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켜준 편지를 한편씩 읽었습니다. 부산 원도심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시인 김수우씨와 그곳을 드나들던 스물다섯 법대생 김민정씨가 무려 10년간 주고받은 편지들이 달빛처럼 은은한 울림을 주었어요. 긴 인연의 폭과 흐름이 담긴 이 서간집은 요즘 제 화두인 관계와 인연을 너른 폭으로 조망하게끔 해주었습니다. "잊은 듯 살다가도 문득 따뜻한 애정이 솟구치며 그리워지는 것, (…) 불가에서는 이를 좋은 인연이라 하더군요. 잊고 있다가도 만나면 더없이 기쁜 관계 말입니다." 
이런 대목에선 저의 이름 없는 관계들이 적합한 이름을 부여받은 듯했어요.
사실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찬찬한 관계로 기우는 마음이, 나이가 들어가며 끈끈한 관계의 부침을 감내하지 못하는 저에 대한 정당화 같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떡볶이 먹고 시시콜콜 잡담을 나누는 소소한 사이도, 다글다글 뒤엉켜 사느라 못난이 같은 내 모습을 들킨 징한 인연도 있듯이, 이렇게 조금은 멀리서 서로의 - P73

일상을 애틋하게 바라봐주는 고고하고 너그러운 관계도 필요하구나, 참으로 근사한 인연이구나, 수우님과 민정님 두사람의 서신을 보며 느꼈거든요.
우리도 이만하면 좋은 인연이겠지요? 서로에게 애틋한 먼 곳이 되어줄 수 있다면 경치 좋은 데에 세컨드하우스가있는 갑부가 부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마음의 별장은 심다책방을 비롯한 곳곳의 작은 책방입니다. 머물다보면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이 밀려오는 장소이고, ‘삶의 근원이 환기되는 곳‘이죠.
주은이 둘째 아이를 임신한 모습을 보고 와서 좋았습니다. 중요한 생애주기를 함께 하는 특권을 누리는 기분이랄까요. 특히 헤어지며 우리가 안았을 때 태내의 아이까지 셋이서 포옹하는 느낌이 만월처럼 충만했습니다. 연말이라고 안부를 묻고 무슨 모임이라서 만나는 사이도 좋지만 언제 만날지 몰라서 설레는 인연들, 보면 반갑고 못 보면 그리운 얼굴이 둘레에 남아 있어서 제가 또 살아갑니다. - P74

쿤체는 원래 좋은 사람이라 좋은 시를 썼을까요. 아니면좋은 시를 쓰면서 좋은 사람이 되어갔을까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대가 시를 공부하려다가 겪은 이상한 방식은아니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시를 쓰고 싶어 찾아간 사설교육기관, "무슨 전공이세요?"라며 인사를 나누는 수강생들,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겠다 싶어 찾아간 문예창작과 입시전문학원, "네 시는 시도 아니야" 같은 원장의 말, 입시에 합격한 고등학생들 작품을 세번씩 노트에 필사시키는 학습법 같은 것들이요. 그대 말대로 도식화된 문장을 뽑아내며 노회한 교수들의 취향에 길들여지는 것이 시인의 자격증은 - P85

만들어줄 수는 있어도 시를 쓰는 몸을 길러주진 못하리라생각합니다.
쿤체가 이런 얘길 합니다. 한편의 시는 ‘네가 세상에 무엇을 더하였는가?‘라는 엄혹한 질문에 버텨낼 수 있어야 한다고요(「너는 누구길래, 시인아). 이보다 더 시적인 화두는 없지않은가, 저는 감탄하며 마음에 새겼습니다. 내가 세상에 무엇을 더하였는지, 이 엄정한 물음에서 도망치지 않는 한 우리는 시적인 것에서 아주 멀어지지는 않을 수 있지 않을까감히 생각해봅니다. 다시 감각의 재활훈련에 나선 그대, 쓰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정수의 건강을 빕니다. - P86

어쩌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아무 걸림 없이 ‘오직 읽고 오직 쓰는‘ 삶이란 누구에게나 불가능한 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이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가 근무조건이 열악해도 책에서 양식을 구하라는 식의 자기계발논리는 아닙니다. 노동하는 인간이 자기 영혼의 본질을 지켜가고 사유하는 인간이 되어가는 여정의 숭고함, 자신이 숭배하는 대상을 파괴하는 모순된 상황에 처해서도 아름다움을 구하는 지성의 고귀함을 보여주죠.
여전히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살림과 육아와 집필이 늘 서로의 핑계가 되었던 어정쩡한 시기를 통과해 일에 몰입해도 좋을 시기가 되었는데 이제 체력이 따라주지 않고, 프리랜서 작가의 노동 환경은 일관된 체계가 없어서 일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현기증이 일어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탸가 꿈꿨던 ‘온전한 러브스토리‘를 저도 포기할 수가 없네요. 매번 바뀌는 동료를 무도회장의 파트너 - P91

처럼 다정하게 맞이하고, 동시에 인간을 부품화하는 업계구조엔 주저 없이 저항하며 작가의 노동권을 사수하고, 읽어야 할 것을 읽고 써야 할 것을 쓰는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한탸처럼 책더미에서 조용히 몰락할 수 있는 생이면 더바랄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대상 없는 하소연과 반성문을 이만 마칩니다. - P92

"내 창문으로 세상을 내다보면서, 『작은 것들의 신을 쓰면서 여러해 동안 누렸던 즐거움에 대한 기억이 시들기 시작했다. 책의 판매를 통한 금전적 이익이 몰려들었다. 내 은행계좌 잔고는 급격히 불어났다. 이미 가진 자들 사이에 세계의 부를 순환시키고 있는 거대한 파이프에 내가 우연하게도 구멍을 뚫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래서 그 파이프에서 어마어마한 속도와 힘으로 돈이 쏟아져 나오면서내게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소설의 한 장면처럼 강렬한 이미지가 
그려지죠. 작품의성공이 가져다준 부와 명예가 자신에게 상처를 내고 있다고 고백하는 작가라니! 와, 멋있어서 감탄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병들게도 한다는 걸 고려하면, 작가 - P94

의 예민함으로 그걸 알아차리는 게 어쩌면 그다운 모습이기도 하겠지요. ‘시장의 심장부‘에 펜을 겨누면서도 그곳으로부터 부를 쌓는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아룬다티로이는 눈을 부릅뜹니다.
"나는 작은 것들의 신속의 모든 감정, 모든 작은 느낌이 모조리 은화로 교환되어버렸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조심하지 않는다면, 어느 날 나 자신이 은으로 된 심장을 가진 은색의 형체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내 주변의 폐허화된 풍경은 그저 나 자신의 번쩍임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데 이바지할 뿐일 것만 같았다." 로이는 부커상을 받고 나서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말했대요. 자신을 ‘소설 공장처럼 취급하는 게 싫다고요. 소설을 영화화하자는 제의도 거절하고 긴급한 글들을 써내죠. 댐건설로 인한 심각한 자연 파괴, 이라크전쟁과 미국의 오만한제국주의 등 "공공연히 편을 들지 않으면 안 되는 정치적상황"에 대해 자비 없이 신랄한 언어를 구사합니다.
그리고 20년이 흐르고 나서야 두번째 소설 『지복의 성자』(문 - P95

를 출간해요.
멋지지 않나요? 글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염결성, 자기만의 속도로 밀고 나가는 의연함이요. 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 점, 작가의 사회적 구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 글 쓰는 활동가의 모습까지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작가 겸 활동가‘라는 딱지를 거부해요. 침대 겸용 소파라는 말을 연상시킨다고요. 하핫. 저는 이 대목에서 막 웃었는데요, 깊은 뜻이 있죠. 모든 저항적 운동을 직업적 활동가들만 하는 일로 여기도록 암시한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이런 사태에 누군가 관여하게 되는 것은 그가 작가나 활동가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관여하는 것입니다." 로이는 글을 쓰는 이유도 작가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일" 이기때문이라고 말하죠. 장르적 구분도 의미를 두지 않아요. "논픽션이건 픽션이건, 내가 주로 다루는 주제는 권력과 권력없는 자들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의 끝없는 순환적인 갈등입니다." - P96

버지니아 울프가 딱 그랬다. 『파도』라는 독백과 이미지로 된 형식의 소설에 도전하면서 "완전히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런 작품을 쓰는 나 자신을 매우 존경한다"고 일기에 적었다. 자기 쇄신의 실행력이 존경스럽지. "포도송이에서 포도를 떼어내듯이 떼어내어 ‘받아요. 이것이 나의 인생이오‘라고 말" 하는 몽상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이 있는가 하면, 또 "인생은 즐겁고 좋은 것이다.
월요일 다음에는 화요일이 오고 그다음에는 수요일이 온다" 고 무심하게 삶에 순응하는 책을 마저 읽다가, 그날 너와의 대화를 복기하며 나는 좋은 늙음을 꿈꾼다. - P104

삶의 목표가 인간성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다만 친절을 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친절에 대해 거듭 말하고 쓰고 고민하는데 희한하게 실천에는 자꾸 실패해서 반성하느라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사람. 친절한 사람이아니라 친절한 사람이 되기 어려운 구조를 파악하는 사람. 그렇게 용쓰다보면 주름이 늘듯이 말투와 표정에 친절의 함량이 높아지길 기대합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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