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철학 강의를 몇년간 들었고 선생님이 쓰는 지성과 슬픔의 언어를 동경하는 독자입니다. 2018년도에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고서야 출간된 선생님의 아도르노 Theodor W. Adorno 강의록 『상처로 숨 쉬는 법을한번씩 꺼내봅니다. 가슴이 답답할 땐 표지만 봐도 숨이 쉬어지는 것 같거든요. 755면에 달하는 본문을 상처가 허파가되리란 기대로 뒤적이곤 합니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핼러윈 축제를 즐기러 갔던 젊은이들이 골목길에 갇혔고 158명 - P174
이 길에서 선 채로 압사를 당했습니다. 10만명 넘는 인파가몰리는데도 사전대책이 없었고 위험을 알리는 최초 신고로부터 네시간이 지나서야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살릴 수 있었는데, 이번에도 살리지 못했습니다. 정부는 재빠르게 ‘참사‘를 ‘사고‘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쓰도록 지시했고 국가에도기간을 지정했습니다. 지역축제와공연이 취소되었죠. 이 엄청난 참사 앞에 책임지고 물러나는 행정관료 하나없이 예술가의 노동만 간단히 중단시켜버리는 저들의 뻔뻔함과 비겁함에 분통이 터졌습니다. 선생님이 살아 계셨다면 뭐라고 말했을까요. 『상처로 숨 쉬는 법을 보는데 아도르노의 말이 다가왔죠. "문명이 지닌 상처이며 비사회적인감성인 슬픔은 인간을 목적의 왕국에 종속시키는 일이 온전하게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세상은 다른 어떤 것보다 슬픔이나 애도를 온갖 방식으로 치장하고 변질시켜 사회적인 형식으로 만든다."(650~51면) ‘애도의 계엄령‘이 내려진 여기의 현실을 훤히 보는 듯, 선생님은 아도르노의 철학을 가져와서 슬픔에 대한 관리 - P175
통제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사회는 무슨 방식을 쓰든지 슬픔을 관리하려 한다, 사람들이 마음껏 슬퍼하도록 허용하면 대단히 위험할 수 있기에 일정한 처리방식을 따라가도록 한다고요. "사람들이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되면 하나의 인식에 도달하는데, 그 대상은 결코 슬픔의 감상이아니라 바로 사회적 삶의 조건들에 눈뜨기 쉽다는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밑줄을 그었습니다. 슬픔은 위험한 감정입니다. 가족을 뺏긴 유가족들, 일자리를 뺏긴 노동자들, 온갖 사회적 참사 피해자의 글을 통해 세상을 공부한 저도슬픔이 얼마나 급진적인 감정인지 목격했습니다. 사람이 소중한 것을 잃고 나면 세상이 보이는 사람이 되죠. 슬픔의 렌즈로만 보이는 은폐된 진실을 보았기에 권력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로 거듭나죠. - P176
코로나19로 중단되었던 야외 록페스티벌에 갔습니다. 그곳에는 몸을 부딪치며 슬램을 즐기고 음악에 몸을 흔드는 젊은이들이 다수를 차지하는데, 저 같은 중년의 록마니아도 있고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를 탄 장애인도 옵니다. 스탠딩석 가장자리에서 젊은 부부가 아이와 손잡고 신나게 몸을 흔들기도 했습니다. 만에 하나 예기치 못한 참사가 일어났다면 어땠을까요. 왜 몸도 성치 않은데 저길 가서, 왜 아줌마가 저길 가서, 왜 애를 데리고 저길 가서, 같은 비난이 쏟아지고도 남았겠지요. 선생님이 누차 강조하던 객관적 권력, 즉 ‘우리를 지배하는 모든 것, 생의 기쁨을 빼앗아가려는 모든 것,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려는 모든 것‘의 정체가 이번 참사로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슬픔이 통제되고 놀이가 비난받는 이 일그러진 세상에서 시험과 노동에만 복속된 삶을, 우린 왜 누구를 위하여 평생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선생님이 강의 때 자주 던진 물음이고, 책에도 남긴 질문을 붙들어봅니다. 도대체 상처 없는 삶이란 무엇일까, 그리 - P178
고 사람답게 사는 사회란 무엇일까. 그건 이렇게 억울하게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선생님은 세월호참사 때 말씀하셨어요. 결국 내가 사람답게 사는 사회에서 살고자 한다면,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당한 고통을 외면하지 말라는 뜻으로 저는 이해했어요. 사람들은여전히 묻습니다. 왜 타인의 아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고요. 그럴 때 선생님에게 배운 아도르노의 말을 전합니다. "나의 상처로부터 해방이 되려면 이 사회적인 상처를 볼줄 알아야 된다." - P179
김진영 선생님 식으로 말하자면, "나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타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나의 몸은 타자들의 그것과 분리될 수도 격리될 수도 없는 것이다. 나의 몸은 관계들 속에서 비로소 내 것이기도 하다." 이문장을 아픔은 너무도 혼자의 일인데 투병은 다행히 모두의 일이다, 나는 이렇게 이해했어. 저번에 봤을 때 그대가 그랬지. 읽었던 책들이 발병 이후 새롭게 보인다고. 형광펜 파티 하고 있다고. 나도 그러네.「아침의 피아노에서 좋았던 부분은 여전히 좋은데, 아픈 몸들을 떠올리면 구체적으로 좋아. J에겐 활자의 약효가 가장 빠르다는 것을 아니까 특히 그래. 이 책이 주는 온화함, 다정함, 부드러움 같은 조용한 감정들이 그대의 등을 어루만져줄 거야. 그리고J를 쓰게 하겠지. 아마도 형광펜이 두툼하게 입혀질 이 문장 때문에, "글쓰기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건 타자를 위한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병중의 기록들도 마찬가지다. 이기 - P183
록들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나도 남겨질 이들을 위한 것이다. 나만을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약해진다. 타자를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확실해진다." 글쓰기의 본질은 나눔이라는 것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표현할 수 있을까. 몸이 신음하고 마음 어딘가 작게 부서지는 느낌을 기록하면서 그대는 나날이 확실해지겠지. - P184
한사람에 대한 기록, 그 엄중한 과제 앞에서 도움받은 책이 있어요.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의 『한 여자』인데요, 딸이엄마의 삶과 죽음을 기록한 자전적 소설이죠. "어머니는 농번기인지 아닌지, 병이 난 형제자매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서 들쭉날쭉 학교를 다녔다"는 문장은 익숙해서 놀라웠죠. ‘프랑스 사람인 아니 에르노의 엄마도?‘ 배움의 의자를 빼앗기고 희생의 자리에 배정되는 여자의 삶은 시대나 국경과 무관했습니다. - P187
딸은 어머니를 이렇게 기억해요. 정신적으로 고양되려는 의지, 권위, 낭만, 야심, 분노, 의심, 딸에 대한 지지와 질투등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의 활화산을 품고 있는 사람으로. 때로는 ‘좋은‘ 어머니를 때로는 ‘나쁜‘ 어머니를 봅니다. "나는 어머니의 폭력, 애정 과잉, 꾸지람을 성격의 개인적인 특색으로 보지 않고 어머니의 개인사, 사회적 신분과 연결해 보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이 좋았어요. 엄마를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고리‘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손쉬운 선악 이분법으로 갈라서 보지 않고, 그가 처한 사회구조, 모순과 욕망의 지도를 읽어내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감정의실핏줄까지 포착한 글들은 사모곡을 넘어선 인간 탐구서가 되거든요. - P188
고양이에게 면목 없는 인간 세상입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날개도 없이 허공에 매달려 일하겠지요. 그들은 존버거John Berger가 이주노동자를 빗댄 표현을 빌리자면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들"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이들이 흘린 ‘페인트 눈물‘로 우린 깨끗한 아파트, 쾌적한 도시에 삽니다. 노동자의 죽음과 인간 불평등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새가 있을 자리에 사람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면서. - P205
남들 앞에서 자기 서사를 낭독하기까지 오랜 시간, 생각의 뒤척임, 단어 선택의 어려움, 자기 부정과 인정의 반복을 견뎌냈다. 나란 존재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랑을 하는가. 얼마나 썼다 지우고 또 써 내려갔을까. 자기를 알아가는노력은 답도 없고 돈도 안 되고 힘에 부친다. 그러니까 사림들이 종교인이나 전문가에게 사는 법을 문의하겠지. 그런데 소라도 다른 학인도 글쓰기를 통해 자기 힘으로 그 어려운작업을 해냈다. 어마어마한 능력이라고 생각해. - P215
누대로 억압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에 대해 영감과용기를 준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입니다. 저자 리베카 솔닛은 국내에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창비 2015)로 유명하죠. 페미니스트로 알려졌습니다만 그는 일찍이 환경과 인권운동에 투신한 활동가이기도 해요.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는 미투운동, 기후변화, 국가폭력 등 시대의 위기를 폭넓게 다루고 있는데요, 이들 주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바꾸는 일, 이름을 바꾸는 일, 새 이름이나 용어나 표현을 지어내고 퍼뜨리는 일은 세상을 바꾸려 할때 핵심적인 작업이다. (...) 백인 아이들은 그냥 ‘어울려 노 - P236
는 것이지만 흑인 아이들은 ‘어슬렁거리고‘ ‘슬금슬금 돌아다니는‘ 것이 된다. 언어는 지우고, 왜곡하고,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고, 거짓 미끼를 던지거나 주의를 흘뜨릴 수 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 이야기를 바꾸는 것이라니. 해볼 만하지 않나요 우린 이야기를 공기처럼 마시며 삽니다. 그중엔질 나쁜 공기처럼 몸에 해로운 이야기가 있지요.]가 성장기 내내 남성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덕목들, 가령 자신감 있어라, 활동적이어야 한다, 같은 것들의 강요에 거부감이 있었지만 또 아빠가 없어서 남자답지 못하다는 말은 듣기 싫었기에 혼란스러웠다고 했던 것처럼요. 솔닛은 세상의 이야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하는사람‘이 되라고 조언합니다. "여러분의 이야기는 세상을 둘러싼 그 물의 일부가 되어, 기존의 이야기들을 훼손하거나 강화할" 거라고요. 그러니까 부당함에 침묵하지 말자, 반박하고 저항하는 말들이 물처럼 넘치도록 하자는 뜻이겠죠. - P237
불행의 스펙트럼은 넓습니다. 허기, 권태, 불안 같은 일시적 상태부터 가난, 불화, 폭력, 질병, 낙인 같은 구조적 고통까지. 우리가 이를 드러냈을 때 사람이 다가오기도 달아나기도 하죠. 그럼에도 저는 불행은 말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입니다. 내 불행을 나부터 숨기고 부정한다면 상황을 남에게 이해받기도 그리고 바꾸어내기도 어려워요. 또 불행을털어놓아보아야 ‘불행을 말해도 되는 안전한 관계‘로 자기주변의 인간관계를 구축할 수 있겠죠. 약한 존재들이 기대어 사는 작품을 만드는 일본의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하다." 찾아 나서는 행위 자체가 나약함이 아니라 강인함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동의합니다. 사는 동안 불행 - P284
상태가 해소되는 순간은 짧고, 지치고 불행한 채로 사는 시기가 더 길죠.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행의 해결사가 아니라 불행을 말해도 좋을 관계, 일단 밥이나 먹자고할 사람이 아닐까요. - P285
글쓰기는 문장 쓰기가 아니라 관점 만들기를 배우는 일입니다. 비문 없이 정확한 문장들, 문학적인 수사를 곁들인서사가 아무리 매끄럽게 전개되어도, 혐오와 차별 표현이있는 글이라면 공적인 글로서 가치를 잃죠. 저는 이 부분을분명히 짚었습니다. 교재로 읽은 책에도 나왔듯이 장애인, 여성, 이주민 같은 소수자의 경우 개인이 잘못해도 집단이 매도당한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다, 글 쓸 땐 혹시 편견과 통념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기 생각을 의심하고 책 내용을 내 일상으로 가져와 검토하자고요. - P289
‘덜‘ 다치게 하는 방도로 예방주사 같은 이야기를 고민하시다니요. 몇줄 문장으로는 아이들이 겪을 별의별 문제에 대비하기 어려울 거예요 잘게 쪼개서 삶의 면면을 지켜야죠. 『말을 부수는 말목차에 나오는 대로 시간, 퀴어, 나이 듦, 동물, 몸, 지방, 아름다움 등 19가지 화두를 가지고 아이들과 하나씩 이야기를풀어가면 어떨까요. 자신을 해치는 말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자신을 지키는 말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면 흥미롭지 않을까요. 아이들과함께 ‘부수고 싶은 말들의 목록‘을 만들어봐도 재밌겠고요. 티끌같이 흩뿌려져 있지만 태산 같은 힘을 행사하는 권력의 언어를 저항의 언어로 바꾸어낼 아이들과, 아이들 곁에선 선생님이 있는 교실, 다정하고 살벌한 말들의 풍경을 그려봅니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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