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시 울주군 언양읍언양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이라고 해야 하는데 나에겐그냥 언양이라고 입에 붙어 있다. 이건 내가 나이 많은 옛날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학, 고고학, 미술사학, 민속학 등 국학을전공하는 분들은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본래 조선시대 언양현은 경상도의 당당한 고을로, 1895년에는언양군이 되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 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울산군에 통합되었다. 그러다 1962년 울산읍이울산만을 끼고 있는 방어진, 대현면, 하상면 등과 합쳐 울산시로독립하고 나머지 지역은 울주군이 되는 바람에 이번에는 울주군 언양면이 되었다. - P117
그리고 조선시대만 해도 언양은 교통의 요충지여서 사람과 물화의 왕래가 많은 곳으로 자연히 객주가 발달했고 이에 따라 독특한 향토음식을 낳았으니 그것이 언양불고기다. 언양바로 북쪽은 소고기 산지로 유명한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인데 사실 두동면은 조선시대엔 경주에 속한 지역으로 울산과는 아무 연관이 없었다. 이 봉계는 생고기의 산지로서 유명한 것이고 언양은 조리법으로 이름을 얻은 것이다. 언양불고기는 껍질과 속을 제거하고 강판에 간 배에 잘게(3×5센티미터) 썬 쇠고기를 30분 정도 재워둔 뒤 양념장에 버무리고가열된 석쇠에 구워 만든다(본래는 한지에 물을 묻혀가며 구웠다). 그리고 구운 고기 위에 통깨를 뿌린다. 그래서 고소하고 먹기편하다. 서울 음식으로 석쇠에 굽는 바싹불고기와 비슷한데 배가들어가서 많이 달고 부드럽다. 그래서 언양에 가면 나는 언양읍성가까이 있는 언양불고기집에서 점심을 먹는다. 그래야 언양에 온것 같다. - P120
우리의 답사 목표는 천전리 각석이지만 이곳 안내판에서는 ‘천전리 공룡 발자국 화석‘이 더 눈에 띈다. 천전리와 반구대의 대곡천변에서는 중생대 쥐라기 (2억~1억 4천 5백만 년 전)와 백악기 (1억4천 5백만~6천 5백만 년 전)에 살던 공룡의 발자국이 약 130개 확인되었다. 스마트폰에서 ‘천전리 백악기 AR 공룡체험‘ 앱을 다운로드하고 실행시키면 백악기 공룡들의 모습을 증강현실로 만나볼 수 있는 장치도 설치되어 있었다. 천전리 각석 맞은편 바위 위에도 여러 개의 공룡 발자국을 볼수 있는데 나는 대개 여기서 천전리 답사를 시작한다. 그것은 공룡 발자국도 발자국이지만 이곳 너럭바위 위에서 계곡 건너 각석 - P135
을 바라보면서 대곡천의 물소리를 들으면 천고의 자연과 벗하는기분으로 너무도 마음 편하고 한가로워지기 때문이다. 기암절벽이 즐비한 천하의 절경은 아니지만 전형적인 우리나라 산천의 맑은 계곡이 갖고 있는 정취와 그윽한 멋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는 나만이 느끼는 감정도 아니고, 오늘날의 답사객들만의 생각도 아니다. 1,500년 전 신라의 왕족과 화랑도 똑같이 이 계곡을 사랑하여 자신들이 다녀간 자취를 저 넓은 바위 절벽에 글로새겨놓았다. 그것이 천전리 각석이다. - P136
천전리 각석은 계곡 위쪽에 길이 9.5미터, 높이 2.7미터의 넓적한 바위가 땅바닥을 향해 15도로 기울어진 상태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천전리 각석이 풍화를 피해 잘 보존되어온 것은 바로이 기울기 덕분이었다. 바위 위쪽에는 청동기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형태의 추상무늬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일부신석기시대의 사실적인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하단부에는 훗날 신라 사람들이 새긴 글씨가 낙서처럼 어지러운 가운데, 명확하게구획을 짓고 마치 책을 펼쳐놓은 모양으로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써 놓은 긴 글이 있다. 이 두 글은 서로 연결되어 먼저 쓴 것을 원명(原銘), 나중 쓴 것을 추명(銘)이라고 부른다. 1970년 발견 직후 당시 (1988년에 울진 봉평리 신라비가 발견되기 - P136
전)로서는 가장 오래된 신라 금석문의 발견이었기 때문에 학계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수영, 임창순, 이기백 등 원로 금석학자와 역사학자가 달려들어 글자를 해독했는데, 그 내용이6세기 전반 신라 법흥왕 때 왕가의 이야기여서 세상을 더욱 놀라게 했다. 학자들에게는 엄청난 기쁨이었다. 청명 임창순 선생이1971년 6월 8일 천전리에 다녀오면서 탁본의 여백에 쓴 소견에는 그런 기쁨이 절절히 들어 있다. 이후 수많은 학자가 후속 연구를 진행하여 대략 원명은 12행107자, 추명은 11행 184자 정도가 판독되고 있다. 글자의 판독과 해석에는 학자마다 차이를 보이지만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 P137
반구대암각화의 전체 구성을 보면, 화면 오른쪽에는 고래 그림이 다양하게 나오고 왼쪽으로 갈수록 고래의 양이 적어진 반면에 멧돼지 등 물짐승 그림이 대부분을 이룬다. 이는 주된 사냥 대상이 어로에서 수렵으로 점점 바뀌어간 것을 반영한다. 새김 기법도 면새김에서 점차 선새김 위주로 바뀌었다. 반구대암각화에 대한 연구는 아주 풍부히 이루어져 이와 관련된 저술과 논문이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다큐멘터리로도 여러 번 방영되어 지금도 유튜브(YouTube)를 통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또 이 그림들의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선례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는데,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의 암각화에 비슷한 예가 있어 도상 내용의 유사성과 연대측정 등에서 더 면밀한 비교 검토가 필요하다. 반구대암각화에 그려진 작살 맞은 고래는 프랑스 라스코 동굴벽화의 창에 꽂힌 들소 그림을 연상케 한다. 원시인류 사회에서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는 ‘유사한 행위는 유사한 결과를 낳는다‘는 믿음이다. 그들은 그림 속에서 사냥감을 죽임으 - P163
로써 실제 사냥에서 풍성한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뉴기니의 원주민들은 타조를 사냥할 때 타조 춤을 춘다고한다. 이러한 것들을 유감주술(呪術, homocopathic magic)‘이라고 한다. 반구대암각화에 나타난 동물들 그림을 보면 최대한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지만 인간의 모습은 동작을 설명하는 정도만 소략하게 그렸을 뿐이다. 즉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냥감이었고 인간은 동작만 보여주면 그만이었다. 뱃머리에서 손을 눈위에 얹고 고래가 어디에 있나 관찰하는 사람은 얼굴, 몸, 다리, - P164
손으로만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선사인들에게 성(性)은 생산의 근원이기에 고래 있는 곳을 관찰하는 인물은 남근이 강조되어 있고, 한쪽엔 돼지가 교미하는 모습도 그려져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반구대암각화가 그려진 이 바위는 신석기인들이 신성하게 여겨 제의를 올리던 곳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심각한 식량 위기를 겪으면 여기에 사냥감을 그리면서 제사를드리는 주술 행위를 했을 것이다. 어로와 수렵을 생활의 주요 방편으로 삼았던 신석기인은 풍요롭고 성공적인 사냥을 위하여 이신성한 곳에 장구한 세월에 걸쳐 그림을 되풀이하여 그렸던 것은아닐까. 모든 생명체는 영혼이 있다는 애니미즘, 영혼과 대화하며 기원하는 샤머니즘, 그리고 영혼을 신성하게 모시는 토테미즘모두 이 반구대암각화에 서려 있는 것이 아닐까. 반구대암각화를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보는 견해가 계속 제기되고 있지만, 청동기시대는 본격적으로 농경이 이루어진 시기인데 반구대암각화의 내용은 모두 어로와 수렵에 관한 그림일 뿐이고 농경에 관한 그림이나 청동기시대의 추상무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 보는 시각이 더 설득력 있다. - P165
동북삼성이란 요령성(遼寧省, 랴오닝성), 길림성(吉林省, 지린성), 흑룡강성(黑龍江省, 헤이룽장성)을 말한다. 그런데 중국은 역사의격변을 거칠 때마다 통치 방침에 따라 곧잘 지명을 바꿔 불렀다. 본래 이곳 이름은 만주(滿洲)인데 오늘날 의도적으로 거의 사용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동북삼성이라고 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넓은 의미의 간도 땅이다. - P178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였습니다. 후기에 들어오면 전국을 5부(部) 176성(城)으로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5개 권역 아래 주요 거점들로 안시성(安市城), 백암성(白巖城), 오골성(烏骨城), 박작성城) 등을 설치했는데, 우리가 가고 있는 봉황산성이 오골성으로 비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 우리가 단동을 떠날 때 들르게될 호산장성(長城)은 박작성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박작성은 압록강변에 바짝 붙어 있어 강 건너 의주성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평양성에서 의주성, 박작성, 오골성, 안시성을 거쳐 요동성에 이르는 방어선에 고구려의 주요 산성들이 있습니다." - P189
안시성은 645년 당 태종이 직접 이끄는 대군이 고구려 정벌에나섰지만 전설적인 양만춘(楊萬) 장군의 통솔력과 병사들의 투지로 뚫지 못했다는 난공불락의 성으로, 그 전까지 정복 전쟁에서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았다던 당 태종이 3개월 만에 아무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물러난 곳으로 유명하다. 병자호란 이후 민족의식이 확대되면서 안시성 전투가 전설적으로 회자되는 가운데 이계 홍양호(洪良浩)의 『이계집(耳溪集)』이나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봉황산성을 안시성으로 비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구만(萬), 김창업등은 이 견해를 의심했고,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당서(唐書)』와 『한서(漢書』 「지리지」 등을 인용하면서 안시성은 봉황산성 서북쪽에 위치한 개주(州) 일대에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는 여기에서 서쪽으로 100여 킬로미터 떨어져 요동반도의 해성, 하이청)에 있는 영성자산성(山城)을 안시성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바로 그 북쪽에 있는 성이 요동성이라고 한다. - P196
요단 2호에서 내려 우리는 다시 압록강단교로 가 끊어진 다리끝까지 걸어가며 원 없이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거기서 다시 신의주를 바라보며 북한 주민들의 움직임을 망연히 지켜보고 나선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압록강공원 초입에 대기하고있는 버스에 올랐다. 모두들 방망이로 머리를 맞은 사람처럼 멍한 눈빛으로 자기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우리의 버스가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을 느꼈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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