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목

1981년 서울 동대문에서 태어났다. 2015년까지 영화현장에 있으면서 장편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일곱 작품에 참여하였고, ‘목사‘에서 단편 극영화와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고 있다. 시집 『연애의 책』 『식물원』 『작가의 탄생』이 있고 산문집 『디스옥타비아』 「산책과연애」 「거짓의 조금』을 썼다. 난설헌시문학상을 수상했다.

사람은 한평생을 살아가며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한다.
-로르 아들레르

어제는 장 아메리의 「자유음」 조판 원고를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짧은 글을 써서 출판사에 송고했다. 사람은 언제든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죽을 수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자유죽음』은 참으로적절하고 또 가혹한 책이 아닐 수 없다. "살아야 한다고 일단 태어난 이상 살아야만 한다고?" 장 아메리의 물음은 삶과 죽음에 대한 나의 의문과 일치한다. 어째서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지? 나는 여지껏 대답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살아왔다. 아무 이유 없이 살아야 한다니. 그리하여 결국에는 태어난 것을 원망하면서. - P12

어쨌든 매일 죽지 않고 살아 있으려고 노력한다. 살아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요즘은 질문의 국면이 바뀌었다. 매일 쓸 수 있을까? 혼자서 멍하니있다가 불쑥 나에게 질문한다. 일단 쓰는 것을 시작하고나면 매일 쓸 수 있을까? 대답은 없다. 매일 쓰는 일은 두렵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두려운 것에 나는 반응하지않는 사람이다. 그러면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두려움과 눈 마주치지 않을 수 있다. - P13

나는 시를 쓴다.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하지 못하는 경험을 하기 위해 시를 쓴다. 그러므로 시는 내게 인공적인 행위이다. 다른 세계는 어쩌다갑자기 생겨나지 않고 내가 애써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면 좋을 텐데, 힘들어서하는 말이다. 여기에 없는 다른 세계를 만드는 건 여기에 있는 나를 전부 소진해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만든 세계에서 여기서는 절대로 하지 못할 경험을 한다. 그래서 그만두지 못한다. 마치 중독된 것처럼 계속해서다른 세계를 찾는다. 나는 여기서의 삶만으로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다. - P25

살아 있는 사람에게 행운처럼 주어지는 여행. 나는 살아있어서 여행할 수 있다. 죽어서도 여행할 수 있다면 나는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나에게 죽음은 태어나기 전과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서도 여행할 수 있다면 나는 죽은 자로서 기꺼이 여행할 것이다. - P76

나는 왜 하노이에 왔을까. 왜 하노이일까. 어째서 자꾸만하노이의 골목길을 걷는 것일까.


지금은 대답할 수 있다. 내가 있고 싶은 곳과 있고 싶지않은 곳을 알기 위해서 온 것이다. 나는 밝은 곳에 있으면서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싶어 온 것이다. 무엇도 나를 압도하지 않는 곳에서 아무것에도 압도당하지 않고 단지 계속해서 살아보자는 마음 하나에만 순순히 이끌리고 싶어 온 것이다. 아름다운 것도 싫고 추한 것도 싫고 끝없이 펼쳐지는 자연이나 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산물들에 감탄하는 것도 싫어서 온 것이다. 나는 그저 그늘이 아닌 밝은 곳에서 더이상 화내지 말고 분노에 차 있지 말자고 사십 도의 햇빛 아래 서서 다짐했다. - P82

삶이 기다리는 일로 이루어져 있다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삶이 경험하는 일로 이루어져 있다면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무언가를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일을 살아 있는 동안에 하는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인간은 나이가 들고 육체가 쇠락하고 병들다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 P90

슬픔은 사랑을 먹고 자란다. 슬픔은 충만한 사랑을 알아본다. 사랑을 먹고 자란 슬픔은 이내 충만해진다.


나는 슬픔이 없는 사람을 경멸한다. 아니, 슬픔을 모르는사람을 경멸한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매사에 무례하다. 슬픔을 모르기 때문이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매사에 자신이 옳다. 슬픔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픔은 중요하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무례하지않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틀림을 가늠해본다.  - P91

픔이 있는 사람은 모든 말을 내뱉지 않는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적절히 타인과 거리를 둔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타인을 해하지 않는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매사에 조심한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공감할 줄 안다. 그래서 슬픔이 있는 사람은 조용히 타인을 위로한다.


사람들은 각자의 슬픔을 품고 살아간다. 슬픔은 없애버려야 할 것이 아니다. 상처는 낫고 슬픔은 머문다. 우리는 우리에게 머물기로 한 슬픔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슬픔은 삶을 신중하게 한다. 그것이 슬픔의 미덕이다.


여기서 슬픔은 고통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고통은 비탄이며 비탄은 많은 것을 파괴한다.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타인을 파괴하고 세상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자기 자신을 위해. 타인을위해, 그리고 세상을 위해. - P92

고독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마음의 고통을 여전히 품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은신처로 몸을 피하는 것만으로 절망을 치유하는 사람은 없다. 방안에서는 아무것도 잊히지 않는다.
-올리비에 르모

나는 내가 또다시 나를 죽이고 싶어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많고 시끄럽고 맛있는 것이 잔뜩 있고 날씨가 따뜻한 곳으로, 하지만 여행답게 그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나를 압도하는 아름다움은 지금의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있었다.


나는 자연에 완벽히 압도되어 다시 자신이 사는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들의 삶을 읽는 것은 전율 그 자체였다. 나는 여러 번 반복해 - P100

책을 읽으면서 완전히 자연 속으로 들어가 사라져버리는상상을 수없이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처럼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 내가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마음과 끝을 보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여행이라는 것을 하면서 내가 가진 나에 대한 살의를 끝장내고 싶었다. - P101

그것은 그저 살아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죽고 싶다 생각하지 않고 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살아있다는 생각도 그만 하고 싶었다. 그냥 살고 싶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잠시만이라도 생각을 멈추고 그냥 살아있고 싶었다.


살아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일이 얼마나 피로한 일인지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말없이 그를 안아주고 싶다. - P101

닌빈의 도로는 산을 따라 굽이지고, 가로수가 많고, 여느 도시의 도로처럼 차나 오토바이가 넘치지 않는다. 달리다보면 가끔씩 차 한 대 오토바이 한 대가 옆을 스쳐갈뿐이다. 넓은 평원에는 농을 쓴 사람들이 허리를 숙이고농사를 짓고 있다. 가끔 무리를 진 소들이 꼬리를 흔들며평원을 거닐고 있기도 하다. 어느 곳은 사람이 갈 수 있어 보이고 어느 곳은 사람이 갈 수 없어 보인다. 나는 그 모든 땅의 넓고 광활함이 복받쳐왔다. 아름다운 산들과 평원이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트레킹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 나는 그들이 몹시 멋져 보였다. - P124

기차에 앉아 바깥 풍경을 보고 있자니 "기억의 끈이 끊어진 것 같았다. 전에 없이 맑고 개운한 기분이었다. 몸이 너무 피곤한 나머지 금방이라도 곯아떨어질 것 같았는데 잠 같은 건 전혀 오지 않았다. 기차에서도 나는 계속해서 폭우가 쏟아지는 닌빈의 도로를 오토바이로 달리고 있었다. 고통은 어째서 저절로 물러나지 않을까. 이렇게 애를 써야만 저만치 물러서서 나로부터 작별을 고하는 걸까. 힘든 일들이 끝나면 그걸로 끝이면 안 되는 거야? 꼭 그것과 내가 분리될 수 있도록 어떤 수고로움이든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인간은 참 이상하기도 하다. 이렇게 복잡하게 지어진 생물이라니. 나는 불평을 하면서도 닌빈에 두고 온 나의 과거에 또 찔끔 눈물이 났다.


닌빈은 아름다웠고, 아름다운 닌빈은 나의 고통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여기에 두고 가면 돼.


넓은 땅이 내게 말해주었다. - P127

불행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불행이대단히 악질적이라 생각한다. 하나의 사건에서 파생된 불행이 사건의 종결과 함께 끝이 난다면 인간은 좀더 단순하고 가뿐하게 이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은 반드시 남는다. 불행을 낳은 사건이 끝난 뒤에도 불행은 남아서 마음을 갉아먹으며 자라난다. 불행은 마음속에 담겨 있는 언어를 배우고 감정을 배우고 바깥 세상을 익힌다. 성숙한 불행은 인간에게 말을 걸고 감정을 조종하고 바깥 세상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속삭인다. 성숙한 불행은 환청이자 환각이 되어 나와 함께 살아간다. - P135

불행은 내게 말한다. 저기엔 아무것도 없어. 불행은 눈앞의 것을 지워버린다. 불행은 하늘을 지우고 구름을 지우고 산을 지우고 나무를 지우고 강을 지우고 철 따라 피어나는 꽃들을 지운다. 인생이 아무 대가 없이 인간에게 주는 행복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런 뒤 자신만을 보라고불행은 속삭인다.


불행은 어두운 밤길과 같다. 가로등도 없고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어둠뿐인 밤길과 같다. 어디선가 풀섶을 뒤척이는 소리가 나고 금방이라도 뛰쳐나와 나를 덮칠 것만 같아도 보이는 것은 없다. 누군가 쫓아오는 것만 같아뒤를 돌아보며 속도를 내 걷다가 넘어지길 반복한다. 그래도 계속해서 가야 한다. 아주 작은 희망이라는 것이 계속해서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라고 다그친다. 언제 날이 밝을지도 알려주지 않고 언제 두려움에서 벗어날지도 알려주지 않고 희망은 일단 계속해서 가라고만 한다.


불행한 사람에게 희망은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불행이 그저 있는 것처럼 희망도 그저 있다. 그저 있으면서 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한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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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철학 강의를 몇년간 들었고 선생님이 쓰는 지성과 슬픔의 언어를 동경하는 독자입니다. 2018년도에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고서야 출간된 선생님의 아도르노 Theodor W. Adorno 강의록 『상처로 숨 쉬는 법을한번씩 꺼내봅니다. 가슴이 답답할 땐 표지만 봐도 숨이 쉬어지는 것 같거든요. 755면에 달하는 본문을 상처가 허파가되리란 기대로 뒤적이곤 합니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핼러윈 축제를 즐기러 갔던 젊은이들이 골목길에 갇혔고 158명 - P174

이 길에서 선 채로 압사를 당했습니다. 10만명 넘는 인파가몰리는데도 사전대책이 없었고 위험을 알리는 최초 신고로부터 네시간이 지나서야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살릴 수 있었는데, 이번에도 살리지 못했습니다. 정부는 재빠르게 ‘참사‘를 ‘사고‘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쓰도록 지시했고 국가에도기간을 지정했습니다. 지역축제와공연이 취소되었죠.
이 엄청난 참사 앞에 책임지고 물러나는 행정관료 하나없이 예술가의 노동만 간단히 중단시켜버리는 저들의 뻔뻔함과 비겁함에 분통이 터졌습니다. 선생님이 살아 계셨다면 뭐라고 말했을까요. 『상처로 숨 쉬는 법을 보는데 아도르노의 말이 다가왔죠. "문명이 지닌 상처이며 비사회적인감성인 슬픔은 인간을 목적의 왕국에 종속시키는 일이 온전하게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세상은 다른 어떤 것보다 슬픔이나 애도를 온갖 방식으로 치장하고 변질시켜 사회적인 형식으로 만든다."(650~51면)
‘애도의 계엄령‘이 내려진 여기의 현실을 훤히 보는 듯, 선생님은 아도르노의 철학을 가져와서 슬픔에 대한 관리 - P175

통제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사회는 무슨 방식을 쓰든지 슬픔을 관리하려 한다, 사람들이 마음껏 슬퍼하도록 허용하면 대단히 위험할 수 있기에 일정한 처리방식을 따라가도록 한다고요. "사람들이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되면 하나의 인식에 도달하는데, 그 대상은 결코 슬픔의 감상이아니라 바로 사회적 삶의 조건들에 눈뜨기 쉽다는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밑줄을 그었습니다. 슬픔은 위험한 감정입니다. 가족을 뺏긴 유가족들, 일자리를 뺏긴 노동자들, 온갖 사회적 참사 피해자의 글을 통해 세상을 공부한 저도슬픔이 얼마나 급진적인 감정인지 목격했습니다. 사람이 소중한 것을 잃고 나면 세상이 보이는 사람이 되죠. 슬픔의 렌즈로만 보이는 은폐된 진실을 보았기에 권력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로 거듭나죠. - P176

코로나19로 중단되었던 야외 록페스티벌에 갔습니다. 그곳에는 몸을 부딪치며 슬램을 즐기고 음악에 몸을 흔드는 젊은이들이 다수를 차지하는데, 저 같은 중년의 록마니아도 있고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를 탄 장애인도 옵니다. 스탠딩석 가장자리에서 젊은 부부가 아이와 손잡고 신나게 몸을 흔들기도 했습니다. 만에 하나 예기치 못한 참사가 일어났다면 어땠을까요. 왜 몸도 성치 않은데 저길 가서, 왜 아줌마가 저길 가서, 왜 애를 데리고 저길 가서, 같은 비난이 쏟아지고도 남았겠지요.
선생님이 누차 강조하던 객관적 권력, 즉 ‘우리를 지배하는 모든 것, 생의 기쁨을 빼앗아가려는 모든 것,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려는 모든 것‘의 정체가 이번 참사로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슬픔이 통제되고 놀이가 비난받는 이 일그러진 세상에서 시험과 노동에만 복속된 삶을, 우린 왜 누구를 위하여 평생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선생님이 강의 때 자주 던진 물음이고, 책에도 남긴 질문을 붙들어봅니다. 도대체 상처 없는 삶이란 무엇일까, 그리 - P178

고 사람답게 사는 사회란 무엇일까. 그건 이렇게 억울하게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선생님은 세월호참사 때 말씀하셨어요. 결국 내가 사람답게 사는 사회에서 살고자 한다면,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당한 고통을 외면하지 말라는 뜻으로 저는 이해했어요. 사람들은여전히 묻습니다. 왜 타인의 아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고요. 그럴 때 선생님에게 배운 아도르노의 말을 전합니다.
"나의 상처로부터 해방이 되려면 이 사회적인 상처를 볼줄 알아야 된다." - P179

김진영 선생님 식으로 말하자면, "나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타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나의 몸은 타자들의 그것과 분리될 수도 격리될 수도 없는 것이다. 나의 몸은 관계들 속에서 비로소 내 것이기도 하다." 이문장을 아픔은 너무도 혼자의 일인데 투병은 다행히 모두의 일이다, 나는 이렇게 이해했어.
저번에 봤을 때 그대가 그랬지. 읽었던 책들이 발병 이후 새롭게 보인다고. 형광펜 파티 하고 있다고. 나도 그러네.「아침의 피아노에서 좋았던 부분은 여전히 좋은데, 아픈 몸들을 떠올리면 구체적으로 좋아. J에겐 활자의 약효가 가장 빠르다는 것을 아니까 특히 그래. 이 책이 주는 온화함, 다정함, 부드러움 같은 조용한 감정들이 그대의 등을 어루만져줄 거야. 그리고J를 쓰게 하겠지. 아마도 형광펜이 두툼하게 입혀질 이 문장 때문에,
"글쓰기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건 타자를 위한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병중의 기록들도 마찬가지다. 이기 - P183

록들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나도 남겨질 이들을 위한 것이다. 나만을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약해진다. 타자를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확실해진다." 
글쓰기의 본질은 나눔이라는 것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표현할 수 있을까. 몸이 신음하고 마음 어딘가 작게 부서지는 느낌을 기록하면서 그대는 나날이 확실해지겠지. - P184

한사람에 대한 기록, 그 엄중한 과제 앞에서 도움받은 책이 있어요.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의 『한 여자』인데요, 딸이엄마의 삶과 죽음을 기록한 자전적 소설이죠. "어머니는 농번기인지 아닌지, 병이 난 형제자매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서 들쭉날쭉 학교를 다녔다"는 문장은 익숙해서 놀라웠죠. ‘프랑스 사람인 아니 에르노의 엄마도?‘ 배움의 의자를 빼앗기고 희생의 자리에 배정되는 여자의 삶은 시대나 국경과 무관했습니다. - P187

딸은 어머니를 이렇게 기억해요. 정신적으로 고양되려는 의지, 권위, 낭만, 야심, 분노, 의심, 딸에 대한 지지와 질투등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의 활화산을 품고 있는 사람으로. 때로는 ‘좋은‘ 어머니를 때로는 ‘나쁜‘ 어머니를 봅니다. "나는 어머니의 폭력, 애정 과잉, 꾸지람을 성격의 개인적인 특색으로 보지 않고 어머니의 개인사, 사회적 신분과 연결해 보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이 좋았어요. 엄마를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고리‘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손쉬운 선악 이분법으로 갈라서 보지 않고, 그가 처한 사회구조, 모순과 욕망의 지도를 읽어내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감정의실핏줄까지 포착한 글들은 사모곡을 넘어선 인간 탐구서가 되거든요. - P188

고양이에게 면목 없는 인간 세상입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날개도 없이 허공에 매달려 일하겠지요. 그들은 존버거John Berger가 이주노동자를 빗댄 표현을 빌리자면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들"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이들이 흘린 ‘페인트 눈물‘로 우린 깨끗한 아파트, 쾌적한 도시에 삽니다. 노동자의 죽음과 인간 불평등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새가 있을 자리에 사람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면서. - P205

남들 앞에서 자기 서사를 낭독하기까지 오랜 시간, 생각의 뒤척임, 단어 선택의 어려움, 자기 부정과 인정의 반복을 견뎌냈다. 나란 존재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랑을 하는가. 얼마나 썼다 지우고 또 써 내려갔을까. 자기를 알아가는노력은 답도 없고 돈도 안 되고 힘에 부친다. 그러니까 사림들이 종교인이나 전문가에게 사는 법을 문의하겠지. 그런데 소라도 다른 학인도 글쓰기를 통해 자기 힘으로 그 어려운작업을 해냈다. 어마어마한 능력이라고 생각해. - P215

누대로 억압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에 대해 영감과용기를 준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입니다. 저자 리베카 솔닛은 국내에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창비 2015)로 유명하죠. 페미니스트로 알려졌습니다만 그는 일찍이 환경과 인권운동에 투신한 활동가이기도 해요.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는 미투운동, 기후변화, 국가폭력 등 시대의 위기를 폭넓게 다루고 있는데요, 이들 주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바꾸는 일, 이름을 바꾸는 일, 새 이름이나 용어나 표현을 지어내고 퍼뜨리는 일은 세상을 바꾸려 할때 핵심적인 작업이다. (...) 백인 아이들은 그냥 ‘어울려 노 - P236

는 것이지만 흑인 아이들은 ‘어슬렁거리고‘ ‘슬금슬금 돌아다니는‘ 것이 된다. 언어는 지우고, 왜곡하고,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고, 거짓 미끼를 던지거나 주의를 흘뜨릴 수 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 이야기를 바꾸는 것이라니. 해볼 만하지 않나요 우린 이야기를 공기처럼 마시며 삽니다. 그중엔질 나쁜 공기처럼 몸에 해로운 이야기가 있지요.]가 성장기 내내 남성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덕목들, 가령 자신감 있어라, 활동적이어야 한다, 같은 것들의 강요에 거부감이 있었지만 또 아빠가 없어서 남자답지 못하다는 말은 듣기 싫었기에 혼란스러웠다고 했던 것처럼요.
솔닛은 세상의 이야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하는사람‘이 되라고 조언합니다. "여러분의 이야기는 세상을 둘러싼 그 물의 일부가 되어, 기존의 이야기들을 훼손하거나 강화할" 거라고요. 그러니까 부당함에 침묵하지 말자, 반박하고 저항하는 말들이 물처럼 넘치도록 하자는 뜻이겠죠. - P237

불행의 스펙트럼은 넓습니다. 허기, 권태, 불안 같은 일시적 상태부터 가난, 불화, 폭력, 질병, 낙인 같은 구조적 고통까지. 우리가 이를 드러냈을 때 사람이 다가오기도 달아나기도 하죠. 그럼에도 저는 불행은 말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입니다. 내 불행을 나부터 숨기고 부정한다면 상황을 남에게 이해받기도 그리고 바꾸어내기도 어려워요. 또 불행을털어놓아보아야 ‘불행을 말해도 되는 안전한 관계‘로 자기주변의 인간관계를 구축할 수 있겠죠.
약한 존재들이 기대어 사는 작품을 만드는 일본의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하다." 찾아 나서는 행위 자체가 나약함이 아니라 강인함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동의합니다. 사는 동안 불행 - P284

상태가 해소되는 순간은 짧고, 지치고 불행한 채로 사는 시기가 더 길죠.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행의 해결사가 아니라 불행을 말해도 좋을 관계, 일단 밥이나 먹자고할 사람이 아닐까요. - P285

글쓰기는 문장 쓰기가 아니라 관점 만들기를 배우는 일입니다. 비문 없이 정확한 문장들, 문학적인 수사를 곁들인서사가 아무리 매끄럽게 전개되어도, 혐오와 차별 표현이있는 글이라면 공적인 글로서 가치를 잃죠. 저는 이 부분을분명히 짚었습니다. 교재로 읽은 책에도 나왔듯이 장애인, 여성, 이주민 같은 소수자의 경우 개인이 잘못해도 집단이 매도당한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다, 글 쓸 땐 혹시 편견과 통념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기 생각을 의심하고 책 내용을 내 일상으로 가져와 검토하자고요. - P289

‘덜‘ 다치게 하는 방도로 예방주사 같은 이야기를 고민하시다니요. 몇줄 문장으로는 아이들이 겪을 별의별 문제에 대비하기 어려울 거예요 잘게 쪼개서 삶의 면면을 지켜야죠. 『말을 부수는 말목차에 나오는 대로 시간, 퀴어, 나이 듦, 동물, 몸, 지방, 아름다움 등 19가지 화두를 가지고 아이들과 하나씩 이야기를풀어가면 어떨까요.
자신을 해치는 말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자신을 지키는 말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면 흥미롭지 않을까요. 아이들과함께 ‘부수고 싶은 말들의 목록‘을 만들어봐도 재밌겠고요. 티끌같이 흩뿌려져 있지만 태산 같은 힘을 행사하는 권력의 언어를 저항의 언어로 바꾸어낼 아이들과, 아이들 곁에선 선생님이 있는 교실, 다정하고 살벌한 말들의 풍경을 그려봅니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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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없는 세상, 기적 같은 생존의 서사 틈에 예원은 지나가듯 털어놓았습니다. 작가가 되고 싶은 꿈도 있었다고요. 자신이 겪은 일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가족과 다른 생존자들에게 글로 알리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물질적 토대나 재능이 부족했다고 썼어요. 아, 그 대목을 읽으면서 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어요. 재능 없지 않은데... 많은데... 자신의상처와 취약함을 직시하는 글은 아무나 쓰지 못하거든요. 그 힘과 용기가 예원은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예원의 글은가부장제의 권력구조를 고발하는 생존자의 탄원서이자 청년노동 잔혹사가 담긴 르포로 읽혔습니다. - P154

나약하고 구멍 많은 인간이라서 잠시라도 성찰을 멈추고 휩쓸려 살다보면 짓는지도 모르고 죄를 짓습니다.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게 그만큼 힘든 일이기에 영화에서도 시를 쓴 사람이 미자밖에 없는 것이겠죠.『시 각본집』을 동준이의 죽음과 이선호씨의 죽음을 포개가며 읽고 났더니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시처럼 다가옵니다.
"우리는 남의 비극이나 고통이 아주 멀리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토록 가까이 있다!"고 이창동 감독은 말합니다. 이 통렬한 진실을 이미 삶으로 받아내고 살 저미는 고통을 겪어낸 선생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옆의 동료나 친구에게 같이 마음 나누어줄 수 있는사람으로 늙어가길 기원해요."
덕분에 시심 부푸는 봄밤이 깊어갑니다. - P163

세월호가 일어난 그해 2014년 1월 20일에 현장실습생 동준이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곧 기일이 돌아옵니다. 유가족의 달력은 눈물이 마를 새가 없네요. 생일이 지나면 생일만큼 힘든 기일이 오고 기일이 지나면 기일만큼 괴로운 명절이오고... 내 이웃이 슬픔의 둑이 터지고 무너져내리는데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일상을 나누는 일상을 고민합니다. - P168

"애들은 좋은 곳에 갔으니까 이제 마음에 묻어라." "교통사고다 생각해라." "시간도 흘렀는데, 옛날처럼 같이 산에도 다니고 만나서 술도 한잔 하자." "아이를 잃은 건 슬프지만 너는 그만큼 보상을 받지 않았느냐?" 세월호 유가족이들었던 말들입니다. 위로하고 싶은 상대의 선의는 의심하지 않으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유가족을 배려하는 행동도 배려가 되진 않았죠. "유가족입니다" 하는 순간에 모든 사람들이 아무것도 안 시킨답니다. 커피 한잔, 물 한잔 마시려고 해도 다들 "앉아 계세요, 제 - P169

가 타드릴게요" 하고 어딜 가도 유가족 자리는 따로 마련되고요. 지나친 배려는 때론 배제가 되죠. 유가족이 술을 시켜도 되나, 화장은 해도 되나, 여행 간다고 손가락질하면 어쩌나 지레 주눅이 듭니다.
세월호 5주기에 맞춰 발간된 유가족 육성 기록집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에 나온 몇가지 에피소드입니다. 유가족은 자식 잃은 비통함에다가 거친 말들과 고정된 시선까지 감내해야 했죠. 슬픔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슬픔의 일부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유가족들은 그래서 모임을 꺼립니다. 광화문 농성장에 모여 있어도 말은 돌죠. 자신들이 울기만 한다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길래 웃었더니 다시 웃었다고 뭐라고들 하니까, 유가족들은 서로 이렇게 충고합니다. "간간이 울어"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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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켜준 편지를 한편씩 읽었습니다. 부산 원도심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시인 김수우씨와 그곳을 드나들던 스물다섯 법대생 김민정씨가 무려 10년간 주고받은 편지들이 달빛처럼 은은한 울림을 주었어요. 긴 인연의 폭과 흐름이 담긴 이 서간집은 요즘 제 화두인 관계와 인연을 너른 폭으로 조망하게끔 해주었습니다. "잊은 듯 살다가도 문득 따뜻한 애정이 솟구치며 그리워지는 것, (…) 불가에서는 이를 좋은 인연이라 하더군요. 잊고 있다가도 만나면 더없이 기쁜 관계 말입니다." 
이런 대목에선 저의 이름 없는 관계들이 적합한 이름을 부여받은 듯했어요.
사실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찬찬한 관계로 기우는 마음이, 나이가 들어가며 끈끈한 관계의 부침을 감내하지 못하는 저에 대한 정당화 같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떡볶이 먹고 시시콜콜 잡담을 나누는 소소한 사이도, 다글다글 뒤엉켜 사느라 못난이 같은 내 모습을 들킨 징한 인연도 있듯이, 이렇게 조금은 멀리서 서로의 - P73

일상을 애틋하게 바라봐주는 고고하고 너그러운 관계도 필요하구나, 참으로 근사한 인연이구나, 수우님과 민정님 두사람의 서신을 보며 느꼈거든요.
우리도 이만하면 좋은 인연이겠지요? 서로에게 애틋한 먼 곳이 되어줄 수 있다면 경치 좋은 데에 세컨드하우스가있는 갑부가 부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마음의 별장은 심다책방을 비롯한 곳곳의 작은 책방입니다. 머물다보면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이 밀려오는 장소이고, ‘삶의 근원이 환기되는 곳‘이죠.
주은이 둘째 아이를 임신한 모습을 보고 와서 좋았습니다. 중요한 생애주기를 함께 하는 특권을 누리는 기분이랄까요. 특히 헤어지며 우리가 안았을 때 태내의 아이까지 셋이서 포옹하는 느낌이 만월처럼 충만했습니다. 연말이라고 안부를 묻고 무슨 모임이라서 만나는 사이도 좋지만 언제 만날지 몰라서 설레는 인연들, 보면 반갑고 못 보면 그리운 얼굴이 둘레에 남아 있어서 제가 또 살아갑니다. - P74

쿤체는 원래 좋은 사람이라 좋은 시를 썼을까요. 아니면좋은 시를 쓰면서 좋은 사람이 되어갔을까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대가 시를 공부하려다가 겪은 이상한 방식은아니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시를 쓰고 싶어 찾아간 사설교육기관, "무슨 전공이세요?"라며 인사를 나누는 수강생들,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겠다 싶어 찾아간 문예창작과 입시전문학원, "네 시는 시도 아니야" 같은 원장의 말, 입시에 합격한 고등학생들 작품을 세번씩 노트에 필사시키는 학습법 같은 것들이요. 그대 말대로 도식화된 문장을 뽑아내며 노회한 교수들의 취향에 길들여지는 것이 시인의 자격증은 - P85

만들어줄 수는 있어도 시를 쓰는 몸을 길러주진 못하리라생각합니다.
쿤체가 이런 얘길 합니다. 한편의 시는 ‘네가 세상에 무엇을 더하였는가?‘라는 엄혹한 질문에 버텨낼 수 있어야 한다고요(「너는 누구길래, 시인아). 이보다 더 시적인 화두는 없지않은가, 저는 감탄하며 마음에 새겼습니다. 내가 세상에 무엇을 더하였는지, 이 엄정한 물음에서 도망치지 않는 한 우리는 시적인 것에서 아주 멀어지지는 않을 수 있지 않을까감히 생각해봅니다. 다시 감각의 재활훈련에 나선 그대, 쓰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정수의 건강을 빕니다. - P86

어쩌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아무 걸림 없이 ‘오직 읽고 오직 쓰는‘ 삶이란 누구에게나 불가능한 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이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가 근무조건이 열악해도 책에서 양식을 구하라는 식의 자기계발논리는 아닙니다. 노동하는 인간이 자기 영혼의 본질을 지켜가고 사유하는 인간이 되어가는 여정의 숭고함, 자신이 숭배하는 대상을 파괴하는 모순된 상황에 처해서도 아름다움을 구하는 지성의 고귀함을 보여주죠.
여전히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살림과 육아와 집필이 늘 서로의 핑계가 되었던 어정쩡한 시기를 통과해 일에 몰입해도 좋을 시기가 되었는데 이제 체력이 따라주지 않고, 프리랜서 작가의 노동 환경은 일관된 체계가 없어서 일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현기증이 일어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탸가 꿈꿨던 ‘온전한 러브스토리‘를 저도 포기할 수가 없네요. 매번 바뀌는 동료를 무도회장의 파트너 - P91

처럼 다정하게 맞이하고, 동시에 인간을 부품화하는 업계구조엔 주저 없이 저항하며 작가의 노동권을 사수하고, 읽어야 할 것을 읽고 써야 할 것을 쓰는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한탸처럼 책더미에서 조용히 몰락할 수 있는 생이면 더바랄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대상 없는 하소연과 반성문을 이만 마칩니다. - P92

"내 창문으로 세상을 내다보면서, 『작은 것들의 신을 쓰면서 여러해 동안 누렸던 즐거움에 대한 기억이 시들기 시작했다. 책의 판매를 통한 금전적 이익이 몰려들었다. 내 은행계좌 잔고는 급격히 불어났다. 이미 가진 자들 사이에 세계의 부를 순환시키고 있는 거대한 파이프에 내가 우연하게도 구멍을 뚫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래서 그 파이프에서 어마어마한 속도와 힘으로 돈이 쏟아져 나오면서내게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소설의 한 장면처럼 강렬한 이미지가 
그려지죠. 작품의성공이 가져다준 부와 명예가 자신에게 상처를 내고 있다고 고백하는 작가라니! 와, 멋있어서 감탄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병들게도 한다는 걸 고려하면, 작가 - P94

의 예민함으로 그걸 알아차리는 게 어쩌면 그다운 모습이기도 하겠지요. ‘시장의 심장부‘에 펜을 겨누면서도 그곳으로부터 부를 쌓는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아룬다티로이는 눈을 부릅뜹니다.
"나는 작은 것들의 신속의 모든 감정, 모든 작은 느낌이 모조리 은화로 교환되어버렸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조심하지 않는다면, 어느 날 나 자신이 은으로 된 심장을 가진 은색의 형체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내 주변의 폐허화된 풍경은 그저 나 자신의 번쩍임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데 이바지할 뿐일 것만 같았다." 로이는 부커상을 받고 나서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말했대요. 자신을 ‘소설 공장처럼 취급하는 게 싫다고요. 소설을 영화화하자는 제의도 거절하고 긴급한 글들을 써내죠. 댐건설로 인한 심각한 자연 파괴, 이라크전쟁과 미국의 오만한제국주의 등 "공공연히 편을 들지 않으면 안 되는 정치적상황"에 대해 자비 없이 신랄한 언어를 구사합니다.
그리고 20년이 흐르고 나서야 두번째 소설 『지복의 성자』(문 - P95

를 출간해요.
멋지지 않나요? 글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염결성, 자기만의 속도로 밀고 나가는 의연함이요. 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 점, 작가의 사회적 구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 글 쓰는 활동가의 모습까지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작가 겸 활동가‘라는 딱지를 거부해요. 침대 겸용 소파라는 말을 연상시킨다고요. 하핫. 저는 이 대목에서 막 웃었는데요, 깊은 뜻이 있죠. 모든 저항적 운동을 직업적 활동가들만 하는 일로 여기도록 암시한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이런 사태에 누군가 관여하게 되는 것은 그가 작가나 활동가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관여하는 것입니다." 로이는 글을 쓰는 이유도 작가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일" 이기때문이라고 말하죠. 장르적 구분도 의미를 두지 않아요. "논픽션이건 픽션이건, 내가 주로 다루는 주제는 권력과 권력없는 자들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의 끝없는 순환적인 갈등입니다." - P96

버지니아 울프가 딱 그랬다. 『파도』라는 독백과 이미지로 된 형식의 소설에 도전하면서 "완전히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런 작품을 쓰는 나 자신을 매우 존경한다"고 일기에 적었다. 자기 쇄신의 실행력이 존경스럽지. "포도송이에서 포도를 떼어내듯이 떼어내어 ‘받아요. 이것이 나의 인생이오‘라고 말" 하는 몽상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이 있는가 하면, 또 "인생은 즐겁고 좋은 것이다.
월요일 다음에는 화요일이 오고 그다음에는 수요일이 온다" 고 무심하게 삶에 순응하는 책을 마저 읽다가, 그날 너와의 대화를 복기하며 나는 좋은 늙음을 꿈꾼다. - P104

삶의 목표가 인간성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다만 친절을 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친절에 대해 거듭 말하고 쓰고 고민하는데 희한하게 실천에는 자꾸 실패해서 반성하느라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사람. 친절한 사람이아니라 친절한 사람이 되기 어려운 구조를 파악하는 사람. 그렇게 용쓰다보면 주름이 늘듯이 말투와 표정에 친절의 함량이 높아지길 기대합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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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닛이 내어준 언어의 방에 머물면서 내 깊고 어둑한 곳에 묻어둔 이야기를 꺼내놓을 용기를 냈습니다. 음, 솔직히말하면 그가 네바다 핵실험장에서 장기간을 싸우고, 대뜸 트럭에 올라 몇주고 어디론가 떠나는 대목에서는 너무 부럽기도 했습니다. 만약에 그가 기혼 유자녀 여성이었다면 집안과 밥상에서 전투를 치르는 이야기도 멋지게 써냈을지 모르겠습니다. 솔닛이 쓴 밥 이야기를 읽었다면, 나는 내 삶의 지배자 노릇을 하는 ‘밥‘에 끌려다니는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내가 바라는 건 명절 철폐도 아버지와 밥 먹지 않기도 아닙니다. 집을 밥의 즐거움을 되찾는 장소로 만드는 것입니다. 엄마 제사를 간소화하자는 제안을 수용하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나도 가족의 구성원이자 상 차리는 당사자로서 권한을 갖고 있음을 차분하게 말하고 싶은 거죠. 끊어내지 않고 연결하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싶습니다. 솔닛이 말한 작가의 책무인 "이야기를 깨뜨리는 사람이자 어떤 이야기 - P37

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302) 일을 계속해보고 싶습니다.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을 두번 읽었습니다. 한번은 솔닛은 어떻게 오늘의 솔닛이 되었나를 생각하며 읽었고, 한번은 그의 삶에 빗대어 나는 어떻게 오늘의 내가 되었나를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선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전진한 것은 후퇴할 수도 있고, 닫힌 것이 다시 열리기도 한다는것. 한 사람의 긴 강물 같은 삶이 만들어내는 패턴이 보여주있습니다.
다시 써야겠습니다. 우리의 핵심 도구는 이야기니까요. "낮은 곳들로부터 벗어날 때 사다리로 쓴 논리와 서사를 다른 이들에게도 건네주고 싶"(15면)다는 솔닛의 자상함이 내 막힌 글을 뚫어주고 이야기를 끌어내주었듯이, 내 이야기도 누군가의 말문을 틔우는 입김이 되기를 바라면서요. - P38

‘가족‘이 삶의 화두가 됐다. 마치 공기처럼 삶에서 한번도분리된 적 없는 그것. ‘보호‘보단 ‘제약‘이 연상되는 단어. 『반사회적 가족』이라는 책은 제목부터 나를 자극했다. 모두가느끼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금기가 들어 있을 것 같았지. 예감대로였다. 저자는 가족의 폐단을 세가지로 꼽는다.
첫째, 부와 빈곤을 세습하는 것. 둘째, 사생활권이라는 미명 아래 개인의 개성과 인권을 억누르고 갈등을 은폐하는것. 셋째, 모성 역할과 가사노동에 여성을 속박하는 것.
난 한줄한줄 빨려들었다. 흙수저·금수저란 말도 있듯이 부모의 능력에 따라 자식의 신분이 결정된다. ‘계급 배치의 강력한 기관‘으로 가족이 기능하지. 우리나라에서도 가정폭력은 뉴스의 단골 소재잖아. 부모는 자식을 독립된 인격으로 대하기보다 통제하고 간섭하지. 사람들은 그래도 가족밖에 없다고들 말하지만, 가족에게 가장 큰 상처를 받는 경우도 허다한 게 현실이다.
특히 가족이 ‘여성을 모성 역할과 가사노동에 속박한다‘ - P41

는 내용에 아무래도 난 공감했다. 너희들 성장을 지켜보는일은 과한 축복이자 더없는 행복이었지만 그 일상을 떠받치는 노동과 일상은 혹독했다. 육아는 퇴근과 퇴직도 없다고 하는데, 그 피할 길 없음과 미룰 수 없음이 가장 억압적인점이었다. 어떤 좋은 직업도 자기 의지로 쉬거나 그만둘 수없다면 끔찍하겠지.
어쩌면 너희들에겐 엄마의 손길이 부족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일을 시작하고는 체력이 달려서 양육에 전념하지 못했지만, 어떤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해서 마음이 편한 건 아니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도 엄마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떨쳐지지 않으니까. 읽고 쓰고 강의하는 순간순간에도 불쑥 엄마 자아가 튀어나와 당황하곤 했다. 엄마 일과 작가 일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느라 어느 하나도 제대로 누리기 어려웠지.
내가 ‘자취‘를 해볼까 하고 결심한 이유다. 실은 너희들이 자취 이야기를 할 때 힌트를 얻었어. 흔히 자녀들이 다 커서 독립하면 중년 여성은 집에서 홀로 ‘빈둥지증후군‘을 겪 - P42

는다고들 하잖아.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었어. 왜 엄마는 꼭 남겨진 자의 역할이어야 하는가? 나도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각이 들었고, 떠나보고 싶었다. 젊어서 누리지 못한자유를 이제라도 되찾고 싶은 마음 같은 거야. 내가 세운 자취의 목표는 두가지다. 인간에게 마땅히 필요한 ‘고요한 단독자‘의 시간을 늦게라도 살아보는 것. 그리고 반사회적 가족』을 교본 삼아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중산층 가족을 가족 외부에서 비판적으로 사유해볼 기회를 갖는 것.
늘 현실은 이론보다 앞선다. 요즘 한국사회도 혈연 중심의 가족에 대한 신비화와 과대평가가 사라지고 있지. 이미 독신, 생활공동체, 동성가구 등 다양한 가구 형태가 늘어나고 있고, 굳이 가족이 아니더라도 관계를 만들고 연결되고자하는 인간의 열망은 더 기발하고 긴밀해지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내 가족도 못 챙기는 사람이 되는 것만큼이나 내가족만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두렵다. 우선 가족 바깥을 향해 몸을 틀어본다. - P43

『욕구들』에서 저자는 ‘딸‘의 목소리로 묻습니다. "어머니가 결코 갖지 못했던 것을 어떻게 나 자신에게 허용할 수 있어?"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뻥 뚫리는 말입니다. ‘하지 마‘ 의 세계에서 엄마를 구원하는 멋진 문장이죠. 사랑눈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나중에‘라는 시간은 영영 도래하지 않으며 지금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행동해도 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증여이고, 원함에 관해 아이들이 본받을만한 모범이 된다는 점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는 일에 비해 모자람 없는 어머니의 일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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