은 아버지들의 그 약점을 파고든다.
우리들 모두는 한때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이 절실한 나약한 어린아이였다. 그 사실이 변한 적은 없다. 한때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 정면에는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라는 네루다의 시구가 적힌 대형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그 어린아이는 영원히 우리 안에 있다. 성장은 끝나지 않는다. 모든 비극과 희극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나는 것, 술을 만들어 먹는 것만으로 온전한 성인이 될 수 있었다면 아마 문학과 연극, 영화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P82

남의 위험은 더 커 보인다. 반면 자기가 처한 위험은 무시한다. 그게 인간이다. 나는 북한이 핵미사일을 쏠지도 모르니 이에 대비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로마인들은 화려한 연회를 열 때마다 노예가 은쟁반에 해골바가지를 받쳐들고 손님들사이를 지나다니게 했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 같은 깊은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게 연회의 흥을 더 돋우었기 때문이다. 해골바가지를 보면 술맛이더 났던 것이다. 로마인들은 변태였나? 아니다. 지금도 그 전통은 핼러윈으로 면면히 이어져내려오고 있다. 그날이 되면 해골과 좀비들이 거리를 행진하고 죽은 자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 밤새 술을 마셔댄다. 핼러윈의 상징, 속을 파내고 불을 밝힌 호박은 즉각적으로 해골바가지를 연상시킨다. 죽음과 종말을 떠올리면 현재의 삶은 더 진하고 달콤해진다. 로마인들은 이천년 전에 이미 그걸 알고 있었다. - P90

노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혼자 죽는것‘이라고들 답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누구에게도 자신의 죽음이 인지되지 못한 채 오랫동안 버려지는 무연사가 가장 두렵다고 한다. 그들은 마치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에피쿠로스가 이천삼백여 년 전에 통찰했듯이 그런 상태를 바로 죽음이라 한다. 그러므로 혼자 죽든,
함께 죽든 혹은 가족들 앞에서 죽든, 죽음은 우리를 똑같은 상태로 인도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무와 침묵의 세계다. - P93

그런데 ‘혼자 죽는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노인들의 말은 그냥 어리석기만 한 것일까? 혹시 그들은 죽음이 아닌 ‘혼자‘를강조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인간이 정말 무서워하는 것은 죽음그 자체가 아니라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것이라고 읽을 수는없을까? 죽음은 개별적이다. 탄생은 어미의 고통과 함께하지만 죽음은 홀로 겪는다. 요컨대, 우리는 모두 혼자 죽는다.
우울증을 겪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자살률이 매우높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우울증에 걸리면 세상과 인간관계에 대해 비관적이 되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들에 사로잡힌다. - P93

우울증 환자들은 인간이 혼자라는 것, 죽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운명이라는 것을 냉철하게 직시한다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현실적이다. ‘혼자 죽는‘ 고통을 미리 맛보고 있는 그들에게는 삶이 이미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들은 죽음으로 이 절대고독을 끝장내고자 한다. 고층아파트에서 아이를 밖으로 던져 죽이고 자기도 자살을 시도하는 우울증 환자는 ‘이런 세상 살아봐야 고통이다. 이게 아이를 위하는 길이다‘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삶의 고통과 의미 없음에 대한 무서운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가 죽음의 무의미성이라는 계단을 통해 고귀한 쾌락의 세계로 들어갔다면,
우울증 환자들은 삶의 무의미와 고통이라는 다이빙대에서 죽음의 우울 세계로 점프한다. - P94

우리가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장면은 바로 우리의 일상일 것이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메릴린 먼로를 모델로 한 역작 『블론드』(올, 2011)에서 조디마지오와의 결혼생활, 즉 끝없이 이어지는 일상을 힘겨워하는 메릴린 먼로의 육성을 들려준다. "대디, 난 너무 무서워요. 영화 밖 실제 사람들과 함께하는 장면은 왜이렇게 ‘끝없이‘ 이어지기만 하는 걸까요? (…)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일상에서는 누구도 ‘컷‘이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삶은 때로 끝도 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것만 같다. 그럴 때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면 참 좋을 것이다.
"자, 다시 갑시다." - P123

"사람들은 영화를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벽에 비쳐지는 평범한 그림인 영화는 현실의 환영이지 실재하는물건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이건 이미지의 문제가 된다. 대개처음에는 영화를 수동적으로 보게 된다. 그렇지만 영화가 끝날무렵이 되면 우리는 영화 속에 흠뻑 빠지고 만다. 두 시간 동안매혹당하고, 속임수에 넘어가고 즐거워하다가 극장 밖으로 걸어나오면 우리는 그동안 본 것을 거의 잊어버리고 만다. 소설은 전혀 다르다. 책을 읽을 때에는 단어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노력해야 하고 상상력을 동원해야한다. 그런 다음 상상력이 활짝 열리면 그때는 책 안의 세계가우리들 자신의 인생인 듯 느끼고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냄새를 맡고, 물건들을 만져보고 복합적인 사고와 통찰력을 갖게되고 자신이 3차원의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폴 오스터,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열린책들, 2001) - P128

파묵은 말한다. "꿈을 꿀 때는 그 꿈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꿈이니까요. 우리는 소설도 진짜라고 생각하며 읽습니다. 하지만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모순되는 상황은 소설의 본질에서 옵니다. 소설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바탕을 둡니다."(오르한 파묵, 소설과 소설가』, 민음사, 2012)
조 라이트 감독의 <안나 카레니나>를 보러 간 날. ‘영화의 전당‘ 중극장에는 관객이 반쯤 차 있었다. 상영 중간에 휴대폰을 확인하거나 대놓고 문자메시지를 줄기차게 주고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끝없이 먹어대는 관객까지 내옆에 앉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를 보는 마음은 상트페 - P130

테르부르크로 돌아오는 안나의 마음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녀는 소설에 빠져들기를 거부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었던 반면 나는 영화에 빠져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폴 오스터 말마따나 영화는 이미지로 저 멀리에 있고 팝콘씹는 소리와 휴대폰의 푸른 빛기둥들은 현실로 가까이 있어끝까지 서로 섞여들지 않았다. 책을 든 안나는 ‘무엇이든 직접체험하고 싶은 마음‘에 시달렸지만 나는 아무런 방해 없이 영화에 몰입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언제든 멈출 수 있는 책과는 달리 영화는 어쩐지 한번 지나가면 돌이킬 수 없는 현실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모스크바행 기차처럼 무지막지하게 달려온다. - P131

그는 마치 정해진 운명을 읽어주듯 담담한 확신을 가지고 말했고 나는 그의 말을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라고 여기고 피하지 않고 맞았던 셈이다.
우리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운명 예정 따위를 믿을게 아니라면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우리에게 자기실현적 암시가 꼭 필요한 인생의 순간들이 있다는 것. 그 암시가 꼭 점쟁이나 관상쟁이에게서 나올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 P154

그렇다면 한국 가족의 미래는 어디에 도착해 있을까? 자수성가한 상고 출신의 변호사가 자기가지은 아파트를 현찰로 사는 시대가 다시 돌아올까? 아닐 것이다. 친밀감까지 장착한 성숙한 ‘부자 아빠‘가 한국 가족의 미래일까? 환상적이지만 현실성은 적어 보인다. 그보다는 다양한 형태의 결합에서 탄생한 구성원들이 닥쳐오는 갖가지 윤리적 딜레마를 힘겹게 풀어가면서 살아가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속 가족의 모습이 아마 우리가 미구에 경험하게 될 가족상과 가장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느슨하고 어지러운 가족관계에서는 영화 속 아메드(알리 모사파)와 같은 태도가 바람직할 것이다. 그는 가족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되 누구의 말이든주의깊게 듣고 보편적 윤리에 호소한다. 네가 딸이니까 이래야한다, 당신이 엄마니까 이래야 한다는 당위의 언어는 함부로동원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구성원에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것을 조심스럽게 요구한다. 가족과 타인을 가르는 기준이급속히 희미해지는 시대, 그런 아버지가 미래다. - P171

예측 가능한 인간이 되면 이렇게 편리한 점도 있겠지만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어쩐지 기분 나쁜 일이다. 국가정보원이나 기업, 웹사이트 방문자가 내 일상을 들여다볼 뿐 아니라 아예 예측까지하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그 예측에 기반을 두고 우리를 조종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우선은 자신이 예측 가능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전제를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탐정의 눈으로 자신의 일상을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조금씩 변화를 주는 것이다. 출근길을 바꾸고 안 먹던 것을 먹고 안 하던짓을 하며 난데없이 엉뚱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점차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되어갈 것이다. 이런 엉뚱한 연습에서얻어지는 부산물도 있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감수성이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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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경험은 켜켜이 쌓여 일종의 숙성과정을 거치며 발효한다. 한 층에 간접경험을 쌓고 그 위에 직접경험을 얹고 그 위에 다시 다른 누군가의 간접경험을 추가한다. 내가 직접 경험한 여행에 비여행, 탈여행이 모두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여행 경험이 완성되는 것이다.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해진다.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 P117

페넬로페의 침대에 누운 오디세우스는 비로소 깨달았을 것이다. 그토록 길고 고통스러웠던 여행의 목적은 고작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었다. 때로 그는 고향으로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었다. 영원히 늙지 않는 아름다운요정 칼립소의 침대에서 매일같이 맛있는 것을 먹으며 행복한 여행자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혜의 여신이 그를다시 고난의 여행길로 끌어냈고 그는 무거운 책임과 의무가기다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곳으로 돌아갔다.
자주 떠도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오디세우스와 같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방랑을 멈추고 그림자를 되찾을수 있는 어떤 곳으로 돌아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할까? 과연그런 곳이 있기나 할까? 나는 거기에서 받아들여질까? 요술 장화를 신고 영원히 떠돌아다니는 슐레밀, 그림자를 판사나이가 내 운명은 아닐까? 그런데 그런 삶은 과연 온당한가? 요즘의 나 역시 이런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 P132

인류가 한 배에 탄 승객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우주선을타고 달의 뒤편까지 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번성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달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지구의 모습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것과 그 푸른구슬에서 시인이 바로 인류애를 떠올린 것은 지구라는 행성의 승객인 우리 모두가 오랜 세월 서로에게 보여준 신뢰와환대 덕분이었을 것이다. - P148

우리들 대부분은 돌아올 지점이 어딘지를 분명히 알고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는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돌아올 곳,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곳, 내 집과 내 물건이 있는 곳은 여정이 끝날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여행의 원점. 여행이 실패하거나 큰 곤란을 겪을 때 돌아갈 수 있는 베이스캠프 그곳에서 우리는 피해를 복구하고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마사이족의 청년은 달랐다. 여행의 목적지는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고, 오히려 고향이 유동적이었다. 육중한 돌로 지어진 케임브리지대학교는 수백 년 동안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 아마 청년의 손자가 죽을 때까지도 어디론가 옮겨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가 떠나온 곳, 그의 부족은 늘 이동 중이었다.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삶인이들에게 여행이란 과연 무엇일까? - P191

‘여행의 이유‘를 캐다보니 삶과 글쓰기, 타자에 대한 생각들로 이어졌다. 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며, 타인의 신뢰와 환대를 절실히필요로 한다. 여행에서뿐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도 많은이들의 도움 덕분에 굴러간다. 낯선 곳에 도착한 이들을 반기고, 그들이 와 있는 동안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다 가도록안내하는 것, 그것이 이 지구에 잠깐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들이 서로에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일이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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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리되어 있으며, 설령 어질러진다 해도 떠나면그만이다. 호텔 청소의 기본 원칙은 이미 다녀간 투숙객의흔적을 완벽히 제거하는 것이다. 그들의 냄새까지 지워야하니까 호텔에선 가정집보다 훨씬 독한 세제와 방향제를 쓴다. 호텔에 들어설 때마다 맡게 되는 그 냄새, 분명 처음에는 자연의 어떤 향을 흉내냈겠지만, 어느 순간 그 근원을 몰각한 듯한, 아니 아예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한, 이제는 그저세제와 방향제 냄새로만 지각되는 그 익숙한 향의 습격을받는다. 나라마다 호텔 냄새도 각기 다르다. 그러나 세제와방향제 특유의, 여타의 다른 잡냄새를 일거에 제압하는 독선적이고 인공적인 향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 덕분에 우리는 호텔의 방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마치 새집에 들어선 것 같은 설렘을 느낀다.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  - P65

소설가는 어떨까? 나는 전업이니 어디 묶여 있지는 않다.
구상과 집필 능력은 무게가 없어 어디로든 지고 다닐 수 있다. 전 세계의 많은 작가들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 뉴욕이나 바르셀로나, 런던, 파리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때 나도 그런 삶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렇게 살수 있는 작가들은 주로 영어나 스페인어를 쓰고 있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페루에서 태어났지만 마드리드에서산다. 칠레 출신의 이사벨 아옌데는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다. 살만 루슈디는 뭄바이에서 태어났지만 런던을 거쳐 지금은 뉴욕에 정착했다. 작가의 뇌는 들고 다니기 어렵지 않지만, 그 뇌를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는 모국어로 짜여 있다. 작가는 모국어에 묶인다. 프랑스 작가 르클레지오가 ‘나의 조국은 모국어‘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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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간의 ‘내 방 여행‘에서 돌아온 어느 날, 한겨울의 한강변으로 나가 걸었다. 마치 오랜 외국 여행에서 갓 귀국한사람처럼 서울의 모든 것이 낯설게 보였다. 한 선배 작가는 장편 출간에 즈음하여 가진 한 인터뷰에서 소설을 탈고하고밖으로 나오니 자기만 겨울옷을 입고 있더라는 말을 했다.
매일 출근을 하는 직장인이라면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안다. 작가는 대체로 다른 직업보다는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지만, 우리들의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로 다녀오는 여행이다. 그 토끼굴 속으로 뛰어들면 시간이 다르게 흐르며, 주인공의 운명을 뒤흔드는 격심한 시련과 갈등이 전개되고 있어 현실의 여행지보다 훨씬 드라마틱하다. - P26

중국은 그가 처음으로 가본 외국이었고, 젊은 날의 환상이 깨져나간 곳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찾은 중국에서 추방되어 집으로 돌아온 그는 오히려 안온함을 느꼈다. 그는 비로소 오래 미루던 소설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했다. 아내는 집 밖으로 절대 나가선 안 된다고 다짐을 두었는데 그것이야말로 그가 진정으로 바라던 것이었다. 비밀의 벽장을 열고 자기만의 세계로 내려가는 나니아처럼 그 역시 자신만이 열어젖힐 수있는 문을 열고 오랫동안 중단했던 소설 속으로, 매번 낯설지만 끝내는 그를 환대해주는, 비자 따위는 요구하지 않는 그 나라로 바로 빨려들어갔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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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동백꽃은 


2월은 좀 무언가가 부족한 달
동백꽃은 한떨기 한떨기 허공으로 툭 떨어진다
떨어져서도 꿈틀대며 며칠을 살아 있는 꽃 모가지
낙태와 존엄사와 동반자살, 그런 무거운 낱말을 품고 
선홍빛 꽃잎, 초록색 잎사귀
툭, 동백꽃은 모가지째로 떨어져 죽는다.
부활이란 말을 몰라
단번에 죽음을 관통한다

더이상 퇴로는 없었다.
칼로 목을 자르자 하얀 피가 한길이나 솟구치고 
캄캄해진 천지에 붉은 꽃비가 내렸다는
겨울 속의 봄날
산 채로 모가지가 떨어지고
모가지째로 허공을 긋다가 땅바닥에 툭 떨어져
피의 기운으로 땅과 꽃봉오리는 꿈틀대고

한떨기 한떨기가 피렌체 르네상스 같은 동백꽃,
너무 아름다워 무서웠던 파란하늘 아래
꽃의 성모 마리아, 빛나는 한채의 두오모 성당의 머리를들고
툭, 무겁게 떨어지는 동백꽃

여한 없이 살았다
여한 없이 죽었다
불멸이란 말을 몰라 날마다 찬란했다

섬초


섬초는 묻는다
비금도의 시금치
차가운 해풍의 한가운데
얼음을 배로 밀고 나가는 푸른 밭의 쇄빙선
섬초
섬초에서는 난초꽃 향기가 난다
해안가 언덕에 바싹 붙어 파도소리를 세다보면
초산의 젊은 엄마 유방에 젖이 돌기 시작하는 것처럼
거친 잎사귀에 단맛이 돌고
난초가 따뜻한 곳에서는 꽃눈을 틔우지 않는 것처럼
비금도의 시금치는
아랫목 같은 것은 모른다
비둘기 발처럼 빨갛게 되도록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언 땅에 발을 꼭꼭 묻고섬초는 이렇게 시퍼렇게 만개할 때까지
쇄빙선의 칼 같은 배를 밀고 간다
올리브산의 포도나무처럼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그림
빨간 수박처럼

해안가 얼음산을 헤치고
파도소리를 줄기 속으로 밀고 가면 갈수록
비금도의 난초
속으로 단맛이 돌며
난초꽃 향기를 은은히 뿌리는 푸른 잎 무성한 섬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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